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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서울대 강의 전문] '개성공단과 한국형 통일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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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9-26 00:0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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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서울대 강의 전문] '개성공단과 한국형 통일방안'

 

 

 

루나문 | 2014/09/25 19:46 | 정동영의 말과 글

 
 
 

   정동영 상임고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센터 초청 강의(2014.9.24) 

 

 

어제(24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센터에서 교수님, 박사·석사 과정 중인 분들의 초청으로《개성공단과 한국형 통일방안》을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이번 강의는 저의 대북정책과 통일방안을 집약한 것입니다. 아래 강의 원고 전문을 올립니다. 많은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개성공단과 한국형 통일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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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자 한국형 통일모델 
 
얼마 전 『10년 후 통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눈부시게 발전한 대만과 중국 관계를 보면서 우리라고 10년 안에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이루지 못하란 법이 없다는 뜻에서였다. 대만-중국 도시 간에는 1주일에 800여 편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대만에서 연간 500만 명, 중국에서 200만 명의 관광객이 상대 지역을 방문한다. 전화, 편지, 송금, 투자, 여행, 관광이 자유롭다. 대만 인구의 10분의 1인 200만 명이 중국 본토 영주권을 받았다. 이만하면 서로 간에 고통이 없는 사실상의 통일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민주정부 시절만 해도 남북 관계가 대만-중국 관계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10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본다. 대만-중국 관계를 봐도 그렇고, 우리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도 적대와 증오를 걷어내고 철도·도로를 잇고, 금강산 관광을 가고, 서로 총 쏘고 전쟁하던 곳에 공단을 세워 물건을 만들어내는 등 눈부시게 변화했던 경험이 우리에겐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눈앞에 길이 나 있다. 개성공단이 10년 후 통일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그걸 쭉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왜 ‘사실상의 통일’을 말하는가. 단순히 통일이라는 당위론적 개념이나 안보 차원에서의 개념을 넘어선다. 그것만이 머지않아 엔진이 꺼질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호의 경제적 성장 동력을 힘차게 재가동시킬 유일한 돌파구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은 그 성장동력의 생명줄이자 숨구멍이다.
 
이것은 우리만의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이미 나와 있다. 
 
OECD 사무국이 작년(2013년) 6월에 발표한 한국 경제 전망 보고서를 보면, 2031년이 되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0%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다른 말로 성장 엔진이 꺼진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잠재성장률 하락이 급속도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몇 해 전 세계 최대의 투자 금융기관인 골드만삭스에서는 정반대의 예측을 내놨다. 한국이 30년 뒤에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40년 뒤에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을 했다.  
 
골드만삭스의 <글로벌 경제, 상품 및 전략 연구소>는 2009년 9월 ‘글로벌 경제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남한과 북한이 '평화적·점진적 통일 한국'으로 가면, 본 연구 결과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 통일 한국의 잠재적 규모이다. 북한의 성장 잠재력이 실현된다면, 미 달러화 기준으로 통일 한국의 GDP가 30년에서 40년 후 프랑스, 독일을 추월하고 일본까지도 앞지를 수도 있을 것으로 우리는 내다보고 있다. 이러한 예측에서 보면 2050년 통일 한국의 규모는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G-7 국가와 동등하거나 넘어설 것이다.(*2050년 통일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 86,000달러 전망)

 

​북한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강력한 잠재력이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으며 일단 의미 있는 경제 개혁이 단행되기만 하면 투자가 유입될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요인에 집중하고 있다. ①풍부하고 경쟁력 있는 노동력, ②남한 자본과 기술, 북한의 천연자원과 노동력 간의 막대한 시너지 효과의 가능성, ③체제전환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생산성 향상과 통화절상으로 인한 커다란 잠재적 이익.​​

 

​한국이 독일식 통일 방식(흡수통일)을 선택하면, 한국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비용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비용이 가장 적은 선택은 한 국가에 두 개의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이 공존하는 것을 허용하는 중국과 홍콩의 통합방식이 될 것이다. 적절한 정책만 뒷받침된다면 남북한의 통합 비용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북한 경제 붕괴를 대비해 통일 비용을 줄이기 위한 적절한 정책이 필요하다.』 
 
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평화적·점진적 통일 한국’은 내가 주장하는 ‘사실상의 통일 상태’와 내용상 거의 일치한다.
 
왜 이렇게 국제적 신인도가 높은 두 기관이 상반된 전망을 하는 걸까? 골드만삭스는 개성공단이 쭉 확장된다는 것을 전제로 삼은 것이고, OECD 보고서는 남북이 분단된 현 상태에서 남한 단독 경제를 전망한 것이다. 

사실 따져 보면 상식이다.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려면 인구가 늘든지, 기술 혁신이 일어나든지, 자본 투자가 활발하든지 해야 하는데, 현재 대한민국은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다. GDP 성장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분기별 성장률이 0%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 상태에서는 누가 대통령이라도 국내에서는 용빼는 재주가 없을 듯하다. 

