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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결성 11주년을 맞아 범민련 남측본부 이종린 의장 자택을 찾았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1990년 11월 20일 베를린에서 남북해외 3자가 모여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결성하기로 합의한 지 오늘이 11년째 되는 날이다. 범민련 남측본부의 출발에서부터 의장을 맡은 지금까지 줄곧 외길을 걸어온 이종린(79세) 의장을 만나 그간 범민련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전망을 들어보았다. 이종린 의장은 범민련 결성 11주년을 맞아 "범민련을 사수, 지켜왔는데 이는 민족사의 큰 발자취로 기록해야 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인터뷰는 이종린 의장이 부인과 장남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역삼동 자택에서 진행되었다.
일시 : 2001.11.20 오후 2시 장소 : 이종린 의장 자택(서울 강남구 역삼동 소재) 대담 : 김치관 기자 사진 : 송정미 기자
`피눈물 나는 길을 걸어왔죠`
□ 통일뉴스 : 범민련 결성 11주년을 축하드리며 소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 이종린 : 한마디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간 우여곡절을 생각하면 정말 피눈물나는 길을 걸어왔죠. 범민련 깃발 아래 죽어간 사람도 있고 지금도 죽어갈 사람도 있고......
□ 그간 가장 기억에 남는 범민련에 관한 기억은 무엇입니까.
■ 저는 88년에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을 재건해서 89년에 체포되었습니다. 90년 제1차 범민족대회를 옥중에서 보도를 보고 알았는데 그 때 감격이란 건 뭐라고 말로 표현 못해요.
□ 범민련은 그간 내부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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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감개가 무량`하다고 소회를 밝힌 이종린 의장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 문익환 목사님이 안동교도소에서 나와서 "아 이선생 나를 산에 좀 데려다 줘" 그러더라고. 내가 50년 이상 산행 경험이 있었거든. 그래서 백두산회를 만들어 당신이 회장, 내가 산행대장을 맡고 "제일 먼저 평양 지나 백두산 갑시다" 이렇게 어울려 산에 다니고 그랬지.
그런데 대화를 해보니 문 목사님은 김영삼 정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나는 김영삼은 민족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문 목사는 당시 통일원장관 한완상씨, 국정원장을 김덕씨가 하고 비서실장 박관용까지 핵심 트리오를 진보계로 꾸리니까 통일운동을 탄압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거죠. 그래서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꾸리자 이렇게 했는데 시국을 너무 안일하게 봤고 자기 이야기라면 다 따라줄 줄 알았던 거죠.
그런데 범민련은 3자연대인데 남측만 해체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3자가 합의해야 하는데, 3자 고리를 빼고 남측만 통일운동 한다고 되나요. 그래서 2차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단장이었던 내가 학생들에게 말해 범민련 사수 깃발을 들고 한양대 대회장에 입장했죠. 그것 때문에 94년부터 `하나의 대회` 가지고 전국연합, 민족회의하고 얼마나 대화가 격렬했는지......
□ 지금은 그때에 대해 어떻게 정리하고 평가하고 계신지요.
■ 어디까지고 평생을 꺾이지 않고 외길을 걸어왔고 범민련을 사수, 지켜왔는데 이는 민족사의 큰 발자취로 기록해야 할 일이라고 평가합니다. 6.15 선언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을 보면 범민련 사수는 정당성이 있고 옳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문 목사님은 나가버려서 수월했죠. 조직적 문제는 없어 단순했죠. 그 이후 두 번째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원칙이 중요`
□ 두 번째의 어려움은 어떻게 겪으셨는지요. 그리고 되돌아 보실때의 소감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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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3자연대의 원칙을 지켜 범민련을 사수해 왔다고 말한 이종린 의장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 97년경 내가 감옥에서 나와 보니까 강희남 목사가 또하나의 범민련을 만들었어요. 이것은 종파성과 분열주의인데 이건 조직을 망치는 것이죠. 사무처장을 바꾸자고 제기하는가 하면 99년 10차 범민족대회 명칭을 바꾸자하고, 자기 사람들로 인맥을 장악하려 했죠.
여기에 한총련이 강 목사를 싸고돌았는데 학생운동이 큰 오류를 저질렀어요. 한총련이 작년 10월 중앙위 총회에서 범민련에 복귀했죠. 만 1년만의 일입니다.
언제나 세상에는 사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민족사적으로 정통성과 정당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마련인데 어려운 때일수록 원칙이 중요합니다. 3자연대는 민족 앞에 당면한 과제로서의 원칙입니다.
□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통일과 관련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 6.15 선언은 72년 7.4남북공동성명 못지 않게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은 선언입니다. 72년 당시에도 중국의 주은래 수상이 `한반도 문제는 자국 문제와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미.중 관계 정상화를 위해 한국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미국의 CIA(중앙정보국)의 각본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박정희가 통일을 바랬다는 것은 허위고 집권연장을 위해서 이용해 먹은 거죠.
