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가족 모두에 충실했던 송세영 비전향장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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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4-19 15:19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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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가족 모두에 충실했던 송세영 비전향장기수 | ||||||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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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4/19 [19: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또 한 분의 비전향장기수 선생이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다. 두 아들과 아내에게 "이제 곧 통일이 된다. 통일되면 우리 모두가 다 잘 살게 된다"라며 그렇게 염원했던 조국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고 송세영 선생이 18일 향년 85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송세영 선생은 해방 전 한학자였던 부친으로부터 한자와 일본어 등을 잘 배워 학식이 높았으며 해방이후 중학교에 갓 입학을 했을 때 전쟁이 터지자 조국해방을 위해 주저없이 산에 올라 총을 들고 미점령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체포되어 15년 감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혹하기로 소문난 교도소를 전전하다 만기출소하였다. 감옥에서 폐결핵에 걸려 관련 환자들만 모아놓은 마산교도소로 이감되어 다 죽었다고 했었는데 철의 의지로 병마와 싸워이겨 다시 살아났었다.
그런 고초를 겪고 나와서도 조금도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눈을 감는 그날까지 집회와 행사를 찾아다니고 시민사회단체활동을 해왔다. 배운 것, 아는 것이 많아 편히 살려고 마음 먹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는데 신념과 양심이 가리키는 애국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것이다.
"아주 가정적이셨습니다. 술도, 담배도 안하고 외박도 안 하셨습니다. 집안청소는 거의 전담하셨지요." 아내 강말분 여사의 말에 "에그 아주 함께 있으면 10분에 한 번 씩은 전화가 와요. 아내를 얼마나 챙기는지 몰라요" 곁에 있던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런 애처가도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님은 인자하신 분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기대치가 있어서 좀 엄하신 면도 없지 않았지만 손주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 살짝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사랑하고 배려해주셨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집안을 살뜰하게 거두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아버지 손길이 집안 곳곳에 얼마나 미쳤는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특히 책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아버님 통일운동하셨다는 것을 성인되서 알았는데 그땐 충격적이기도 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버님께서 뜻을 굽히지 않고 사셨던 면은 존경스럽습니다. 아버지 만큼은 안되겠지만 그림자를 쫗아가려고 합니다."
송세영 선생은 이렇게 애국자이면서 동시에 가정에도 아주 충실했던 가장이었다. 특히 가정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개인의 정치적 활동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책 외판원, 치과 기공소 배달원 등 어떤 일이건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한다. 하여 자녀들도 잘 교육시키고 가정도 안정시켰으며 통일운동도 누구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중단없이 계속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송세영 선생은 말보다는 실천을 더 중시였다.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던지는 짧은 말이 정곡을 찌르고 천금의 무게가 느껴졌다고 한다. 그런 내공은 단 한 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사상학습에서 나왔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우리민족 항일무장투쟁 관련 중요한 책은 하도 많이 봐서 거의 다 외울 정도라고 했다.
송세영 선생은 매우 겸손한 품성을 체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 앞에 나서기보다는 맡겨진 일을 어김없이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들어줄 줄 알았고 단체 회의에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결정이 나왔다고 해도 그 결정을 집행하는데 헌신을 다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 집안의 형님같은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참 따뜻한 분이었지요. 많이 안다고 떠들지 않고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 깊이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겸손하고 인자했지만 꼭 가야할 곳을 갔고 해야할 행동은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는 최근 함께 의정부에서 살게 되어 한창 우정이 싹트는 과정에 불현듯 돌아가시게 되어 가슴이 더 아프다는 윤한탁 선생의 회고이다.
"송세영 선생은 인품이 되신 분이다. 제대로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한 두 마디 찌른 말이 정곡을 찌른다. 이 분은 정말 칭찬 받을 만 하신 분이다." 권낙기 선생도 이런 똑같은 회고를 들려주었으며 권오헌 선생의 회고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송세영 선생은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한 애국자였다. 10여년 전 서울대병원에서 간경화가 악화되어 더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며 앞으로 얼마 못 사실 것이니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시라는 진단 결과를 알려주어 속수무책으로 퇴원해 나왔는데 그 때부터 손에 뜸을 꾸준히 떠서 결국 간경화를 극복하였다고 한다. 눈을 감는 그날까지도 쑥뜸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왔다는 것이다.
통일운동,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가정 일은 등한시하거나 건강관리 등을 철저히 하지 못해 우여곡절을 겪고 중도반단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송세영 선생의 삶에서 배울 점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 약력> 통일뉴스 정리 보도 1931년 2월 7일 충남 논산 연무읍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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