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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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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11 09:3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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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홍갑표 <민족정기구현회> 전 회장

  

 

들어가며

 

나는 세균전의 희생자다.

 

얼마 전 케블 티비 히스토리 체널에서 한국전쟁 시기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에 대하여 집중 방영하였다시청을 하다 보니까 그 시기가 바로 내가 염병(장티브스?)에 걸려서 사경 한 달을 견디고 겨우 몸을 추스릴 수 있었고 같은 병으로 이웃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와 일치하였다.

 

많은 미국인들이 세균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특히 극비리에 세균을 전단에 섞어 뿌렸다는 비행사의 증언도 있었다.

 

또 일본군이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내용도 히스토리 체널은 언급하고 있었다.

악명 높은 731 이시이 부대는 숱한 한국인과 중국인을 생체실험 대상인 '마루타해부를 통하여 세균 무기를 개발했으며 패전 이후 여기에 종사했던 자들이 미 점령군에 그대로 영입되어 미국의 세균 무기 개발에 참여했으며 이들의 일부가 미 군속으로 위장하여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시이 부대 소속 대원들은 전범 재판은 커녕 미국의 비호 아래 한국전 특수로 일본 혈액사업을 벌여 떼돈을 벌었고 일본 굴지의 제약회사로 발전했다.

 

또 뒤에 실은 韓國戰爭資料叢書(63-67)(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미국 정부의 공문서로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 미국무부가 작성하였거나 국무부에 접수된 다른 행정부서 및 재외공관,개인전문가비평가들의 문서들을 집약한 것인데 이 글의 요약 부분을 읽고 내가 세균전의 피해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동네 사람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 생존하며 비록 이사를 갔다하더라도 거의 다 연락이 되고 있다.

 

아직도 미국이 세균전을 부인하고 은폐하려 한다면 이는 양의 꺼풀을 쓴 이리떼와 뭐가 다르랴.

 

당시 내가 머물렀던 곳은 둘째 누님 댁이 있는 현 경기도 양주시 회천 행정동 관할 봉양 법정동으로서, 2km 쯤 떨어져 있는 현 회천행정동 관활 덕정 법정동인 당시 회천면 '덕정리 원잠동(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을 그냥 두고 누님 댁인 그 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곳이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기 좋은 철도 정거장과 면 소재지에서 떨어져 있고 들을 앞으로 둔 산록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는 조선 전기 이태조와 관련하여 국내 최대의 명찰인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과 북으로 이어지는 칠봉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내 초등학교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고난과 아름다움의 기억이 함께 깃든 곳이기도 하다.

 

내가 디지털 말에 2002년 6월 20일과 7월 1일에 색션에 선택된 '나의 6.25전쟁 체험기'(1)과 (2)의 필요부분만을 다시 게재하여 당시의 상황에 이해를 보태고자 한다.

 

이 글을 읽음으로써 내가 꾸며낸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또 자료를 첨부하고 내가 세균전의 희생자임을 반세기가 넘은 지금 발표하게 된 기회를 디지털 말을 통하여 알리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1

 

1950년 6월 25일 새벽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어머니 조국의 허리가 톱질 당하며 낭자한 피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의정부 아래 덕정리에 살고 있던 나는 아버지를 백 일만에 여윈당시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다.

누나는 영등포 공장에 가고어머니는 큰 누님 해산 차 서울 가시고 둘째 누님은 거리가 떨어진 칠봉산 밑에 살고 계셨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없어졌지만 봉우재(봉화재-지금은 밀어버려 없어지고 그 곳에는 봉우 아파트가 서 있다)는 제법 높아서 일대를 보기에 좋은 전망대였다.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 들고 이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생전 처음 듣는 포성과 저 건너 구덕정 신작로를 타고 길게 나타난 피난민의 행렬을 보고 있었다.

 

'난리가 났다!'

나는 혼자라는 공포에 질렸다외가는 등 너머 있었다외가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간다는 말도 없이 일찌감치 장롱 속 어머님이 두고 가신 몇 푼의 돈을 티셔츠 윗 주머니에 챙기고 초가 삼간을 뒤로 철길을 따라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철길은 모터카 몇 대가 가끔 탄알 같은 것을 싣고 내려가는 것 외에는 아직은 한가했다나는 딸기를 따먹기도 하며 서서히 의정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교통 정리를 하던 헌병이 오는 사람 모두를 초등학교 수용소로 들어가란다나는 기겁을 하여 '왜 수용소로 가?' 하면서 도루 집으로 가서 자고 내일 다시 올 요량으로 가던 길을 되돌려 덕정을 향했다.

 

엄상굴 다리 근방에 왔을 때 포성은 더욱 커지고 동네 사람들은 피난 봇짐을 싸서 지고 이고 모두들 의정부를 향하고 있었고 하늘은 소나기를 퍼붓고 있었다.

