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조국소식 | 나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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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9-04-25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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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갔다.
사랑하는 남편 윤이상을 잃고 방황하는 마음의 안정을 평양에서 찾았다. 그곳에서 그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저주로운 남조선을 결별하고 반생을 서방세계에서 살아온 그녀가 생의 말년에 자기삶의 보금자리로 정한 북부조국이 어떤곳이였는지 그의 마음속 독백을 통해 들여다 본다.
나의 독백
등대지기
남편이 베를린예술대학 교수인 탓에 우리는 방학을 리용해 1980년대 초엽에 북을 방문했다.
북의 여름은 무덥다.
함경남도 리원군 송단이란곳에 초대소가 있어서 거기서 한여름 휴가를 지내기 위해 기차를 타고 평양을 떠났다.
초대소는 흰 모래사장이 바라다보이는 바다가에 있었다.
눈이 부시게 흰 해빛이다.
바다가라서 그런지 주변의 밭은 깨끗한 흰 모래가 많이 섞여있었다. 파랗고 불그스레한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고추밭도 있고, 껍질이 연한 자그마한 가지들이 달려있는 가지밭도 있었다. 호박넝쿨도 뻗어있었다. 탐스러이 피여있는 노란 호박꽃옆에서 반질반질한 둥근 호박이 큰 호박잎에 몸을 숨긴채 크고있었다.
모두 별것 아닌 우리 나라의 농촌풍경이다. 그러나 오랜세월동안 우리것을 접하지 못하고 외국에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모두 목마르게 그리운 향수였고 농어촌의 정서를 한꺼번에 되살리는듯한 정겨움이였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에는 넓은 베란다가 전부 덮일만큼 큰 돗자리를 깔고 앉아 까마귀들이 그 일대 적송나무우로 날아가며 한가하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온갖것이 다 한가하고 여유가 있는 이곳에 별별 종류의 까마귀가 자기들끼리 말하고 노래부르며 지나간다. 나는 까마귀가 그저《까-우, 까-우》하는줄로만 알고있었으나 이곳 까마귀소리는 종류가 여간 많지 않다. 목소리도 다양하다.
《가아-우 가아우.》
《아-우 아-우, 아- 아-》
《까- 까-, 까-우 까-우》
저물어가는 저녁무렵에 듣는 까마귀소리는 여유있고 영감이 넘친다.
《아우 아- 아우 아-》
《아니, 무슨 까마귀소리가 저런 소리를 내지?》
그 소리를 음악같이 듣고있던 남편과 나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하도 오래돼서 잊어버렸는데 언젠가 세계문학소설이나 신문기사에서 읽은 이야기다.
미국의 한 외딴 섬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허허망망 수평선만 바라보며 살고있는, 고국 폴란드를 떠난 등대지기에게 어느날 폴란드신문이 한장 날아왔다. 그는 고국의 신문을 보는 순간 그 신문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날이 어두워지는것도 잊고등대에 불을 켜는것도 잊었다. 그래서 지나가던 배가 암초에 걸려 파손이 되는 바람에 그 등대지기기가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단다.
고국에 가지 못하고 외국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이야기이다.
남편과 나는 동백림사건뒤에 우리 땅을 밟지 못했다. 김대중구출운동에 나서고 나서 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 남편은《한민련》이라는 해외 한국인세계조직의 유럽지구 의장자격으로《동백림사건》후 처음으로 1979년 북을 방문했다.
마치 어마어마한《국제간첩단조직》인양 선전하며 조작한 이 사건에 걸려들어 얼마나 고생했는가. 그후 1969년 독일로 돌아온 우리는 그때 입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조국이란 단어를 잊고 살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 조국을 잊을수 있겠는가. 그래서 10년세월이 흐른뒤 민주화운동조직의 의장자격으로 민족화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떠난 평양행이였다.
내가 1961년에 남편이 류학가있던 독일로 향했을때는 한국의 정치상황이 리승만정권의 부패와 부정선거, 장면정권의 무능함, 군사정권의 대두 등 신물이 날만큼 짜증나던 시절이였다. 그러다보니 그 무렵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을 주변에서는 모두 부러운 눈길로 보았고 나도《이 지긋지긋한 나라, 다시는 밟지 않겠다.》하는 마음이였다.
우리 나라 속담에《그 우물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침 뱉고 떠났으나 언젠가 다시 되돌아와서 그 우물을 마신다.》는 말이 있다.
그말의 뜻 한가지는 막말 못한다는 뜻이요, 또 한가지는 아무리 돌아봐도 제 살던 정든 곳을 잊을수 없다는 말이리라.
