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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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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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13 14:5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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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소개하며 글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12.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김 승 구 (작가)

 

                        • 1914년 7월 12일 충청남도 아산군 령인면(당시)에서 출생.

                        • 1937년 5월부터 극단 중앙무대 문예부장.

                        • 1945년 9월부터 경기도 서울시 문화통신사 주필.

                        • 1946년 8월부터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예술과장.

                        •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작가로 활동.

                        • 1956년 2월부터 국립예술극장 총장.

                        • 1959년 1월부터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주필.

                        • 1981년 10월부터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원.

                        • 1994년 11월 29일 사망.                   

                                                           

 

 

누구에게나 삶의 태줄을 묻은 고향이 있지만 그 고향이 또한 누구에게나 보람찬 삶의 요람으로 되고 소중한 꿈과 재능을 꽃피워준 희망의 터전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하기에 나라잃은 수난의 그 세월 뼈아픈 고통과 절망만을 안겨준 고향을 등지고 참된 삶의 빛을 찾아 헤매인 재사가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의 주인공 김승구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한생은 절세의 위인들의 품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삶의 고향을 찾고 잃어버릴번 했던 청춘도 다시 찾아 조국과 더불어 빛나는 생의 자욱을 아로새긴 뜻깊은 인생행로였다.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체험은 중요하다. 생활의 학문을 다루는 작가에게 있어서는 더욱 중요하다.

 

누구나 인생의 모든 시기의 체험이 다 중요하겠지만 시대와 생활을 산 화폭으로 그려내는 작가에게 있어서 유년시절의 체험은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재산으로 된다. 아마도 어린시절의 체험은 인간의 성격을 완성시키는데서, 중요하게는 작가의 창작방법을 세우는데서 무시할수 없는 작용을 하기때문일것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니나》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레브 똘스또이나 23살의 젊은 나이에 력작 《고요한 돈》 제1부를 발표하여 세상에 《로씨야땅에 똘스또이와 같은 천재가 나타났다.》고 소문을 떨친 숄로호브의 경우를 놓고봐도 그들이 나름대로 겪은 유년시절의 체험이 작가의 성장과 창작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옛사람들도 《유년시절체험은 량식 지고 다니며 한다.》고 했던가싶다.

 

하다면 조선영화계의 첫 영화를 만들어낸 작가 김승구의 유년시절은 어떻게 흘러갔으며 그가 생활체험의 바다속에서 캐낸 진주는 과연 어떤것인가?

 

김승구는 1914년 7월 충청남도 아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충청남도 아산이라고 하면 조선문학의 재사들인 리기영, 조령출을 배출한 곳이다.

 

봄철에는 마치 눈이 내린듯 살구꽃이 하얗게 피여나고 앞벌에는 개구쟁이들을 못견디게 유혹하는 큰내가 시원스럽게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 고향산천은 더 말할나위없이 아름다왔으나 그의 어린시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에게서 꿈과 랑만을 사정없이 앗아갔다.

 

김승구가 네살 나던 해였다.

 

하루는 그가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는 엄마에게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고있는데 마을지주가 불쑥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가족들을 집에서 내쫓았다. 빚을 많이 졌다고 집을 차압한것이다.

 

졸지에 초가지붕대신 비꽃이 뚝뚝 떨어지는 하늘을 머리우에 인채 한지에 나앉은 가족들은 억울한 신세를 한탄하며 친척집으로 사방 흩어져갔다.

 

무정하기 그지없는 세상은 두해후에는 여섯살밖에 안되는 승구에게서 어머니마저 빼앗아갔다.

 

아버지를 잃으면 절반고아요, 어머니를 잃으면 완전고아라는 말이 있다.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모진 고생을 다 겪으며 자식들을 위해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승구는 빨간 주먹밖에 없는 알몸신세가 되였다.

 

집안의 기둥이였던 맏형마저 3. 1인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고향을 떠나가게 되자 너무도 억이 막힌 승구는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 하늘아! 나는 어떻게 살라는거냐?》

 

철부지소년의 연약한 어깨로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도 무섭고 아름찬 시련은 엊그제만 해도 동네아이들과 수수대총을 휘두르며 뛰여다니던 코흘리개를 일찌기 철들게 했다.