​골드만삭스 보고서도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국내의 여러 학자들과 전문기관들도 그렇게 예측한 곳이 많지만 이걸 확인시켜준 의미가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한국 경제가 남한의 자본과 기술에다 북한의 노동력과 풍부한 광물자원을 결합하면 다시 한번 고성장 시대로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북한은 북한대로 발전해서 20년 후에는 북한의 국민소득이 한국의 절반까지 따라올 수 있다고 예측했다. 북이 베트남·중국 모델을 착실하게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

​한국이 세계 최고의 제조업과 첨단 산업 경쟁력을 가진 독일과 일본을 제친다. 상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지난 20여년 동안 세계 1등을 지켜왔던 조선 산업이 최근 들어 중국에 추월당했다. 그런데 만일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합의대로 원산에 조선 단지를 착공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남쪽의 울산·거제와 북한의 원산은 바닷길로 한나절 거리다. 원산에 조선소를 지어서 여기서 화물선, 여객선, 컨테이너선 같은 저부가가치 선박을 건조하고, LNG선이나 해양 플랜트선은 남쪽에서 짓고 이렇게 조선 산업의 일관체계를 구축한다면 시너지가 발생한다. 중국에 기술을 넘겨줘서 추격을 당할 염려도 없어지고 일석삼조다. 조선 1등 국가 지위를 앞으로 백 년은 끄떡없이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경제 또한 불같이 성장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더 이상 전쟁 걱정 필요 없는 완전한 평화 공동체, 경제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건 비단 조선 산업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 산업, 제철 산업, 에너지 산업, 반도체, IT 산업 등 전 분야에 걸쳐 윈윈하는 모델이 가능하다.

이렇게 북한 경제가 자체 발전을 하게 되면 통일 비용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북한이 한국 경제에 두통거리가 아니라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된다. 
​​
개성공단은 현재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한국형 통일 모델’이기도 하다. 내가 몇 년 전에 독일에 갔을 때 에곤 바르(EGON BAHR) 박사가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분은 빌리 브란트 수상의 특별보좌역이자 정무장관으로서 동방정책을 설계한 분이다. 
 
그런데 내가 개성공단 사진을 보여주고 몇 가지 설명을 했더니 그 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이건 놀라운 상상력이다. 내가 동방정책을 설계할 때 동독 지역에 서독의 공단을 만든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대단한 상상력이다”고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한국에도 통일 모델이 필요한데, 한국은 베트남 모델도 될 수가 없고, 독일 모델도 될 수가 없다. 한국형 통일 모델이어야 하는데, 한국형 통일 모델이 바로 개성공단 모델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개성공단을 확장해서 계속 따라가면 그 중간에 경제 통일이 올 것이고, 종점에 마침내 한반도의 통일이 올 것이다”고 단언했다.  ​ 

"30만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 개성공단에 넣겠다​"

개성공단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한 것이지만, 처음에 기획하고 설계한 것은 정주영 회장이고 참여정부 때 그림을 다 그렸다. 그래서 2003년에 터 기공식을 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을 하고 남북 간에 공단을 북한에 만들기로 했는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처음에는 해주를 희망했다. 그런데 북한은 해주는 해군사령부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전격적으로 개성을 제안했다. 정주영 회장은 군사 지식은 없지만 개성이란 지역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어서 애초부터 개성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정주영 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경상남도 창원공단을 모델로 개성공단의 밑그림을 설명했다. 창원은 과거에 경남 의창군의 하나의 면이었는데 50만 공단이 들어서는데 2000만 평의 규모다.
 
정주영 회장의 설명에 입이 딱 벌어진 김정일 위원장은 “이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세계적인 수준의 공단을 만들겠다”고 설득했다. 이어 “1단계로는 섬유를 비롯한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넣지만, 점차적으로 전기, 전자, IT, 바이오 등 첨단공단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토지비용이 낮아야 한다. 그리고 인건비가 저렴해야 경쟁력이 있을 것 아니냐”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개성공단 부지의 50년 사용권에 평당 14만 9000원인데 인건비가 세금 포함해서 57불로 시작한 것이다.
 
2000년 정주영 회장이 개성공단을 시작할 때 김정일 위원장과 나눈 대화 내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정 회장은 김 위원장한테 “2000만 평이 완공 되면 적어도 창원처럼 50만 공업도시가 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만 35만 명에 달하는데, 개성 주변의 인구가 30만 명밖에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 노동력 조달은 어떻게 하죠?”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이거 다 하는데 몇 년 걸립니까?”라고 되물었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착공해서 8년이면 됩니다”고 답변했다. 김 위원장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8년이라…. 우리가 6.15도 했고, 8년이면 남북관계도 발전했을 것이고, 그런데 남과 북에는 군대 숫자가 너무 많아요. 자, 그 단계가 되면 내가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서 한 30만 명을 공장에 넣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결과적으로 실현은 안 됐지만, 북한 최고 지도자의 머릿속에 그런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는 개성공단의 노동력도 되면서 자연스럽게 군축이 되는 것, 그런 단계적 발전 모델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햇볕정책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미국까지 날아가 '강경 매파'를 설득하다​
 