9월 초가을의 북녘하늘은 푸르고도 맑고 높았다. 잊고 살려고 한 고국의 강산은 우리에게 잊고 살수 없는 조국애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하늘과 훈풍과 해빛, 어떻게 이렇게도 수려하고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외면하고 살수있단 말인가.
우리가 생을 받고 나서자란 이 고마운 어머니의 땅, 그우에서 자라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까지도 우리에게 반가움을 안겨줬고 그우를 지나가는 개 한마리, 소 한마리까지도 나와 같은 형제요 동포라는 정겨움을 느끼게 하였다.
유구한 세월 이땅에서 생을 받고 함께 먹고 살았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조국이란 생명과도 바꿀수 없는것임을, 그 귀중함을 떠나고서 비로소 알게 되였다. 북에서 접하는것이 모두 나에게는 새롭고 고맙고 반가운것이였다.
우리가 송단에 도착한 다음날 원산에서 밤을 새워 온 한척의 배가 도착했다. 남편이 바다를 좋아하고 어릴때부터 낚시에 취미가 많았다는걸 안 김정일비서가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보낸 배였다.
배만 있으면 저 멀리 보이는 섬에도 갈수 있고, 크고 넓은 바위들이 바다우에 앉아있는 송단의 명물《학사바위》라는데도 갈수 있다.
우리나라 동해바다는 경치가 좋기로는 그만이다.
근 2주일을 송단에서 지내면서 원산에서 온 댓사람들과도 가까워지고 친해졌다. 나는 그때 그 선원들의 인격과 진실성에 감동하여 옆사람에게 그들의 됨됨이를 칭찬했더니 《그분들은 우리 공화국의 노력영웅들입니다》라고 한다. 뭐라고 표현할수 없을만큼 헌신적이고 진실한 그들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은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북에서는 무슨 행사가 있을때면 사람들이 가슴에 많은 훈장을 달고 나온다. 하나하나의 훈장이 모두 얼마나 큰 노력의 상징인가. 나는 항상 그 많은 훈장들가운데서도 노력영웅이란 칭호에 경의를 표한다. 그때 그 선원들을 생각하면서…….
그때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때의 송단을 생각하면 섬 학사바위, 배에서 낚시하던 일, 모래속의 많은 조개, 눈이 부실만큼 흰 모래사장, 먼바다까지 나갔다가 어두워지면 거센 파도를 뚫고 속력을 내며 돌아올때의 긴장감, 예술에서나 민주화운동에서나 한창 왕성하게 일하던 남편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가 영원히 떠나버린 오늘날에도 그때가 한편의 서정시처럼 그립고 아련하다
1981년 8월을 추억하며
나의 독백
외국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독일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아들과 딸이 30년 넘게 살아온 베를린을 떠나갔다. 딸은 뉴욕으로, 아들은 캘리포니아로 제각기 삶을 찾아서 미국으로 갔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강한 정신력으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던 남편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생활할수 있도록 신경을 쓰며 열심히 살아왔다. 언젠가는 죽음의 이별이 올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살아온 나에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 없는 나의 삶은 생각도 할수 없었다.
고맙게도 내앞에서 그는 갔다. 숨이 멎을때까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은채 끝까지 지켜보는 나의 눈앞에서 멀리멀리 떠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지 못하게 지키며 흔들어 깨우는 딸의 정성덕에 나는 죽음과 삶을 왕래하다가 결국 삶을 이어가게 되였다. 하지만 베를린의 삶은 이제 적막하여 더는 혼자 견디기 힘들다.
나는 나다니기 싫어하는 성질이여서 한곳에 안착하여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지못하는것이 현재의 내처지이다.
베를린집을 그냥 두고 나는 지금 배가 되여 바다우에 떠있다. 그리고 내가 돌아다니는 항구는 베를린, 캘리포니아, 뉴욕, 평양, 이렇게 네곳이다.
고향에는 아직 가지 못한다. 죽어서도 못돌아간 남편의 40년 추방생활을 내가 뒤를 잇고 있다.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어느 곳이 나의 잠자는 곳이 될는지 아직도 모른다.
남편이 잠자고 있는곳에 가고싶다. 남편이 살아있을때에는 그곳의 작은 집이 나의 고국이요 고향이였으나, 그가 떠난뒤에는 마치 대해속의 작은 고도와 같다.
나의 또 다른 집이 평양에 있다. 나는 그곳에서 마음을 주고 받으며 평화를 누리려고 한다.
캘리포니아의 아들 집에서
먼 평양의 하늘을 생각하며
1998년 4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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