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 | <가짜진보비판> 1. 유시민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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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1-05 01:2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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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진보비판> 1. 유시민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궤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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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기 우리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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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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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못난이”, “키 큰 난쟁이” 이런 표현들은 형용모순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형용모순은 문학적 표현기법으로는 통하겠지만 대중에게 정치사상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사상이론을 설파하는 사회과학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형용모순이 무분별하게 유포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이며 그 대표적 논객은 유시민이다. 유시민은 2010년 국민참여당 시절부터 정체가 불분명한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그가 표방한 ‘진보적 자유주의’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물론 당시 진보진영은 국민참여당 당원들의 진보적 열성을 중시하며 유시민과 정치의 길을 함께 걷고자 통합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유시민은 활짝 열린 진보의 길에 뛰어들지 못하고 자유주의란 욕망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유시민은 통합진보당에 참여하였으면서도 ‘개인의 자유’로 포장한 파벌싸움을 벌였으며 통합진보당 분당사태를 주도해 진보진영을 풍비박산 내었다. 결국 유시민은 2013년에는 정계를 은퇴하고 스스로를 ‘근본적 자유주의자’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유시민이 스스로 고백하였듯,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근본적 자유주의자는 있을지언정 ‘진보적 자유주의’는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유시민의 정치행로는 결국 진보와 자유주의의 갈림길에서 자유주의의 늪에 빠지고 만 퇴행이다.
자유주의는 오늘날 한국사회를 대변할 수 없는, 낡은 시대의 제한적인 사조이다. 초로의 고개를 넘은 중년신사들이 청춘시절에 외쳤던 자유주의가 21세기의 진보로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진보적 보수주의’가 명백한 모순이듯, ‘진보적 자유주의’도 21세기의 한국사회에서는 전혀 통할 수 없는 모순이다.
1. 유시민의 ‘진보적 자유주의’란
유시민은 단행본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은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정의를 소망한다며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유시민은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한민국 헌법이 표방한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 6가지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지며 어떠한 우열관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유시민은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진보정치는 열정을 요구하지만 ‘광신주의’를 배격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진보정치는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에 튼튼하게 닻을 내린 도덕적 이상과 인류에 대한 자비심,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과 겸허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요청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시민의 분석은 잘못되었다.
유시민은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의 6가지 가치에 어떠한 우열관계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유시민의 바램과 달리 국가는 정책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하고 관련예산을 배정해야 한다. 결국 유시민은 정책과 관련예산이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조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유시민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의 가치는 현실정치에서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합의’ 즉 ‘자유’를 대전제로 삼게 되어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합의'는 정책적 목표의 고유한 가치를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유시민은 ‘자유로운 합의’의 기준조차 각자에게 자유롭게, 주관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자유로운 합의’의 바탕으로 도덕적 이상, 인류에 대한 자비심, 관용과 겸손의 자세를 제시하였지만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에 튼튼하게 닻을 내린 도덕적 이상’은 그 기준이 무엇인지 전혀 명확하지 않다. ‘인류에 대한 자비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년 전 프랑스 혁명의 박애사상에서 따온 듯한 ‘자비심’은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강조한 것인지 우리민족 전통적으로 내려온 대승불교의 교리를 설교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유시민은 모든 가치판단의 대전제로 ‘자유로운 합의’를 중시했는데, ‘자유로운 합의’의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이것이 유시민의 진보적 자유주의의 함정이다. 결국 유시민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유로운 합의’ 해석에 의해 어떤 정치적 합의가 자기 마음에 들면 그 합의는 ‘자유로운 합의’였다고 환영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합의가 있으면 ‘자유로운 합의’가 아니었다며 반발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가 독재체제로 단순하고 획일화되었던 1970년대에는 유시민이 주장한 애매한 ‘자유로운 합의’로서도 제한적이나마 대중의 뜻을 모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배세력이 자유주의를 앞장서서 수용해 복잡하게 분화된 21세기의 한국사회에서는 주관적인 ‘자유로운 합의’로는 복잡한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모아나갈 수 없으며 끝없는 분쟁만 이어질 뿐이다. 결국 국민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도 없다.
바로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 유시민의 정치행로가 분쟁의 역사, 패배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문제가 많은 ‘자유주의’가 어찌하여 진보의 모자를 쓰고 진보진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인가? 자유주의의 역사와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자.
2. 자유주의의 역사
1) 자유주의의 기원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한다는 이념이다. 자유주의는 보편적 인권을 중시하며 개인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이성적 합의를 추구한다.
