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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 [한찬욱의 총반격] “친일 청산”은 자주의 선결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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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5-08-20 18:0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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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의 총반격] “친일 청산”은 자주의 선결 조건이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이윤, 조부의 일제 부역을 고백하고 사죄하다 -

이윤 선생은 1944년 충복 옥천에서 태어나 1959년 4월에 청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2로 진급한 1960년, 4월혁명에 뛰어들었다. 이후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미력한 대로 서울사대 쪽 투쟁을 거들었다고 겸손하게 선생은 필자에게 말했던 분이다. 

그리고 고인은 졸업 후 소시민, 대가족의 가장으로서 식솔을 거닐다가, 1990년대 말에 임종국(1929~1989)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친일문제를 실천하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방대한 『친일인명사전』을 기획한다는 신문기사를 접한다.

선생은 “아, 바로 이곳이 내가 들어가 할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찼다고 한다. 그리고 자성하며 은둔 삶을 살았던 할아버지를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서울북부지부장, 운영위원 등으로 고인은 활동한다. 

또한 4월혁명 당시 언론에 콩트를 기고한 것을 계기로 언론에 관심이 많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시민연합)언론학교를 졸업하고 언론운동에도 선생은 뛰어들었다.

무엇보다 고인은 1971년 이래 35년간 서울 시내 사립고교들에서 평생 교사로서 살아왔다. 당연히 전교조를 자랑스러워하였고 서울지부 지도자문위원으로 선생은 활동했다.
(...)
특히 선생은 2001년 10월 사월혁명회가 개설한 “민족학교” 1기 졸업생으로, 당시 교무부장인 필자와 이후 20여 년간 인연을 맺어왔다.

존경하는 이윤 선생님!

조부의 일제 부역을 고백하고 사죄하며 살아온 큰 용기는, 실천하는 민족 양심인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이 못다 한 “친일 청산”과 ‘민족 통일“의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하여 새 역사를 창조할 것입니다.

저자: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故 이윤 선생 [사진제공은 필자]

    광복 80주년을 하루 앞두고 사월혁명회 전 대외협력위원장과 감사를 역임한 이윤 선생이 지난 8월 1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 8월 29일, 경술국치 95주년을 맞아 친일 인사로 우선 3,090명의 명단을 1차로 발표하였다.

    이때 고인은 자신의 조부님이 일제 관료로서 명단에 실린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자신의 소회를 피력했다.

    당시 홍대부속고등학교 교사인 이윤은 명단에서 1,168번째에 있는 관료 부문의 「이준식(李畯植)」이 바로 저의 할아버지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이 만들어진다면 “당연히” 이렇게 성함이 기재되리라는 것을 고인은 예상하였다고 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사업을 성원했다.

    고인이 『친일인명사전』을 성원한 이유는 일제 강점하에서 자신과 조상의 허물이 크면 클수록 숨죽이고 선정 작업을 지켜보아야 할 마당에, 기득권세력인 그 후예들이 악의적인 왜곡을 하면서 친일인명 선정과정과 발표 의도에 먹칠을 가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행태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 조부가 1차 친일인사 명단에 기재되자 아픈 마음으로 고백하다.

    2005년 9월 3일 친일인사 명단 발표(1차) 며칠 후에 고인은 아픈 마음으로 자신을 고백한다.

    『사월혁명회보』(제78호 2005.10)에 게재한 고백 일부이다.

    1895년(을미년)에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출생하셨던 조부님은 증조모님의 독려로 일찍부터 대처로 나가 신문물에 눈을 뜨고자 하셨답니다. 

     

    장손인 제가 집안에서 들었던 이야기로는 조부님은 토지측량기사로 일제의 관료생활을 시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일제의 조선병합후 대대적으로 시행했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조부님은 충북도 관내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1930년대에 보은군의 내무과장을 거쳐 30년대 말에 음성군수 자리로 승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기는 당신의 40대 초반이시고, 중일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로 짐작이 됩니다. 