 

김승구는 차츰 자기의 가정에 들씌워진 가난과 불행, 사회적불평등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였다. 그런 가운데 그의 가슴속에 배움에 대한 열망이 불같이 자라난것은 불행이라면 불행이고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였다.

 

소년 김승구는 고마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재학과정이 여러번 중단되였지만 그는 평양선교보통학교, 아산둔포보통학교 등지로 학적을 옮겨가면서 이악하게 공부하였다.

 

어린시절에 겪은 방랑살이나 같은 고생은 그의 성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가족들의 눈물겨운 리별과 상봉, 숨막히게 죄여드는 빈궁…

 

그것은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으로 하여금 랑만적인 동심에서 벗어나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항거정신을 품게 하였다.

 

경성직업학교시절 진보적학생들의 영향하에 그는 비로소 선진사상에 눈을 뜨게 되였으며 자기와 같이 불행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유년기로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뼈저린 생활체험속에서 그는 순수한 문학이 아니라 정치적인 안목으로 사회를 투시할줄 아는 문학창작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문학의 신입생에게 흔히 차례지는 행운이 없었다.

 

리기영에게는 개화파인 아버지의 영향과 글방훈장의 훈시가 있었고 조벽암에게는 삼촌 조명희의 이끌음이 있었고 송영에게는 청렴한 학자였던 할아버지의 문학열이, 박세영에게는 서울 배재고보시절의 문학교원의 선도가 있었다.

 

그러나 어린 김승구에게는 슬프게도 환상과 랑만의 여유가 없었고 문학에로의 안내자도 없었다.

 

그 나날 그는 식민지민족이 처한 운명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울분과 항거의 정신을 품고있는 인간을 자기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게 하였고 하여 해방전 창작한 그의 작품들의 양상은 대체로 어둡고 비극적인 색채를 띠게 되였다.

 

류민의 신세를 면할수 없었던 김승구는 그후 일본땅에서 고학의 길을 걷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의 문학수업은 점차 본격화되였다.

 

그는 정치영어학교 속성과를 거쳐 명치대학 문예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교육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1년만에 중퇴하고 말았다.

 

당시 그 대학에서는 《초계급적인 예술》에 예술의 본도가 있다고 설교하고있었는바 조선문학을 취급하는 경우에는 리광수, 김동인, 주요한, 김억 같은 사람들을 내세웠었다.

 

근로대중의 운명을 동정하고 불합리한 사회현실을 비판한 고골리, 똘스또이, 체호브, 고리끼의 작품들에 심취되여있던 김승구가 대학모자를 단호히 벗어버린것은 당연한 귀결이였다.

 

그후 그는 도꾜 시바우라항구에서 배짐을 싣고부리는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문학공부를 하는 한편 재일조선문화인들이 조직한 극단 조선예술좌의 성원으로 되였다.

 

김승구가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극단에 찍게 된것은 후일 그가 극작가로 성장하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19세기 로씨야 비판적사실주의작가인 체호브의 《와냐아저씨》, 《세 자매》, 《벗나무동산》과 같은 희곡작품들을 통해서도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이 극단에서 그는 박학을 비롯한 진취적인 문학청년들을 만났고 그들과의 열렬한 토론과 론쟁속에서 진정한 사실주의문학의 길을 모색하였으며 중요한 사회적문제를 제기하고 생활을 보다 진실하게 반영할수 있는 새로운 극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김승구는 처녀작인 희곡 《류민》을 세상에 내놓았다.

 

《류민》은 자신의 고달픈 부두생활체험에 기초한 작품이다.

 

소설은 돈을 벌어보려고 일본땅에 건너간 주인공 락현이가 오히려 막대한 빚까지 걸머지고 고심하던중에 고향에서 기다리기에 지친 아버지와 처까지 찾아오자 헤여날수 없는 고민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내용을 담고있다.

 

이 작품은 1938년 《동아일보》에서 조직한 신춘문예현상응모에서 1등으로 당선되였다.