나는 참여정부 때인 2004년 7월 1일 통일부장관으로 부임했다. 내가 통일부장관에 취임했을 때 개성공단은 벽에 부딪혀 있었다. 나는 통일부 직원들을 모아놓고 “내가 통일부 장관으로 온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개성공단에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 사명이다. 내가 그걸 하려고 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막상 앉아서 들여다 보니까 속도조절론이 있었다.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고 하니까 미국이었다. 미국이 ‘핵 문제나 해결하고 이걸 해야지. 2차 핵 문제가 불거졌는데 북쪽에다 무슨 공단을 짓느냐. 그건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관으로서 내 생각은 달랐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야지. 무슨 소리냐”고 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협조를 해주지 않으면 공단을 지을 수가 없다. 북한은 미국의 적성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적성국가가 몇 개 있다. 쿠바가 적국이고, 북한이 적국이고, 이란이 적국이다. 적국에다 전략 물자, 군대용으로 쓰일 수 있는 물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컴퓨터, 통신기 등도 다 군대용으로 쓸 수 있는 물품이다. 그것은 이중 용도 물자라고 하는데 산업용과 군사용 이중으로 쓰일 수 있는 물자라는 뜻이다. 거기서 미국의 원천 기술이 10% 이상 들어 간 것이 적국에 들어갈 때는 미국 기술을 가지고 들어가는 거니까 미 국무성의 허가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장관으로 가자마자 한 것이 긴급 TF를 만들어서 “개성에 15개 공장이 시범 단지에 들어가는데, 거기 들어가는 품목 즉 책상도 가지고 들어갈 것이고, 재봉틀도 가지고 들어가고, 컴퓨터도 있고, 공작 기계도 있다. 오늘부터 그 아이템 목록을 정리하라. 거기서 전략 물자에 해당될 수 있는 것을 분류하는 것은 공무원들만으로는 어려우니까 각 산업 분야의 협회, 기계공업협회, 섬유공업협회, 자동차공업협회 등과 함께 TF를 무역협회에 설치하고, 국장급 책임자를 '당신은 통일부로 오지 말고 그리로 출근하시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밤을 새워서 목록을 작성했다. 통일부 간부들하고 외교부 1급 실장을 묶어서 미국 상무성으로 보내서 우선 서류 검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의 국방부가 문제였다. 대북 정책 차원에서 결정이 나야 하니까 그렇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직접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을 설득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04년 8월 말 나는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네오콘 수장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통일부 장관으로서 미국의 국방장관을 만날 수가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통일부 장관은 대한민국밖에 없으므로 회담 성사가 안되는 것이다. 그럴려면 우리 국방장관한테 가서 “미국의 국방장관한테 얘기를 해주십시오”라고 해야 하는데, 이 중차대한 문제를 남을 통해서 설명을 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럼스펠드와의 회담 '개성공단 세일즈'
 
다행히 그 당시 나는 통일부 장관과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을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NSC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의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국무장관인 콜린 파월을 만났는데 그는 긍정적이었다. 콜린 파월은 한국의 동두천 미 2사단에서 1년 동안 중령으로 대대장을 했던 사람이어서 판문점이나 동두천 일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개성공단 사진을 보더니 이게 어디냐고 물었다. 자기로서는 DMZ를 가로질러서 거기다 공단을 만든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파월은 군인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긍정적이었다. 나는 파월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2003년 1월 다보스 포럼에 가서도 파월을 만나 북한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북한 문제에 대해 협상을 통해서 해결해야 된다는 온건파였다. 속칭 비둘기파였다. 그래서 개성공단은 좋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미 국방부였다. 그래서 럼스펠드를 만났다. 그는 부시 행정부 내의 강경파(매파)인 네오콘 그룹의 수장이었다. 직책은 체니 부통령이 위였지만 럼스펠드는 오랫동안 체니의 후원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럼스펠드는 포드 정부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고, 부시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소련의 데탕트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물론 북한에 대해서도 강경한 견해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를 어떻게 설득할까. 사실 막막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 남북 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도 중요한 요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명확한 입장이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바로 개성공단에 관한 ‘정동영-럼스펠드 담판’이었다고 생각한다. 
 
2004년 8월 31일 오전 10시. 펜타곤 회의실에서 한 시간쯤 럼스펠드와 회담을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개성공단 세일즈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개성공단은 경제 사업인 동시에 군사전략 사업 즉 군사전략적 가치가 큰 안보 사업입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어떻게 럼스펠드를 설득할 것인가를 놓고 미국 가기 전부터 고민을 했는데, ‘럼스펠드는 개성공단이 경제적 가치가 높은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미국 국방부가 경제적 가치가 있는가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결국 군사전략적 가치 중심으로 설득했다.
 
내가 럼스펠드를 설득한 논리는 이랬다.
 
첫 번째로 한미동맹이 대한민국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취약점은 종심(縱深·작전 범위나 길이)이 짧다는 것이다. 휴전선의 장사정포로부터 서울까지가 불과 40마일이다. 포를 쏘면 3분 내에 광화문에 떨어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에 비해 평양은 휴전선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미사일로 쏘지 않으면 닿지 않는다. 그런데 서울은 일반 포로 쏴도 대포가 떨어진다.

 

종심이 짧다는 것이 결정적인 취약 요소인데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한미동맹이 집중하는 것이 조기 경보 기능을 확보하는 것이다. 조기 경보 기능은 불이 나면 사이렌 울리는 것과 같은 기능이다. 즉 ‘북의 이상 징후가 있다. 북이 도발 징후가 있다. 전쟁 징후가 있다.’ 이런 것을 한 시간 전에 아느냐, 하루 전에 아느냐, 이틀 전에 아느냐에 따라 피해 정도(생존율 등)에 큰 차이가 있다. 피해 정도가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이 24시간이냐, 48시간이냐에 따라 180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미동맹이 집중하는 것이 1번 영상 정보 획득, 2번 음성 정보 획득, 3번 휴민트(human intelligence) 정보 획득이다. 1번 영상 정보는 인공위성으로 계속 감시하는 것이다. 위성사진을 계속 찍어서 사진을 식별하는 것이다. 예컨대 ‘탱크 몇 대가 왜 이쪽으로 갔지, 무슨 훈련인가’ 하고 계속 위성 카메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정찰기를 띄워서 통신을 감청하는 것, 상급 부대와 하급 부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귀를 대고 듣는 일이다. 세 번째는 인간 정보다. 북쪽에서 나온 사람도 있을 테고 집어넣기도 해서 정보를 수집해서 분석하고 판단해야 한다. 거기에 투입되는 인력과 돈, 자원과 물자가 엄청나다.
 
