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짐 내려 놓자'는 대통령, 누구 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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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30 17:0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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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 - 일본 헌법 제9조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헌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특히 제9조에 따르면 일본 국민은 영구히 전쟁을 포기하고 국제 문제 해결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전쟁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육해공 군력을 설치하지 않겠다고도 약속했다.
그런데 현실은 많이 다르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 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는 올해 일본을 세계 9위의 군사 대국으로 평가했다. 또한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군비 지출은 한화로 약 48조9700억 원이었다. 이 역시 세계 9위 수준이다.
더군다나 마음만 먹으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과 플루토늄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대기업 상당수가 군수품 생산에 직접 종사하고 있다. 언제든 군사 장비와 전쟁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 거기다 일본의 장교 비율은 기형적이다. 지금 군력의 최대 5배를 지휘할 수 있는 장교가 훈련돼 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빠지기 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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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표지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 어떻게 아시아를 다시 지배할 수 있었나?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와 뿌리> ⓒ 내일을 여는 책 |
일본의 군국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둬야 할 배경이 있다. 때는 메이지 유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의 시작은 여기부터다.
100년 이상 지속되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50년간 평화로운 에도 막부를 열었다. 안정적인 시대에서 200만 명이나 되는 사무라이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일반 국민이 봉건주의 명령에 절대 순응토록 하는 역할을 자청했다.
국가는 우수한 지도자들의 관할 아래에 있으며, 국민은 그저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국민은 지도자들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법을 잘 따르고 복종하라 선전했다. 그 중심 사상은 국민의 복리가 아닌, 지도층의 이권 보장에 있었다. 이 충복 사상이 곧 일본의 무사도처럼 변질됐다. 그 중심에는 '사무라이'가 있다.
그러니까 결국 봉건적인 에도 막부 시대의 군벌이었던 '사무라이'가 메이지유신의 엘리트가 됐다. 군복만 벗었을 뿐 그들이 일본의 숭고한 전통이라 여기는 일종의 '무사도'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했다. 여기서부터 일본의 군국주의는 시작된다.
일본 애국자는 봉건 시대의 노예 제도를 현대에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적 마음의 준비를 가졌다. 그들은 봉건 정신을 그대로 무장한 메이지 정부 지도자의 지배 밑에서 자기들의 모든 재능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애국이었고 일본 민족주의였다. 이런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는 일본 사회에서는 분리할 수 없다. -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와 뿌리>에서
이런 기조는 당시 헌법에도 반영됐다. '천황은 신성하고 불가침이다'라는 문구가 명시됐다. 의회를 무시하고 대중의 여론을 멸시했으며 극소수의 엘리트가 국가 정책을 좌우했다. 저자는 일본의 이런 면을 "히틀러 파쇼 제도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이론은 없었다"고 평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에서는 전체주의를 애국과 착각하는 이들이 있지 싶다. 자, 이런 배경을 알았다면 지금의 일본 재무장을 이해하기 쉽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헌법'까지 제정한 전범국 일본이 어떻게 다시 군사 대국이 됐을까. 거기다 이 '평화헌법'까지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가능할까.
전범국 일본은 이렇게 다시 재무장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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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중에도 미국의 투자는 일본으로 흘러갔다. ⓒ 김병현 |
평화조약은 미영을 중심으로 일본의 회복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유리한 조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의 이권과 미국의 이권에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워싱턴에서 일본 문제를 볼 때 그렇다고 확정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여기서도 나타난다. 일본 정부가 일본의 보수당의 통치를 받는 동안 일본의 이권과 미국의 이권의 공통점은 계속될 것이다. -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와 뿌리>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가 시작됐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은 조바심이 났다. 서구 제국주의는 아시아 대륙에서 철수하고, 신생 독립국들은 너무 약했다. 미국의 눈에는 마치 아시아가 주인이 없는 공지처럼 보였다. 거기다 소련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면서, 미국은 결국 아시아의 중심 세력을 일본으로 옮기는 공작에 착수한다.
맥아더 군정은 일본의 경제 회복에 적극적으로 집중했다. 일단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강한 주권 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결국 맥아더는 1950년 초, "일본은 사막의 오아시스다, 세상에 그처럼 평화스러운 곳은 없다"면서 7만5000명 규모의 국가 경관대를 설립했다. 일본 재무장의 시작이다.
이후로 미국은 자본과 기술을 일본에 집중했다. 일본의 대기업들은 군수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중에도 미국의 투자는 일본으로 흘러갔다. 왜 그랬을까. 책이 설명하는 이유는 이렇다.
미국은 일본을 재무장하여 아시아를 지키는 '주니어 파트너'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은 성공했다. -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와 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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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얼마나 더 기다려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를 비롯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소속 회원들이 지난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한일 수교 50년을 맞아 과거사 해결 없이 상생은 없다며 정부의 과거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
그렇다면 일본이 노골적으로 재무장을 하는 동안, 한국 정부는 무엇을 했을까. 1973년부터 국회의장을 했던 정일권 전 의원은 "한국에 전쟁이 재발될 시 일본군이 한국을 도울 것"이라 말했다. 또한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만이 아시아에서 신임할 수 있는 나라"라는 발언을 했다.
무엇을 믿고? 저자는 이들의 발언을 '무책임하다'고 평했다. 아니, 무책임을 넘어 한국 정치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공모'했다고까지 표현했다. 일본 군국주의가 다시 기지개를 켤 때, 아시아의 평화만이 아니라 세계 평화가 위협 받는다. 그 속에서 첫째 희생자는 단연 한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2일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일본을 향해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고 말했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할머니들이 떠올랐다. 꽃다운 시절이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49명이 남았다. 평균 연령은 89세다. 이 달에만 세 분이 끝내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이 집회는 벌써 1200번 째를 향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과거사'고, 어떤 '무거운 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걸 '내려놓자' 발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정녕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와 뿌리> (선우학원 지음 / 내일을 여는 책 펴냄 / 2015.05 / 1만 원)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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