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미군 강점 70년에 벗기는 <해방자>의 허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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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08 18:0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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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이남 강점 70년에 벗기는 <해방자>의 허울(상)
편집국
인천상륙으로 침략자의 첫 군화발을 내디딘 미군은 그 다음날인 9월 9일 서울에 밀려들었다. 1945년 9월 11일에 이남에 <군정청>을 수립한 미국은 아놀드를 초대 <군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이 이남의 유일한 ‘합법적권력’임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미군정청의 장관으로 올라앉은 아놀드가 “전 <조선총독>이 가지고 있던 직권과 권리를 나 자신 즉 <군정장관> 아놀드가 장악하고 있다.”(<매일신보> 1945년 9월 16일부)라고 떠벌였으며 “북위 38˚선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하나의 <정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맥아더의 <포고>, 하지의 <일반명령> 및 <군정부>의 <민정명령>에 기초하여 창설된 <정부>이다. …그것은 정치의 모든 면에서 지배와 권한을 독점하고있다.”라고 선포한 사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체계 그대로였다. 그것은 총독과 국장급을 일본인 대신 미국인을 들여 앉히고 종래의 <총독부>를 <군정청>으로 고쳐부른 사실, <국방부》와 《공보부>를 신설하였을 뿐 그 이하의 일본관리들을 그대로 두어 그 수가 무려 1945년 12월 당시 3만 5,000여 명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군정>하의 <중요직책>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도지사, 군수, 면장도 그대로 두었으며 일제의 사법검찰체계도 법원을 <육군점령재판소>로, 일제시기의 <총독부 중추원>을 <군정장관고문회의>로 이름만 바꾸었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이 만들어낸 이른바 <미군정>이라는 것이 일제시기 <총독부>를 재현한 식민지독재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해방자’의 탈을 쓴 침략자 미군의 정체는 남조선에 기여들면서 발포한 포고들의 내용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미국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부의 <포고 1호>(미군점령에 관한 포고)와 <포고 2호>(범죄 및 법규위반에 관한 포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포고 1호>
본관은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의 권한으로써 북위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펴고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 북위 38°선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에 대한 통치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시 복종하여야 한다.
·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는 엄벌에 처한다.
· <군정>기간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
<포고 2호>
미국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의 권한 하에 발포한 모든 포고, 명령, 지령을 위반하는 자 혹은 미국이나 미동맹군 인원의 재산, 생명의 안전 또한 보존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는 자, 질서문란이나 연합군에 적의 있는 행위를 한 자는 군사점령법정의 재판에 의하여 사형 또는 기타의 처벌을 당한다.
<포고> 1, 2를 집약하면 이남이 <미군정>에 의해 통치되며 그 통치권이 맥아더와 그 권한을 대행하는 이남 강점 미군사령관에게 있다는 것, 일제식민지 통치에 이용된 모든 기구와 기능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 남조선에 반인민적 제도와 폭압체제를 세운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며 이에 반항하는 사람들을 엄벌에 처하겠다는것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남에 기여들기 바쁘게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하며 저들의 요구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이와 같은 강도적 처사는 미군이 결코 ‘해방자’가 아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기에 미군의 이남 강점시기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던 미국기자 마크 게인은 종군수기 <일본일기>에 “우리들은 ‘해방군’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점령하기 위해서, 조선사람이 항복조건에 복종하는 가를 감시하기 위하여 달려간 것이다. 우리들은 상륙 첫날부터 조선인민의 적으로서 행동하였다.”라고 썼다. <해방자>가 아닌 침략자, 범죄자로서의 미군의 정체는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적 정당 및 애국적 사회단체들과 조직들을 강제로 해산하고 애국적 역량을 닥치는 대로 탄압 학살하는 데서도 더욱 여지없이 드러났다.

민족의 자주권과 인권은 민족의 생명이며 인간의 초보적인 요구이다. 일제의 패망과 식민지통치의 종말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위한 밝은 전망을 열어놓았다. 해방을 맞이한 이 땅에서는 인민의 창의에 의해 전국의 80여%나 되는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수립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민위원회는 말그대로 인민이 모여 민주주의적인 지역발전과 활동을 보장하는 자치기구였다. 이남지역에서만도 1945년 9월 12일에 서울시인민위원회, 10월 12일에는 경상남도인민위원회, 18일에는 남녘강원도인민위원회, 20일에는 전라남도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0월 말까지 이남의 7개 도, 12개 시, 131개 군에서 각급 인민위원회들이 조직되었다.
