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2월방북 취재기 (8) 북 지도자 가문의 뿌리를 알아본다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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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조국소식 |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2월방북 취재기 (8) 북 지도자 가문의 뿌리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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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사 노길남 편집인 작성일09-03-11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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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사 노길남 편집인은 "뿌리없는 나무는 없다. 현재는 지난 역사의 반영"이라고 전제하고 "이북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북부조국이 오늘과 같은 역사를 건설하여 세계 만방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과시하고 있는 것은 그 원동력이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고 소개하며 이북 지도자들의 뿌리인 그 가문을 소개했다. 그의 올해 2월 방북취재기 가운데 여덟번째인 "이북사회 지도자 가문의 뿌리를 알아본다"를 전재한다.


이북에서 3대장군으로 불리우는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 김정숙 항일투사-민족통신 자료

[방북취재-8] 이북 사회 지도자 가문의 뿌리를 알아본다

뿌리없는 나무는 없다, 현재는 지난 역사의 반영이다


[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역사에서도 과거 없는 현재가 없듯이 오늘 이북역사의 현주소는 지난 역사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길남 특파원
이북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북부조국이 오늘과 같은 역사를 건설하여 세계 만방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과시하고 있는 것은 그 원동력이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녘 지도자들의 가문과 그 뿌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이북 학자들과 지식인들,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두루 만나 보았지만 그 어디를 가나 북녘 동포들은 모두 북부조국,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오늘과 같이 위대한 나라로 건설한 지도자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고 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비전향장기수 선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북의 지도자들은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대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한 식솔의 어버이로 모시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김일성 주석을 가리켜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이라고 부른다. 그 대를 이어 김일성 주석의 온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리켜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이라고 부른다.

이북동포들이 최대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현지지도를 나와 자신들의 공장이나 농장에 다녀 간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앉으나 서나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가지고 있다. 국가행사나 어떤 모임에서 지도자가 나오면 이를 바라보는 이북동포들은 소리치며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한다. 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현상을 서방언론인들처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한 학자는 이북의 인민들이 지도자를 존경하고 흠모할 뿐 아니라 지도자가 얼마나 자기 인민을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도 한 예를 들어준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이 왜 색 안경을 써야 하는지 아는가를 묻고 이렇게 대답한다. 이틀에 한번, 사흘에 한번 정도 쪽 잠을 자며 줴기 밥(주먹밥을 의미)을 먹으며 공장과 농촌, 인민군대 초소들을 현지지도 하느라고 눈에 충혈이 되고 피곤한 기색이 있어 이런 표정을 인민들이 마음 아프게 생각할까 봐 색안경을 착용한다고 귀띔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민위천>의 사상이고 지도자-당-군민이 동지적 의리로 <일심단결>된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일성 주석, 김정숙 투사, 김정일 위원장 어린시절
김일성 주석은 항일투쟁으로 주체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새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무려 2만 6백여 개 단위를 다니며 현장지도했다. 그는 현장에 직접 나가 현실을 알아보는 일을 비롯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 지역과 대상에 적절한 지침을 주며 방조하는 일 등의 국사에 관한 일로 현지지도 한 것을 거리로 계산하여 보면 무려 52만8백 킬로미터나 된다. 이 길이는 지구를 열두 바퀴 반 가량 돌아 본 거리가 되는 엄청난 거리이다. 김정일 위원장도 이 길을 따라 수없이 많은 현지지도에 나섰다. 그는 지난 해에도 1백10여 차례나 현지지도로 정력을 쏟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특히 2012년 김일성 주석의 탄신 100주년을 맞는 해에 경제강국을 이룩하여 강성대국의 문패를 달기 위해 강선제철연합기업소를 비롯하여 각급 공장들, 농장들, 기업소들, 인민군 초소들을 현지지도하며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전역을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이때에 적당한 표현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가문에 대한 그 뿌리를 알기 위해 도서관에 들려 개략적이나마 가문의 인맥들과 이분들의 활동상황을 대충이나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더군다나 조국통일의 대상이 이북이기에 이북을 이끌어 가는 중심 핵인 이북의 지도자와 그 가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삽시간에 솟구쳤다. 그리고 이북이 다른나라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마땅하게 그 내력을 아는 것이 지성인들의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여 이번 방북기간을 통하여 도서관 일부 자료와 인터네트 일부 정보들에 기초하여 그 뿌리를 살펴보았다.

오늘날 전세계가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는 이북이다. 이 사회를 이끌고 있는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위원장 가문의 뿌리와 그 줄기가 어떻게 이어져 왔을까.

