|
이산가족의 피맺힌 한을 이번 설에도 방치할텐가?
(문이 활짝 열린 해외이산가족들은 행운아들)
<설날>은 예외 없이 금년에도 찾아왔다. 민족 최대 명절, <설날>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고향을 찾고 부모형제 곁으로 간다. 이미 가신 조상과 선친을 기리며 성묘도하고 차례를 지낸다. 그런데 이번에 맞는 <설날>은 유별나게 내 마음을 무겁고 착잡하게 만든다. 자나 깨나 오매불만 북녘에 둔 혈육을 그리며 만난 날을 기약없이 기다리던 이산가족은 연로해져 거동이 어렵게 됐고, 그 중에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최근 부쩍 늘어나기 때문에 답답하고 조급하기 짝이 없다. 그저 집권자들을 원망하며 한탄하는 것 이외는 이산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금년 <설날>은 왠지 더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지척에 둔 고향에 피를 나눈 혈육을 두고도 가지도, 오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이산가족이 천만이 넘는다면, 세상에 이것 이상으로 인권 말살이 또 어디에 있을까? 머리에 띠를 두른 사람들이 툭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무리를 지어 인권타령을 하는 것이 다반사긴 한데, 바로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이산가족의 비극, 즉 인산가족의 인권유린엔 어찌 눈을 감는단 말인가? 이산가족의 인권도 마땅히 보장돼야 하고, 또한 그것을 향유할 천부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마지막 남은 유일한 이산가족, 이들의 인권을 확대하면 민족의 인권이 되는 것이다. 민족의 인권이란 민족의 자주와 존엄이 수반되는 것을 전재로 하기에 개인의 인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은 지난 2/18일 주한 유럽연합 상의 (EUCCK) 주최 간담회에서 처음으로 이산가족 문제를 언급했다. 통일을 위해서 먼저 이산가족 문제를 풀어야 하다면서, “이산가족들의 나이가 80-90세가 돼 가는데 지난 2년간 겨우 작년 추석에 한번 만났다”고 실토한 후 “앞으로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고 교류, 협력을 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 탈 없이 잘도 진해되던 혈육상봉이 정권교체와 동시에 일체 정지됐음을 반성하고 앞으로 개선하겠다는 의도로 김 외교안보 수석이 말했다면 오죽이나 좋겠나만, 장구한 2년이나 기다리다 지칠 대로 지친 이산가족들이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통일부도 금년 업무보고서에서 고령자들의 상봉을 다양하게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 설에도 아무런 희소식이 보이질 않아 정부의 구호로만 그칠 공산이 크다고 보인다. 지난 정부까지만 해도 명절에는 혈육상봉이 거의 관례화됐었다. 그러던 것이 새 정부가 들어서고는 작년 추석상봉이 2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것도 현정은 현대회장과 김 위원장의 면담 결과를 거역할 처지가 못돼서, 억지로 떠밀려 한번 치룬 것이다. 이산가족들이 자신의 인권, 자기의 권리를 큰 목소리로 주장하지 못하고 왜들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만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혈육상봉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막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 사상, 제도를 초월한, 하늘이 준 천부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면담신청자 13만 가운데 1/3이 신청만 해놓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 3명 중 1명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는 면담절차로 신청을 포기한 실향민을 합치면 실향민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가 세상을 떠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산가족상봉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절박한 문제다. 정말 이제는 시간이 없다. 의지만 있다면 정부가 미그적댈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필요하다면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실향민의 가슴에 박힌 응어리를 풀어줘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국민을 위한다는 정부가 헤아릴 수 없는 이산가족의 한 맺힌 소원을 풀어주지 못한다면 백성을 멸시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으로 밖에 달리 볼 도리가 없다.
국내와는 달리 해외동포들에게는70년대 말부터 이산가족상봉의 문이 열렸다.
