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님 방북, 본의 아니게 관여”
<미니인터뷰> 도상태 삼천리철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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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상태 삼천리철도 이사장과 15일 나고야호텔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 통일뉴스 : 삼천리철도가 ‘문익환 목사 서거 20주기 4.2남북공동성명 25주년 기념’ 행사를 나고야에서 개최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설명해달라.
■ 도상태 이사장 : 아주 묘한 인연이 문 목사님과 있다. 특이한 인연이라고 할까. 목사님이 서거하셨을 때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추모행사가 있었다. 그때 도쿄 행사에는 참석했는데 나고야에서는 한 번도 나고야에서는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20주기라는 의의있는 기회에 행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맡았다.
□ 요청은 어디서 온 것인가?
■ 통일맞이에서 도쿄 정경모 선생 쪽으로 먼저 제안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하시겠다는 답을 받고 통일맞이의 요청이 간접적으로 삼천리철도 이사장에게 왔다.
□ ‘문 목사님과의 특이한 인연’을 언급했는데, 어떤 것인지 소개해달라.
■ 작년은 김대중 대통령 납치 40년 된 해였고, 올해는 문 목사님 서거 20주년인데, 내가 문 목사님과 인연이 맺어진 것이 김대중 대통령 납치 사건이었다.
한국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도 평소에 많았고, 그 운동에 관여하면서 박병채라는 나고야에 계신 분과 알게 됐는데, 그분이 유원호 선생을 소개해줬다.
유원호 선생과 합영사업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합영회사를 1988년에 설립했다. 88년 10월 아니면 11월에 내가 일본돈 1.500만엔을 합영회사에 투자했다.
그런데 1989년 3월 문 목사와 정경모, 유원호 씨가 일본을 경유해 평양에 갔다. 방북할 때 몫돈이 필요했을 텐데, 그 돈 일부를 합영회사에서 끌어쓰지 않았나 하는 것이 한국 정보계통 또는 검찰의 시나리오다.
유원호 씨는 한마디도 안 하지만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웃음)
□ 도 이사장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라고 보나?
■ 그렇다. 문 목사님이 돈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유원호 씨도 돈이 없고, 정경모 씨도 돈이 어디 있나?
그래서 4월 일본에 돌아와서 그 때 청음으로 도쿄 긴자 도브호텔에 유원호 씨를 만나러 갔다. 그 숙소는 사회당 당수 도이 다카쿠씨가 소개해준 호텔이다.
거기 가서 유원호 씨와 만나고 정경모 씨하고 만났다. 그런데 “나도 문익환 목사님한테 인사하고 싶다” 했는데, 정경모 씨가 막았다. “만나면 안된다”고. 그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
□ 만나면 피해가 갈까봐 그랬던 것 아닌가?
■ 유원호 씨 만나 이야기하고 정경모 씨 만나 이야기했는데 어떤 피해가 있겠나.
문 목사님이 5년 후에 돌아가셨던 1994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맛본 해였다.
□ 어떤 의미에서인가?
■ 내가 만든 회사에서 내부갈등이 있어서 경영자 자리에서 쫒겨났다. 그 이유도 아마 합영회사에 승산이 없는 투자를 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 그 이후에라도 문 목사님을 뵌 적이 있었나?
■ 당시 내 자식 셋이 공부하고 있어서 우이동에 집이 있었지만 내가 서울에 못 들어갔다.
문 목사님 돌아가신 뒤 95,96년경 감옥에서 나온 유원호 씨 소개로 수유리 박용길 여사 계신 곳은 서너 번 찾아간 적이 있다.
□ 문 목사님 방북 후폭풍은 없었나?
■ 자식들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가야했다. 도쿄 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을 소개받고 만났다. 그랬더니 “한국에 가도 좋다. 우이동 너희 집에서 이야기만 듣는다”고 해서 그걸 믿어서 서울에 갔다.
□ 언제쯤이었나?
