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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조국방문기 4] 가 족 상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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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2-01 05:4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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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방문기 4]

 

가 족 상 봉

 

백승배 목사(재미동포)

 

 

10월 8일 목요일 드디어 가족상봉이란다. 생각보다 빨리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호남면 석천리다.

종전에는 3.8선 이남 옹진 반도보다도 훨씬 남쪽,

연백평야의 최서쪽 해변에 있는 작은 마을 소사

마을 집 다 합쳐봐야 30여 채 되었을까?

 

아버지는 마을의 책임자인 구장이었다.

아버지는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평범하고 부지런한 농군,

한 가지 기술이 있다면 바시, -화살촉처럼 끝이 날카로운 쇠로 만든

소침 -으로 소의 간단한 병을 고칠 수 있는 분,

면허증 없은 우의라 할까.

 

우리 집 앞에는 방앗간이 있었는데 전쟁 발발 전에는

그곳에서 “아이구구” 외마디 소리 외치는 소리가 나고

이웃 집 할머니가 와서 우리 아들 살려달라 애원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러나 마음 약한 우리 아버지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전쟁이 나자 우리,-아버지, 어머니, 둘째 누님, 동생 남예, 젖먹이 분례, 사촌형 승범, 그리고 나 승배- 는 빌린 배에 몸을 싣고, 고향을 떠났다. 우리 집 전속 무당, 할머니와 함께. 그 때 내 나이 아홉 살을 사 개월 앞둔 8살. 동생 남예가 다섯 살 (?), 그러나 두 세 살이던 남자 -지금 북에선 남숙이라 부른다. 일제의 잔재 이름이었던 이름 대신 남숙으로 변명한 것이다- 남숙은 할머니 할아버지 위로로 남겨진 것이다. 또한 어머니가 외지에서 어린 애 둘을 돌보기는 힘들다는 배려였을 것이다. 배에 묶여 있다가 풀려 우리는 시도에 짐을 풀었다. 그곳에서 나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헛소리도 하며 몸살을 앓았다. 내가 그 애 이름을 부르며 앓았을 때, 어머니는 심장이 터지듯 아프시고 조바심하셨을 것이다. 외아들인 나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과 두고온 두 세 살의 딸, 남자를 생각하며.

 

인천 상륙작전 후 국군이 북으로 북으로 전진할 때 우리는 고향 가까이로 간다고 보름도를 거쳐 교동도에 머물렀다. 먹거리가 문제였던 시절이다. 고향에 가면 먹을 것이 있는데. 고향이 바다를 건너면 갈 수 있는 바로 지척, 전시 중이라 별로 어렵지 않게 드나들 수 있던 시절, 어머니와, 나, 사촌 승범형과 동생 남예는 밤 중에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누님은 교동도에 남고... 고향에는 먹을 것 풍족했으나 친구들이 내게 말했다. “야, 승배야, 내가 들었는데, 너희 식구들을 몰살시킨다더라.” 그 친구에게 나는 말했다. “죽으면 같이 죽지 뭐.” 당시 어른들에게 많이 듣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날 어머니는 당원인 책임자를 불러 식사를 잘 대접했다. 아마 잘 보아 달라는 뜻이었을 께다. 우리 가족은 무사했다. 예긴 즉 아버지나 어머니가 동리에서 인심을 잃지 않은 때문이라고 했고 그 당원도 한 때 우리 집 신세를 진 분이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버님께서 다시 바다를 건너 오셨다. 아마도 휴전을 앞두고 만약 휴전이 되면 영영 아들을 잃겠다고 생각하여 들어오신 것이다. 아마 1952년 말경 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지석리로 넘어가는 언덕 길가에 초막 집를 짓고 우리는 이사했고 아저닌 손수레를 사 짐을 날라주며 열심히 일하셔서 2000평 정도 되는 논을 사 농사를 지으셨다. 나는 지석리의 교실이 하나밖에 없는 학교에 임시로 다니다 휴전이 되어 대룡리에 있는 본토 교동 초등학교에 5학년 2학기 학생으로 입학 할 수 있었다. 십리 길을 걸어 학교에 가야했고 3, 4 학년을 배우지 못한 관계로 못다 한 것을 채우려 열심히 공부하였다. 호롱불 밑에서 헛소리를 해가며 코피를 흘리며 공부해야 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한 공이 있어 교육감상을 받게 되었고 우리 학년의 유일한 인천중학교 입학생이 되었고 졸업생 대표로 졸업생 답사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서슴없이 땅을 팔고 우리는 인천으로 이사하였다. 누님과 셋이 살던 중 중학교 3학년 때 누님이 결혼 아버지와 둘이 살던 중, 고 3때 우마차 사고로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미국에 왔고 드류신학교를 마치고 장모님이 홀로 계신 로스엔젤레스로 와서 개척교회를 하던 중, 81년 1월 북에 있는 누님의 편지를 받았고, 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 참관단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되어 수차례 북의 가족을 만나는 행운을 갖게 된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은 이산가족들이 고향의 부모님, 형제, 자매들을 그리며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였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에서 혹은 남에서 잃어버린 고향과 형제자매들을 그리며 애가를 불렀는가!

 

▲지난 10월 금강산에 있었던 남북이산가족 상봉 

 

관련기사

► [조국방문기 3] 10월7일, 드디어 북녘평양이다.

► [조국방문기 2] 동강난 우리 조국, 분단

► [조국방문기 1] 나는 북녘의 활기찬 모습, 희망찬 전진을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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