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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대 기고] 임기 일년이 중요하다. 아니 10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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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5-06-10 06:5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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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임기 일년이 중요하다. 아니 100일이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이재명 대통령의 역사적 책임은 막중하다. 


임기 일년이 중요하다. 아니 100일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없이 바로 임기를 시작했다.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 민민운동단체도 이른 시일 내에 전선을 재정비하여, ‘문재인 정부’ 때와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민운동단체는 대선 기간의 활동에 대해 “비와 자비”를 통하여 이른 시일 안에 통일 단결을 이루어 수구세력의 반격에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특히 광화문 “빛의 광장”에서 “빛의 혁명”을 통해 윤석열을 파면시킨 민민운동 단체 지도부는 민중 깊숙이 들어가, 이재명 정권을 민중이 원하는 “나라다운 나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로 견인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저자: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주권자인 민(民)의 승리로 끝났다. 


주권자 민(民)은 “내란 종식”과 “빛의 혁명” 그리고 “사회대개혁”을 위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득표율 49.42%인 1,728만 7,513표로 이재명 대통령을 선택했다. 


민(民)은 ‘내란수괴’ 윤석열과 내란세력 그리고 남북관계를 파탄 낸 수구세력을 단호하고 준엄한 주권자의 표로 심판했다. 


민심이자 천심이었다.


이번 선거로 민심을 거스르는 ‘내란정권’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를 확인하였다.


이제 신속하고 강력하게 “내란청산”과 “헌정 회복” 그리고 “사회대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집권 초기 일 년에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아니 100일 안에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


흔히 “대통령의 첫 100일”은 지도자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시기라고 말한다. 


어려운 시기 대통령에 당선되어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를 꼽는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위키백과]

 

▶ 미국 루스벨트의 “대통령의 첫 100일”, 뉴딜정책(New Deal)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승리 이후 물질적으로는 엄청난 풍요를 누리지만, 도덕적·윤리적으로 타락한 광란의 1920년대를 보낸다. 그러나 미국의 호황은 얼마 가지 못하고 곧 멈추게 된다.  


특히 미국의 자동차 생산은 미국 최대의 산업으로 떠 오르지만,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점점 더 열악해지고 생산과 판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또한, 전쟁특수의 경제 거품이 꺼지자,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 무렵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전 세계를 강타한다.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증권시장의 붕괴는 이후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주식 폭락, 은행 도산, 기업 파산, 농지 황폐화 등으로 민중을 도탄에 빠뜨린다.  


강준만은 『미국사 산책 6: 대공황과 뉴딜혁명』(인물과사상사, 2010)에서 미국의 ‘암흑의 목요일’ 증권시장 붕괴를 묘사했다.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오전 11시, 뉴욕 월스트리트 ‘뉴욕 주식거래소’에서 이상한 징후가 감지됐다. 매도 주문이 갑자기 늘어나더니 이는 곧 눈덩이 사태로 변해 너 나 할 것 없이 ‘팔아, 빨리 팔아, 얼마라도 좋다. 팔기만 하면 된다’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다우존스지수는 이날 20퍼센트 이상 하락해 299.47까지 떨어졌다. 이날 하루 동안 거래된 주식은 종전 하루 최대 거래량인 400만 주의 3배가 넘는 1290만 주였다.”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미국의 경제 대공황 심각한 상황을 설명했다.


“1931년 한 해 동안 은행 약 2,300개가 문을 닫았다. 


(중략) 


1932년 미국 노동 인구의 4분 1에 해당하는 1,3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으며 100만 명 이상의 무주택자가 생겨났다.”


이런 미국 경제대공황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3년 3월 4일 취임했다. 그리고 취임연설에서 그는 미국인들의 경제대공황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명언을 남긴다.


“우리가 두렵게 생각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이후 루스벨트는 의회에 비상 임기 의회를 요청한 뒤 1933년 3월부터 6월까지 100일간에 걸쳐 신속하고 놀라운 법령을 제정한다. ‘3R’로 불리는 개혁(Reform), 부흥(Recovery), 구제(Relief)의 이른바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의 돌파구를 만든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으로 축적한 자본을 “뉴딜정책”에 쏟아부음으로써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굳이 외국의 사례를 들 필요 없이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초기 100일간의 국정운영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았다.


 

김영삼 대통령 [네이버 블로그_열공모드]

 

▶ 김영삼의 “대통령의 첫 100일”, 어떤 이념이나 사상보다 민족이 더 중요하다!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은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출마하여 997만 7,646표(41.4%)를 얻어 2위 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804만 1,690표(33.4%)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3위 정주영 국민당 후보는 388만 167표(16.1%)를 얻었고, 낙선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영삼은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민족 우선론과 함께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촉구하며,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신(新)”을 강조했다. 