김정일 위원장이 태어난 백두밀림의 귀틀집
아버지 쪽으로 올라가면 김일성 주석, 그 위에 김형직 선생, 그 위에 김보현 선생, 그 위에 김응우 선생으로 이어진다. 어머니를 포함하여 부인 쪽으로 올라가면 김정일 위원장의 어머니인 김정숙 항일혁명투사, 그 위 김형직 선생의 부인 강반석 여사, 그 위 김보현 선생의 부인 이보익 여사, 그리고 그 위 김응우 선생의 부인 ‘이씨 부인(봉건시대에는 기혼여성의 이름이 없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가문에서 애국활동을 한 인물들은 또 김형직 선생의 형제 분인 김형권 선생,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철주 선생 및 김정숙 여사의 집안 인맥 등이 포함 된다. 김정일 위원장의 가문은 아버지 쪽이나 어머니 쪽 모두가 항일혁명, 반일민족해방 운동에 참여한 애국자 집안이다.

이북사회는 특히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 그리고 김정숙 항일혁명투사를 《3대장군》으로 부르며 흠모해 왔다. 이 가문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해외동포들이나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김정숙 항일혁명투사를 포함하여 다른 가문의 인맥들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간단하게 나마 이들 인맥의 애국적 활동을 소개한다.

▲김정숙 항일혁명투사(1917.12.24-1949.9.22): 그는 1917년 12월24일 함경북도 회령시 오산덕의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가난 한 농가에서 태어나 1931년 9월 소년선봉대에 입대하고 31년과 32년에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32년 7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해서 중국 연길현에서 아동단 지도자로 활약한다.

김정숙 항일혁명투사
3년 뒤인 1935년 9월에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혁명활동을 전개하다가 그 이듬해인 1936년 4월부터 김일성 주석을 모시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서 친위전사로 복무하며 <시난차 전투>, <서강 전투>, <무송현성 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그러다가 1937년 1월에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한다. 1937년과 1938년에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임무를 받고 장백현 도천리와 국내의 신파(김정숙군), 신흥, 풍산(김형권군), 허천, 랑림, 단천, 리원, 홍원, 북청일대 등 여러 지역에서 당 및 혁명조직과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했다.

그 당시 일제 병사들과 투쟁하며 한 때 고난의 행군시기를 맞는다. 그는 당시 청봉 밀영에서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철저히 옹호 고수하며 투쟁에 임했다. 1939년 가을 600벌이나 되는 조선인민혁명군 병사들의 겨울군복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단 몇 명의 재봉대원들과 함께 20일 동안에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는 <홍기하 전투>, <대사하치기 전투>를 비롯한 각 전투들에서 김일성 주석의 신변안전을 보위하는데 기여해 오면서 당시 소부대 활동시기 백두산밀영을 거점으로 하여 무산, 연사, 삼장지구 등 국경연안과 북부 조선일대 투쟁근거지들을 두루 다니며 활동해 왔다.

김정숙 여사
김정숙 투사는 광복후 김일성 주석의 새 조국건설 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 당, 국가, 군 건설위업에 이바지했다. 그는 특히 김일성 주석의 아내로서 김정일 위원장의 유아시절, 소년시절 그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정숙 여사는 해방 후 새 조국건설에 한창 헌신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런 병환으로 1949년 9월22일 새벽2시40분께 32세 일기로 운명했다. 이북 정부는 그의 항일투쟁과 함께 해방 후 새 조국건설사업에 남긴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3대장군》중 한 분으로 모셨다. 함경북도 회령시와 량강도 김정숙군 김정숙읍 등지에 동상이, 혁명열사릉에 반신상이 모셔져 있다.

▲ 김형직 선생(1894.7.10-1926.6.5):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이자 김정일 위원장의 할아버지가 되는 김형직 선생은 평양시 만경대 구역 만경대에서 1894년 7월10일 태어나 부모님으로부터 애국주의 교양과 혁명적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다. 생전에는 반일민족해방 운동에 가담하여 불요불굴의 혁명투사로 활동해 왔다. 그는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조만식의 숭실학교 선배로도 알려진 인물로 특히 후대교육사업과 대중계몽, 동지규합을 위한 활동에 집중해 왔다. 그는 1913년 봄 직업적 혁명가로 나서면서 《지원》의 사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이끌면서 1917년 3월23일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그 두리에 광범한 민중을 묶어 세웠다. 이것은 반일지하혁명조직으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민족자체의 힘에 의하여 전진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여 왔다. 그는 특히 많은 사람들을 항일투쟁의 길로 인도하여 주는데 평생을 바쳤고 김일성 주석을 어린 시절부터 항일혁명의 길로 나서도록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혁명적 스승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형직 선생
그는 3.1 민중봉기 이후 변천하는 정세의 요구에 맞게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 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시키는데 선구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김형직 선생의 좌우명은 지원(志遠)이다. 지원이라는 뜻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이 사상은 개인의 영달이나 입신영명을 염두에 둔 세속적인 인생교훈이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 인생관이며 대를 이어가며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광복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이다."고 풀이했다.(김일성 저작집 45권 15~16페지 참조)

