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만남'을 기다리며 <기획> 7.4공동성명 42주년, '분단시대의 천형 이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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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7-04 11:53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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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만남'을 기다리며
<기획> 7.4공동성명 42주년, '분단시대의 천형 이산' (2)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100일도 안된 딸을 두고 '쌍무기수'가 된 비운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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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녘 가족과 헤어진 채 홀로 살아가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의 인천 동암동 자택을 지난달 28일 방문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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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년을 헤어졌다 극적으로 상봉하는 이산가족들의 심경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2박 3일간의 이산가족 상봉행사 마지막날 ‘작별상봉’을 갖는 남북의 가족은 물론, 이를 지켜보는 안내원이나 기자들까지 목석이 아닌 바에야 눈물 한줄기를 보태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늘 이산가족 상봉행사 기사의 제목은 ‘눈물범벅이 된 상봉장’이고 ‘눈물의 바다에 잠긴 금강산’이 될 수 밖에 없다.
숱한 이산가족 만큼이나 숱한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국전쟁으로 휴전선이 가로막혀 오가지 못하는 이산가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끝난 지 6년이나 지난 1959년, 100일도 안 된 딸을 남겨둔 채 남파됐다 34년 옥고를 치른 뒤 꿈에도 그리던 딸을 눈 앞에 보고서도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던 비운의 장기수도 있다.
주말인 28일 오후, 인천 동암역으로 기자를 마중나온 2차 송환대상 비전향장기수 박종린(82세) 선생은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이랄 수 있지만 숨이 가뿐 기색이 역력하다. 최근에는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르고 어지러워 서울에서 열리는 행사나 집회에도 자주 참석하지 못한다는 선생은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더 착잡한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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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송환대상 비전향장기수란? 역사적인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된 6.15공동선언 제 3항은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기로 명기돼 있다. 남북 정상의 합의에 따라 45년간의 수감생활로 세계 최장기수로 기록된 김선명 선생을 비롯한 63명의 비전향장기수는 그해 9월 2일 ‘신념의 고향’인 북으로 송환됐다. 민가협은 통상 7년 이상 구금된 이들을 장기수로 분류하고 있지만 송환된 63명의 수감기간은 모두 합쳐 2,045년, 평균 32.5년이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강제전향 공작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향장기수로 분류된 이들은 송환대상에서 빠졌고, 1차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 비전향장기수와 강제전향자 33명은 2001년 2월 6일 ‘장기구금양심수 전향 무효선언’을 발표하고 2차 송환을 공식 요구했다. 2005년 6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한 후 2차 송환을 적극 추진하는 등 몇 차례 성사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결국 2차 송환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정권은 보수세력에게 넘어갔다. 현재는 고령의 2차 송환 대상자들이 중 상당수가 사망해 27명이 남아있으며, 2005년 10월 정순택 선생의 유해가 북측에 처음으로 인계되기도 했다. |
박 선생은 “57년 결혼하고 딸이 태어난 지 100일이 안 돼서 59년에 내가 나왔다”며 “내려올 때는 장기임무가 아니고 3개월 동안 있다가 올라가기로 했는데 그게 제대로 안 돼서 6개월이 되고, 또 올라가면 되는데 또 연기하는 바람에 사고가 난 거다”고 회고했다. 60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현지’에서 직접 지켜보고 올라가려다 사고가 나 체포됐다는 것이다.
무려 34년의 기나긴 감옥생활, 더구나 북녘 소식을 듣기 위해 단파라디오를 감방으로 반입해 보관하고 있다가 적발돼 다시 무기징역형이 추가돼 이른바 ‘쌍무기수’로 보내야 했던 고난의 길은 1993년 병보석으로 출소해 마감됐지만 피붙이 하나 없는 무연고의 남녘땅은 막막하기만 했다.