“신한국은 보다 자유롭고 성숙한 민주사회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입니다.

더불어 풍요롭게 사는 공동체입니다.

문화의 삶, 인간의 품위가 존중되는 나라입니다.

갈라진 민족이 하나되어 풍요롭게 사는 통일조국입니다.

새로운 문명의 중심에 우뚝 서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사회,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신한국입니다.

(중략)

저는 역사와 민족이 저에게 맡겨준 책무를 다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협력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정부 출범 14일 만인 3월 11일, 김영삼은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의 송환 방침을 발표하고, 19일 조건 없는 조선 송환으로 개혁·진보세력에게 큰희망을 주었다.


김영삼의 “어떤 이념이나 사상보다 민족이 더 중요하다”라는 이야기는 과거 한국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민족 우선주의였다.


이어서 김영삼은 “윗물맑기 운동”을 외치며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밀어붙였다. 전광석화도 같이 야당과 재야의 김영삼 3당합당에 대한 자신에 대한 배신자 프레임을 솔선수범과 개혁으로 돌파했다. 

 

▶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 모든 여론조사에서 70~80%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다.


김영삼은 취임 3일째인 2월 27일, 전격적으로 본인 재산이 17억 7,800만 원이라고 공개했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에서 고위 공직자의 재산공개에 관해 설명했다.


“김영삼은 고위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가리켜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고 했으며,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집단에게는 멸망의 길밖에 없다’고 했다. 고위공직자들은 강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국민은 환호했다.

(중략)

평소 정치인들의 속사정에는 비교적 밝은 정치부 기자들도 놀란 일이 수두룩했다. 미성년 손자가 주택을 소유하고, 빌딩을 11개, 주택을 11채 보유한 의원이 있는가 하면, 시가 수백억짜리 땅을 50억에 신고한 이도 있었다. 명백히 ‘파렴치한 투기꾼’이라는 말 외엔 그에게 붙일 말이 없는 의원들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 재산 공개는 김대통령이 주도한 사정(司正)의 첫 시동이었고, 그 결과는 흔히 ‘무월혁명’으로 비유된다.

부패의 정도가 심한 사람들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3월 하순경 김영삼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70~80%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여당 신문과 방송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만년 여당지 ‘서울신문’이 “한겨레신문”보다 더 개혁적인 논조였고, ‘어용 KBS’가 비리 현장 탐사보도로 각광을 받았다.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좀 과장되게 이야기한다면, 한국에서 TV라는 매체의 위대성을 처음 발견한 “사건”이라고 했다. 


“신바람이 난 KBS는 3월 30일 고위 공직자들의 호화 공관까지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독일과 영국의 고위 공직자들은 공관이 아예 없거나 매우 검소한 공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생생한 화면과 함께 보여 주면서 한국의 호화 공관과 대비시켜 준 보도는 서민들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강준만의 같은 책에서 1993년 4월 9일 김영삼이 민자당 상무위원회에서 한 연설은 감동적이었다고 썼다.


“‘우리는 통한의 눈물로 지난날을 반성해야 한다’, ‘재산공개와 관련 진정으로 참회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참회의 눈물 없이 국민에게 고통의 분담을 요구할 수 있는지’, ‘우리 당은 진정 뉘우치는 눈물 속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요, 새로운 각오의 눈물이다.’”

 


하나회 [블로그: 아윌리치 이슈]


▶ 군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김영삼의 최대업적은 군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이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32년 만에, 대통령을 군인 출신에서 민간인으로 바로 잡고 김영삼은 군대를 대대적으로 정화한다.


김영삼은 집권 11일 만인 3월 8일,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전격 경질한다. 바로 5공 인맥으로 군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을 시도한 것이다.


‘하나회’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비호 속에 사회의 지연, 학연, 혈연의 3대 인맥을 초월한 군대 비밀 결사조직이었다.


“대한민국 육군 내에 있었던 비밀 결사 조직. 다시 말해서 신군부는 바로 하나회를 일컫는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중심이 되어 그들의 육군사관학교 11기(1951년 입학, 1955년 임관) 동기들과 후배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비밀리에 결성되었고, 친목회로 출발한 이 조직은 제3공화국 시기,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은밀한 후원 속에 성장해 나갔다.

 

본인도 쿠데타로 집권하여 배신 콤플렉스가 있었던 박정희는 자신에게 충성할 하나회 출신 위주로 진급을 시켜 주었고, 전두환이 준장에 진급할 때는 최고급 세단까지 하사했다. 육사 11기 준장 1차 진급자 4명이 전원 하나회였고, 2차 진급자 4명 중 2명이 하나회였다. 