예를 들면 태평양 연안의 몬터레이 근처 산꼭대기에 미 국방 외국어대학이 있다. DLI(DEFENCE LANGUAGE INSTITUTE)이다. 그 곳에 400명의 한국어 교수가 미군 병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24시간 한국어 집중 교육을 한다. 가장 교수가 많은 언어가 아랍어, 두 번째가 중국어, 세 번째 언어가 한국어인데 한국어라기보다 북한어다.
 
그게 바로 앞서 언급한 영상 정보, 음성 정보, 인간 정보를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미국 군인들이 하는데 인공위성으로 찍는 것도 돈이고, 정찰기로 감청하는 것도 돈이다. 또한 북쪽에서 무슨 폭발이 있어도 우리는 모른다. 국방부나 청와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보가 없다. 결국 며칠이 지나야 알 수 있는 상황인데 미국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전후 사정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다.
 
이른바 자주 국방에서 가장 핵심 요소가 한국군의 정보 획득 능력인데, 이점이 우리는 떨어진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백두, 금강 계획이라고 해서 우리도 사진 찍고, 듣고 하는데 수조 원을 투입했다. 하지만 정찰 기능을 강화하고, 향상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우리는 달린다. 그런데 미국이 100을 알고 있으면, 알고 있는 대로 100을 다 알려주고 즉시 알려주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알려 주기는 하는데 다 알려주느냐 시간을 끌다가 적당히 알려 주느냐. 이것은 전형적인 갑을 관계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럼스펠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심이 짧습니다. 그런데 개성이라는 곳이 6.25 때 제2축선입니다”라고 했다. 제1축선은 철원에서 서울로 직통으로 왔고, 제2축선은 개성 방면에서 문산을 거쳐 서울 미아리 고개로 넘어 들어왔다. 6월 25일 새벽에 포를 쏘기 시작해서 28일 새벽에 서울로 사흘 만에 들어와 버렸다. 그만큼 개성은 남과 북 서로에게 요충 지역인 것이다. 
 
그리고 난 뒤 내가 “여기(개성)를 북이 가로 8킬로미터, 세로 8킬로미터 열어준다고 합니다. 군사전략적으로 이를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철조망 즉 DMZ 군사 분계선 너머의 북한 영토를 준다는 것인데, 그걸 왜 하지 마라, 속도 조절하라고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위성으로 사진 찍는 곳을 내준다는데 안 할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하니까 럼스펠드가 대답을 못 한다. 
 
위성사진에 따르면 개성공단을 건설하고 있는 부지 자체가 북한 6사단, 64사단, 2군단 포병여단 이렇게 6만 명의 병력과 화력이 밀집한 부대 주둔 지역이었다. 포 진지와 탱크 부대가 있고, 중화기와 대포와 2개 사단 병력과 1개 포병 여단이 쫙 깔려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 곳을 비워준다는데 멈출 이유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럼스펠드는 경청했다. 설명을 잘 들었다면서 달리 반문도 없었다.
 
당시 럼스펠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2003년 3월에 이라크전이 시작된다. 우리도 자이툰 부대를 파병했다. 1년 반쯤 됐을 때인데, 개전하자마자 바그다드를 점령해서 그 때는 희생자가 적었다. 그런데 점령하고부터 폭탄 테러가 터지기 시작했다. 미군 병사 전사자가 1000명이 넘고, 2000명이 넘고, 5000명까지 갔다. 2004년에는 삼사천 명까지 희생자가 생겼을 때, 이라크 전쟁에 온 정신이 가 있어 수렁에 빠졌다. 바그다드만 점령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점령 이후에 희생이 너무 컸다. 미국 내 비판 여론도 고조되고, 그 상황에서 이라크에 몇 십만 명을 파병해 놓고 있었다. 그 와중에 멀리 한반도의 휴전선과 개성공단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신경이 다른 데에 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얘기를 들어보니 딱히 반박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럼스펠드는 나에게 설명 잘 들었다고 하더니, ‘보여 줄 것이 있다’면서 회의실 옆 장관 개인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동그란 책상 위의 깔판 밑에 흑백 한반도의 위성사진 지도를 보여줬다. 밤에 찍은 사진으로 남쪽은 서울, 부산 등 전부 불야성인데, 북쪽은 평양만 하얀 점처럼 생겼고 나머지는 깜깜했다. 럼스펠드가 “이게 한미동맹의 우산 아래 발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라고 했다. 나는 “개성공단이 만들어지면 한미동맹과 함께 이루어진 남한의 불빛이 압록강변까지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다시 지하 벙커 같은 곳으로 데려가더니 나한테 북한과 중국의 미사일 능력과 위협에 관한 특별 브리핑을 해줬다. 이는 미사일 방어망(MD)의 필요성을 나에게 입력시키려는 의도로 보였다. 
 
미 국방부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증강되고 있으니 한국이 MD(Missile Defense)에 참여하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DJ 정부와 참여정부는 미국의 MD 계획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걸 설득하기 위한 브리핑을 한 것이다. 
 