그는 아들인 김일성 주석께 자신의 투쟁과정에서 얻은 귀중한 경험과 교훈을 많이 강조하며 특히 우리민족의 혁명이 나아갈 길과 투쟁방도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뼈가 부서지고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고, 또 그런 뜻을 담은 유언을 남겼다.

그는 혁명활동거점을 무송으로 옮긴 후 일제경찰의 고문과 심한 동상의 후 과로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고려혁명당 결성과 정의부 조직에 적극 관여하며 몸소 <무송회의>도 조직 지도하면서 독립운동의 통일단결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26년 6월5일 생의 마지막 순간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인물이다.

그에 대한 자료에는 《지원》의 사상, 3대각오, 동지획득에 대한 사상, 두 자루의 권총을 고귀한 유산으로 남긴 이야기들이 있다.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와 평안북도 삭주군 남사로동자구,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 등에 동상이 세워졌고, 만경대 묘지에 반신상이 모셔져 있다.

▲강반석 여사(1892. 4. 21-1932. 7. 31): 그는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김정일 위원장의 할머니로 우리 나라 공산주의여성운동의 지도자이며 혁명투사로 활약한 인물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오늘의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1동)의 가난한 농가에서 열렬한 애국자인 강돈욱 선생과 위돈신 여사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모와 오빠인 강진석 선생으로부터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교양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반일정신이 강하였고 노동을 사랑하고 근면하게 일하는 아름다운 정신과 이웃과 벗들을 돕는 착한 성품과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강반석 여사
그는 김형직 선생의 혁명사업을 도우면서 투쟁의 길에 나섰다. 특히 집에 찾아오는 독립운동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는데 성심성의를 다한 분이다. 1917년 3월부터 남편이 활동하는 봉화리에 자리를 옮기어 그의 혁명활동을 내조하였다. <조선국민회>가 결성되어 활동할 시기에는 집에는 전보다 많은 손님들이 들끓었다. 비밀모임을 할 때에는 밖에서 망을 보는 일로 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남편의 혁명활동 근거지가 중강, 림강, 8도구, 무송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리로 가서 활동하였다.

때로는 통신 쪽지를 전달하는 연락 일도 했다. 오빠 강진석 선생의 무기를 옮겨주는 일, 여성들을 반일사상으로 교양시키는 일도 했다. 김형직 선생이 1924년 12월 또다시 일제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독한 술과 명태를 구해 황씨에게 주어 탈출을 기도하게 하였고, 1926년 6월5일 남편이 순직하게 되자 맏아들을 중학교까지 공부시키라고 남긴 유언을 받들어 학비마련에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학시키느라고 모진 고생도 하였다.

언제나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1926년 12월26일 주석의 일을 돕느라고 무송에서 반일부녀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사업했다. 이것이 첫 주체 형의 혁명적 여성대중조직으로 기록되었다. 즉 새로운 여성공산주의 조직이었다. 당시 무송지역의 농촌마을을 다니며 여성들들 조직화하여 지도하며 여성혁명역랑을 확대하는데 공헌했다.

그는 그 후 조직의 요구에 의하여 안도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도 여성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주석의 <새날소년동맹>과 <반제청년동맹> 사업을 방조하면서 주석이 창간한 신문 《새날》을 무송과 주변지역에 배달하는 일까지 도왔다. 무기 운반과 비밀 연락들을 돕는 일에도 참여했다. 1931년 12월 <명월구회의>를 마치고 <흥륭촌>에 돌아온 후 김일성 주석이 안도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부녀회원들을 발동하여 주석의 석방을 돕는데 헌신적으로 활약했다.