(중략)

1979년 10.26 사건 이후, 정국 혼란을 틈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이듬해인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전두환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출처 : 나무위키)


김영삼은 이때가 절정이었다.


대대적인 군부 물갈이가 이루어지고 김영삼 정부 석 달 만에 옷 벗은 장군만 18명이었고 떨어진 별만 40개에 달하였다고 한국일보 특별취재팀은 정리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부의 절대 성역인 군부가, 그것도 노태우가 3당합당으로 당선시켜준 김영삼에 의해 철저히 통제를 받게 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리영희 선생[블로그_꾸브와제]


▶ 리영희, 남북한 간의 동질화가 우선이다.


한양대교수 리영희는 1993년 4월 13일 「서울경제신문」의 요청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전환시대의 논리」 그 후』(두레, 1994)에 기록한다. 그 내용 일부이다.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남북한 간의 동질화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교류가 20년 정도는 계속되어야 하겠지요. 사회일각에서 운운되고 있는 흡수통일론은 상대편 민중에게 고통을 강요할 수 있어 경계해야만 됩니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져 있느냐도 문제이고요.”


정부의 통일정책을 사후평가하는 「통일정책 평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돼 관심을 끌고 있는 대표적 재야인사 리영희 한양대교수의 통일관은 이처럼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 일세를 풍미했던 사회평론집의 저자이자 박정희, 전두환 두 정권에 의해 연거푸 해직교수의 대열에 섰던 리교수는 그러나 시대변화에 대한 인상만은 누구 못지 않게 강한 것으로 보였다.


오랜 기간 교우관계를 맺어오면서 해직교수로서 동지애를 함께 느꼈던 한완상 부총리겸 통일원장관으로부터 지난 달 31일 다른 13명과 함께 올해 통일정책 평가위원으로 위촉된 리교수는 김영삼정부의 통일정책에 상당한 신뢰를 보이고 있는 듯했다.


한양대 교수연구실에서 만난 리교수는 ‘문민시대’라는 말을 되풀이 사용함으로써 그같은 감회의 일단을 피력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통일관은 이전 정권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에서도 이인모씨 북송을 결정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신정부의 개혁의지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우선 시작이 좋았습니다. 재산공개도 그렇고 특히 전격적으로 단행된 군 인사 내용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만약 DJ가 집권했더라면 그렇게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군부는 물론 온갖 기득권 집단이 처음부터 총체적으로 저항했을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통일정책 평가위원이라는 것이 관직은 아니지만 위원 위촉을 승낙하신 것은 현정권에의 친밀감을 표시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현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은 방향설정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우선 군사통치의 잔재를 제거하면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경제적인 민주화를 위해 실명제의 실시도 시급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대정권에 의해 키워져 왔던 패권주의의 해소와 국가보안법 등 악법폐지가 중요합니다.


무려 30년이 지난 이 시기 “남북복원”과 ‘내란청산’ 그리고 “사회대개혁”을 위해서도 필요한 리영희 교수의 조언이다.


▶ 김영삼 정권의 몰락


이후 “금융실명제”를 더해 “대통령의 첫 100일”은 김영삼 신드롬을 불러온다.


그러나 김영삼의 개혁은 불행하게도 여기까지였다. 이후 김영삼 정권은 처절하게 몰락한다.


김영삼 정부 몰락의 시작은 육·해·공의 대형참사였다. 김영삼은 대형사고 등으로 8번이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래서 ‘사고 공화국’이자 ‘사과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후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으로 농민과 민중의 분노를 샀다. 농협이 1991년 11월 11일부터 12월 23일까지 진행한 “쌀 수입 개방 반대 서명운동”에는 무려 1,300만여 명이 참여했다. 특히 쌀 시장 개방은 김영삼 정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대통령 선거 유세 때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 개방을 막겠다’라고 큰소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대통령의 아들 ‘소통령’ 김현철이었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성역’으로 군림했다.


여기에 미국의 대조선 전면전 검토 전쟁위기설로 김영삼 정권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편 2권』에서 제22대 유엔군사령관 게리 럭(Gary E. Luck)이 미국무성에 보낸 보고서 내용을 기록했다.


“미군이 북한의 핵 시설을 선제 공격할 경우, 북한은 그들의 핵을 사용하지 않고 휴전선 전방에 배치된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


서울을 포함해 안양까지 5~6분 사이에 6,000개의 포탄이 떨어진다. 또한 노동 1호와 노포동 미사일은 주요 기간산업과 고리, 영광 등 원자력 발전소를 겨냥하고 있는데, 마하 5~6 정도의 속도로 날아오는 노포동 미사일은 충분히 원자력 발전소의 보호벽을 깰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남한 전역은 핵 오염지대가 될 것이다. 

