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 간추린 미주운동사 7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1-23 11:51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간추린 미주운동사 7
하용진(재미동포서부연합회 사무국장)
16
2000년 6월 15일 . 분단 반세기의 대결을 접고 남북의 정상이 평양에서 만났고 우리민족의 힘으로 통일의 방도를 찾고 통일을 달성하자는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한다.
경천동지. 그것은 반세기 오욕과 굴종을 뒤집는 대반전이었으며 외세에 의해 고통을 감내해 왔던 우리민족에게 21세기가 주는 거대한 희망이었다. 그것은 반세기를 지탱해온 냉전의 벽을 최후로 무너뜨리며 세계의 양심에게 보내는 한민족평화의 메시지였다.
6.15선언의 발표 이후 한 민족, 한 핏줄임을 실감하면서 남북간의 교류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전 분야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어 갔다.
특히 각계 각층 민간사이에 있어서의 교류는 가히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활동적이었다.
이산가족 서울, 평양 교차 방문, 6.15 금강산 대토론회, 남북농민, 노동자대회, 8.15민족통일대축전의 대규모 남측대표단 방북 등 그것은 실로 용솟음치는 통일 대하의 거대한 물줄기였으며 온 겨레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 감격이었다.
한편 98년 핵사찰을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위기상태에서 극적인 타결을 통해 관계개선을 모색하던 조-미간에도 6.15선언 이후 조명록 특사와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교차방문이 진행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에의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어 가기 시작했다.
민족화해와 교류가 확대되고 조국통일의 함성이 심장과 국토에 물결치면서 6.15를 사수하고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한반도는 물론 이곳 미주에서도 움틀거리기 시작했다.
국내는 통일운동 제 단체가 뭉친 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가 2001년 3월 결성되었고 이 곳 미주에서는 범민련재미본부, 동포연합, 자주연합을 비롯한 통일운동단체들이 새로운 전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17
6.15선언의 민족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미주에서의 움직임은 이곳 나성에서, 통일맞이 나성포럼의 결성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6.15선언 직후 나성지역에서 청춘을 받쳐 통일(민청), 문화(공동체), 노동(노동상담소) 분야에서 활동해왔던 청년활동가들이 변화된 정세에 적극 대처할 수 있는 조직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깊은 논의에 들어갔다.
2월 9일 조국통일 3대원칙을 기본지침으로 자주적 동포사회건설, 남, 북, 해외간의 교류와 연대확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정착을 내용으로 하는 강령을 내걸고 6.15선언의 미주지역 실천을 담보하기 위해 홍순형, 송현정, 하용진, 정준규, 박진원, 이용균, 김현정 등이 주위의 지지와 격려 속에 통일맞이 나성포럼을 결성하게 된다. (88년 창립, 13년 동안 미주청년 통일운동을 담보했던 민청이 나성포럼으로 발전적 해체를 한다.)
미주통일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게 된 나성포럼의 결성으로 6.15선언 이후 고무되기 시작한 나성지역의 통일운동이 활동에 큰 활력을 얻게 된다.
또한 나성포럼은 지역운동의 오랜 숙원이었던 전임 상근제를 도입하여 지역운동의 실무를 담보해 나갔고 단체간의 연대를 강화해 가는 속에 청장년을 통일운동의 주력으로 나서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실천활동에 있어서도 공개포럼 개최나 타블로이드판 대중지<One Korea News> 발행 등을 통해 6.15선언이후 열려진 공간에서 대중화에 적극 대처해 나가고 있다.
그 외 6.15의 변화는 각 분야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던 바 우리문화공동체는 해체 후 김정열, 문동호, 방연선, 전기선, 전병학 등이 당시의 기관지 월간 열림을 재조직화해 정기적 모임을 갖고 건강한 동포사회를 지향하는 잡지 발간을 꾸준히 전개해 오고 있다.
2001년 중반에는 육영빈, 전진경, 남장우, 남기원, 김현숙, 고동환 등 1.2세, 2세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운동단체 민들레가 조직되어 민족, 통일운동의 새로운 가능성과 전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민들레 산하의 새땅소리는 각종 집회와 시위에 참여해 정치운동에 문화매체를 적극 활용하면서 문화선전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또한 2002년 2월 ‘맑은 세상 만드는 노래, 참된 세상 일구는 마음’이란 슬로건으로 미주최초의 전문노래패 노래지기(회원: 김하림, 최정휘, 정은경, 박진만)가 탄생하여 동포사회와 이민자 삶의 모습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공연하는 등 문화운동에 있어서 보다 세련되고 다양한 시도들이 나오게 되어 미주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나성과 함께 미주운동을 지탱하고 있는 뉴욕의 경우, 90년대 중반에서 시작된 KEEP의 참가자들이 중심이 되어 실천활동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1999년 1.5세, 2세의 전문직 청년(서승혜, 김은희, 염기숙, 육영운, 박혜정, 강병철 등)들이 노둣돌을 조직한다. 노둣돌은 미주운동사 처음으로 1.5세, 2세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시킨 민족민주운동단체로 교육분과, 의료분과들의 전문역할을 통해 동포사회운동을 전개해 가는 한편 통일분과의 활동을 통해 동포사회에 통일운동 당위성 등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면서 미주 청년통일운동의 선봉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특히 2001년부터 ‘이북바로알기’운동의 차원에서 매년 추진하고 있는 DPRK Education & Exposure Program(DEEP)은 미주청년통일운동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며 큰 관심을 불러오고 있다.