북미주에 산재한 이산가족들이 혈육상봉을 한 숫자는 대개 3천 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남북, 북미관계의 변화에 따라 북미주 이산가족들의 상봉 숫자도 달라지고 있다니 북미주동포들이 아직도 정치와 혈육상봉을 연계하고 있는 동포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북녘에 둔 혈육을 찾은 북미주인산가족들은 1년에 한번 꼴로 혈육상봉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으나, 절대적 다수의 북미주이산가족들이 북녘의 가족에 대한 생사 여부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어떤 이산가족은 인편을 통해서나 미주가족찾기기구를 통해 북녘의 가족을 찾아놓고도 상봉을 포기하거나 계속 미루는 동포도 있다. 이산가족 중에는 북녘의 가족들이 인질로 잡힐까 못가겠다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북에서 쓰는 돈이 인민군의 손으로 들어가거나 핵을 만들까봐 못가겠다는 동포도 있다. 국내도 마찬가지지만, 북미주이산가족 중에는 사내라는 이유로 떠밀려 한주일 정도 피난길에 나섰던 것이 마지막 이별이 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뒤에 남겨둔 부모와 동생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무한 애를 쓰는 이들도 있다. 어떤 실향민은 글로, 음악으로, 경제적으로, 행동으로, 민족화해로 북녘의 가족을 직접 돕기도 하고 북녘고향땅 지원도 하고, 더 나아가 민족의 평화번영에 기여하기도 한다.
평양 고려호텔 식당에서 미네소타의 김여식씨가 북의 가족들과 정다운 이야길 나누며 푸짐한 음식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목격하자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주책도 없이 “나도 여기에 낄 수 있을까요?”라 했더니 김씨는 물론 그의 가족들이 대환영을 했다. 너무도 인상적이라 여기서 김씨의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간략하게라도 적어보고자 한다. 평안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와 장남인 14살의 김여식씨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여자들만 남겨두고 집을 나섰다. 연년생인 어린 여동생 5명과 어머니를 뒤로 하고 한주일 예정의 피난길에 나섰던 것이 생이별로 변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와 단 둘이서 서울에 도착한 피난민 부자는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막일을 했고 중학교를 다녀야할 김여식씨는 학교에 갈 형편이 못돼 신문팔이, 구두닦이, 엿장수, 등 할 수 있는 일이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형편이 좀 좋아지자 야간중학에 진학을 했고 이윽고 야간고등하교 졸업장을 따냈다. 가진 것이라곤 남다른 노력 밖에 없었기에 대학도 나왔다. 새어머니를 얻은 아버지가 고향에 버려진 어머니와 5여동생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한 것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연로한 북녘의 어머니는 어린 여동생을 도대체 어떻게 먹여 살리며 거지나 되질 않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머니는 얼마나 아버지와 나를 원망하며 한탄하고 계실까를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때로는 괴로움을 달랠 수가 없어 밤잠을 이룰 수가 없는 날이 허다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두고 온 처자식을 모른 체하는 것에 대해 그는 반항심이 생겼고 부자지간의 사이도 편치가 않았다고 한다. 오매불만 자식 걱정으로 지샐 북녘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는 길은 군사정권 하에서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도미유학의 길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단신 미국으로 유학 온 김씨는 고학을 하면서 대학원을 나왔다. 사업에 손을 대서 경제적 기반도 마련했다. 드디어 수소문 끝에 북녘 동생들의 생사를 알아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즉시 평양으로 달려갔다. 고향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1년 전에 돌아가셨단다. 그는 서둘렀으면 만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너무도 원통해서 땅을 치며 울고 또 울었다. 거지가 됐거나 죽었을 것으로 알았던 5여동생들은 다들 시집들을 가서 잘들 살았고, 그 중에는 대학을 나온 동생도 있었다. 당연히 김씨가 했어야할 일을 나라가 뒷바라지를 해준데 대해 어떻게든 보답하고자 노력을 한다고 했다. 김씨는 매년 한두 번은 꼭 가족상봉 차 평양을 찾는다고 한다.
호텔식당을 나와서 나는 김씨의 여동생을 따로 찻집에 불러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어머니는 아들의 무사귀향을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가까운 절에 가서 빌었다고 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임종했다고 한다. 김씨의 여동생들은 동네 사람들이 자기들을 무척 부러워 한다는 말도 했고, 오빠도 참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왜 좋은 오빠냐고 물으니 배다른 서울의 2남동생들에게도 자기들과 차별하지 않고 잘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월남한 김씨의 아버지는 새장가를 들어 아들 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는 민족의 처절한 비극은 단란했던 한 가정에도 비극을 안겼다는 생각을 하면서 김씨의 여동생들과 작별을 했다.
국내 이산가족의 혈육상봉에 대해 해외동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다. 그러나 문이 활짝 열린 북미주동포들은 맘만 먹으면 언제나 가족상봉이 가능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갖가지 이유로 찾아야 할 북녘가족들을 모른 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혈육이란 어떤 주장이나 주의, 어떤 사상이나 신념, 어떤 제도나 체제, 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혈육상봉을 제약하거나 막는다면, 이것 이상의 비정한 이권유린이 없다는 것을 소리높이 외치고 싶다.
[작성 : 석재환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