※ 1945년 11월 5일에는 16개의 산업별 조직과 1,680개의 노동조합을 가진 <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을 비롯하여 <남조선민주청년동맹>, <남조선부녀총동맹> 등이 결성되었으며 40여 개의 민주역량통일전선체인 <남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이 모든 것은 미제의 식민지정책 실현에 장애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미국은 <미군정>을 통하여 인민위원회와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길에 들어섰다.
1945년 10월, 남원에서의 미군에 의한 학살 만행은 <미군정>에 의한 인민위원회 파괴공작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당시 남원에서는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등이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켜 자치적으로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 24일 남원에 도착한 미군은 남원인민위원회가 일본인 재산을 몰수, 관리한 것을 “불법행위”라고 하면서 인민위원회를 압박해 나섰다. 미군의 개입으로 무고한 조선사람 여러 명이 숨지고 1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참상이 빚어졌다.
이에 대하여 이남의 어느 한 연구가는 “남원의 충돌은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파괴과정에서 나타난 최초의 발포”라고 말하고 그 역사적 의미는 “단순한 몇 명의 목숨을 앗아간 데 그치지 않고 인민위원회를 파괴함으로써 남원군민의 자치, 자주독립 열망을 멸살시켰다는 데서 미군의 <남원학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폭로하였다. 미군이 인민위원회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광증을 부렸던지 당시 한 미군종군기자는 “미군이 인민위원회들을 지하에 몰아넣기 위하여 만 2개월간 다른 아무 것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남에서 인민위원회를 해산시켜버린 미군은 <군정>통치에 거슬리는 그 어떤 정당, 단체들의 활동은 물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등 초보적인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마저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총칼로 무장한 군경들을 내몰아 애국적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정판사위조화페사건>, 하의도농민들의 항의투쟁에 대한 진압과 전라남도 화순탄광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살륙행위, 9월총파업투쟁, 10월인민항쟁에 대한 탄압 등은 그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1946년 5월 공산당을 비롯한 애국역량을 탄압하기 위하여 이른바 <정판사위조화페사건>이라는 날조극을 조작하였다. 정판사는 당시 이남공산당이 가지고 있던 출판사였다. 미국은 공산당을 탄압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정판사에서 위조화페를 대량 찍어냈다는 거짓사건을 꾸며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에서 공산당청사를 습격하는 것과 함께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 투옥하고 공산당기관지 <해방일보>의 출판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곧 남녘겨레의 항의와 규탄을 불러일으켰다. 이남인민들은 <정판사위조화페사건>에 대한 ‘재판’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군은 정당한 요구를 제기하면서 시위에 나선 2,000여 명의 서울시민들에게 마구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들을 발생시켰다.
1946년 8월에 벌어진 전라남도 하의도농민폭동에 대한 미군의 유혈적 탄압만행도 다를바 없었다. 당시 하의도에는 주민은 1만여 명이었고1,300여 호의 농가에 약 158만 평의 논과 밭이 있었다. 농경지는 하의도사람들이 대대로 피땀을 흘려가며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었다. 그런데 1920년에 간악한 일제는 이 땅을 빼앗아 일본인 지주 도꾸다가 경영하게 하였다.
8. 15해방후 이 고장 농민들은 일제가 패망하였으니 도꾸다의 땅은 의례히 농민들의 소유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하의도의 농토를 <신한공사>의 소유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1945년도 소작료와 공출양곡까지 납부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것은 이전 일제의 토지강탈과 양곡공출을 무색케 하는 처사로서 섬사람들의 극도의 격분을 자아냈다.
하의도농민들은 “<신한공사>관리에 넘긴 토지를 농민들에게 반환할것”, “과중한 소작료납부와 하곡수집을 반대한다”는 요구를 들고 미군의 보리강탈을 거부해 나섰다.
그러자 <신한공사> 사원 4명과 목포경찰서 관하 무장경찰 12명이 부락들에 나타났다. 이자들은 집집마다 수색을 하며 “소작료를 내지 않으면 총살한다.”고 위협하였고 나중에는 무고한 주민들에게 총탄을 퍼부어 5명을 죽이고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해갔다.
