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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 여자마라톤의 ‘영웅’ 정성옥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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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9-22 11:4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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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마라톤의 ‘영웅’ 정성옥 선수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누가 ‘스타’로 탄생할까
<연재> 정창현의 ‘북녘 여성을 만나다’ (18)
 
 
 
 
 
정창현  |  ckkim@tongilnews.com

 

 

   
▲ 1998년 8월 29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7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마라톤경기에서 정성옥 선수가 우승하자 북한은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요하고, 100만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다. [자료사진 - 민족21]

 

 

이번 주에 인천아시안게임이 개막한다. 역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은 여러 종목에서 ‘스포츠 스타’를 배출했다. 

아마도 남쪽에 가장 많이 알려진 선수는 1991년 남북 탁구단일팀으로 참가해 우승한 리분희 선수(2012년 ‘코리아’로 영화화)와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유도 여자 48kg급에서 16세의 나이로 우승한 계순희 선수를 들 수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기도 한 계 선수는 남쪽에서 팬클럽이 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체육인은 마라톤의 정성옥 선수가 아닐까.

 

예상치 못했던 마라톤 우승

 

정성옥 선수는 1998년 8월 29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7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마라톤경기에서 25살 무명의 여자 마라토너 선수로 우승을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날은 마침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었다. 정 선수는 우상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세계 육상선수들의 눈으로 볼 때 내가 신진 마라손(마라톤)선수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있었습니다. 세계는 앞으로 우리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하여 더 잘 알게 하고 싶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북한의 기쁨도 컸다. 당시 북한의 잡지 <조선>은 “조선의 첫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1호’의 성과적 발사에 세계가 깜짝 놀랐던 것과 같은 사변이 다시 일어났다”고 정 선수의 우승소식을 전했다. 1998년 8월 인공위성 광명성 발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자축하고 있던 북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정 선수의 우승이 어느 정도의 ‘큰 사건’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은 주인공인 정성옥 선수가 귀국한 날을 임시공휴일로 선포하고 100만 명의 인파가 참가하는 성대한 귀국행사를 마련했다. 그녀에게는 북한 최고의 영예인 ‘공화국영웅’과 ‘인민체육인’ 칭호가 수여됐다.

 

북한에는 세계선수권을 보유하거나 세계 신기록을 세운 체육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인민체육인’이란 호칭으로 불리며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성옥 선수처럼 체육선수가 ‘공화국영웅’의 칭호를 수여 받은 전례는 없었다.

 

과거 북한 체육을 대표하는 박영순(제33차, 34차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자) 선수, 김철환(제22차, 23차 세계자유형레스링선수권대회 48kg급경기에서 우승자) 선수, 배길수(제17차, 28차, 32차 세계체조선수권대회 안마 우승자) 선수를 비롯한 ‘인민체육인’들에게는 통상 ‘로력영웅’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북측의 영웅칭호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 칭호가 있다. ‘공화국영웅’ 칭호는 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한 항일투쟁 등 정치군사적 의의를 가지는 사업에서 위훈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되며 ‘로력영웅’ 칭호는 주로 ‘경제건설과 과학기술발전 등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된다.

 

체육인에 처음으로 ‘공화국영웅’ 칭호

 

또 북한 당국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아파트 한 채(37층)를 줘 가족이 함께 살도록 했다. 그때부터 이 아파트는 ‘정성옥 아파트’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 선수의 우승을 기념하는 기념주화도 발행됐다. 김일성 주석 이후 개인 기념주화는 처음이었다.

북한의 TV방송, 우체국 등에는 정 선수의 경기장면 재방송 요구와 축하편지 등이 폭주했다. 북한 전역이 그야말로 ‘정성옥 열풍’에 휩싸였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제 25회 올림픽에서 20위에 그쳤던 해주 출신의 무명 운동선수가 하루아침에 ‘공화국 영웅’으로, ‘조선의 훌륭한 딸’로 거듭난 셈이다.

북한 당국은 이 열기를 놓치지 않고 ‘정성옥 선수 따라배우기’ 운동을 벌였다. 그해 11월 평양에서 열린 ‘제2천리마선구자대회’에서 북한은 6명을 ‘시대의 선구자’로 선정했다. 20년 간 산림보호에 힘써 710여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이웅찬, 첨단기술인 특수합금원판, 전기접점재료 등의 기술을 개발한 현영라, 13년 간 탄광에 근무하면서 높은 실적을 올린 김유봉, 북방 산골에서 세벌농사(3모작)의 기적을 창조한 박옥희, 중소형발전소 건설에서 높은 실적을 올린 허용구, 세계마라톤을 제패한 마라토너 정성옥 등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1999년 12월 29일 <중앙일보>에 ‘99 북한판 새뚝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정성옥 선수를 그 해의 ‘새뚝이’로 기사화 했다. 그것이 정성옥 선수와 첫 번째 ‘인연’이었다.