그렇게 미국 국방부의 관심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그것을 방어하느냐에 있었던 것이고, 나의 관심은 북쪽에 개성공단을 만들어서 화해 협력을 통해서 위협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MD가 해법이 아니라 미사일을 쏴야 할 이유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미국 쪽 MD에 들어가면 국방비가 엄청나게 들어간다. 미국 국방부의 강경파들은 한국을 MD망에 끌어들여 한국이 미국 무기를 사주기를 바라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무부가 개성공단을 지원한 것은 미국도 국무부나 상무부는 원래가 유연했고, 국방부가 브레이크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럼스펠드를 잘 설득했다기보다는 럼스펠드와 담판을 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이나 서구 사회는 합리적으로 얘기를 해서 납득이 되면 선선히 받아들이기도 한다. 개성공단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설명한 것이 앞뒤가 맞으니까 입장을 바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한국 담당 보좌관은 리처드 로리스(Lawless)였다. Lawless는 무법자라는 뜻인데 우리한테는 악명이 높은 국방부 차관보로 한국 담당이다. 미국 CIA 직원도 했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는 잘했다. 그가 나중에 특파원들한테 브리핑을 했는데, 내가 나온 뒤에 럼스펠드가 로리스한테 “로리스, 아까 미스터 정이 얘기한 것 있지, 그거 대통령 보고 자료에 넣어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부시한테 보고를 했다. 부시도 정신은 이라크에 가 있었는데 럼스펠드가 얘기를 하니까 승인을 했다. 
 
그리고 나서 미국이 속도조절론 대신에 적극적인 협력으로 돌아섰다. 개성공단 사업도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15개 공장의 설비에 대해서 한 건도 거부하지 않았다. 100% 승인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도 박차를 가해 그 해 연말인 12월 15일 마침내 개성공단 제1호 공장인 냄비 공장이 가동된다. 그게 개성공단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왜 미국이 허락을 해야 하는지, 왜 우리 마음대로 개성에 공단을 짓는 결정을 할 수 없는지 의문이 갈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국내법 때문이다. 미국 국내법에 EAR법이 있다.(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 수출에 관한 행정 규제법이다. 적성 국가인 쿠바, 북한, 이란 등의 나라에는 전략 물자, 민간용인데 군수용으로 바뀔 수 있는 이중 용도의 전략 물자는 못 가지고 가며, 특별한 경우에는 미국 상무부의 승인을 받으라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북한은 적성국이다. 전략 물자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무기뿐만이 아니라 컴퓨터, 정밀기계, 통신기기 등 민간용이지만 군대에서도 쓸 수 있는 이런 것들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1960년대인가 알라스카 해안에서 좌초한 소련 잠수함을 미국이 인양했다. 건져서 보니까 일본의 도시바 부품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도시바의 임원 전원이 사퇴하고, 일본 정부 사절단이 미국에 가서 싹싹 빌었다. 소련에 전략 물자를 팔면 안 되는 것이었다. 사건이 정부 차원으로 비화되었다. 
 
미국의 지적재산권이 10% 이상 들어간 물자에 대해서는 미국 국내법에 그러한 규정이 있어서 안 지킬 도리가 없다. 컴퓨터는 CPU 안에 ‘인텔 인사이드’라고 쓰여 있는 것은 컴퓨터의 원천 기술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하나 마음대로 못 가지고 들어가는 실정인데, 그렇게 되면 공장을 돌리지 못 한다. 
 
하지만 럼스펠드와 담판 이후 개성공단의 공장별로 수천 개 아이템 목록을 작성해서 냈는데 100% 통과가 되었다. 전략 물자 반출 문제와 관련해서도 부시 행정부 하의 미 상무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서 가능했다. 물론 설득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미국과 거기에 대해서 일정한 공감대가 없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상무부 직원들이 2주일간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아이템 리스트 검토를 해줬고, 적극 협조해줬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누구인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보고, 여차하면 외과 수술 식으로 영변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 중의 강경파이다. 그가 개성공단에 대해 속도 조절하라고 제동을 걸고 있었는데, 내가 미국까지 날아가 설득시킨 결과 입장을 180도 바꾼 것이다. 그 뒤 연말에 럼스펠드 장관이 한국에 왔다. 청와대에서 만찬을 하는데, 우리 국방부 장관한테 “통일부 장관 미스터 정은 여기 안 오느냐”고 찾았다고 한다. 이점이 바로 자신이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대목이다.
 
'메이드 인 개성공단'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내가 통일부 장관이 되고나서 6개월 뒤인 2004년 12월 15일에 개성공단에서 첫 번째 물건이 생산되었다. 물론 공장터는 전에 불도저로 밀어 놓았었다. 부랴부랴 공장 패널 갖다가 세우고, 연말 안에 물건을 만들어 내자고 해서 밀어붙였다. 그렇게 해서 123개의 공장이 세워졌다. 1호가 123호까지 나간 것이다. 그래서 직원이 5만 3000명까지 갔다. 
 
개성공단의 가치는 1번이 군사전략적 가치, 2번이 경제적 가치, 3번이 미래적 가치다. 그런데 1년 전 개성공단 철수 사태에서 보듯, 아직도 정부여당이나 보수진영의 인식은 한참 거리가 멀다.
 