강반석 여사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을 때에는 부녀회원들을 움직여 인민유격대원들의 옷을 만드는 일도 했다. 그 때 먼 길을 떠날 아들에게 한푼 두 푼 번 돈 20원을 주석께 주며 혁명하는 사업에 쓰라고 하였다. 주석은 그 돈을 갖고 다니다가 1936년 <마안산>에서 헐벗고 있는 아동단원들을 위해 몽땅 헌금했다. 아픈 몸 땜에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강반석 여사는 어서 떠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철주도 혁명의 길에 떠밀어 내 보낸다. 이것이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임종을 앞두고 이웃집 여인에게 <내가 죽어도 성주가 돌아오면 내가 대하듯 대해주세요. 일제가 조선땅에 남아있고 조선이 독 립하지 못한 채 오거든 내 무덤을 파가지 못하게 해 주시오. 그러나 성주는 싸우다가 도중에 돌아서지는 않을 꺼요..> 강반석 여사는 애석하게도 4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 관한 도서 <조선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근로단체 출판사 1980년), 그리고 <강반석 여사를 따라 배우자>라는 도서가 조선로동당 출판사에 의해 1984년에 출판되었다.

▲김보현 선생(1871.8.19-1955.9.2): 그는 김일성 주석의 할아버지이며 김정일 위원장의 증조 할아버지로 평양시 만경대 구역 만경대에서 탄생하여 이곳에서 소작살이로 농사를 지으며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자손들의 애국활동을 열렬하게 지원해 준 애국심이 강한 농민이다.

김보현 선생
혁명위업에 바친 혁명일가의 절개와 조선민족의 넋을 지켜 꿋꿋이 싸웠으며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지니고 자제들과 손자들의 혁명활동을 적극 방조해 준 인물로 생전에는 "사람이란 제 살과 피값을 해야 하느니라. 원쑤놈들에게 착취와 구박을 받으면서 살기 보다는 차라리 맞받아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느니라...남자는 세상에 낫다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전쟁마당에 나가 적과 싸우다가 죽어야 충성을 다하는 것이니라!"고 늘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는 애국심과 봉건관료배들과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정신이 남달리 강했다고 한다. 봉건통치배들의 사대투항주의적 매국행위로 말미암아 일제에게 나라의 운명이 농락당하는 것을 통탄하며 자제분들에게 그런 답답한 심정을 기회 있을 때 마다 토로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과 손자 분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대단히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쪼들리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나라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기어코 조국해방 위업을 이루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어 손자인 김일성 주석이 새 나라 건설에서 수상의 위치에 있어도 농사일에 전념하며 편안한 생활을 거부했던 진정한 농부였고, 소박하고 겸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렇게 소박한 농부생활을 하다가 84살에 세상을 떠났다. 백범 김구 선생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을 때 이분을 만나보고 그의 소박한 애국심에 탄복했다는 일화도 있다. 만경대의 묘지에는 그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 이보익 여사(1876. 5. 31-1959. 10. 18):그는 김일성 주석의 할머니이며 김정일 위원장의 증조 할머니로 강의한 의지를 지닌 농민애국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양시 사동구역 오류리에서 청빈하면서도 의절이 강한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리보익 여사
모진 가난과 고역 속에서도 민족의 절개를 지켜 굳세게 살아 온 한 빈농의 아내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제들에게 “대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의 맏아들인 김형직 선생께서 혁명의 길에 나선 다음부터는 “나라를 찾는 큰일을 하자면 마음을 굳게 먹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하면서 아들의 혁명활동을 적극 고무해주고 방조해주었다.

이보익 여사는 일제 침략자들이 김일성 주석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귀순공작에 강제동원되었으나 절개와 지조를 잃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 일화도 있다.

맏아들 김형직 선생에 뒤이어 셋째 아들인 김형권 선생이 혁명투쟁에 나서게 되면서부터 만경대집에는 일제와 그 주구들이 매일같이 달려들어 가택수색을 벌리면서 별의별 행패를 부렸다. 그는 특히 맏손자인 김일성 주석이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영도하던 시기에 일제는 어리석게도 김일성 주석을 체포해 보려는 공작을 펼쳤다. 일제는 당시 항일혁명의 변절자들을 내세워 만경대 집을 들락거리게 하면서 온갖 유혹을 자행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돈뭉치까지 들고가 이보익 여사와 김보현 선생을 설득하며 김일성 주석을 체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작했다.

