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취재 5] “이 야만의 시대로 또다시 돌아갈 수 없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2-12 17:46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조국이 해방된 지 어느덧 69년이 되었다. 그러나 조국은 아직도 갈라져 있다.민족이 화해하여 통일되면 대박이 난다는데 왜 시간이 갈수록 분단의 벽은 점점 더 두꺼워지는 것인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이북을 바로 아는 것이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믿고 노력해왔다. 북을 더 잘 이해하는 만큼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빨라지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나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편집국에서 북 바로 알기 운동의 하나로 계획한 방북 특별취재단에 기자 신분으로 합류하여 10월 24일부터 31일까지 북을 방문하였다. 북녘땅 여러 곳을 다니며 듣고 본 것을 바탕으로 하여 북 동포들의 사는 모습과 생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북취재방문기 5>
“이 야만의 시대로 또다시 돌아갈 수 없다.”
-양심과 정의의 신념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 댁 방문-
위찬미 기자
특별취재단 일행은 30일 저녁 이남에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이 함께 사는 아파트를 찾아가서 장기수 여러분과 상봉하고 미주 동포들의 인사를 전하였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이들을 전향시키려는 이남 당국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 인간승리자들은 지금 꿈에 그리던 자유로운 조국 품에 안겨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자 한다.
특별취재단 일행이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로 찾아가자, 미리 연락을 받은 김동기 선생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동기 선생은 지금 82세의 연세이고 건강해 보였다. 선생은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 결코 양심을 굽힐 수 없었다"는 이유로 전향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로 이남에서 3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힘찼다. 그는 1999년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한 후에 2000년 6.15 공동선언으로 북에 송환되었다. 그는 송환되기 전에 이남에서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는 수필집을 출판하였고, 송환 후에는 평양에 정착하여 '조선작가동맹' 소속의 정식 작가가 되었다
김동기 선생은 우리를 입구에서 가까운 큰 방으로 안내하였다. 방에는 소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고, 우리는 청중석 의자에 앉았다. 무대에서 그는 조국을 찾아온 재미동포 일행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인사를 하고, 리공순 비전향 장기수 선생을 소개하였다.
리공순 선생은 충청남도가 고향이며 지금 80세이다. 그는 1967년부터 1999년까지 이남에서 3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6.15선언으로 2000년 북에 송환되었다. 그의 백발 아래 빛나는 눈빛과 힘 있는 말,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똑바른 몸가짐에서 33년의 치열한 이남 정부의 전향공작 고문을 이겨낸 투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리공순 33년 비전향장기수 선생 80세의 연세에도 정정한 모습이다.
다음은 리공순 선생께서 고문으로 일관된 이남 정부의 지독한 전향공작에 굴하지 않고 신념과 양심을 지켜낸 이야기를 간추려 적은 것이다.