그와 관련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개성공단에는 신변 위협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개성공단에서 단 한 번도 신변 위협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막판에 철수 명령을 내렸을 때 안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면 서로 먼저 나오려고 하고, 인질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겠는가. 그럴 염려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안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번째, 개성공단에 식량난은 없었다. 왜냐하면 5만 3000명의 점심과 야간 간식을 주기 위한 식량이 부식 창고에 가득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100~200명 남아 있는데 무슨 식량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박근혜 대통령 책상 위에 올라간 보고서에 개성공단에 있는 우리 국민이 식량이 바닥나서 심지어 쑥을 뜯어 먹는다고 잘못 보고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나라 지도자라도 우리 국민이 쑥을 뜯어 먹고 살거나, 의료진을 못 가게 하면 흥분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개성공단 중단시 사실은 식량난은 없었고, 쑥을 뜯어 먹었다는 것은 사실 관계가 전혀 다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개성공단 옆에는 삼봉천이라는 냇가가 있다. 삼봉천 옆에는 공해 없는 청정 지대의 쑥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해마다 봄철 3~4월이면 쑥을 뜯었는데, 개성공단의 공장이 멈춰서서 할 일이 없어 마침 쑥을 뜯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신문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쑥을 뜯어 먹고 사는 걸로 보도가 되었다. 이렇게 와전이 되어 대통령의 보고서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개성공단 입주 업체 대표의 얘기다. 그렇다면 이것이 개성공단 사태를 불행하게 만든 작은 단초다.

 

세 번째는 123개 공장 전체가 흑자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사실 흑자가 안 나면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건비가 양질의 노동력 한 명을 쓰고도 한 달에 13만원인데, 남쪽에서 한 명을 고용할 수 있는 비용으로 거기서 거의 15~20명을 고용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토지 비용이 평당 14만 9000원이라서 대부분의 공장이 천 평, 이천 평, 사천 평씩을 매우 넓게 사용하고 있다. 토지 비용에 대한 부담이 남쪽에 비하면 거의 제로에 가깝게 수렴하는 것이다. 50년 사용권이 14만 9000원이기 때문에 흑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은 개성공단의 생산액 규모가 10분의1로 축소돼서 발표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에 개성공단에서 5억 달러, 즉 5000억 원어치 물품을 생산했다고 나온다. 왜 5000억이냐 하면, 예컨대 셔츠를 한 장 만들었는데 실제로는 10,000원 짜리다. 그런데 개성공단에서 기록이 되는 것은 원단 값, 실 값, 단추 값 같은 원부자재 비용은 빼버리고, 나머지 인건비, 공장의 전기료, 관리비, 세금, 수도료 등만 합쳐서 “이거 1000원이구먼” 하고 1000원으로 계산한다. 따라서 실제 물건 값은 1000원 짜리가 아니라 10,000원 짜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것은 5000억이 아니라 실제로는 5조 원 정도가 되는 것이다. 원부자재 비용이 인건비나 관리비의 10~12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성공단의 생산액이 5000억이 아니라 5조원이 되는 게 맞는데,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규모를 줄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를 언론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다.

 

아마도 어떤 규제조치나 제한이 없었다면 이익이 많기 때문에 서로 들어가려고 줄을 섰을 것이다. 개성공단의 장애물은 딱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정치적 불안이다. 정부가 제 역할을 해서 문제해결 능력을 가지고 해소해 주면 즉 군사적 충돌 가능성만 없애주면 대한민국 중소기업들은 다 들어가고 싶어 한다. 작년에 개성공단이 중단 되었을 때 오히려 일반 국민들이 개성공단에 대한 존재감을 아는 계기가 되었다. 올해 9월 16일이 개성공단 재가동 1주년이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다. 정상화가 되면 개성공단은 역설적으로 불사조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매일매일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개성공단을 통해 한국형 통일 모델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 방안은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이다. 이것은 노태우 정부 때 만든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수정 보완해서 김영삼 정부 때 만든 방안이다. 그런데 통일은 통일 방안이 훌륭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실천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책상에서 종이 위에 만든 통일 방안은 민족 공동체 방안이고, 현장에서 돌아가는 실천 모델은 개성공단 모델이다.

 

 현재 개성공단에서는 매일매일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광화문에서 매일 개성공단 가는 통근 버스가 있는데 사람들은 잘 모른다. 개성공단을 시공한 현대아산과 관련해서 협력 업체 등이 계속 들락날락해야 하니까 일요일은 빼고, 매일 가는 통근 버스가 있다. 가회동 현대 본사 앞에서 광화문을 지나가니까 서울 한복판을 지나간다. 매일 아침 7시 반에 출발해서 10년 동안 통근 버스가 다녔다. 연평도에서 대한민국 영토에 포탄이 떨어졌는데, 그때도 다음 날 하루 멈췄다. 그리고 천안함 때도 하루인가 멈췄고 계속 갔다. 연평도나 천안함 때도 바로 하루 지나서 통근버스가 갔기 때문에 ‘아, 전쟁은 안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을 보면 마치 전쟁이 날 것 같이, 보복 응징을 할 것 같이 했지만 태평하게 아침에 버스로 출근하고 오후 5시 되면 퇴근하고 그랬다. 아무 때나 가는 것은 아니고, 하루에 22차례를 연다. 가령 9시, 9시 반, 10시, 10시 반, 11시 이렇게 30분 간격으로 입출경하는 시간이 있다.

 

세계에서 적대적인 나라가 국경선에 철조망 깔아놓고, 지뢰밭 설치한 지역을 아침 저녁으로 건너다니며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은 묘한 장면이다. 해가 떨어지면 철문이 닫히고, 다시 총을 거총하고 쳐다보고 있다. 해가 밝으면 철문을 열고 총을 내려놓고 이쪽에서는 차를 들여보내고, 저쪽에서는 받는다. 거기에서 남쪽 기업 관계자가 민주정부 때 많게는 2000명까지 숙식을 하며 지냈다.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있고, 들어갔다가 일주일 있다가 나오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매일매일 개성에서는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로 만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는데, 일하는 얘기도 물론 하지만 “애는 학교에 잘 다닙니까? 집안 살림은 어때요?” 등의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대화를 나누고 남쪽 사람은 북쪽 사람을 이해하고, 또 북쪽 사람은 남쪽 사람의 삶의 방식과 내용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 바로 통일이 아니겠는가? 
 