     

    40년대로 들어와서는 공직을 물러나셔서 경부선이 지나는 영동으로 내려오셔서 산금회사에 관여하시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일제의 고등관료로서 군수자리에까지 오르셨으나 성품이 청렴결백하시고 의기와 긍휼심이 많으시어 이재(理財)와는 담을 쌓고 해방 무렵 은퇴 시에는 전답은커녕 집 한 채조차 갖고 계시지 못하셨습니다. 이러니 주변에서(누구보다도 맏며느리이신 제 어머니부터도) “군수까지 하신 양반이 얼마나 주변머리가 없었으면 집 한 칸 마련을 못했을까?”하는 푸념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중략)

    이제 친일인명 사전의 편찬에 앞서 일차적으로 단순히 그에 수록될 명단만을 발표했을 뿐인데도 세상은 왜 이리도 소란스러운지? 붓을 놀려 살고있는 소위 ‘조·중·동’을 필두로 하여 입에 개 거품을 물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하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새삼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일개 무명교사일망정 내 자신부터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서 이런 어두운 과거를 규명하고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전폭적인 성원을 보냅니다.

     

    외세에 의한 뼈아픈 분단을 안고 출발한 민족의 해방이 진정한 해방일 리 없습니다. 교활한 친일파의 후예들은 이제 한술 더 떠 친미도 아닌 숭미파가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의 기본과제는 사대주의의 척결과 민족정기의 확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세기 전의 그 풍전등화 같던 시대가 되풀이되고 있는 듯한 오늘날 우리는 진정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 일제 부역에 대해 본인과 자손이 직접 사죄(死罪)와 사과(謝過)한 사례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일본의 화족(華族)제도를 모방해 <조선귀족령>(일본 황실령 제14호)을 공포하면서, 10월 7일 병합과정에 협력하거나 순응한 조선 이씨 왕가와 고위 관료 등 76명에게 귀족 작위를 주었다. 

    또한, 일제는 작위와 함께 거액의 은사금도 지급했다. 특히 작위와 은사금은 당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속자에게도 세습되어 매국노들은 대를 이어 특권을 누리며 일본 굴종 반민족 노예 매국을 했다.

    그러나 민중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을사5적(1905년), 정미7적(1907년), 경술9적(1910년)’이라 부르며, 이들에 대한 징계(懲戒)와 암살을 시도하면서 가만두지 않았다. 

    1906년 2월에 이근택(을사5적 중 군부대신)이 저격당했다. 1909년 12월에는 이재명(1887~1910)이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현 명동 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찔러 오른쪽 폐를 관통했지만, 이완용은 죽지 않고 살아난다. 당시 이재명은 이완용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다 순사들과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이재명은 재판정에서 판사가 배후를 묻자 “이완용을 살해한다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치 않을 자 없을 것이요. 이천만 동포 모두가 배후요.”라고 답변하고 1910년 9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아내 오인성(1891~1919)은 목놓아 울면서 “국적(國賊) 이완용은 아직 살아 있는데, 우리 집 가장은 무슨 죄로 사형에 처하느냐!”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후 오인성은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이후에도 국내와 중국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애국지사는 자신의 몸을 던져 항일 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을 병행한다. 

    그러나 매국노들은 일제 호위 속에 살아남아, 해방 후에는 미국의 보호 속에 호의호식하며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는커녕 기득권세력으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부끄러움과 창피를 아는 사람은 있었다.

    이윤 선생과 같이 민족 앞에 자손들이나 본인이 직접 사죄(死罪)와 사과(謝過)를 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5)에서 8·15 광복 이후 뉘우치는 빛을 보인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래도 가뭄에 콩 나듯이 사과하는 인물들을 정리했다.

    “친일을 반성한 인물들 중에는 조용만, 이항녕, 채만식, 현석호, 제씨가 있으며, 일제 때 법조인으로 있었던 걸 반성하여 한국정부가 수립된 직후 사퇴한 엄상섭嚴詳燮, 이호李澔, 이병용李炳瑢, 김윤수金潤壽, 박종금朴宗根, 김영재金寧在, 신언한申彦瀚, 제씨가 있다.

     

    후손으로 참회한 분으로는 김동환의 장남 김영식, 신기남 전 의원, 이윤, 한진규 등과, 단체로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등이 그나마 역사의 어둠을 밝혀준 등불이 되어 주었다.”

    ▶ 프랑스의 ‘친독협력자’ 처벌의 주요 대상 언론인·문학인·예술인·학자

    임헌영은 앞의 책에서 1948년 8월 24일 자 여러 신문기사를 요약해, 각주로 엄상섭의 일제뿐만 아니라 미군정 협조의 자성(自省) 내용도 부연 설명했다.

    “왜정 압력하에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시던 애국지사들에게 대하여는 지금도 면목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자성했다.