 

 

   
▲ 2003년 제주 민족평화축전에 참가한 정성옥 선수는 북측 그림 전시회 개막식에 계순희 선수와 함께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해 행사에 참여했고, 전시회 개막식에 끝난 후에는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 회장과 나란히 앉아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자료사진 - 민족21]

 

 

그리고 4년 뒤인 2003년 10월 24일 ‘명예손님’ 자격으로 제주 민족평화축전에 참석한 정성옥 선수를 만날 수 있었다. 24일 오전 11시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북측미술 및 수공예품 전시회 개막식에 정성옥 선수는 북한의 ‘유도 영웅’ 계순희 선수와 함께 한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전시회 개막식을 마치고 난 뒤 휴식시간, 기사들의 질문 공세와 사진 촬영에 정 선수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 회장 바로 옆에 앉아 있어 더욱 그런 모양이었다. 여러 질문을 던졌으나 묵묵부답 또는 “그렇습니다”란 짤막한 대답이 전부였다. 자꾸 카메라를 피해 “여기 좀 봐 주세요?”라고 하자 정 선수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뒤에 앉아 있던 낯익은 수행원이 ‘이제 그만하라’는 듯 미소를 보냈다.

당시 그녀는 조선체육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우승이후 지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결혼 후 늦깎이로 체육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24일 저녁 서귀포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 참가단 400여 명(북한측 190명)과 제주도민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민족평화축전 개막식에서 정 선수는 백두산에서 채화된 성화의 최종점화자로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

 

 

   
▲ 제주 민족평화축전 환송만찬에 참석한 정 선수. 민족평화축전 성화봉송식에 남측의 김무교 탁구선수와 함께 마지막 주자로 깜짝 등장한 정 선수는 씨름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과 기념촬영하는 등 다양한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자료사진 - 민족21]

 

 

10월 27일 환송 만찬 때 김영대 회장, 전금진.김완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정 선수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뒤에 있던 낯익은 북측 수행원에게 눈짓을 하자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다가가 남측에 온 소감을 물었다.

 

- 남쪽에 온 소감은 어떻습니까? 


“가는 곳마다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가슴 깊이 동포애의 정을 담아 갑니다."


-은퇴를 했는데 앞으로는 어떤 분야에서 활동할 예정입니까?


“지금 다니고 있는 체육대학을 마치고 나면 어린 선수들에게 마라손을 가르치는 지도자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북측에는 유망한 육상선수가 많이 있나요?


“저보다 더 뛰어난 어린 선수들이 많지요.”


-남북 마라톤대회를 하면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습니까?


“남과 북, 어느 쪽이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 대회가 인차(곧) 열리게 된다면 6.15공동선언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중학교 때 유망선수로 발탁

 

정성옥 선수는 1974년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체육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영택 씨는 해주에서 18년 간 지방공장의 화물자동차 운전수로 일했다. 어머니 리춘희 씨는 해주에 있는 여관에서 일했다.

“해주에 있는 우리 집이 차도 옆으로 세워져 있었어요. 어린 시절의 성옥이는 자동차를 보기만 하면 함께 달려나가는 거예요. 또 우리 집은 체육인 가정인 것 같아요. 성옥이 동생도 체육대학에서 력기를 하고 군대에 나갔던 막내도 육상을 했습니다. 나도 열아홉 살 나이까지 유술(유도)을 했지요. 우리 집사람은 빙상을 했고요. 이제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겠지만 속도빙상 선수였죠.”

아버지가 <조선신보>와 인터뷰에서 밝힌 이야기다. 정 선수가 열 살 되던 해인 1984년 봄 해주시 옥계동에서 봄철 운동회가 열렸을 때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참가한 800m 달리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것을 지켜본 해주체육학원 교원 리만석 씨가 그녀의 소질을 발견했다. 그래서 열한 살에 해주체육학원 중등반에 입학할 수 있었다. 리만석 교원은 소녀 시절의 이 제자가 ‘무서운 이악쟁이’(북에서 ‘이악하다’는 끈질지고 근면 성실하다는 의미다)였다고 말했다.