숫자를 보더라도 북쪽 인원은 5만 명이 넘고, 남쪽 인원은 많을 때는 2000명씩 가서 상주하기 때문에 그 접촉이 한 두 해가 지나고 10년이나 되니까 북한 전역에서 개성만큼 통일을 향해서 전진한 도시가 없다. 그러니까 개성을 늘려 가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다. 
 
중소기업과 청년세대의 유일한 돌파구이자 블루오션
 
현재 가동 중인 개성공단 크기는 원래 설계도의 64분의 1이다. 왜냐하면 2000만 평은 64평방킬로미터인데, 현재 가동 중인 123개 공장이 입주해 있는 면적은 30만 평, 1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개성공단은 당초 계획대로라면 2012년까지 총 2000만 평의 부지 가운데 800만 평은 공단 부지로 2000개의 공장이 들어서고, 나머지 1200만 평에는 아파트, 상가, 공원, 골프장 등 근린 시설을 만들어 총 50만 명의 인구가 생활하는 첨단 공업도시로 완성이 됐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해주, 남포, 원산, 신의주, 나진, 선봉, 함흥, 청진 등 해안선을 따라 경제 특구를 설치했었더라면, 북한은 지금쯤 중국과 베트남을 뒤쫓아 가고 있었을 것이다.

 

개성공단 도시가 인구 50만 명 단위로 들어서게 되면 적어도 생산총액이 1년에 500억 불 이상 되리라고 본다. 한국은행 추계로는 현재 북한 GDP가 300억 불이라고 한다. 그러면 1인당 국민소득이 1200불이 넘는다는 얘기인데, 기초적인 식량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북한이 베트남보다 잘산다고 하는 격이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1년 GDP를 100억불 수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개성공단을 완공해서 연간 생산품의 가치가 500억 불 이상 규모가 되면 그건 실질적으로 북한 경제의 5배에 해당한다.

 

또한 개성공단은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유일한 활로이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중국도 가 보고, 동남아도 가 보았는데 활로가 안 생겼다. 현재 중소기업들은 수직 계열화, 재벌들의 하청 구조화되어 있다. 현재 중소기업에는 4가지가 없다. 돈이 없고, 사람이 없고, 판로도 없고, 기술이 없다. 신용이 약하니까 금융 쓰기도 어렵다. 자기 돈도 없지만, 신용을 쓰기도 어렵고, 땅값도 비싸고, 중소기업에 인재가 안 온다.

 

그런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인 해법을 찾기가 힘들고, 중소기업 정책을 어떻게 해도 즉효가 나기 어려운데, 개성공단에 123개 공장을 두었더니 팔팔하게 살아난다. 123개 공장이 모두 흑자인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123개가 아니라 1200개, 아니 12,000개를 갖다 놔도 다 흑자가 날 수 있는 구조다.

 

따라서 이 중소기업의 활로를 한 차원만 더 키우면 된다. 지금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3% 대로 주저앉았다. 이명박 정부가 5년간 기를 쓰고 성장률을 끌어올리려고 4대강도 파헤치고 안간힘을 썼지만 5년 평균이 2.9%밖에 안됐다. 앞으로 갈수록 잠재성장력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 졸업하고 취직한다고 할 때쯤이면 우리의 경제성장이 멈춰선다는 전망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데, 마땅한 돌파구가 없다.

 

이유는 첫째 자본을 더 투입할 수 없는 환경, 둘째 노동인구 감소 때문이다. 저출산으로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다. 해법은 정년을 없애거나 올려서 노인 노동력, 여성 경제 활동 인구를 늘리는 수밖에 없는데, 이것도 금방 쑥쑥 늘리는 데 어려움이 있다.


셋째는 생산성 정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 혁신의 문제도 우리의 교육 시스템으로는 한계에 부딪혔다. 노벨 과학상이 안 나온다. 한 문제 안 틀리려고 달달 외우는 반복 주입식 수능 교육이나 입시 교육을 해서 무슨 획기적인 상상력과 창의력이 나오겠는가.
 
결국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블루오션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개성공단을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 그게 밥이고 일자리고 꿈이 될 것이다. 
 
남북 소통의 차단벽 ‘5·24 조치’ 해제해야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8년 5.24조치를 통해 남북교류를 중단시켰다. 2004년 12월에 첫 가동을 하고, 2006년도에 만 명을 넘어서고, 2007년까지 커지다가 2008년 정권이 바뀌면서 개성공단 계획이 갑자기 얼어붙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하여 2010년 5월 24일 대북조치를 발표하면서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투자를 금지하고, 공단체류 인원을 평소의 50~60% 수준으로 축소했는데 그 기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개성공단 입주 기업은 기존 주문 생산 계약이 취소되거나 축소되거나, 납품 지연 등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속 개성공단에 노동자 공급을 늘렸다.