“나는 일제 강점과 미제 군정 시기를 살면서 일본의 만행과 미군의 행패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 때에는 인민 의용군에 가담하여 홍천, 횡성, 원주까지 갔다가 국사봉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통일된 자주독립국은 누가 갖다 주지 않으니 우리가 이루어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끼리 자주독립국을 세우자고 호소한 김일성 주석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였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외세에 의존하면 민족이 불행해질 것이 뻔한 이치이며 나라의 지도자가 좋아야 나라가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외세 때문에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니까 남북이 힘을 합쳐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가 국가보안법 간첩 법에 걸려 1967년에 구속되어 갇혔습니다. 당시 대전, 대구, 광주, 그리고 전주에서 700명이 수감되었으나 고문과 추위, 또 배고픔으로 많이 죽어서 99년에 석뱡되었을 때는 17명만 남았습니다. 당시 사상범에게 겨울옷이란 없었고, 썩은 밥에 벌레가 나오기 일쑤였고, 또 옷은 떨어져 맨살이 드러났습니다. 방은 0.75평(90cm x 180cm)이었는데 끝에는 변기통이 있었습니다. 창이 없어서 밤인지 낮인지 알 수도 없었고, 겨울철이면 방안이 물이 얼 만큼 추웠고 손발은 언제나 얼어 있었습니다. 면회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내려졌던 사형선고는 대법원에서 무기로 감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남 당국은 30여 년간 장기수들의 사상을 전향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었습니다. 당국은 전향공작의 목적으로 돈뭉치와 여자를 이용하였고, 가족을 인질로 잡아 그들을 협박하기도 하였습니다. 전향공작에는 목사, 월남자, 또 기업가들, 스님들, 박사, 교수, 또 과부와 처녀들까지 이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남에 사는 동생, 조카, 가족들의 생계를 파괴하며 협박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생의 구멍가게를 때려 부수며 공포심을 조성했을 때 정말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또 간수들이 겨울 독방에 수 명의 장기수를 동시에 집어넣고 얼음물을 덮어씌우는가 하면, 소금을 묻힌 밧줄로 몸을 묶어서 꽁꽁 언 밧줄에 살이 붙어 떨어지는 고문도 하였습니다. 간수들은 우리 비전향 장기수들을 개새끼라 하며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1982년 광주교도소에 전남대의 총학생회장이던 박관용이 5.18사건과 관련해서 들어왔는데 그도 감옥에서 물대포에 맞은 후 죽었습니다.
“1999년에 석방되어서 공원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일을 너무 열심히 잘하니까 사람들이 놀라며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북쪽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들이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나를 피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나를 믿고 자기들 집 열쇠도 맡겼습니다.”
“당국은 석방된 후에도 장기수들을 계속 도청하고 감시하고 제약하였습니다. 김남주 시인이 장기수들이 있던 감방에 왔다가 장기수들이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참혹한 상태에 있다는 실정을 폭로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끔찍했던 장기수 감방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몸이 떨립니다. 아직 잠시라도 다리를 펴고 자면 불편하여 늘 새우잠을 자고 있습니다.”
“미주 동포와 관련하여 한가지 잊지 못할 일은 1992년에 필라델피아에서 황규식 동포가 편지를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당국은 나중에 내용은 빼고 봉투만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 봉투를 7년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99년 5.18 기념행사로 황규식 동포가 광주에 왔을 때 그 봉투를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미주 동포가 보여준 관심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불행하게 할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라는 말로 강의를 끝낸 리동순 선생은 이남 당국의 치열했던 전향공작에 맞서서 투쟁하던 일들을 마치 지금 일어난 일처럼 굳은 표정으로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리공순 선생은 이렇게 33년간 이남의 감옥에서 온갖 잔혹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앞에 한 맹세와 조국통일에 대해 자기의 신념을 지키고자 투쟁하였다. 당시의 극렬했던 순간들을 담담하게 말했지만 우리는 그가 받았던 고문을 함께 받은 것처럼 아팠고 분노했다. 그가 받은 잔혹한 고문들은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었고,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우리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한동안 자리에 얼어붙은 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 한 분 한 분이 조국의 100년 근대사이고 분단 역사의 증인이다. 분단 때문에 국민이 생각의 자유마저 빼앗겼고, 무고한 사람들이 간첩으로 몰려 극악한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당하였다. 지금 이남은 자기들이 저지른 최악의 인권침해의 역사는 모른 체하며 이북의 인권문제를 개선하도록 도와달라며 세계에 호소하고 있다. 오늘도 이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색깔론과 종북몰이, 그리고 간첩조작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를 보면 앞으로도 비전향 장기수들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조국분단 역사의 질곡이 언제쯤이면 해소될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6.15 선언, 10.4선언을 성사시켰다. 통일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 우리에게 있다. 죄없는 장기수들을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굴에서 나오게 한 것도 6.15선언의 이행 결과였다. 지금은 외세에 빌붙어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일부 반민족 사대주의자들이 이 선언들을 폐기하여 민족의 고통을 연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이런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 민족은 우리의 살 길인 통일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열정이 또한 방도가 있기에 조국통일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참고로 비전향장기수 가운데 현재 36명이 사망했고 28명이 생존해 있다. 생존자는 90대가 8명, 80대가 16명, 70대가 4명이 있다. 제일 연세가 많은 분이 97세의 방재순 선생이다. 많은 분이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리재룡 선생처럼 만혼에 딸까지 얻은 분들도 있다. 비전향장기수 전원이 북의 '조국통일상'과 노동당 당원증을 받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해 연구활동을 하거나 문필가, 음악가, 서예가, 또 미술가로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는 분이 많다.