노근리사건이 폭로되어 한국전쟁당시의 미군범죄가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자 남북해외가 공동으로 미군의 범죄를 규명하기 위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가 발족되고 정기열, 정유미, 이화영 등이 전민특위의 공동사무국을 맡아 활동을 전개하고 나성에서는 범민련 재미본부, 나성포럼, 민주노동당 미주후원회, 민족통신, 동포연합 서부위가 전민특위 서부위원회(위원장:서정균)를 구성한다.
2001년 6월에는 전민특위와 미국의 대표적 반전진보단체인 International Action Center(IAC:국제행동센터)가 주관이 되어 코리아국제전범재판과 코리아 평화대행진을 뉴욕과 워싱턴디시에서 개최한다.
한국전쟁기간과 분단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의 미군범죄를 폭로하고 미국에 전 세계 양심의 이름으로 유죄를 선언한 이 행사에는 전국연합, 한총련, 재일 한통련, 한청등 남, 일본, 유럽, 카나다, 미주 각지역 등지의 여러 단체와 인사, 세계 각지의 진보적 외국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미주운동사 최대의 행사가 되기도 했다.
그 외 미 동부지역을 기반으로 한 단체(동포연합, 자주연합, NAKA)들이 중심이 되어 6.15통일시대에 공동의 연대전선 구축과 역할분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민협과 6.15미주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18
21세기의 거대한 희망.
6.15선언으로 인해 조국통일이 단지 우리의 소원이 아닌 다가올 엄연한 현실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희망 앞에 우리는 또 하나의 난관을 만나게 되었다.
개표 부정의 우여곡절 속에 연방대법원을 통해 대통령직을 탈취한 부시는 취임하자마자 군수업자의 이해를 반영한 NMD정책을 밀어부치며 다시금 세계를 군비경쟁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전임 클린턴의 대북정책을 백지화하면서 한반도를 긴장정국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부시의 폭거와 전횡이 전 세계를 위협하는 가운데 전대미문의 911사태가 터졌다. 기다렸다는 듯 부시는 빈 라덴 사냥을 핑계로 전쟁에 돌입했다. 마침내 아프카니스탄 폐허를 자축. 마자원독점의 길을 터고 군사기지를 확보한다. 그리고 오늘 빈또 다른 먹이감을 찾아 페르시아만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테러와의 싸움에 편승한 이스라엘 빈팔레스타인 학살을 자행한다. 한편 911을 빌미로 미국의 극우세력들은 자국내 이민자들을 탄압하고 삶을 옥째이기 위한 법안들을 위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안하무인. 부시의 오만은 갈수록 그 증상을 더하고 마침내 2002년을 들어서자 북을 ‘악의 축’이라 칭하고 선제 핵 공격도 불사하겠다며 우리민족에게 일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미국의 폭력적 방식에 의해 6.15선언에 따른 민족화해와 남북교류의 춘풍이 일시에 위협을 받고 긴장이 고조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누구인가 명백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반세기의 점령기간 동안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에 기대어 온갖 만행에 체질화된 주한미군의 오만 무례함이 마침내 길 가던 두 여학생을 전차로 치어 죽이면서 분노가 폭발하였고 반미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엄중한 역사의 물음 앞에 놓여 있다.
전진이냐. 예속이냐.
6.15선언후 조국통일의 열망과 분위기가 더 높아졌고 우리민족끼리 기필코 통일의 문을 열고 말겠다는 결사의지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고 나선 외세와 반통일세력들과의 마지막 한판 승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6․15남북공동선언의 성과를 지켜내고 확대시키는 역할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보다 폭넓고 대중적인, 실천적인 미주통일운동의 전망을 위해 역사의 고비마다 선두에서 투쟁을 이끌었던 이 땅의 ‘청춘’들이 단결의 기치를 들고 앞장서 나설 때이다.
19
의미 있는 변화, 02년 10월 11일 뉴욕에서 통일맞이 나성포럼, 노둣돌, 자주연합(청년위원회)의 대표자들이 모여 (민들레와 우리문화나눔터의 대표들도 업저버로 참가) 미주운동의 단결을 촉진하고 6.15시대를 주도하는, 미주청년운동체의 건설에 합의하고 뉴욕, 워싱턴디시, 나성을 연결하는 연대체로서 재미청년연대(Corean Action Network for Democracy & Unification : CAN-DU)를 결성하였다.
* 이 글은 필자가 통일맞이 나성포럼의 사무국장으로 있던 2002년 10월 재미청년연대 결성을 위한 회의에서 발표한 글로 미서부지역운동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이 글의 1970~80년대 초 부분은 고 홍동근 목사님께서 서거하시기 두어 달 전 만난 자리에서 구술해 주신 것을 정리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