 

사실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5·24 조치는 강도는 셌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한미가 공동으로 압박한 군사적 압력은 오히려 중국을 자극해 중국의 대북 접근을 높이는 역효과를 냈다. 북한과 중국은 두 차례 정상 회담을 가졌고, 창지투(장춘-길림-도문) 개발 계획에 따른 북-중 간 경제 협력이 긴밀해지는 효과를 낳았다. 북한과 중국은 1330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국경선을 마주 대고 있어서 중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대북 압박과 봉쇄는 실효성을 가질 수가 없는데, 이것이 여러차례 입증되었다.
 
개성공단의 장래는 박근혜-김정은 정상 회담이 언제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전반기인 2015년 말 이전에 성사되면, 개성공단은 이 정부 하에서 상당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정상 회담이 박근혜 정권 후반기로 넘어가면 개성공단은 1단계를 못 벗어난다. 
 
대통령 특사로 평양에 가다
 
노무현 정권 전반부 2년 반 동안 남북 관계가 경색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2005년 6·15 5주년을 기해 내가 평양에 특사로 가서 김정일 위원장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남북 관계가 풀리게 된다.

 

2004년 의욕을 갖고 통일부 장관으로 갔는데 처음부터 시련에 부딪쳤다. 북이 온갖 욕을 해대도 참고 인내하면서 해빙기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물론 그 사이 개성공단을 문 여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기회가 찾아왔다. 2005년 6월 14일 6·15 5주년에 6·15 남측위원회, 북측위원회, 해외위원회 3자가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하기로 했는데, 내가 정부 대표로 참석하게 됐다. 당시 정부 내에서 반대도 있었다. 민간이 주도하는 행사에 정부가 곁다리로 가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점에서 실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남북 관계가 어려운데 민간이 공동 행사를 만들고, 정부 대표가 함께 가서 축하하고 기념함으로써 남북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통일부 장관이 민간 행사에 간다고 해서 남쪽 정부의 자존심을 훼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는 것이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있고, 막혀 있는 상황에서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 해결이 중요하고, 형식은 그 다음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평양에 갔는데, 그걸 계기로 해서 제2의 6·15 시대가 개막된다. 기념행사 기간 중에 김정일 위원장과 5시간 동안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5년에서 가장 중요한 남북의 소통은 2005년 6월 17일 대통령 특사로서 나와 김정일 위원장이 다섯 시간 만난 것이다. 두 시간 반은 배석자가 한 명씩 있었지만 사실상 일대일로 대화한 것이고, 오찬 회동을 하면서 두 시간 반까지 합하면 전부 다섯 시간을 얘기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현안을 다 얘기했다. 충분히 소통을 한 것이다. 북한의 모든 의사 결정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그 한 사람과 남북한 간에 맺혀 있는 거의 모든 사안들을 솔직하게 얘기했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이른바 제2의 6·15 시대다. 그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2005년 9월 19일 베이징 공동성명이었고, 그걸 통해 ‘핵을 포기하겠다, 북미 수교하자, 한반도 평화 체제를 논의하자’는 보따리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만남에서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가 김 위원장에게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는 문제였다. 2000년 6·15 공동선언 마지막 항에 ‘김정일 위원장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그때까지 5년 동안 서울 답방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했다.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으로 보아 서울 답방은 조속한 시일 내에 이루어지기 힘들 것으로 보이니 남측은 이를 고집하지 않겠다. 장소는 위원장께서 알아서 결정하시고, 다만 시기 문제는 6자 회담이 재개된 때로부터 멀지 않은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하다면 9월 이내에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즉답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헤어질 때 귀엣말로 “좋은 소식을 내려 보내겠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과 내가 서서 대화 할 때 귀엣말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갔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도대체 무슨 얘길 나눴느냐고 물었다.
 
그때 김 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작정을 하고 내게 귀엣말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05년 8·15에 서울에 파견한 임동옥 통전부장을 통해서 답을 보내왔다. “정상회담 장소를 제3국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도시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3국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나 이르쿠츠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건 안 된다고 했다. 개성이든 금강산이든 백두산이든 평양이든 어디라도 좋으나 반드시 한반도 내여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과거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이르쿠츠크 정상회담 제안을 북이 했던 적이 있었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유발할 수도 있고 남북이 만나는데 강대국이 후견인 노릇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기 문제는 평양에서 제안한 대로 내가 9월 개최를 강조했다. 당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이 막 베이징에서 재개돼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이를 추동할 힘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북한이 시기 문제는 6자 회담이 진행되는 추이를 보고 잡자며 꼬리를 뺐다. 미국이 진정으로 적대시 정책을 포기할 의사 있는지 확인해보고 결정하려는 속내였던 것 같다. 그 점이 못내 아쉽다. 그때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더라면 한반도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지나치게 미국을 두려워한다.

 

사실 2000년도에도 한반도 정세가 급물살을 탔을 때 북이 결정적으로 실기를 했다. 2000년 5월에 북-중 정상회담, 6월에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7월에 북-러 정상회담. 여기까진 빠르게 왔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인 미국과의 소통이 지체된다. 바로 8월 늦어도 9월에는 북-미 대화와 정상회담 추진으로 갔으면 한반도 냉전 해체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을 텐데, 역사의 신이 아직 한민족에게 연단의 시간을 더 주고 계신 것 아닌가 싶다.

 

물론 그 뒤에도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진행되긴 했다. 2000년 10월에 북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군복 차림으로 백악관에 가서 클린턴 대통령이랑 대화하고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하게 된다. 조명록 차수의 백악관 군복 연출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미국 관리들 가운데 당황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군복 연출은 김정일 뒤에 있는 북한의 당.군 일체성을 과시한 것이었다. 조명록 차수가 클린턴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하고, 바로 열흘 뒤 올브라이트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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