 

나는 겁이 나고 두려워 샛길을 통해 십여 리 되는 고주내 큰댁을 향해 뛰었으나 막상 도착해 보니 대문은 굳게 닫쳐 있었다.

 

그때 샛길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도롱이를 쓰고 구부정하고 가시는 큰어머니였다반가웠다큰댁과 동네 사람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다춥고 배고프고 다리가 아프고 졸려 왔다.

걷다가 한내 개울 뚝 아래로 내려가면 올라오기가 힘들었다감자라도 캐 먹고 싶었다동막골에 도착해 밥을 지어먹을 때는 제일 많이 담긴 밥 사발을 골랐다.

이튿날 일어나려 하니 뱃살이 땅겨 억지로 몸을 틀어 손을 집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라디오를 들은 사람들이 국군이 이미 개성서 300리를 쳐들어갔다고 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거짓임이 증명되었다야포가 건너편 도봉산 자락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수락산을 넘어 퇴계원으로 가서 장위로 향했다.

 

같이 가던 사촌 큰 형님의 딸 손위 조카마저 떨어진 채 피난민을 따라 마냥 걸어가고 있었다누님 댁인 왕십리 안장사 동네로 간다 하나 길을 알 리가 없다그냥 가는 것이다.

 

그 때 길가에서 내 이종형이 나를 낚아챘다.

"어머니 우리 집에 계셔." 그는 알코올 중독자로 동네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였으나 내게는 정다운 형이었고 또 생명의 은인이다그는 피난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들어가 보니 동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어머니는 안장사(현 도선동 청련사누님 댁을 오가며 내가 이미 서울로 떠났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은 들은 터에 덕정리로 찾아 나선다고 하는 것을 이모나 동네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는 나를 껴안고 우셨다어머니는 부어 오른 내 발을 한없이 주무르고 계셨다.

그 날로 왕십리 안장사 큰 누님 댁으로 가고 이모 댁과 다른 사람들은 계속 피난길에 올라 우리하고는 헤어졌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동네 뒷산 일제 시대 파놓은 방공호에 담당하는 사람에게 집요하게 매달려서 결국 나만을 방공호에 겨우 밀어 넣어 놓고 누님 댁으로 돌아가셨다.

 

9남매 중 다섯이 죽고 남은 세 딸과 유일한 아들인 나이튿날 아침 세상은 바뀌었다.

 

붉은 완장을 찬 치안대원들이 나타나서 '동무들 해방이 되었소수고하시오 이제는 잘사는 세상이 되었소'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은 온통 파괴와 살육이었다끊어진 전기 전선줄무너진 건물에 흩어진 벽돌 더미 근방에 여기 저기 널려있는 시신들하늘에는 몇 대의 인민군 야크기가 서울 상공을 날고 있었다.

 

큰 누님은 광무극장 옆에서 조그만 오뎅 집을 하면서 극장 안에서는 매점을 운영하셨다.

누님이 챙겨준 오징어과자 사탕 봉지를양손에 들고 왕십리를 떠나 종암동창동을 거쳐 의정부 덕정리로 이어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땅을 보며 하늘을 보며나는 마냥 가고 있었다수많은 회향 피난민 무리에 끼어 의정부덕정 쪽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2

 

나뭇가지로 위장하고많은 인민군 병사들이 대오를 정비하고 행진해 오고 평복에 빨치산 행정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손을 흔드는 피난민들을 거슬러 서울 쪽으로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의 도봉산 입구 도로 양옆 구거 에는 시신 둘이 한 사람은 엎어져 있고 또 한 사람은 의자에 앉은 자세로 얼굴을 들어 눈을 뜬 채 하늘로 향하고 몸 여러 군데 총 창에 찔린 상태로 누워 있었다.

예외 없이 파리는 윙특유의 냄새는 코를 찌르고 버려진 기관총 박격포 등이 북을 향해 버려진 채 놓인 부근에 숫한 탄피들이 널려 있었다.

 

도로 양옆에 여러 구의 시신을 보면서 의정부를 지나 샘내 고개를 넘어 막 덕계리로 들어서는 순간 두 대의 무스탕 전투기가 신작로를 따라 저공 비행하며 덕정역 옆 일제시대 지어진 군수창고를 폭격하고 서울 쪽으로 나르면서 연속 사격을 가하고 사라졌다.

순간의 일이었다.

길옆 밤나무 밭 아래 몸을 던져 몸을 오그린 순간 나를 보호하려고 몸을 덮치고 있는 어머니의 베 적삼 사이로 늘어진 젖꼭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기관포탄은 인간 생체 열을 관통 할 수 있다나.