 

그해 2월 《동아일보》에는 《류민》의 창작경위에 대한 작가의 소감이 실렸다.

 

《밤으로만 6일간에 120장을 썼으니 과연 열도 상당하였다. 밤 3시까지 전등을 써 하숙집에서 전기세를 초과한다고 쫓겨까지 났다.

 

할수 없이 12시부터는 초를 쓰겠다고 약속하고 이 작품을 썼다.

 

급한것은 아니였으나 자리에 누우면 〈류민〉에 나오는 인물들이 눈앞에 얼른거려 잠을 못자게 한탓이였다. 허나 뇌빈혈까지 일으키게 한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다니 한없이 즐겁다.》

 

미사려구를 싫어하는 작가의 극히 실무적인 수기이다.

 

살래야 살수 없어 자살의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주인공 락현의 운명은 곧 삶의 진정한 고향을 찾지 못한 불행한 작가의 운명이였으며 식민지청년들모두의 운명이였다.

 

결국 가슴아픈 유년시절로부터 시작하여 청년시절로 이어진 쓰라린 생활체험은 작가 김승구로 하여금 자기의 첫 주인공을 자살의 낭떠러지로 몰아갔던것이다.

 

일제는 회령철도공사 로동자의 자살을 내용으로 한 라운규의 연극 《철도공부의 죽음》을 중지시킨것처럼 연극 《류민》에도 탄압의 마수를 뻗쳤다. 하여 극단 조선예술좌는 강제로 해산되고 작가 김승구는 징역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희곡 《류민》이 좌절된 후 그는 조선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사실주의적으로 보여준 단편소설 《배꼽쟁이 박서방의 귀향》을 창작하였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주인공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를 통해서도 작가 김승구의 평범치 않은 체험세계를 가히 짐작할수 있다.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작가는 후날 수기에서 《유년시절로부터 청년시절에 이르는 과정에 겪은 일들은 아직도 이목에 생생하고 가슴에 사무쳐 그때의 이야기를 쓰려면 별다른 준비가 없이도 얼음판에 박밀듯 풀려》나간다고 하였다.

 

60이 넘도록 글을 써오면서 그때까지도 이목에 생생하고 가슴에 사무친것은 나라잃은 피나는 설음이였고 민족의 운명을 맡아줄 위인이 없어 당하던 인민의 고통이였다.

 

영화문학작가인 그를 평생 사랑한 안해는 좋을 때마저도 웃을줄 모르는 남편에게 노여워한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당신에 대한 불만은 전혀 아니고 그저 굳어진 인상이여서 그런다고 사죄하군 하였다.

 

작가에게 몹시 헌신적이였던 안해에게서조차 몰리해를 받은 그의 우거지상은 바로 눈물겨운 유년시절에 굳어진 고칠수 없는 인상이였던것이다.

 

김승구의 해방전 창작활동은 사회주의사실주의를 지향한 비판적사실주의문학이였다.

 

정의와 량심을 옹호하고 선도하는 작가라는 직업에 운명을 담도록 하고 그의 한생을 채찍질해준 중요한 바탕이기도 한 눈물겨운 유년시절 체험세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류민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정한 어머니조국- 참된 삶의 고향을 찾지 못한 작가의 재능은 묻혀버릴수 밖에 없으며 빛날래야 빛날수 없다는것이다.

 

사실상 청춘기나이에 있던 작가였지만 그는 푸르러지지 못하였고 가슴아픈 체험속에 정신은 이미 로쇠에 이른것이였다.

 

그렇다. 진정한 삶의 고향이 없는 작가에게 열정넘친 청춘이란 말도 되지 않는것이다.

 

자기 삶의 보금자리, 따뜻한 고향이 없는 인간에게 육체적인 젊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열정을 뿜어내지는 못하는것이다.

 

해방전 가슴에 쌓인 울분을 터치지 못해 문학의 길에 들어선 김승구의 체험은 바로 이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이것은 유년시절로부터 련련히 이어진 가슴아픈 생활체험이 그에게 가져다준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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