     

    이어 ‘우리들은 일정 아래 검사로서, 해방 후 다시 미군정에 협조하였다. 오늘날 독립정부가 수립되고 검사진영에도 우수한 인재가 배출된 이 마당에 그 자리에 눌러 있음은 민족정기 앙양에 떳떳치 못할뿐더러 인심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의를 표명하는 바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퇴직원을 제출했다.”

    그래도 진실로 이렇게라도 민족 앞에 자성과 책임을 진 분들이 없었다면, 광복은 인민에게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지, 정말 막막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광수를 비롯한 문학인들 다수는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미사여구로 변명한다. 임헌영은 앞의 책에서 이들을 호되게 비판했다.

    “친일행위를 하고도 반성하지 않는 것은 그 죄가 배가 되며, 변명만 늘어놓는 것은 3배 죄이며, 그 변명조차 이치에 안 맞는 데다 ‘민족’을 다시 팔아먹는 것은 4배의 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치로 따지면 단테가 만든 제9지옥의 제3지역보다 더 엄한 제4지대를 특별사동으로 세워야 할 판이 아닐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사에 나타난 치욕인 친일파들의 행각은 세계 어느 식민지 역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몰염치와 악덕의 화신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친일파’ 청산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기 나치 독일에 부역한 ‘친독반역자’ 심판이 있었다. 

    첫 시도는 프랑스로, 우리의 ‘친일파’와는 달리 ‘친독반역자’를 ‘협력자(콜라보, collabo)’로 불렀다. 드골은 ‘친독반역자’에 대해서 “흉칙한 종기가 영원히 나라 전체에 번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처벌했다.

    2012년 3월 3일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경남진주지회 창립식 때 임헌영 소장은 프랑스의 ‘친독협력자’ 언론 청산을 이야기하며 한국 언론의 ‘친일 청산’을 주장했다.

    “프랑스는 독일 2차대전 이후 얼마나 철저히 했나. '드골'은 우파였다. 드골이 파리에 입성해서 ‘친독협력자’를 처벌하는데, 1순위가 언론인·문학인·예술인·학자였다. 

     

    언론은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을 때 2주 이상 발행된 모든 신문은 정부에서 압수하거나 없앴다. '친독'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반대하는 글을 실었다고 하더라도, 독일 점령하에 2주 이상 발행되었다는 것 자체가 죄라고 봤다. 

     

    그랬더니 600개 신문 중에 2개만 남았다고 한다.”

     

    임헌영 소장은 ’그런 논리로 보면 < 조선일보 > < 동아일보 > 는 8·15 뒤에 반드시 빼앗겨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언론이 온갖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오마이뉴스』“임헌영 일제시대 언론 <조선일보> 재산 조사해야”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04719 )

    ▶ 친일파 심판의 첫 시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광복 후 이남은 미군정으로 인해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인민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48년 8월 5일 제헌의회 김웅진 의원은 “특별법 기초위원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후 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48년 9월 7일 재석의원 141명 중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승만이 같은 달 22일에 공포했다.

    이때 처벌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한일병합’에 서명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형을 적용하지 않았고, 무기징역 이하로만 처벌하고자 했다. 그리고 공포일인 8월 16일부터 공소시효는 1년이었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1940년대편 2권: 8·15해방에서 6·25전야까지』(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반민특의의 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행적 조사와 이들에 대한 검거작업을 기술했다.

    “1949년 1월 8일부터 검거작업에 나선 특위는 제1호로 화신 재벌 박흥식을 검거한 데 이어, 일본 헌병 앞잡이로 250여 명의 독립투사를 밀고한 친일파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33인 중 한 사람인 최린, 친일변호사 이승우, 남작 이풍한, 『매일신보』 사장 이성근, 친일 경찰 노덕술, 문인 이광수와 최남선 등을 검거하였다.

     

    반민특위 요인 암살음모의 주동 인물이기도 한 노덕술은 1월 24일에 체포되었는데, 이는 반민특위에 반대했던 대통령 이승만과 반민특위 사이의 갈등을 불거지게 만들었다. 이승만은 특위가 구성될 초창기부터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 처리가 안 되고 나라가 손해가 될 뿐이다’라며 반대했었다.”