한길에는 마차를 끌던 황소가 여러 방의 기관포탄을 맞고 네 다리를 허공으로 하고 쓰러져 있었고 주인은 달아나고 없었다.

 

비행기의 폭격은 거세졌다쌕쌕기(제트기)는 날쌔고프로펠러의 그라망은 좀 느리나 오랜 동안 폭격을 해 목표물에 뿌리를 뽑고 약간 작고 날렵하게 생긴 무스탕은 날쌘 편이었고B29나 24는 고공에서 서서히 왔다 갔다 하면서 새우젓독 만한 폭탄을 똥누듯 내려 부으면 교량 철도는 말할 것도 없고 터진 곳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형성되었다.

 

기관포 사격이나 로켓포도 무서웠으나 북같이 생겨서 가블가블거리며 떨어지면 그 일대는 불바다가 되고 끈적거려 묻으면 떨어지지도 않는 네이팜탄이 더 무서웠다.

대개의 민가는 몽땅 이놈의 피해를 많이 보았다후에 이놈의 외피로 웅덩이에서 보트를 타기도 했다.

 

어느 날 나이가 열 여덟이었던둘째 누님의 아들 영만이는 친구 어머니의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연설을 들은 후 수건을 질끈 동이고 의용군으로 트럭을 타고 떠난 뒤 소식이 없었다.

워커라인인 낙동강 전투에서 폭탄을 삼태기로 떠서 뿌리는 것 같은 미군기 융단 폭격에 희생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산곡 어느 강변에 누워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후 칠봉소년단 화랑소년단이 조직되고 나는 좀 똑똑하고 노래 잘한다는 이유 하나로 저학년인데도 지도부장의 감투를 쓰고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회천면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내촌공회당(덕정 분교로 사용되던)에서 기만이 형과 그 애인이었던 쌍 가랑머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노래를 따라 배워 그것을 다시 저녁에 마당에 모깃불 피우고 멍석 깔고 동네 주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 -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위에 역력히 비춰 주는 거룩한 자국 아아

 

애국가 -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 금의 자원도 가득 찬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적기가 -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밑에서 선서하리라비겁한 놈은 갈려면 가라임화의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소년단 노래 - '빛나 오른 새 조선에 밝은 아침에… 기세도 높이 우리들은 민주소년 조국의 아들 딸가슴 펴고 일어나라 김장군 따라깃발을 흔들어라 소년단 깃발을 외쳐라… 소년단 만만세

농민의 노래 - '불러라 노래 불러라… 논밭을 빼앗겨 삼십 육년간

 

이러한 일들은 비단 우리 동네 만의 일이 아니라 당시 북한의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에서는 예외 없이 일어난 것으로 어설핀 '색깔론'은 펴지 말기 바란다.

 

낙엽이 졌다가을이 되었다교교한 달빛이 비췄던가?

쿵쿵쿵쿵쿵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인천상륙작전생전 처음 보는 모양을 한 여러 나라 군인들이 왔다.

이번에는 '오대양 육대주… 평화의 사도유엔군의 노래를 불러야 했고, '공비 토벌로 떠나온 이내 몸이'나 혹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면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여 잘 자거라' '단장의 미아리 고개'나 '님께서 가신 길은 영강의 길이 옵기에 이몸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를 불러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갔다.

기만이 형도흥범이 아버지도구두쇠 아저씨도.

 

머리가 유난히 커 대갈 장군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성민이란 분은 갓 시집온 부인을 두고 동네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으로 가다가 며칠 후 되돌아 왔다.

그가 가기 전에 "나는 도마 위에 오른 고기예요!" 그러나 그가 인공 치하에서 한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고기예요'가 한동안 유행했다.

 

동급생으로 나이가 서너 살 위인 소년단 면 위원장이었던 수남이가 총살되었다.

여성동맹 면 위원장으로 금시계를 탔던 요욕이 어머니도 내촌 시냇가 찔레 덤불 아래서 사살되었다.

축동 밖 집이 있었던 방직공장 누나 친구는 동네 일 봤다고 칼빈 총 개머리 판으로 손가락을 짓이김 당했다.

미군들의 사냥에 윤간을 당한 등 넘어 한 누나는 양잿물을 먹다 실패하여 호스로 음식물을 넣어야 했다.

 

3

 

다음해 겨울 덕정리 일대의 소개 명령이 떨어졌다적을 유인하여 원자탄을 쓸 것이니 살고 싶으면 38선으로부터 50(?)밖으로 소개하라는 통보를 받고 동네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동네는 텅 비우게 되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어머님은 해소 병이 악화되어 퉁퉁 부으셨고 촌보를 움직이지 못하셨다.그래도 횃대를 잡고 걸음 연습을 하시면서 좀 나으면 나가자고 하셨다.

 

빈 동네를 지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개도 짖지 않았다.