“정성옥 선수는 동무들에 대한 우아심과 진정이 많으면서도 일단 경기에 들어가서는 무서운 경쟁자였습니다. 늘 교원이 제시한 훈련 계획을 제멋대로 넘쳐 수행하여 은근히 교원들의 속을 태우기도 했지요. 하루 훈련판정에서 상급생들에게 조금만 뒤져도 주먹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뿌릴 줄 알던 요구성이 높은 소녀, 이것이 ‘세계마라손(마라톤) 여왕’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습니다.”

그후 정성옥 선수는 평양 압록강체육선수단에서 신금단 감독의 지도를 받게 된다. 선수 시절 400m, 800m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신금단 감독도 정 선수의 강한 정신력에 주목하였다고 한다.

“성옥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해주 출장 중이었을 때입니다. 체육학원에서 학생들의 훈련 정형을 관찰하다가 저도 모르게 한 여학생에게 눈길이 쏠렸어요. 당시 속도는 비록 남보다 빠르지 못하였지만 높은 인내력을 가지고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이악하게 땀 흘리는 소녀, 그가 바로 성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해주에 살고 있을 때 국가대표팀에서 훈련하는 딸을 만나기 위하여 공장의 화물자동차를 몰고 평양으로 자주 올라가곤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할머니가 만든 강냉이엿을 딸에게 넘겨주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지방도시에서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이 얼마나 어렵게 그 엿을 마련했는지 정성옥 선수는 잘 알고 있었고, 그 고마움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우승으로 보답했다.

 

북에서도 유명한 러브스토리

 

정성옥 선수가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되기까지에는 남편의 격려도 한몫 톡톡히 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북한 남자 마라톤의 간판으로 활약했던 김중원 선수다. 북한의 체육계에서 같은 종목 남녀체육선수들이 맺어지는 일은 드물다. 제41차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코리아단일팀의 성원으로 참가했던 리분희 선수가 김성희 탁구선수와 결혼한 경우가 있지만 현역선수들 속에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로 간주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연애이야기는 이미 정 선수가 우승하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95년이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 마라톤경기에 출전할 국가종합체육선수단에 선발돼 함께 훈련하게 된 것이다. 처음 김중원 선수가 관심을 표시했다고 한다. 정 선수는 2001년 <조선신보> 평양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체육선수란 사랑보다 훈련에 열중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도 서로 종목이 다르면 눈길이 갈 수도 있고 자기에게 없는 재능을 가진 그 선수를 존경할 수도 있겠지만 매일 같은 훈련에 땀 흘리는 선수들끼리는 그런 감정을 몰라요.”

그러나 김중원 선수는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고 한다. 
“난 성옥 동지에게 눈길이 갔어요. 사람이란 그렇지 않습니까. 남자라는 건 여자를 주시해 보게 되어 있고 여자가 남자에 관심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성옥 동지를 보니까 항상 훈련에서 이악하고 경기에서도 뭐라 할까, 어떻게 해보자는 마음이 아주 강한 거예요. 호감을 가졌죠.”

동료 선수의 눈길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정 선수의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였다.

 

“애틀란타올림픽에 갔다가 돌아와서 경기 성적에 대한 총화가 엄격히 진행됐죠. 그것이 계기가 된 거예요. 총화가 끝나고 중원 동지가 ‘우리는 금메달로 조국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고 나직히 말했는데 공감이 갔어요. 정말 이 사람이 진실하구나. 그의 인간성을 알게 되면서 나도 변했지요. 조기훈련 시간에는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부족점을 일깨워주었고 훈련에 지쳐 일어나기 힘들 때면 서로 호실에 찾아가 일으켜 세워서 같이 달리기도 하였고….” 
이때부터 ‘동료’에서 ‘연인’으로 질적 변화가 이뤄진 것이다.

 

애인이 채워준 손목시계

 

평양의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 중 하나가 손목시계 일화다. 1999년 8월 정성옥 선수가 스페인 시빌리아(세비야)로 떠나기 전날 애인을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김중원 선수의 눈길이 애인의 손목에 멈췄다. 시계를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애인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시계가 고장나서 벗어놓았다는데 마라손 선수가 시계 없이 어떻게 경기를 한단 말입니까. 시계를 채워주면서 이국의 거리를 달릴 때 이것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조국을 그리고 나의 모습도 떠올리면 큰 힘이 날 것이라고 송별인사를 했지요.” 