변절자들이 이보익 할머니에게 “…일본제국은 김일성 장군이 산에서 내려오면 일본 관동군 대장을 시키겠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번에 나라의 이런 훈령을 받고 할머님을 백두산에 모시고 가서 산에서 고생하는 김일성 장군을 데려오려고 합니다. …”라고 간교한 술책을 꾸미자, 할머니는 이들에게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3년 전에 신문에 죽었다는 광고까지 났다는 손자가 살았다니 웬 말인가! 우리 손자를 관동군대장이 아니라 그 할애비를 시킨다 해도 나는 안 가겠다. 내 아들 김형직이 왜놈에게 죽은 것만해도 가슴이 아프다. 나는 손자 데리러 못 가겠다.”라고 호령하면서 당장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은 할머니를 강제적인 방법으로 중강진과 포평 등 압록강 연안과 중국동북 일대의 험한 산속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끈질기게 설득하고 때로는 박해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김일성 주석이 조국을 광복하고 1945년 10월 14일 저녁 만경대 고향집을 찾았을 때 두 팔로 손자를 끌어안고 “… 기어이 돌아왔구나!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하면서 눈물을 닦고 “너를 보니 한 생에 쌓인 시름이 다 풀리는구나!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같이 오면 못 쓴다더냐! …”하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자제분들을 생각하며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그는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향 만경대에서 농사일을 계속하다가 1959년 10월18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사의 묘가 있는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에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 김응우 선생(1848.6.17-1878.10.4): 그는 김일성 주석의 증조 할아버지이며 김정일 위원장의 고조 할아버지로 1848년 평양 중성리에서 태어나 1860년 경에 만경대로 이사와 거주해 왔다. 그는 특히 미국의 함선 <셔만>호와 2년 뒤 또 하나의 미국함선 <쉐난도아>호를 대동강변에서 물리치는데 선봉에서 투쟁한 애국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특히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고 반동 관료무리들과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정신이 강한 애국자였다. 김응우 선생은 1866년 8월 미국해적선 <셔먼>호가 대동강에 침입하였을 때 선두에서 만경대와 그 주변 농민들을 불러일으켜 화공전술로 불태워버리고, 2년 후인 1868년에는 또 미국해적선 <쉐난도아>호가 대동강하구에 침입하였을 때에도 의병대오를 조직하고 강력한 진지방어전법으로 적들을 완전히 격퇴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여 그 당시 세상을 놀라게 한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김일성 주석의 동생이며, 김정일 위원장의 삼촌인 김철주 선생이 일제 침략자들과 싸우다가 19세의 어린 나이에 민족의 제단에 한 목숨 바친 가문의 인맥이 있고, 이외에도 김형록, 김영주 등과 김정숙 항일투사의 가문 내에 여러 애국적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나는 북녘사회 지도자 가문의 뿌리와 그 줄기를 살펴 보면서 역시 뿌리없는 나무가 없듯이 이 사회를 이끌어 온 지도자의 뒤에는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 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조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 수많은 애국적 인맥들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한마디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그리고 김정숙 항일혁명투사의 가문은 모두가 우리 민족사와 함께 걸어온 애국자들이었다. 이 주체사회주의의 지도자들, 즉《3대장군》의 가문은 이 세상 그 어느 가문에 비교할 수 없는 절세의 애국자 집안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다음은 [방북취재-9]에서 마지막으로 <나는 지금까지 너무 무지한 삶을 살았다>라는 고백적인 소감을 피력하면서 이번 방북취재를 마감할 계획이다.


민족통신에 실린 노길남 박사 2009년 2월 방북취재기 연재물 보기-아래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8)[방북취재-8]북 지도자 가문의 뿌리를 알아본다
뿌리없는 나무는 없다.현재는 지난 역사의 반영이다

(7)[방북취재-7]학자들과 지식인들과의 대화
모두가 인테리로서 대중들과 직결된 지식소유

(6)[방북취재-6]비전향 장기수 선생 부부와 가족들의 소품공연
공연 행사를 마치고 윤희보 선생(94세) 별도로 만나 환담

(5)[방북취재-5]<김일성 종합대학교> 방문
15개 학부 1만2천 명 학생, 교수진은 2,500명

(4) [방북취재-4]미곡 협동농장과 이들 삶의 현장을 방문
노길남 특파원 <황해북도 농촌 농토와 농민가정> 방문


(3) [방북취재-3]경공업 분야의 비단 실 생산현장 방문
노길남 특파원 <평양 제사공장> 방문


(2) [방북취재-2]경공업 분야의 기호품 산업현장
<평양 껌 공장>의 시설과 일꾼들을 접한 소감


(1) [방북취재-1][방북취재-1]혁명적 대 고조 열기가 뜨겁다
노길남 특파원 열흘동안 시골농촌 및 각계각층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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