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연재 84]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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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20 02:3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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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84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84) 6. 15공동선언리행의 첫막을 열어>기사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주체104(2015)년 10월 19일 《우리 민족끼리》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84)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위대한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6. 15공동선언리행의 첫막을 열어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6. 15북남공동선언발표후 북남관계는 명실공히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자주통일시대, 화해협력시대에 들어섰다.
북남관계발전의 격동적인 분위기속에서 공화국정부는 6. 15공동선언을 철저히 리행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평양상봉이 있은 직후 남조선의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일행의 공화국에 대한 방문이 이루어졌다.
▲2000년 6월 29일 김정일 위원장은 정주영 명예회장 일행과 사진을 찍었다.
2000년 6월 29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고령의 불편한 몸으로 불원천리 찾아온 정주영 명예회장과 그 일행을 접견하시고 그들을 뜨겁게 환영해주시면서 건강상태며 기업형편에 대해 상세히 료해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개성공업지구건설과 금강산관광사업을 비롯한 경제협력사업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모두 풀어주시였다.
이 소식은 남조선과 세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평양상봉과 더불어 급격히 고조되고있던 겨레의 통일열기를 더한층 북돋아주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6. 15북남공동선언리행을 위한 첫 조치로서 2000년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제1차 북남상급회담이 서울에서 진행되였다.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발표이후 그 리행을 위한 첫 회담인것만큼 그 의의가 자못 컸다.
북측의 원칙적인 노력에 의하여 제1차 북남상급회담에서는 겨레의 념원과 새로운 시대적요구에 맞게 북남회담이 북남공동선언의 합의사항을 리행하는 회담으로, 과거의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 신의와 협력의 정신에서 문제를 타결하는 회담으로, 실질적으로 결실을 맺는 회담으로 만들데 대한 원칙적문제들에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상급회담뿐아니라 북과 남사이에 진행될 여러 갈래의 회담들을 6. 15공동선언리행에로 지향시켜 실속있게 전개해나갈수 있는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회담에서는 또한 2000년 8월 15일을 계기로 잠정적으로 중단되였던 판문점 북남련락사무소운영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제1차 북남상급회담에 뒤이어 그해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평양에서 제2차회담이, 9월 28일부터 9월 30일까지 제주도에서 제3차회담이, 12월 12일부터 12월 16일까지 평양에서 제4차회담이 열렸다. 이러한 회담들에서는 북남적십자회담을 열고 북과 남으로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인도주의사업을 폭넓게 추진시켜나갈데 대한 문제, 조선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보장을 위한 북남군사당국자회담을 개최할데 대한 문제, 북남사이의 경제협력을 활발히 벌리기 위하여 법적, 제도적장치들을 마련하고 북남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구성운영할데 대한 문제, 남조선어민들에게 북측의 동해어장을 제공하기 위한 북남어업회담을 개최할데 대한 문제, 북남태권도단체들사이의 회담을 가질데 대한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협의하고 합의하였다.
북남상급회담과 함께 2000년 6월 27일과 9월 20일 금강산에서는 두차례에 걸쳐 북남적십자회담이 열리였으며 9월 25일부터 26일사이에 제주도에서는 북남군사당국자들사이에 부장급회담이 개최되고 9월 25일과 12월 27일에는 평양과 서울에서 북남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열리였다. 그리고 북남사이에 고위급대표단도 교환되였다.
또한 북남적십자회담들에서 북과 남사이의 인도주의적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치들이 취해진 결과 그해 8월과 11월 2차에 걸쳐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교환사업이 진행되였다.
북과 남사이의 이러한 여러 갈래의 회담과 접촉들이 진행되고 협력과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던 주체89(2000)년 8월 5일부터 12일까지 남조선의 주요신문, 방송회사사장, 총국장들과 관계자들로 구성된 큰 규모의 언론사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 남조선언론사대표단 성원들은 만경대와 국제친선전람관, 로동신문사와 조선중앙방송위원회를 비롯한 평양과 지방의 여러 대상들을 참관하였다.
남조선언론사대표단 성원들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특별비행기를 타고 백두산지구에 대한 참관도 진행하였다.
남조선언론사대표단의 평양방문에서 최절정을 이룬것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들을 접견해주신것이였다.
▲2000년 8월 12일 김정일 위원장은 남쪽 언론사 대표단과 만났다
8월 12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낮 12시부터 무려 3시간 20분동안이나 남조선언론사대표단을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담화와 오찬회석상에서 우리 민족이 당하여온 수난에 찬 분렬의 력사를 회고하시면서 높은 민족적자존심을 가지고 민족앞에 나서는 력사적과제를 풀어나가며 민족공동의 리익을 도모하고 북남관계를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6. 15공동선언을 리행하는데서 북과 남의 언론기관들과 언론사들이 자기의 책임과 임무를 다하여야 할것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6. 15공동선언을 지지환영하고 통일위업을 실현하는데 나선다면 여당이건 야당이건 관계없이 그리고 과거는 물론 어제의 실언도 불문에 붙이고 함께 손잡고나갈것이라고 확언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남조선언론사대표단을 만나주신것은 그들부터가 북에 대한 이지러진 관점을 바로세우고 6. 15북남공동선언리행에서 언론인의 본분을 지켜나가도록 하는데서 전환적계기로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언론사대표단을 접견해주시고 하신 말씀은 8월 13일 남조선신문들의 옹근 두면에 일제히 편집되였다. 이것은 남조선언론사상 전례없는 일이였다.