자유주의는 중세봉건제도에 대한 반발에서 태동하였다. 천주교나 불교 또는 이슬람식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였던 중세봉건제도는 이른바 종교의 시대였다. 다음 생의 안락을 위해 지금 생을 바치라는 종교적 인생관은 중세봉건제도에 신음하는 농노들, 즉 소작농들에게 주입, 유포되어 봉건제를 지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중세봉건제도는 종교의 시대이자 관념의 시대, 믿음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대중의 창조적 노동의 결과로 사회적 생산이 조금씩 증대되기 시작하면서 중세사회에는 일대변혁이 일어났다. 중국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으로 아시아대륙의 교역을 촉진하였으며 유럽국가는 선단을 묶어 교역을 촉진하였다. 유럽의 상인들은 아시아, 아프리카와의 교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생활의 변화는 사상의 변화를 낳았다. 인간은 동서양을 떠나 종교의 문제에서 인간의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서양에서는 르네상스가, 동양에서는 실학사상이 꽃피우기 시작하였다.
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시기에 출현하였다. 당시 해외 교역과 수공업적 생산으로 초기자본을 축적하던 상인들은 왕권이나 나아가 신권보다도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자유주의에 매료되었다. 자유주의는 그 태생부터 ‘개인의 자유로운 상품선택’을 대전제로 삼는 시장주의자, 자본가계급의 사상으로 기능하였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주창하며 도시상공인들과 지식인들 사이로 계속 퍼져나갔다. 영국의 존 로크는 최소한의 안전보장을 위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국가가 발생하였다며 자유주의 정치체제를 구상하였다.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 볼테르와 루소 등에게 영향을 미쳐 18세기에 일어났던 부르조아 혁명,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 등의 기본사상을 구축하였다.
초기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이론활동을 사회계급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보면, 이들은 자유주의가 전사회적으로 실현되려면 봉건귀족계급들이 점유하고 있는 국가권력을 신흥 자본가계급이 접수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자본가계급에게는 봉건체제에 맞설 독자적인 힘이 없었다.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중세의 사상흐름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광범위한 농민계급에게 눈을 돌렸다. 결국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의 모자를 쓰고 농민계급에게 접근하였다.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광범위한 농민계급을 귀족의 편에서 자본가계급의 편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기존의 자유에 평등과 박애의 개념을 삽입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에서 제시되었던 자유와 평등, 박애의 정신이 탄생하였다. 당시 농민들은 피압박 대중의 온전한 사상이 출현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 자유와 더불어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함께 설교한 자유주의에 이끌려 봉건체제를 뒤엎는 혁명에 나서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1789)을 주도하였으며 나폴레옹의 시대에 전 유럽대륙에 확산되었다. 봉건제도를 고수한 빈체제(1814)는 10년도 못 가서 유럽 각지에서 격파당하였으며 유럽대륙은 정치의 영역에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였다. 자유, 평등, 박애의 자유주의 사상은 광범위한 농민을 끌어들여 왕정을 붕괴시키고 공화정으로 이끌며 1800년대 정치를 주도하였다.
자유주의는 경제제도에도 전면적으로 도입되어 초기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낳았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며 시장경제를 논증하였는데 개인의 자유로운 교역을 전제한 ‘시장’은 자유를 사상적 토대로 한다. 결국 자유주의는 인간의 창조적 노동으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교환방식에 적용되어 ‘시장’을 형성하였다. 때마침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생산물의 폭발을 이끌었으며 자유주의에 기초한 ‘시장경제’는 생산의 폭발 덕분에 전면적으로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세계의 전반적 경제제도를 좌우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은 부르조아 혁명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지난날 농민을 비롯한 광범위한 대중을 쟁취하기 위해 동원하였던 평등과 박애정신을 슬그머니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자유주의는 자본가계급의 사상일 뿐 광범위한 농민들,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 될 수 없었다. 오늘날 시장주의자들의 논리의 어느 구석에 평등과 박애정신이 있는가.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자유란 자본가가 돈을 벌 수 있는 자유이며 자본가가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자유, 자본가가 국가의 재부를 이용할 수 있는 자유일 뿐이다. 자유주의가 유포될수록 역설적으로 지난날의 농민, 오늘날의 노동자의 삶은 고난을 면치 못하였다.