정 선수는 마라톤경기에서 달리면서 힘들면 애인이 채워준 손목시계를 보며 힘을 냈다고 한다.

 

1년 뒤인 2000년 4월 이번에는 정 선수가 애인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평양에서 열리는 ‘만경대상 국제마라손경기대회’에 참가한 애인을 응원하기 위해 정 선수는 승용차를 타고 애인의 뒤를 따라가며 “힘내라요”, “빨리 뛰라요”라며 목이 쉬도록 격려했다. 처음에 앞서 달리던 김중원 선수는 마지막에 주력이 딸려 외국선수에게 역전 당해 2등으로 골인했다.

다시 1년 뒤인 2001년 3월 두 사람은 5년 간의 연애 끝에 마침내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었다. 다음 날 남편은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4월 15일부터 진행되는 ‘만경대상 국제마라손경기대회’에 다시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김중원 선수는 보란 듯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는 우승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난 작년에도 같은 경기에 출전했는데 2등을 했거든요. 올해는 결혼상도 받았으니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비할 바 없이 컸어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달렸지요.” 
승용차를 타고 달리는 남편의 뒤를 따랐던 정 선수는 기쁨의 눈물을 보였다.
“나의 ‘길동무’가 1등으로 결승선을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보니 얼마나 기쁜지, 막 눈물이 흘러나왔어요.”

두 사람은 “금메달로 조국에 이바지하자는 하나의 목표를 내걸고 그것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깊어진 사랑”을 완성했다. 결혼 후 남편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고, 2007년 졸업해 공장에 취직했다.

 

체육지도자로 변신

 

 

   
▲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후배 여자마라톤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정성옥 선수. [사진출처 - 통일신보]

 

 

정성옥 선수도 2005년 체육대학을 졸업한 후 지도자로 변신했다. 체육지도위원회 육상협회 부서기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중책도 맡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는 후배 육상 선수들을 지도했다.

12살이 된 첫 아들 효일이는 창광유치원을 졸업하고 소학교에 다니고 있다. 부모의 기질을 타고 낳는지 효일이는 창광유치원에 다니던 여섯 살 때 6.1국제아동절날 달리기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새벽 4시에 집을 나가서는 밤 11시에 들어오곤 합니다. 효일이 엄마의 일과표에서 휴식이란 없지요.”

남편의 말이다. 당연히 아들과 놀아주는 것은 남편의 몫이다.


해주 출신의 ‘무서운 이악쟁이’에서 ‘마라톤 영웅’으로, 하루아침에 ‘시대의 전형’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정성옥 선수는 이제 가정주부로, 마라톤지도자로, 체육협회의 간부로 1인 3역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번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누가 북녘의 새로운 ‘스포츠 스타’로 탄생할지 궁금하다.

 

인천아시안게임으로 남과 북이 더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과거 스포츠경기는 종종 화해의 전령사 역할을 했다. 미국과 중국을 수교로 이끈 ‘핑퐁외교’가 대표적이다. 남과 북 사이에서도 1985년 남북체육회담을 시작으로 1991년 탁구단일팀 구성, 시드니올림픽 공동입장, 남북통일축구대회 개최 등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고, 화해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북한도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열린 ‘2013 아시안컵 및 아시아클럽 역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국제관례에 따라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를 허용했다. 이전까지는 ‘대한민국’ 대신 ‘대한올림픽위원회(KOC)’를 대체 국호로 쓰고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통일기)를 사용했었다.

그런데 정부는 인천아시안게임이 열리는 경기장 밖에 참가국의 국기를 걸지 않기로 했다. 인공기가 걸지 않기 위해서다. 인공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남과 북의 체제경쟁은 끝났다’, ‘순수 체육경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온 우리 정부의 입장이 무색하게 돼버렸다. 이념적 대결의식에 쌓여 주최국으로서 최소한의 ‘국제적 품격’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북측 선수의 경기를 흔쾌하게 응원할 수도 없는 분위기다. 꽉 막힌 남북관계와 우리 정부가 가진 대북인식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천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일 수 있다는 전망은 빗나갈 것 같다. ‘아시안게임 기간만이라도 이념전쟁을 멈추자’는 호소가 나올 정도로 오히려 인천아시안게임이 남북관계를 더 경색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북한 응원단 참가도 받지 못하고, 국제경기 관례에 따른 인공기 게양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고위급회담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출처: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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