6.15 선언은 동구권 변화와 소련 붕괴로 사회주의권이 변화했고 이런 상황에서 세계의 냉전체제가 다 해소되고 월남이나 예멘 같은 분단국들이 모두 통일돼서 유일하게 한반도만 남게 된 조건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한국도 미국도 분단 상태를 영구히 휴전체제로 끌고 갈 수 없게 된 거죠. 특히 94년 핵위기 때 5027 전쟁계획까지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으로는 될 수 없다는 미국의 입장이 정리되어 결국 페리보고서가 나와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 최근에 범민련의 강령과 규약을 개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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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기 때문에` 범민련은 6.15 선언 이후 강령을 바꾸고 범민족대회 명칭을 양보했다고 말한 이종린 의장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 6.15 선언 2항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점`이라는 그 원칙을 우리 강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6.15 선언 후 언론사 사장단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했을 때 범민련, 한총련이 범민족대회로 소란스럽다고 하자 김 위원장이 `앞으로 그런 대회는 않는다`라고 말해 범민족대회는 막을 내리고 `2000년 통일축전`으로 명칭이 바뀌었죠.
□ 일부에서는 그런 모습을 `대북 추수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이전에 연방제 강령이나 범민족대회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는데 수용하지 않다가 북한측 한마디에 돌아섰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 그게 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북이 대립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풀어나가자면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바꾼 것입니다. 기존 강령과 규약도 민족적 입장에서는 옳은데 공안기관이 문제 삼아 불법으로 보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비판)는 내부에서는 없었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연방제나 범민족대회 보다는 3자연대의 고리입니다. 공안당국에서도 3자연대를 제일 크게 보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참 안타까운 사람`
□ 올 8.15 평양행사에 참가한 사람들 중 범민련 관계자들이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보고 계시며 수감자들의 석방여부는 어떠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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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평양행사와 관련해 구속된 범민련 관계자들은 반드시 석방될 것이라고 낙관한 이종린 의장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과연 이 정부가 6.15 선언을 제대로 이행할 자신이 있는 정부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레 3차 공판에 들어가는데 정부가 비행기까지 주선해서 왔다갔다한 사람들을 잠입탈출, 회합통신, 고무찬양 등 국보법 전조항을 갖다 붙이니...... 과연 입법, 사법, 행정부,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국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령 6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보도는 안되고 있지만 북측 대표단이 구속 항의를 언급했고 북 언론도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002년 8.15 통일축전을 서울서 갖고 평양대표단이 오기로 되어 있는데 과연 그분들을 감옥에 놔두고 2002 통일축전이 이루어질 것인가 의문입니다. 우리는 무죄를 주장하지만 사법부가 그런 조직은 아니니까 무죄는 어려워도 감형해서 반드시 석방되리라 낙관합니다.
□ 흔히 범민련의 합법화 대중화를 과제로 꼽고 있습니다. 어떤 전망을 갖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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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명한 이종린 의장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 김대중 대통령은 참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6.15 선언으로, 남북 화해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범민련과 한총련을 사면복권시킬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시에는 미군에게 넘기게 돼 있지만 군 통수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6.15 선언 정신에 따라 남북 문제는 민족내부 문제니까 주적개념을 철회하면 됩니다. 왜 못합니까. 임기 1년이 남았는데 유종의 미를 거두고 민족 자주노선에 서서 큰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국민정서가 퇴폐 문화에 찌들어있고 정치에 대한 혐오감에 젖어있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통일선봉 단장으로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녀 보면 2, 3천명씩 선봉대원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통일선봉대 인원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민족개념이 희석화되고 이기주의가 깊습니다.
□ 김 대통령이나 국민정서 탓도 있겠지만 범민련이 국민들에게 다가가 설득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못한 이유도 있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범민련의 대중화를 위해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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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연대와 민중연대를 통해 통일운동의 큰 틀을 구상한다는 이종린 의장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 지난해 6.15 선언 이후 통일연대를 발기했습니다. 범민련이 통일운동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10차례의 범민족대회도 다 버리고 큰 틀로 꾸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 8.15때 민족통일대축전에 모두 함께 했습니다. 그렇지만 통일연대 안에서 범민련이 앞장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범민련이 앞장서면 올 사람도 안 올 수도 있죠. 하지만 범민련은 자타가 다 통일운동에서의 공로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서 반전자주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소파개정국민행동, 매향리대책위, MD(미사일방어망)공대위 등 반미자주 단체들이 수없이 꾸려져 있는데 하루에 다섯군데 (행사에) 다닐 때도 있어요. 그래봐야 그 얼굴이 그 얼굴이죠. 그래서 이것을 하나로 모아 올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 중에 특위로 만들 계획입니다.
□ 국민들에게 더 다가가고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통일운동을 위해 범민련이 어떻게 할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 청년.학생들이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의장단 회의의 결의를 통해 한청, 한총련 등과의 간담회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20:80사회가 심화되고 있는데 80%의 대중들이 반공교육의 찌든 때를 씻어내고 보다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합니다. 이제 6.15라는 통일 이정표가 나왔으니까 그 길에 동참을 바랍니다. 민중연대가 생존권 차원을 넘어서 통일.반전반핵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게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걸 더 다져가면서 기층에 들어가면 대중확보가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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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79세의 나이답지 않게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한 이종린 의장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이종린 의장은 시종 건강한 모습으로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마침 부인이 밖에서 돌아왔는데 이 의장보다 한 살 연하인 78세라고 한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이 의장님 건강은 어떠신지 물으니 저번 일요일에도 8시간 산을 올랐다는 말로 대신한다. 노 부부는 시내에 위치한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작은 마당에서 백일홍 나무등을 세세히 일러주었다. 기사에는 다 쓰지 않았지만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7차례 감옥을 드나들며 80 평생을 `정치권 한번 쳐다도 안보고` 통일을 위해 헌신한 노 운동가가 낙엽 물든 작은 마당에서 부인과 함께 사진에 담기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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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택 앞마당에서 평생의 반려자와 함께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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