자유주의는 사회문화영역에서도 인류사회에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 자유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천부적 인권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자유주의가 설교한 평등과 박애사상은 제3세계에서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이끌어, 일정한 진보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2) 제국주의 시대의 자유주의
봉건체제의 억압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자유주의는 신의 권한을 인간의 영역으로 전환시키기는 하였지만 신의 권한을 인간으로 온전히 분배하는 단계에서는 여지없이 실패하였다.
자유주의가 언급한 ‘개인의 자유’는 자본주의를 낳았지만 동전의 양면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안고 있었다. 인간의 운명문제를 신을 내세운 봉건귀족에서 자본가, 시민, 농민들로 가져오는 부르조아혁명 시기에는 자유와 더불어 계몽주의적인 평등과 박애정신이 포함되어 있어서 개인주의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인간의 운명문제를 자본가, 시민, 농민들의 손으로 해결하게 된 19세기가 되자 모든 상황은 역전되었다.
자유주의는 시장경제를 통해 초기자본주의 시대를 열었지만, 초기자본주의경제에서 등장한 자본가계급의 탐욕을 전혀 통제하지 않았다. 자유주의는 철저히 자본가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자본가계급의 사상이었다. 자유주의는 근로하는 대중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사상이 될 수 없었다.
자본가들은 국가권력을 쥐자 정계로 진출해 자본주의적 정권을 구성하였고 이후 자본주의 독점시장의 확대를 위해 경쟁적인 해외 식민지 수탈에 나섰다. 신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자유주의는 어느덧 ‘자유’의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착취를 제도화하였다. 개인의 자유란 이름으로 개인주의를 장려하는 자유주의는 자본가의 탐욕도 역시나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제국주의’를 낳았다.
자본가계급, 이제 제국주의자들은 자기나라 내에서는 평등과 박애정신을 슬그머니 내려놓았지만, 해외식민지 민중들 앞에서는 평등과 박애정신을 쓰레기통에 구겨넣어 버렸다. 미국의 독립선언에는 천부적 인권이 강조되어 있지만 그런 미국에서 이후 100여년간 흑인노예가 매매되었으며 미국의 인종차별은 지금까지 극심하다. 이것은 미국 독립선언의 천부적 인권도 결국 백인남성들에 국한된 것으로서 미국인들이 백인남성을 제외한 존재들, 특히 유색인종의 인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지하자원을 자기들 마음대로 강탈하고 조선의 쌀을 자기들 마음대로 빼앗았으며 조선청년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징용으로 끌고 갔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치떨리는 학살만행에서 평등과 박애사상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를 지나 오늘에 이르면서, 자유주의는 유감스럽게도 서구제국주의의 이념으로, 서구독점자본의 이념으로, 양키문화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미국은 자유주의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았으며,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국가였다. 식민지를 개척하던 영국인들은 자유주의 사상에 의거해 미국 독립의 명분을 얻었다. 미국은 누구보다도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20세기 초에 강력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류역사에 등장하였다. 자유주의는 진보인가? 천만에. 자유주의는 보수다.
3. 한국에서 자유주의
1) 자유주의의 유입배경
구한말까지 지속된 조선왕정이 일제의 식민지 강점으로 이어졌던 우리민족은 개인의 천부적 인권을 보장받아본 적이 없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의 인권은커녕 수많은 양민들을 무리로 학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를 청산하였지만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기나긴 군부독재정치를 경험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한국경제의 봉건적 잔재는 해방 후에도 여전하였다. 땅을 가진 지주와 땅을 부쳐먹는 소작농의 착취관계는 1970년대 사회까지 주된 사회경제적 관계였으며 오늘날의 농촌사회에도 아직까지 남아있다. 한국의 사회문화적 영역에서는 인간의 사상을 통제하려는 대표적인 인권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지금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다. 1980년대까지 한국사회에는 군대와 학교 전반에 폭력이 난무하였다.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지 않는 폭력적 사회는 국민들로 하여금 천부적 인권을 갈망하게 하였다.
1970년대 한국사회의 이러한 실태에서, 당시 한국청년들은 자유주의 사상에 환호하였다. 서구의 경찰은 시민을 고문하지 않는다는 소문만으로 청년들은 자유주의를 동경하였다. 자유주의는 때로 민주주의와 혼용되면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상적 근거로 70년대 젊은이들의 머리와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자유주의에 심취한 청년들은 1970년대 “유신반대” 투쟁을 주도하였으며 1980년 서울의 봄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서 싸웠다. 독재를 반대하는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는 ‘개인의 자유’냐 ‘민주적 공동체의 자유’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어깨 겯고 단결하며 군부독재 종식의 그날을 꿈꾸며 함께 싸웠고 함께 피를 흘렸다.
