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 [연재 20]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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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25 19:2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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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2015-06-25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20) 조국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 (2)> 기사를 원문그대로 소개한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20)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조국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 (2)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는 북과 유엔군
의정문제의 토의에서부터 조선문제의 평화적해결을 거부하면서 담판을 파탄에로 끌어가려고 획책하던 미제는 끝끝내 7월 26일 공화국이 제의한 5개 항목의 의사일정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당시 공화국이 제안한 5개 항목의 의사일정에는 ① 의사일정 통과 ② 조선에서 적대행동을 정지하는 기본조건으로 되는 쌍방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함으로써 비무장지대를 설치할데 대한 문제 ③ 조선경내에서 정전 및 휴전을 실현하는 구체적조치로서 정전 및 휴전감시조항 실시기구의 구성, 권한 및 직책 등을 포함시키는 문제 ④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문제 ⑤ 쌍방에 관련된 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사항문제 등이 제안되여있었다.
정전담판에서의 미제의 침략적야욕과 황당한 주장은 모든 문제토의에서 표현되였지만 특히 군사분계선설정과 전쟁포로문제토의에서 로골적으로 드러났다.
합의된 의사일정에 따라 7월 27일부터 군사분계선확정문제토의에 들어간 공화국정부는 쌍방의 전선실정을 참작하여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고 쌍방이 각각 10㎞씩 철거함으로써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자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미제는 공화국의 정당한 제안을 그 무슨 《방위상필요》니, 《항공우세에 대한 대가》니 하는 부당한 구실을 들고 거부하면서 군사분계선을 38°선이북으로 깊이 설정하자고 강짜를 부렸다. 이를테면 38°선이북 강원도 고성군 남애리로부터 황해도 옹진반도의 동단에 이르는 선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함으로써 공화국측으로부터 1만 3천k㎡의 면적 즉 공화국북반부 전체 면적의 10분의 1이 넘는 광대한 지역을 떼내려고 하였다.
이것은 전선에서 달성하지 못한 령토적야망을 정전담판회의장에서 달성해보려는 무분별한 행동이였다. 이러한 강도적요구가 공화국측에 의하여 거부되자 미제는 수백대의 폭격기를 동원하여 평양시에 대한 맹폭격을 가하는 한편 전선동부에서 인민군진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등 《군사적압력》을 가해나섰다.
미제는 이러한 《군사적압력》이 통할수 없게 되자 1951년 8월 22일 정전담판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키고말았다.
미제는 정전담판을 중단시키고 군사적공세를 시도하였으나 1951년 《하기 및 추기공세》에서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게 되자 63일간 중단하였던 정전담판재개에 동의하고 판문점회의장에 다시 나타나게 되였다.
제2항 군사분계선설정문제토의에서 미제는 마침내 11월 23일 쌍방의 실제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자는 공화국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1951년 11월 27일부터 개시된 의정 제3항 토의에서 미제는 정전후 전쟁이 발생되지 않도록 보장할데 대한 공화국의 합리적인 제안에 대하여 또다시 반기를 들고 저들이 남조선에서 자유롭게 군사력량을 증강하며 정전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조선에서 전쟁을 재도발할수 있게 하려고 책동하였다.
12월 11일부터 시작된 의정 제4항 포로문제토의에서도 미제는 전쟁포로처리에 관한 국제협약을 무시하고 이른바 《1 대 1 교환》, 《자원송환》 등을 들고나와 공화국측 포로의 강제억류를 획책함으로써 담판을 지연파탄시키려고 하였다.
한편 미제는 정전담판막뒤에서 공화국의 후방에 대한 맹폭격을 계속 강화하면서 전선에서는 세균무기까지 사용하였으며 전선에 막대한 병력과 전투기술기재들을 투입하여 새로운 군사적공세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미제는 전선에서 거듭 패배하고 《공중우세》도 맥을 추지 못하게 되였으며 범죄적인 세균전으로도 조선인민을 놀래울수 없게 되자 하는수없이 1952년 2월 6일부터 19일까지의 기간에 진행된 정전담판회의에서 의정 제5항 관계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문제토의에 응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이 발생한 후 3개월내에 한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조선으로부터 모든 외국군대의 철거 및 조선문제의 평화적해결 등 문제들을 협의할것을 관계각국 정부에 건의할것을 규정한 공화국측의 수정안을 받아들이게 되였던것이다.