언론사대표단의 평양방문이후 남조선언론인들속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위인상을 적극 소개선전하고 련북을 지향하는 언론활동들이 전례없이 강화되였다.
2000년 남조선언론계는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영상사진을 전례없이 많이 모시였는데 남조선의 주요신문 11종과 잡지 14종만 보아도 총 1 030상의 영상사진들을 모시였다. 그리고 남조선의 주요신문들과 잡지들이 4. 8북남합의서발표 이전인 3월 한달동안에 북과 관련한 기사를 평균 7. 5건(사설은 평균 3. 5건)을 실었다면 언론사대표단의 평양방문이후인 9월과 10월에는 북과 관련한 사설만 해도 한달에 평균 10건으로서 3일에 한번정도로 실었으며 기타 시론, 론평 등은 거의 매일 싣다싶이 하였다.
6. 15북남공동선언을 철저히 리행하기 위한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꿈결에도 그리던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는 경이적인 현실이 펼쳐지게 되였다. 한두명도 아닌 63명 비전향장기수들의 공화국에로의 집단적귀환, 이것은 6. 15북남공동선언의 위대한 생활력을 보여주는 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특기할 사변이였다.
한편 2000년 추석을 맞으며 위대한 장군님께서 남조선의 각계 인사들에게 보내시는 칠보산의 송이버섯을 전달할데 대한 위임을 받고 조선인민군 대장과 함께 서울에 간 북측의 책임일군은 남측의 관계자들과 북남간에 제기되는 현안 문제들에 대하여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고 9월 14일 북남공동보도문을 발표하였다.
공동보도문에는 북측 인민무력부장과 남측 국방부 장관사이의 회담을 개최하는 문제,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생사 및 주소확인과 이들의 서신교환 그리고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 추가교환문제, 서해선철도 및 도로련결을 위한 착공식개최문제, 경제고찰단의 파견문제, 림진강수해방지 공동조사문제 등의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공동보도문의 발표로 겨레의 통일열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조선반도에서 이러한 격동적인 사변들이 련이어 일어나고있던 2000년 9월말 평양에서는 공화국정부, 정당, 단체합동회의가 열렸다. 합동회의에서는 6. 15북남공동선언이 채택된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맞게 북남관계를 보다 높은 단계에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조선로동당창건 55돐행사에 남조선의 정당, 단체들과 개별인사들을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였다.
그리하여 남조선에서 14개 정당, 단체대표, 개별인사 45명과 《한겨레》신문사와 《서울방송》기자 30여명 등 모두 78명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온 남측대표들은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창건 55돐경축 열병식과 군중시위, 청년학생들의 야회와 홰불행진, 5월1일경기장에서 진행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을 비롯한 경축행사들을 참관하였다. 또한 그들은 공화국의 정당, 단체일군들과 조국통일문제를 놓고 쌍무적 및 다무적접촉들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시기 미국은 북남관계개선이 지내 빠르다느니,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남조선당국에 압력을 가하고 남조선의 극우보수세력과 군부를 사촉하여 북남관계개선의 좋은 분위기를 흐려놓는가 하면 10월말부터 11월초까지 대규모의 《독수리》합동군사연습을 강행해나섰으며 그 얼마후에는 전투함선을 서해의 공화국령해 깊이 침투시키는 도발행위를 감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공화국정부는 11월 28일에 열린 북남군사실무회담에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을 하자는 때에 외세와 야합하여 반북대결소동을 벌리는것은 반민족적, 반통일적죄행이다, 평화통일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도 그에 대응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다,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강하게 추궁하였다.
그러나 남조선의 군부호전분자들은 공화국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12월 4일 공화국을 《주적》으로 규정한 남조선국방부의 《2000 국방백서》라는것을 공식발표하고 북의 《전력증강》이니, 《지속적인 침투활동추진》이니, 《군사적위협의 존재》니 하고 공화국을 걸고들면서 북의 《현실적군사위협》이 해소될 때까지 이른바 《주적관념》을 유지할것이라고 떠벌였다.
이에 편승하여 남조선의 통일부도 《여론조사》놀음을 벌려놓고 공화국의 존엄높은 정치체제를 걸고들었다.
미국과 그와 야합한 남조선의 반통일분자들의 이러한 책동을 짓부셔버리지 않으면 6. 15북남공동선언의 성과적인 리행을 기대할수 없는것은 물론이고 북남관계가 대결상태로 되돌아갈수 있었다.
12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대변인성명을 발표하여 남조선당국이 동족사이에 극도의 적대감을 고취하는 《주적론》을 또다시 들고나오고 공화국의 정치체제까지 걸고드는것은 명백히 6. 15공동선언에 대한 배신이며 북남관계를 대결의 시작점으로 되돌려세우려는 반통일행위라고 단호히 규탄하였다. 12월 12일에 평양에서 진행된 제4차 북남상급회담에서도 북측은 남측 군부호전세력이 들고나온 《주적론》을 강하게 문제시하면서 남조선당국이 온 민족앞에 확약한 6. 15북남공동선언의 정신을 귀중히 여기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라의 통일을 위한 립장과 자세로 나올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북측의 사리정연한 주장앞에서 남측은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공화국의 이러한 주동적인 조치와 원칙적인 활동에 의해 북과 남사이에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사업이 성과적으로 진행되게 되였다. 이것은 6. 15공동선언이 낳은 중대한 변화로써 그 위대한 생활력의 과시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