■ 방북 3,4년 후에, 목사님 감옥에 계실 때 서울에 갔다. 바로 비행장에서 “이리 오라”, 바로 호텔로 갔다. 거기서 2박3일 조사 받았다. 기본 코스였다.(웃음)
□ 고문을 받지는 않았나.
■ 그건 안 했다.
□ 주로 어떤 혐의에 대해 조사 받았나.
■ 나도 많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주로 어떤 관계가 있느냐? 돈 이야기도 나왔다. 나는 피해자였고, 그들도 다 알고 있었다. 법적으로 투자한 거다.
그전에 우리 아이들이 있는 우이동 집에 가택수색도 나왔다.
□ 문 목사님과의 인연은 주로 유원호 씨와의 연관성 같은데.
■ 내가 ‘김대중 납치사건’ 때 화가 나서 도쿄에 있는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사무실을 찾아갔다. 한민통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초대의장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도저히 못 참겠다고 생각해 구출운동을 하러 갔다.
당시 32살 때인가의 일이고, 찾아가서 소개받은 사람이 박병채 씨다. 박병채 씨와 정경모 씨가 아주 절친한 사이다.
나고야 사람으로서 일 이야기도 많지만 박병채 씨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이 유원호 씨다. 유원호 씨가 민주화 운동하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해 정치인들의 서예작품을 구입해준 적도 있다.
□ 실례가 될 수 있지만 기자로서 묻겠다. 유원호 씨로부터 합영투자를 제안받고 투자할 때 혹시 그 돈이 정치자금이나 다른 곳으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해봤나?
■ 아니다. 일본돈 1,500만엔 보냈고, 그 후에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기계도 서울 회사로 보냈다.
유원호 씨 남동생 유원철 씨가 가드레일 회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회사가 실제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유원호 씨가 들어간 후에도 유원철 씨와의 거래는 계속됐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측이 큰 거짓말을 하나 했다. 한국 쪽이 51% 자본금을 법적으로는 출자했지만 사실은 우리 돈 1,500만엔과 1,500만엔 이상 되는 우리가 보낸 기계가 전부였다. 한마디로 한국 쪽은 페이퍼 컴퍼니였다.
그래도 인생은 또 재미있다. 그 후에 유원호 씨의 동생 유원철 씨가 성실하게 같이 가드레일 일을 해서 우리 회사가 투자한 만큼 이득을 봤다.
□ 결과적으로 봤을 때, 유원호 씨가 돈을 쓰기는 썼을 것 같다. 어쨌든 한국 정부가 문제 삼지 않았나?
■ 나는 피해자라고 다 알고 있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정치에 뜻이 있거나 정치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나한테 정치적 인연이 맺어져 문익환 목사님 방북도 본의 아니게 관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회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사귀다 보니까 강종헌 씨도 만나고 오사카 민족학교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게 됐다. 오사카 국제학원이다. 돈이 없어서 학교 못 나가는 아이들 보고 또 돈을 냈다. 회사에서 또 반기 드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 유원호 씨와는 교류하고 있나?
■ 최근에 유원호 씨와 자주 만나지는 않고, 동생을 통해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도다. 몸도 그리 성치 않으신 것 같고 귀도 잘 안 들린다고 하니까 일부러 만날 것도 없다.
다만 나는 유원호 씨와의 만남은 후회하지 않고 그분이 목사님 방북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어떻게 보면 그 분이 자기 인생 건 거니까 그건 높이 평가하고 있다.
94년에 문 목사님 돌아가셨고, 나는 회사에서 굉장히 궁지에 몰리고, 95년에는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굉장히 인생의 기로에 섰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94년 문 목사님 서거, 10년, 20년 단위로 나한테도 큰 변화가 있었다.
□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극복했나?
■ 어려울 때는 물론 최선 다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을 때가 있고, 세월이 해결해 준 때도 있었다.
[출처: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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