1987년 6월 항쟁은 군부독재정권이 이른바 ‘절차상의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를 수용한 계기였다. 독재정권이 통치하던 대한민국의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오늘날의 87년 헌법으로 바뀌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어 1987년 이후로 한국사회에 한미동맹과 재벌의 장기집권은 있지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치에서의 자유주의 도입은 경제에서의 자유주의 도입과 사회문화적 측면에서의 자유주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1994년 쌀 시장 개방을 신호탄으로 해서 1997년 IMF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경제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질서가 전면화된 완전개방경제로 전환되었다. 1992년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필두로 대중문화에서도 천편일률적인 트로트 노래를 타파하고 다양한 사조와 색채의 자유주의적 문화가 홍수처럼 유입되었다.
이른바 1987년을 지나며 시작된 자유주의의 도입 바람은 1997년에 이르러 한국사회의 전반에 확고히 굳어졌다. 자유주의는 1970년대에는 유신을 반대하는 혁신계 청년들의 사상논조였지만 1997년 이후에는 청와대의 입장이고 경총의 입장이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층이 차례로 자유주의를 흡수하면서 자유주의에 기초해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청춘을 바쳤던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사상적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2) 자유주의의 갈림길
그것은 종래의 자유주의가 속삭였던 ‘개인의 자유’에서 발전하는 사회에 맞게 민중의 정치적 진출을 더욱 적극화하는 ‘민주적 공동체의 자유’로 승화될 것인가, 아니면 종래의 ‘개인의 자유’에 머물 것인가의 갈림길이었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의 청년들은 지난 20여년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대한 총체적 분석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에 머물 것을 요구했던 자유주의와 결별하고 ‘민주적 공동체의 자유’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대학생들은 전대협, 한총련 등의 학생운동 조직을 구축하고 한국사회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이념들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까지 자유주의에 의거한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모색하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80년대 학생들과 함께 진보적 운동에 눈을 떠 오늘날 진보진영의 한 세대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개인의 자유’를 고수하며 자유주의에 남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차례로 집권세력의 정치행보에 흡수되었다. 87년 6월 항쟁에 유명세를 탔던 김영삼은 3당 합당으로 ‘신군부’의 품에 안겨 청와대에 들어가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야기하고 말았다. 1970년대 반독재 투쟁에 열심이었던 손학규는 1993년에 노태우의 민자당에 입당하였다.
‘타는 목마름으로’로 유명한 김지하는 1991년 명지대 강경대 열사의 사망정국에서 “죽음의 굿판을 치워라”라며 학생들을 비난하였고 2009년에는 촛불집회를 반대하고 2012년에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대로까지 이르렀다. 새누리당의 김문수, 이재오가 소련의 붕괴를 보고 사상적으로 변절한 경우라면 김지하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쫒아오지 못하고 자유주의에 정체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명박도 50년전에는 1963년 한일회담 반대에 참여했던 인물이지만 기득권에 몸과 영혼을 팔고 현대건설 사장에서 대통령으로까지 벼락출세하였다.
3) 이젠 보수가 된 자유주의
이제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민중을 추동하는 진보적 사상이 아니라 집권세력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보수적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다.
보수진영 가운데 자유주의를 전면화한 이들은 바로 뉴라이트 세력들이다. 2004년 11월에 뉴라이트 운동을 발기한 신지호가 처음으로 결성한 조직의 이름이 바로 “자유주의연대”이다. 조전혁은 “자유주의 교육운동연합”으로 뉴라이트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2007년 이명박 정권의 집권에 대중적 영향력을 끼치고자 활동하였으며 신지호와 조전혁은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뉴라이트 진영은 친일 역사교과서로 낙인찍힌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발간하는데 앞장섰으며 6.15 공동선언에 의거한 남북통일을 반대하고 한미동맹의 지속적 강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뉴라이트는 자유주의에 기대어 현 집권세력의 반민중적 이념과 정책을 설교하고 있다.