    특히 친일파는 반민특위에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며 이승만은 그런 저항을 비호했다. 또한 특위를 와해시키려는 친일파의 공작은 계속되었다. 바로 이것이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1949년 5월 20일,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인 이문원(익산 을구, 1906~1969), 최태규(정선. 1919~2009), 이구수(고성, 1912~1967), 황윤호(진양, 1913~1977) 등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고 전격 체포된다. 이어 6월에는 ‘제2차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고 하여 노일환(1914~1982), 서용길(1912~1992)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 부의장 김약수(1890~1964)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구속된다.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1』(녹두, 1993) 기록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을 담당했던, 이후 반공검사로 명성을 떨친 오제도는 1992년 4월 8일 ‘국회 프락치 사건의 증거가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증거는 없다.’"

    결국 ‘국회 프락치 사건’을 구실로,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방해로 반민특위는 결국 와해된다.

    ▶ “친일 청산”은 자주의 선결 조건이다.

    임헌영은 앞의 책에서 프랑스 사례를 인용해 “친일파”의 뿌리와 이후 변신 과정을 정리했다.

    “협력자에 대한 개념은 사르트르가 독일로부터 해방된 프랑스에서 『협력자란 무엇인가』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1789년 프랑스대혁명까지 소급하여 그때 혁명을 반대한 왕당파와 그 후예들의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이 시대의 굴곡에 따라 변신한 것이 친독협력자가 되었다고 밝혀준다.

     

    사르트르의 논리적 연장선으로 볼 때 친일파가 친미파 - 독재권력 옹호 - 민주화운동 반대 - 평화통일 반대 – 노동자·농민 등의 관점이 아닌 재벌과 상류층 이익 옹호 - 사회 복지보다 성장 신화 옹호 - 일본의 대북 강경책 지지 등으로 이어진다는 건 당연한 귀결이 될 터이다.”

    여기에 더해 ‘내란수괴’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을 통해 ‘친일파’뿐만 아니라 그동안 암약하던 종일(從日) 극우 세력과 미국을 신으로 믿는 수구 세력의 준동을 민(民)은 똑똑히 보았다. 

    이제 ‘친일파·친미파’ 세력 확장에 맞서는 시대의 선결과제는 “친일 청산”뿐만 아니라 “자주”임을 민은 분분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윤 선생은 이미 ‘일제 부역자’의 귀결을 알고 있었다.

    고인은 비록 조부가 일제 부역을 했지만, 그분의 청렴결백과 의기 그리고 긍휼을 본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가는 길과는 다른 길로 간다.

     故 이윤 선생 [사진제공-필자]
     故 이윤 선생 [사진제공-필자]

    이윤 선생은 1944년 충복 옥천에서 태어나 1959년 4월에 청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2로 진급한 1960년, 4월혁명에 뛰어들었다. 이후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미력한 대로 서울사대 쪽 투쟁을 거들었다고 겸손하게 선생은 필자에게 말했던 분이다. 

    그리고 고인은 졸업 후 소시민, 대가족의 가장으로서 식솔을 거닐다가, 1990년대 말에 임종국(1929~1989)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친일문제를 실천하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방대한 『친일인명사전』을 기획한다는 신문기사를 접한다.

    선생은 “아, 바로 이곳이 내가 들어가 할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찼다고 한다. 그리고 자성하며 은둔 삶을 살았던 할아버지를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서울북부지부장, 운영위원 등으로 고인은 활동한다. 

    또한 4월혁명 당시 언론에 콩트를 기고한 것을 계기로 언론에 관심이 많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시민연합)언론학교를 졸업하고 언론운동에도 선생은 뛰어들었다.

    무엇보다 고인은 1971년 이래 35년간 서울 시내 사립고교들에서 평생 교사로서 살아왔다. 당연히 전교조를 자랑스러워하였고 서울지부 지도자문위원으로 선생은 활동했다.

    그리고 고인은 1년에 150권 이상씩의 책을 읽는 독서광이었다. 특히 무엇보다 부지런하여 사회단체가 개설하는 학교와 토론회 그리고 행사 등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

    [사진제공-필자]
    [사진제공-필자]

    특히 선생은 2001년 10월 사월혁명회가 개설한 “민족학교” 1기 졸업생으로, 당시 교무부장인 필자와 이후 20여 년간 인연을 맺어왔다.

    존경하는 이윤 선생님!

    조부의 일제 부역을 고백하고 사죄하며 살아온 큰 용기는, 실천하는 민족 양심인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이 못다 한 “친일 청산”과 ‘민족 통일“의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하여 새 역사를 창조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사진제공-필자]
    [사진제공-필자]

     [출처 통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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