“아버지 소리는 못 들어도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애들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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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린 선생은 지난 겨울 자신이 태어난 중국 훈춘을 방문해 조카네 가족과 만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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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교 매점에서 일할 당시에 맺은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는 아이들이 박종린 선생의 칠순잔치를 마련해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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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독교 목사와의 인연으로 전남 무안의 중고교 매점에서 일하게 된 그는 ‘통일 할아버지’로 불리며 손주같은 아이들을 만났고, 이 아이들이 모임을 만들어 칠순 잔치를 치러주고 팔순 잔치에도 참가했다. 또한, 13살 때부터 함께 살며 손자처럼 키워온 아이가 어느덧 자라나 결혼까지 했다. 선생은 “아버지 소리는 못 들어도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애들은 많다”고 환한 표정을 보였다.
지금은 인천에 거주하며 범민련 경인연합 고문으로 활동해 주변의 존경을 받고 있고, 선생의 고향인 중국 훈춘에서 한국으로 온 조카 내외가 자주 찾아뵙는 등 적적하지만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 선생은 “보이지 않는 식구가 많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정작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선생의 눈길이 허허로워진다. 2000년 9월, 63명의 1차 비전향장기수 송환 당시 ‘비전향’으로 분류되지 않아 기회를 놓친 뒤 2차 송환 대상자로 이름은 올려놓고 있지만 보수정권 하에서 하세월인 셈이다.
선생은 뜻밖에 “딸은 멀리서 한 번 봤다”고 말했다. 2007년 6.15공동행사 남측 대표단으로 딸이 있는 평양을 찾은 것. 그러나 “다 만나게 해준다고 그랬는데, 박계동 한나라당 의원의 주석단 문제로 분위기가 안 좋다고 해, 책잡히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겠다고 그랬다”고...
미완의 만남과 마지막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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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6월, 6.15공동행사 남측 대표단으로 평양을 찾은 박종린 선생. [사진제공 - 박종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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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사진- 손주들과 함께 한 부인 로인숙. 이미 작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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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에서도 이를 안타깝게 여겼는지 선생도 모르게 회의장 복도에 딸 가족들을 데려왔고, “회의 중간에 복도에 와서 문이 다 열려있는데 딸애랑 외손자, 외손녀가 계속 들여다보는 거다. 나는 누군지 모르고 본 거다. 나는 이상하다고, 왜 나한테만 시선이 집중이 되는지...”
회의가 끝나고 “암만 생각해도 머리에 잡히는 게 있어서” 복도로 뛰어 나가 봤지만 딸 가족들은 이미 자리를 떴고 북측 안내원은 “사전에 이야기하면 혹시 회의 도중이라도 나간다든가 하면 혼란이 야기될까 말 안해 미안하게 됐다”며 딸 가족이 맞다고 확인해줬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데 다시 한 번 딸 가족이 멀찍이 떨어져 승용차 안에서 선생을 배웅했고, 선생은 뛰어가다가 제지당해야 했다. “헤어질 적에는 100일도 안 됐던 딸앤데 50이 넘어 그렇게 한 번 봤어...”
딸에게 한말씀 전하라는 기자의 성화에 선생은 “잘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까 안심한다”며 “생후 100일도 되지 않았을 적에 헤어진 딸이 이제 쉰여섯이 됐으니까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다”고 어렵게 입을 뗐다.
선생은 “딸하고 한번 만나서 살다가 죽었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지만 현재 정세로 봐서 꼭 그렇게 되리라고 믿지는 않는다”며 “내가 지금 힘은 없지만 통일에 일부분이라도 기여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그런 심정을 딸애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앞으로 젊은이들이 통일운동에 기여하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 여생을 끈기있게 잘 살아갈 것”이라며 “남북이 쌍방 간에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의 창구로 나오리라 자신있게 생각하고 있다”고 낙관적 전망을 덧붙였다.
한국전쟁 시기는 물론, 그 이후에도 이러 저러한 이유로 가족과 헤어져 분단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남과 북의 모든 이산가족에게 희망의 소식이 들릴 날은 언제일지 아직은 기약할 수 없지만 “지금 같은 상태가 계속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선생의 굳은 믿음이 적중하길 바라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출처: 통일뉴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07-04 12:01:12 새 소식에서 복사 됨]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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