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특집 다시 쓰는 현대사] 과연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 외 5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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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 [8.15특집 다시 쓰는 현대사] 과연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 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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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5-08-14 06:3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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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특집①] 과연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

 

① 서문 : 오래된 질문




2025년 광복 80돌을 맞아 1945년 8월 15일 그때를 돌아본다. 문득 해답을 찾지 못한 오래된 질문과 마주한다. “과연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


대한민국 주류 역사관은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했고, 그 결과 우리 민족이 해방되었다는 구도를 유지해왔다. 즉, 해방은 미국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제국주의도 제 발로 물러나는 경우는 없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도 마찬가지다. 2차대전에서 연합군에 패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순순히 물러났을 리 없다.


해방은 항일무장투쟁과 전민항쟁을 전개한 우리 민족이 자력으로 쟁취한 역사적 성과다. 그렇기에 8.15는 한반도에서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민족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전승절’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특집기획은 이러한 관점을 복원하는 시도다. ‘자력 해방’의 출발점은 항일무장투쟁의 최종 국면, 1945년 8월 9일 항일유격대(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 시점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첫째, 8월 9일 총공격 작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둘째, 항일무장세력이 실제로 일제의 통치기구를 무력화하고 민중 권력을 수립한 구체적 사례들. 셋째,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일제의 탄압과 민중의 항거에 대해 알아본다. 도서 '현대조선의 탄생'(저자 박경순)을 참고했다.


1. 일본 본토 방어의 전초기지로 변한 한반도

2. 해방의 진실을 가린 ‘원자탄 신화’

3.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 자력해방전의 결정판

4. 일제의 통치기구를 분쇄한 전민항쟁

5.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가 왜 중요한가


해방 80년을 맞아 ‘자력 해방론’을 재조명함으로서 잊힌 민중항쟁, 외면당한 항일무장투쟁, 지워진 승리의 역사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승리했다.”



[8.15특집②] 일본 본토 방어의 전초기지로 변한 한반도

 

과연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 ②



1940년대 말 제주 서남부 알뜨르 비행장에 늘어서 있는 일본군 무기들.


1945년, 일본 제국주의는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전략의 무게중심을 한반도로 옮기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에 식민지로만 간주되던 한반도는 이 시기 들어 ‘일본 본토’의 연장선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방어 전략을 넘어 ‘조선사수론’이라는 이름의 결사항전론으로 나타났다.


그 상징적 조치가 바로 17방면군 사령부의 한반도 설치였다. 1945년 4월, 일본은 이 부대를 조직하고 37만 병력을 한반도 전역에 배치했다. 평양에서 대전, 부산으로 이어지는 방어축이 형성되었고, 병참과 작전기지가 구축되었다. 특히 제주도는 태평양 전선의 미군 북상에 대비한 전략 요충지로 전환되며 비행장과 대규모 병력기지가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이처럼 한반도는 일본의 ‘본토방위선’에 편입되며 열도와 같은 수준의 결전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전술상의 판단이 아니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제국 최후의 방어선이자, 천황제 체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간주한 것이다. 헌병과 경찰 병력은 치안유지 명목 하에 증강되었고, 우리 민족을 전시체제에 동원하기 위한 ‘황국신민’ 교육이 강화되었다. 한반도의 청년과 노동자들은 군사기지 건설과 전투지원에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이는 우리 민족에게 또 하나의 고통을 안겼다.


이 시기 일제가 한반도에 남긴 병력과 군사시설의 규모는 단순한 식민지 통제를 넘는 것이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전략적 전방'으로 전환했고, 만약 미군이 상륙해올 경우 이곳에서 결사항전을 벌이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는 제국의 마지막 발악이었으며, 한반도는 그들의 최후 결전지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실현되지 못했다. 8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세, 그리고 한반도 전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전민족의 항쟁이 맞물리며 일본의 방어선은 허무하게 붕괴되었다. 한반도는 단지 ‘해방을 받은 땅’이 아니었다. 제국주의가 끝까지 움켜쥐려 했던 곳이자, 오히려 그 야망이 꺾인 역사적 전환지였다.



[8.15특집③] 해방의 진실을 가린 ‘원자탄 신화’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 해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는 지금까지도 역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많은 이들이 해방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이라는 국제정세의 부산물로 간주한다. 이는 이른바 ‘타율해방론’이다.


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과 전민항쟁, 그리고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해방을 쟁취했다는 ‘자력해방론’이다.


타율해방론은 대체로 원자폭탄 투하를 해방의 결정적 계기로 삼는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일본이 이에 굴복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사에는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 특히 무장투쟁의 역할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해방을 외부에 의해 ‘선사된 것’으로만 보는 이 시각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투쟁의 정당성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를 냉정히 들여다보면, 일본이 항복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단지 원자폭탄의 물리적 파괴력에만 있지 않았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하였다.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 사령관의 지휘 아래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하여, 회령·온성·나남·청진 등지의 일본군 통치기관을 실질적으로 붕괴시켰다. 이 작전은 단순한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에 준하는 수준의 작전이었으며, 전략적으로도 소련군과 연계되어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북방의 공세에 크게 동요했다. 기존의 일본군 최고지도부는 소련군의 급속한 남하와 한반도 북부에서의 조선인민혁명군 진공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간주했고, 이는 미국을 통해 조기 항복을 모색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소련에 항복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서의 군사적 붕괴는 제국 일본에게 치명적인 전략적 타격이었다.