 

전쟁 발발 후 1개월이 지나면 전선에 배치된 미군 3만 5,000명이 사망하고 8~10만 명의 미국인이 죽게된다. 또한 한국인은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할 것이다.”


그리고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서거에 대한 조문 파동으로, 김영삼 정권은 신공안정국을 조성해 민중을 격분케 했다. 또한 한보사태와 ‘문민 황태자’ 김현철 사건 그리고 IMF사태로 김영삼 정권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줄곧 야당에 몸담은 민주투사 김영삼이, 1990년 1월 22일 신군부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와 유신 잔당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3당합당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민(民)을 설득할 수 없었다.


김영삼은 3당 합당의 배경을 ‘신사고에 의한 구국적 결단’이며, ‘이번의 결정은 위대한 결정이요, 혁명이다’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개소리였다. 3당합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결정적 약점이 김영삼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독한 선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나는 일단 결심하고 나면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가는 사람인데 3당통합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침에 결심했다가도 저녁에 마음이 돌아서고, 자고 일어나면 마음이 바뀌었다.”


그렇게 흔들리는 김영삼의 마음을 3당합당 쪽으로 몰아간 결정적 계기가 동해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 이후 김영삼을 겨냥하고 쳐들어오는 검찰의 칼이었다.


당시 매수의 장본인은 서석재였지만, 매수자금은 김영삼의 은행구좌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영삼으로선 치명타를 입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서청원이 증언하듯이, ‘3당통합은 사실 동해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출처 :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편 1권』)


▶ 임기 일년이 중요하다. 아니 100일이다!


6월 3일, ‘내란수괴’ 윤석열의 쿠데타로부터 이를 막아낸 6개월의 투쟁이 주권자 민(民)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극우 내란 잔존 세력은 다시 결집하고 있다. 이는 윤석열을 옹호한 김문수가 40%가 넘는 표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것은 3월 8일 사법부가 윤석열을 탈옥시켜, 끊임없이 윤석열이 극우 내란세력을 부추기며 결집하도록 방치했기 때문이었다.


윤석열의 ‘12·3비상계엄’은 하루 만에 끝난 실패한 쿠데타가 아니다.


‘내란수괴’ 윤석열과 내란동조세력은 나라가 어떻게 되던 자기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작년부터 군을 동원해 전쟁까지 준비해온 전쟁음모자이자 민주주의와 헌정 파괴범이었다. 위헌·위법한 내란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명명백백히 이재명 정부는 처벌해야 한다. 


특히 ‘하나회’ 이후 다시 비밀 군대 사조직이 군대에 암약했던 것이 이번 ‘12·3비상계엄’으로 빙산의 일각이 들어났다. 군은 끊임없이 분단체제를 악용하여 정치 혼란기에 항상 개입해 온 것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비밀 군대 사조직을 뿌리 뽑아, 다시는 이런 내란음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과거 미국의 『워싱턴타임스』지는 1992년 대선 때 전쟁을 계획했던 사실을 폭로한 적이 있다.


“훗날 미국의 『워싱턴타임스』지는 한국의 한 고위 정치지도자의 증언을 인용해 92년 대선 때 한국의 특수부대원을 북한군 복장으로 위장시켜 휴전선 일대에서 사건을 일으키려 계획했으며, 이 계획은 김영삼 당시 민자통 대통령 후보의 지지도가 낮았더라면 실행될 예정이었다고 보도했다.”(『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편 1권』) 


이재명 대통령의 역사적 책임은 막중하다. 


임기 일년이 중요하다. 아니 100일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없이 바로 임기를 시작했다.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 민민운동단체도 이른 시일 내에 전선을 재정비하여, ‘문재인 정부’ 때와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민운동단체는 대선 기간의 활동에 대해 “비와 자비”를 통하여 이른 시일 안에 통일 단결을 이루어 수구세력의 반격에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특히 광화문 “빛의 광장”에서 “빛의 혁명”을 통해 윤석열을 파면시킨 민민운동 단체 지도부는 민중 깊숙이 들어가, 이재명 정권을 민중이 원하는 “나라다운 나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로 견인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검은색 강조는 편집자.)


[출처 통일시대]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25-06-10 07:00:06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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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로동신문] 2월 5일 (목)
【KCTV 조선중앙텔레비죤 보도】2월 4일 (수), 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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