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나셨다칠봉산 밑 봉양리 현암동 거무네미 누님이 오셨다그는 사력을 다하여 짝짝 미끄러지는 시오리 빙판 길을 한번 쉬지도 않고 주내면 덕고개 안 동네 큰댁으로 모셨다.

어머니를 모실 피난을 포기한 10촌 누나가 나타나자 외아들인 나는 피난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고집과 주위의 권유로 송산까지 나갔으나 중국지원군의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결국 저녁에 조명탄을 낮같이 밝혀놓고 폭격과 포격을 가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흰 홑이불을 망토 처럼 두른 중공군(중국 인민 해방군 지원군)이 왔다.우리가 돌아올 때 근방에 폭격을 당했으나 피해자는 없었다그들은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시신을 묻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땅을 파는데 곡괭이가 텅텅 튀었다어느 날 갑자기 쌕쌔기(제트기)가 마을로 덮쳤는데 방공호 속으로 뛰어든 우리는 무사했으나 우리가 있던 방 옆 마루에 놓였던 뒤주를 기관포탄이 관통했고 옆집 할머니 벌되는 분이 허벅지 관통상을 입으셨다그분은 호박 삶은 것과 소금을 섞은 즙을 상처 부위에 처매고 나셨다.

 

우리 동네는 홍씨 집성촌이었다마당에는 기관포탄이 언땅을 뚫지 못하고 강철 탄환만 박히고 구리 외피가 널려져 있었다실탄 사격은 따따따가 아니고 마른나무더미를 거대한 힘으로 일시에 짓이기는 소리가 난다아지직!아지직한다고나 할까?

이 경험으로 4.19경무대 공격 시 실탄 사격을 즉각 감지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칠봉산 밑 누님 댁으로 왔다나는 비행기 공포증과 방공호에 물이 차 상한 곡식 밥으로 식욕을 잃고 있었는데 이 곳으로 온 후 알타리 김치 된장찌개에 입맛을 찾고 이 동네는 비행기가 와 사람들이 나다니고 있었다.

 

아마 공군 당국도 민간인이 있다고 알고 있어 폭격이 고려 된 것 같았다중국 지원군들은 부대 이동이 주로 도보였다그래서 누빈 방한복과 여러 종류의 신발은 튼튼하고 따뜻했다.

주요 수송수단은 노새가 끄는 마차였다그들은 학습 등을 위한 만년필이나 손전등이 잘 보급되었고 우리들은 장수연 담배로 그것들과 맞바꾸어 사용할 수 있었고 국군이 버리고 간 권총을 챙겨 논 애들의 수입은 더 짭짤했다.

 

주로 밤에 행군했다어둠이 깔리면 있던 부대는 이동하고 새 부대가 왔다노새 울음소리 마차 바퀴소리 ,그리고 허리에 찬 물 컵과 수저 호크가 부디쳐 절겅거리는 소리 그리고 각 집으로 숙소를 배정하는 지휘관의 낯선 언어...

 

그들의 무기는 노획한 미제무기가 꽤 있었다모택동의 말 "우리의 무기고는 바로 미국에 있다주인집 여자들은 아랫목으로 그들은 윗목으로그래서 그 경계선은 당연히 남자인 내 몫이 되었다심지어 칫솔 치약까지 미제가 많았다.

 

밤에는 문을 가리고 전대에다 넣을 미수 가루나간단한 과자를 굽거나 튀겼다나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집어먹곤 했다쌀은 몰래 땅에 묻는데 총 창으로 찔러 잘도 찾아냈다붉은 돈(북한 전시 화폐)을 주기는 하나 그것으로 교환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치 된장 간장은 나누어 먹었다물론 돈을 주고..달빛이 교교한 한밤 내 옆에 자던 병사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울고 있었다쌍 가랑머리 예쁜 여자의 사진 ..손발언어로 의사 소통그는 북경대학 의과 출신이고 그 여자는 간호사 ....

 

시아버지와 며느리만 남은 집에 들었던 한 병사는 밤에 자다가 며느리의 치마꼬리를 잡았다가 고발되어 저녁 회의인지 군법회의인지 동방홍(모택동 찬가)등의 노래를 부른 후 ....등등광에다 가두고 밥을 굶기는 벌을 주는 것을 보았다.

광에는 열쇠도 안 잠갔는데 그는 나오려 하지도 않았다눈이 하얗게 덮이고 그들의 모자 옷의 안쪽은 하얗고비행기가 뜨면 하얀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훌륭한 대피.

밤이면 어떤 이는 앞밭에 쓰러져 있던 꽁꽁 얼은 국군의 시체를 일으켜 세워 한 방 치는 경우도 목격되었다. "너희들은 국군이 오면 그만이야 알았어?'"하니 그 병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윗동네 가보니 그 사람이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게 아닌가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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