리공순 선생의 회고 말씀이 끝나고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기자: 선생님의 말씀에 가슴이 떨려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장기수 어른들을 전향할 수 밖에 없도록 한 혹독한 고문 속에서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병드셔서 살아 남으신 분들이 많지 않은데 선생님은 어떻게 끝까지 버티셨습니까?
리공순 선생: 이러한 처참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김일성 장군만 믿고 따르면 이긴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은혜로 인간답게 사는 걸 배웠는데, 사상 이전에 도의적인 이유로도 그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어떤 환경에도 신념만 있으면 힘이 나온다는 것을 내가 경험하였습니다. 신념이란 투쟁에서 나오지 편안한 데서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기자: 선생님께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감옥에서 특별히 하신 것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공순 선생: 감옥에서는 조용히 앉아 있으면 죽게 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수령님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고 상상하고 매일 인사를 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찬물로 몸과 얼굴을 문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생존하는 것도 불의에 투쟁하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미주동포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십니까?
리공순 선생: 우리가 어려웠을 때 마음써 주신 미주동포들께 감사합니다. 우리 민족을 불행하게 하는 전쟁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합니다. 조국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함께 노력하십시다.
질의응답이 끝나고 장기수 선생과 가족들 22명이 준비한 공연이 있었다.
공연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창원 장기수 선생이 작곡한 ‘장기수 옥중투쟁가’ 합창으로 시작하였다. 이어 38년 수감생활을 하였던 84세의 이경구 선생의 시 “어머니가 앓고 있습니다” 낭독, 여성중창, 남성중창, 최성규 선생의 장구춤과 밭갈이 노래가 있었고 마지막에 출연자 전원의 합창이 있었다.
높은 연세에도 우렁찬 목소리로 부른 노래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낭독한 시들은 함께 통일을 비는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참가자들과 취재단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조국통일을 위해 매진하자는 다짐과 함께 서로가 붙잡은 손을 쉽게 놓지 못하였다. 못내 아쉬운 작별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양심과 정의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선생들의 뜻이 조국통일로 꼭 이어져야 하며, 조국땅에 이런 야만적인 폭력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골똘하여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일행은 모두 말이 없었다. (계속)
▲광주북부경찰서 보안과에서 보낸 출석요구서
무슨 행사만 있으면 사전에 장기수들을 조사하기 위하여 이런 소환장을 보냈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재미동포가 보낸 위문편지 봉투,
정부가 속은 빼고 봉투만 전해준 것을 지금껏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김창원 장기수가 작곡한 <장기수 옥중 투쟁가> 를 부른 남성 합창
▲38년간 수감 생활을 하신 84세의 이경구 선생 시낭독
“어머니가 앓고 있습니다
머리에 하얀 서리 내리도록
외아들 옥바라지해 온 어머니
떠나온 남녘땅에 있었습니다.
지팡이 짚고 면회온 어머니...
......"
▲노래하는 장기수 선생 부인들
▲<행복아리랑>을 부르며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최성국 선생과 부인
▲부인들과 함께 노래하는 장기수 선생들
▲<밭갈이 노래> 부르며 장구춤 추는 장기수 선생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방문단을 보내는 장기수 선생들과 가족
▲장기수 선생들과 방문단은 통일의 길에 잡은 손을 쉽게 놓지 못하고 조국통일의 한길로 매진할 것을 다짐하며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고 헤어졌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