미제는 1952년 5월 2일 의정 제3항 정화 및 정전감시기구의 구성과 권한문제토의에서 공화국측이 제출한 제안을 토대로 하여 뽈스까,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 스웨리예, 스위스 등 4개국 대표로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하며 동위원회 시찰소조들의 출입지점을 각기 5개소(우리측의 신의주, 청진, 흥남, 남포, 신안주, 상대측의 부산, 인천, 대구, 강릉, 군산)로 하는데도 합의하였다.
하지만 미제는 의정 제4항 포로송환문제토의에서 계속 난관을 조성하였다. 공화국측에 수용되여있는 자기들의 포로는 전원송환하고 저들에게 수용되여있는 공화국측 포로에 대해서는 《자원송환》을 계속 고집함으로써 담판을 또다시 침체상태에 빠뜨렸던것이다.
미제는 회의장밖에서 저들의 《자원송환》주장을 《합법화》하기 위해 인민군포로들에 대한 악착한 고문으로 이른바 《선별》을 진행하였으며 그에 응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한편 1952년 6월과 7월에 공화국측 포로인원들을 강제《석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조국에 돌아올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는 1952년 전 전선에서 여러차례 대규모적인 공격을 되풀이하던 끝에 1953년에 들어와서는 보다 대규모적인 《신공세》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공화국측의 드세찬 타격에 의하여 그것은 파탄을 면할수 없게 되였다. 결국 적들은 더욱더 곤경에 빠지게 되였다. 포로교환문제로 하여 1952년 10월 8일 정전담판의 중단을 선포하였던 미제는 곤경에 빠진 처지를 회복하기 위해 1953년 2월 22일 쌍방의 병상포로를 교환할것을 공화국측에 제의하여왔다.
공화국측은 이에 동의하면서 이와 함께 정전담판을 재개하고 전반적포로교환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전을 실현할것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정전담판은 재개되게 되였다. 미제는 재개된 정전담판뒤에서 계속 《자원송환》, 《현지석방》을 들고 인민군포로들을 강제억류하려고 책동하면서 공화국의 후방, 특히 발전소들과 저수지들에 대한 맹폭격을 감행하였다.
공화국은 미제의 이러한 책동에 대처하여 1953년 5월중순부터 전 전선에 걸쳐 강력한 반타격을 가하여 적들의 방어선들을 허물어뜨리고 놈들을 최종적으로 격멸할 태세로 대답하였다.
더는 어쩔수 없게 된 미제는 정전담판에서 1년 6개월동안이나 끌어오던 포로교환문제에서 공화국의 합리적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1953년 6월 8일 드디여 합의에 도달하게 됨으로써 조선정전의 앞길에 놓였던 마지막장애물이 제거되였다. 그러나 미제는 정전협정조인을 위한 준비가 거의 되여가던 때인 6월중순에 이미 합의된 포로송환문제에 대한 협정을 란폭하게 유린하고 우리측 포로인원을 《석방》의 명목밑에 강제억류하는 도발행위를 감행함으로써 정전담판을 또다시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와 함께 리승만역도를 부추겨 광란적인 《정전결사반대》, 《단독북진》소동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정전실현을 방해하여나섰다.
공화국측은 이에 대처하여 7월 13일부터 전 전선에 걸쳐 새로운 강력한 반타격을 가하여 새로 넓은 지역을 해방하였다. 전선형편이 갈수록 저들에게 불리하게 되자 미제는 어쩔수없이 조선정전협정에 도장을 찍지 않을수 없었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여 조선정전은 실현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정전의 실현은 외래제국주의련합세력과 미제의 앞잡이 리승만매국도당을 반대하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3년간에 걸친 영웅적투쟁의 결과이며 우리 인민이 쟁취한 력사적승리입니다.》
정전의 실현, 이것은 우리 공화국이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련합세력과 리승만매국집단을 반대하며 조국의 자유와 통일독립을 위하여 벌린 영웅적투쟁의 결과였다.
그것은 우리 인민군대와 전체 인민이 미제에게 결정적타격을 안기고 쟁취한 력사적승리였다. 조선전쟁에서 미제는 군사, 정치, 도덕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고 세계인민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여 배격당하게 되였으며 내리막길을 걷게 되였다.
조선정전협정의 체결은 평화적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은 획기적인 사변이였으며 조국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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