최근들어 새민련이 제대로 된 야당으로서 노선을 정립하지 못하고 매번 새누리당의 프레임에 걸려들면서 패배를 면치 못하는 것도 새민련이 보수세력의 자유주의적 사고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것이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에 기초한 뉴레프트 진영도 출현하였다. 이들은 지난 50년간 민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해 왔던 진보진영을 올드레프트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새로운 진보라며 뉴레프트라고 추켜세웠다. 이들은 진보의 모자를 쓰고 민중세력의 이념과 정책을 낡았다고 공격해 결과적으로 보수세력의 확대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들은 평등과 박애정신의 포함정도에 따라 자유를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뉴라이트와, 자유와 더불어 평등과 박애를 함께 외치는 뉴레프트로 구별된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그들이 뉴라이트이건 뉴레프트이건을 떠나 다음의 영역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자유주의는 뉴라이트로부터 뉴레프트에 이르기까지, 첫째로 친미사대주의적 입장을 띠게 된다. 현재 인류사회에서 자유주의가 전면화 된 사회가 단연 미국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사회는 ‘개인의 자유’의 거점이자 총본산으로서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적 고향이다. 물론 자유주의자들도 미국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 스스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뉴레프트들까지 포함해도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식 사고방식과 미국식 제도를 선호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미국식 인권기준을 중시하며 북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인권공세에 정서적으로 공감한다.
둘째로 자유주의는 반미국가 진영에 대한 극렬한 거부의식을 노골화한다. 자유주의자들은 통일을 외면하며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다. 북한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한 사회주의체제이면서 ‘개인의 자유’를 전파하는 미국과 온갖 형태의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북한 뿐만 아니라 이란, 시리아, 쿠바, 나아가 중국까지를 아우르는 반미성향의 국가들, 그리고 그들의 정치체제와 생활양식과 문화도 경멸한다. 미국을 선호하는 이들이 반미국가를 싫어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자유주의자들치고 중국공산당의 유일집권이나 이슬람 신정체제를 존중하는 이는 없다.
셋째로 자유주의는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개방정책을 수용한다. 뉴라이트는 적극적으로 개방을 주장할 것이 자명하며, 뉴레프트도 개방의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개방 자체를 반대하지 못한다. 이들은 FTA 협정의 일부 항목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정부의 FTA 추진정책 자체만은 결코 비판하지 못한다.
넷째로 자유주의는 6.15 공동선언에 의거한 통일을 외면하고 흡수통일을 선호한다. 자유주의자 가운데 열성적인 통일활동가가 있다면 그런 자유주의자들은 뉴라이트이건 뉴레프트이건을 떠나 대체로 북한 땅에도 미국 같은 ‘개인의 자유’를 뿌리내려야 한다고 보는 흡수통일론자들이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은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연합제안과 낮은 단계 연방제안에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을 추진해 나기로 하였다. 이를테면 북한체제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중국의 집권방식도 용인하기 어려운데 과연 북한체제를 인정할 수 있을까?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6.15 공동선언보다 박근혜 정부의 흡수통일에 끌리게 되어 있다.
4. 결론
자유주의가 자본가계급, 보수세력의 사상이론적 근거지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주의가 탄생의 순간부터 자본가계급의 요구로 탄생한 나머지 인간의 사회적 속성, 공동체의 가치를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언급하는 ‘자유’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이다. 자유주의는 단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민주적 공동체의 자유’에 앞세우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주적 공동체의 자유’는 인간이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해서 사회적 집단을 조직하고 확대해나가며 강화해나가는 활동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의 주권을 개인적으로 행사하지 않는다. 어떠한 단체들 보더라도 대중의 이해와 요구는 대중단체, 나아가 정당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행사된다. 이를테면 ‘민주적 공동체의 자유’는 인간의 정치활동방식이며 인간의 주권행사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인간이 민주주의적 집단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민주적 공동체의 자유’보다 ‘개인의 자유’를 더욱 우선시하며 이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버린다.
결국 진보는 개인이 아닌 사회를 바꾸기 위한 활동의 총체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속성으로 하기에 21세기의 한국사회에서 진보와 결코 섞일 수 없다.
진보는 개인의 내적수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는 사회적 활동이며, 결국 개인의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진보진영에게 ‘개인의 투쟁’보다 ‘단결투쟁’이 결코 방관할 수 없는 승리의 필수공식이 되는 이유는 진보적 활동, 투쟁 자체가 철저히 사회적 영역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절대시하고 ‘자유로운 합의’를 중시하면서도 ‘합의’의 기준을 주관적으로 해석해버린 유시민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독선적 요소와 분쟁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유시민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21세기의 한국사회를 진보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궤변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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