격노한 농민들은 하의도경찰분서와 <신한공사>출장소 창고를 습격하여 불태워버렸다. 무장경찰들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투쟁은 연일 계속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하의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무장한 미군부대를 직접 투입하여 농민들의 투쟁을 야수적인 방법으로 무참히 진압하였다.
미군정 하에서의 미군의 야수적인 학살만행은 1946년 8.15해방기념일에 감행한 전라남도 화순탄광노동자들에 대한 대량살륙행위에서 더욱 악랄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날 전라남도 화순탄광노동자 2천여 명은 해방 1년을 맞으며 광주에서 진행되는 군중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시위행렬을 짓고 70여리나 떨어진 광주시로 향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군은 저들의 무장부대와 기마대, 남녘무장경찰대에 비행기, 탱크, 화학무기까지 동원하여 평화적 시위자들을 백주에 습격하고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하지만 화순탄광노동자들은 미군의 무력탄압에도 굴함없이 끝끝내 광주시에 도착하여 군중대회와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에 악에 받친 미 침략군은 귀로에 오른 그들에게 또다시 달려들어 총탄과 폭탄, 포탄을 마구 퍼부어 30여 명을 학살하고 50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으며 한 주일 동안이나 현장을 봉쇄하여 노동자들의 시체까지 찾아가지 못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해방자’의 탈을 쓴 미군의 정체는 1946년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한 야수적 탄압을 통하여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8. 15해방은 우리 겨레에게 민족의 독립이라는 기쁨과 함께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길을 걸어나갈 수 있는 희망과 기대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남녘겨레의 이러한 희망과 기대는 미군정의 식민지통치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폭등하였으며 실업자가 수백만 명으로 늘어나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기업의 대부분은 모리배들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정권야욕에 눈이 어두워 돌아치는 반동정치간상배들의 모략과 책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험악해지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학원의 자유가 말살되고 진보적인 신문들이 페간되였으며 언론의 자유도 박탈되었다.
그야말로 온 남녘땅에는 미증유의 암흑이 지배하는 절망상태가 조성되었다. 남녘인민들은 대중적 파업투쟁에 떨쳐나섰다. 4만여 명에 달하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투쟁은 남녘의 전반적 산업, 운수, 금융, 상업부문과 58개의 시, 군을 휩쓴 26만여 명의 노동자, 사무원들이 참가한 대중적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바빠난 미국이 “취업하면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는 감언이설로 파업투쟁을 무마시켜보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애국적 인민들의 투쟁이 저들의 뜻대로 저지되지 않자 미제는 공공연한 무장탄압에로 넘어갔다. 9월 30일 미군의 지휘밑에 탱크를 앞세운 4,000여명의 무장경찰과 테로단이 그 진압에 동원되었다. 미제의 사촉 하에 무장경찰과 테로단은 투쟁참가자들에게 무자비한 사격과 폭행을 가하였다. 미제와 그 주구들의 야수적인 만행으로 40여 명의 시위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1,7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하지만 투쟁은 중단되지 않았다. 9월총파업투쟁은 대구에서 일어난 10월항쟁으로 하여 이남 전역에 확산되었다. 11월 중순까지 약 2개월간이나 줄기차게 계속된 10월항쟁에는 230여만 명의 광범한 대중이 참가하여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밑뿌리채 뒤흔들어 놓았다.
이에 바빠맞은 미제는 탱크를 비롯한 수많은 중무기와 각종 테러단을 총동원하여 무차별적인 탄압에 나섰다. 항쟁에 참가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미제의 살인지령에 따라 무장경찰과 테러단은 눈에 보이는 것이 노인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쏘아죽였다. 항쟁참가자의 가족이라고 하여 그자리에서 기관총을 휘둘러 즉사시켰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난탕치는가 하면 탱크의 무한궤도로 사정없이 깔아뭉갰다. 이 귀축같은 만행으로 반미반파쑈투쟁으로 들끓던 항쟁의 거리들은 피로 물들여졌다. 10월항쟁을 계기로 1,000여명이 무참히 학살되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만여 명의 애국적 인민들이 검거되었다.
이 모든 사실은 이 땅에 기여든 미군은 ‘해방자’, 보호자’가 아니라 침략자, 범죄자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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