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연재 52]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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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24 17:1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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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52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52) 파쑈적인 《유신체제》의 총파산 기사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주체104(2015)년 8월 18일 《우리 민족끼리》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52)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파쑈적인 《유신체제》의 총파산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정부의 공명정대한 제안과 조치들,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투쟁과 성의있는 노력은 온 민족의 통일열망을 크게 높여주었으며 민족분렬체제인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을 힘있게 고무하였다.
남조선군사독재자는 《유신체제》에 의거하여 민중의 통일열의를 억누르고 반통일적인 범죄행위를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모처럼 마련된 7. 4공동성명의 합의사항리행이 차단된것도, 통일문제해결을 위한 온 민족의 총의를 모으게 될 대민족회의가 끝내 소집되지 못하고 조절위원회사업이 결렬되게 된것도 결국은 군사독재자가 파쑈적인 《유신체제》를 세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민족의 영구분렬을 추구하였기때문이다.
이 모든것은 군사독재자의 《유신체제》야말로 자주적평화통일의 중요한 장애이며 《유신체제》를 철페하고 남조선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지 않고서는 조국통일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다는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남조선당국자들의 파쑈화와 전쟁, 분렬책동은 남조선인민들의 분노를 격발시켰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은 1973년 10월초 《유신》파쑈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대중적항쟁에 일떠섰다.
▲유신 첫 반대 시위, 1973년 10월2일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 박정희 정권의 1인1당파쑈독재체제인 유신체제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은 교내 《4. 19의거탑》앞에 모여 《누구를 위한 10월〈유신〉이냐, 국민의 노예화를 위한것인가》라는 프랑카드를 내걸고 1인1당파쑈독재체제를 수립하고 애국적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탄압학살하며 외세를 등에 업고 분렬의 영구화를 꾀하는 군사독재자의 반인민적, 반민족적죄행과 부정부패행위를 낱낱이 폭로단죄하였으며 반파쑈, 반《정부》, 반외세구호를 높이 들고 노도와 같이 시위에 떨쳐나섰다.
청년학생들의 이 투쟁은 반《유신》투쟁의 도화선으로 되여 곧 서울의 다른 대학들과 남조선 전지역으로 급속히 파급되였다.
청년학생들은 《10월〈유신〉을 백지화하라》, 《새로운 민주정권 세우자》, 《분단고정화를 반대한다》, 《통일에 대한 자유로운 론의와 참여를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리였으며 정보정치의 즉각중지와 민중의 기본권보장도 요구해나섰다.
1973년 12월에 이르기까지 근 석달동안에 걸쳐 벌어진 투쟁에는 서울과 지방에서 10여만명의 청년학생들과 지식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이 참가하였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의 1973년 10월투쟁은 《유신》독재에 항거해나선 첫 대중적인 진출이였다. 10월투쟁은 《유신체제》하의 남조선에서 다시는 인민투쟁이 일어나지 못할것이라고 장담하던 군사독재자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하였다.
10월투쟁의 불길속에서 1974년 3월 전 남조선적인 청년학생들의 통일적투쟁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민학련)이 결성되였으며 《민학련》의 지도밑에 1974년 4월 3일 남조선 전지역에서 군사파쑈《정권》을 반대하는 조직적이며 대중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유신》파쑈독재를 짓부시고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은 197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더욱 고조되여갔다.
《유신》파쑈독재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불만과 반항심은 1979년 8월 YH무역회사 로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남조선당국의 야수적인 탄압을 계기로 극도에 이르렀다.
남조선당국의 파쑈적폭압만행은 남조선인민들속에서 참을래야 참을수 없는 반항과 불만을 야기시키고 그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8월 중순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민들은 《유신》독재를 짓부시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섰다.
청년학생들의 투쟁과 함께 생존의 권리를 위한 로동자들과 언론의 자유, 사회의 민주화와 《박〈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인사들과 종교인들의 투쟁도 고조되였다.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은 1979년 10월에 이르러 마침내 《유신》독재의 원흉을 타도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적인 항쟁으로 폭발하였다.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 10월민주항쟁은 군사독재자를 타도하는데 예봉을 돌리고 격렬하게 전개된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였으며 파쑈적《유신》독재를 짓부시고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반파쑈애국투쟁이였다.
10월 21일에 진행된 평양시군중대회에서는 부산의 애국적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일으킨 대중적항쟁은 군사독재자의 《유신》파쑈통치에 대한 그들의 쌓이고쌓인 원한과 울분의 폭발이며 전체 남조선인민들의 사활적인 요구와 지향을 반영한 애국적인 투쟁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굴함없이 싸우고있는 부산의 애국적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을 비롯한 전체 남조선인민들에게 뜨거운 지지와 성원을 보내였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회 등을 비롯한 공화국의 단체들에서는 군사파쑈도당의 폭압만행을 규탄하여 성명들을 련이어 발표하였다.
남조선인민들의 반《정부》투쟁은 《유신체제》를 밑뿌리로부터 뒤흔들어놓았고 미국의 식민지통치체제를 극도로 약화시켰다. 10월민주항쟁에 의하여 파쑈적인 《유신체제》는 더는 걷잡기 어려운 총파산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남조선에서 민주와 파쑈사이의 대결이 절정에 이르고 사회적혼란이 극도에 달하고있는 가운데 악명높은 《유신》독재자가 10월 26일 미국의 버림을 받고 자기 심복의 총에 맞아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민족을 등지고 외세에 의거하여 매국과 파쑈, 전쟁과 분렬을 일삼아온 범죄자에게 차례진 응당한 대가였다.
《유신》독재자의 종말은 극악한 파쑈독재자, 분렬만을 일삼아온 주구의 운명이 결코 달리될수 없다는것을 다시한번 똑똑히 보여주었다.
《유신》독재의 원흉이 제거됨으로써 파쑈적《유신》독재체제는 수습할수 없는 일대 혼란과 막다른 위기에 빠지게 되였으며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의 앞길에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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