자력해방론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김일성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단순히 일제에 맞선 무력 저항을 넘어, 해방 이후 사회체제까지 준비한 정치·군사 통합세력이었다. 이들은 국제 반파시즘 전선의 일원으로 중국 및 소련 공산당과 협력하며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한 연대를 실현해왔다. 따라서 자력해방론은 자주적 주체를 바탕으로 한 능동적 연대의 결실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해방은 결코 외세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한반도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던 제국주의 일본의 계획을 실질적으로 붕괴시킨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무장투쟁이었고, 그 무게중심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각지에서 전개된 우리 민족의 봉기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해방의 주역은 누구인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은 분명 역사적 조건이었지만, 그것만으로 해방을 설명하는 것은 진실의 절반만을 말하는 것이다. 해방은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싸우고 피 흘리며 우리 민족이 쟁취한 역사였다. 바로 그 점에서, 자력해방은 자기만족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8.15특집④]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 자력해방전의 결정판

 



1945년 8월 9일, 김일성 사령관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1930년대부터 준비된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 전략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자력해방전이었다.


총공격은 다음 세 축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국경 돌파 작전. 둘째, 국내 소부대와 인민무장대의 배후타격. 셋째, 전민항쟁을 통한 해방지대의 구축이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독립된 전투방식이자,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략이기도 했다.


경흥요새 돌파작전은 자력해방의 첫 포성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두만강을 건너 원정교 일대를 점령하고 일본군 주둔지를 타격했다. 이어 청학동의 101혼성연대를 격멸했고, 송진산·강팔령·어운동골짜기에서는 도주하는 잔당을 매복·소탕했다. 이 과정에서 청학반일회, 곰산노농무장대, 오봉반일동맹 등 민중조직도 합세했다.


훈춘 전선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련군, 동북항일연군이 연합해 대반령, 마유산 일대를 공격했다. 박광선 소부대가 일본군 진지를 정탐하고, 낙하조가 적 종심에 기습을 가했다. 특히 증산무장대는 적의 탄약고를 습격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본진의 진격을 가능케 했다. 이 연합전은 국제연대 속에서도 조선인 주력군이 중심 역할을 수행한 사례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군사작전과 병행해 해방지대에서 인민위원회 수립과 자위대 조직을 직접 주도했다. 함경북도 회령·경성·무산 등에서는 군사해방 직후 바로 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지역 질서 유지가 실행되었다. 이처럼 군대와 정권 창출이 결합된 전략은 단순한 점령이 아닌, 해방 이후 질서를 준비하는 혁명적 총합이었다.


총공격의 전선은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간백산밀영, 국사봉, 백학산, 곰산 등 국내 20여 곳 이상의 비밀근거지에서 출발한 인민혁명군 소부대들은 각 도의 전선별 지휘계획에 따라 진입했고, 민중 항쟁조직과 협력하여 지역 점령을 넘어 행정기반까지 구축했다.


나아가 8월 13일~25일 사이 전국 1,000여 곳에서 무장봉기, 반일시위가 폭발했다. 함경남도의 경우, 8월 말까지 3개 시·16개 군·129개 면 전역에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는 단일 조직이 아닌 각 지역 인민이 주도한 실질적 자치기구였다.


결국 김일성 사령관의 총공격 명령은 단순한 전투개시가 아닌, ‘우리 손으로 쟁취한 해방’의 집단적 실천이었다. 이는 미군정이 들어오기도 전에 이북 전역을 해방구로 전환시킨 결정적 분수령이자, 자력해방의 군사적·정치적 주도권을 동시에 확보한 사건이었다.




■ 육상작전: 국경 돌파와 요새 격파


① 경흥요새 돌파전


경흥은 일제가 ‘동해의 철통’이라 자부한 요충지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8월 9일 새벽, 원정교 일대에 화력을 집중하며 총공세를 시작했다. 전위부대는 기습과 돌격으로 일본군의 주요 방어진지를 무력화하고, 청학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송진산 전투와 강팔령 매복전이 이어졌고, 항일유격대는 도주하던 일본군 잔당을 어운동 골짜기에서 소멸시켰다. 그 지역 조국광복회는 무장대를 조직해 병참을 지원하고, 곧바로 인민위원회를 수립하여 질서를 장악했다.


② 훈춘·훈융 해방전


훈춘은 일본군과 만주국 잔존 세력이 집중된 국경 방어의 중심축이었다. 박광선 소부대를 포함한 혁명군 정예 병력은 남별리와 동흥진 요새에 대한 정밀 정찰 후, 대반령 진지를 공격했다. 마유산·월명산 일대에서는 낙하조가 적 후방을 교란했고, 정면공격대는 동시 돌입으로 주둔부대를 섬멸했다. 증산무장대는 적 탄약고를 폭파하고 보급선을 차단해 퇴로를 봉쇄했다. 이 작전은 3개국 연합의 성격을 지녔으나, 조선인민혁명군이 중심축이 되어 훈춘 전역을 해방시켰다.


③ 배후타격과 전민항쟁의 결합


간백산, 국사봉, 곰산, 백학산 등 국내 밀영에서 진입한 소부대는 각 도·군 단위의 조국광복회와 협력해 후방에서 통신소, 경찰서, 창고 등을 파괴했다. 항일유격대는 일본군의 이동로를 차단하고, 무장을 해제한 후 인민위원회를 세워 지역 자치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배후타격은 전방의 총공격과 동시에 이루어져, 일제의 군-행정 연계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해상작전: 연합상륙과 전략 항만 확보


① 웅기 상륙작전 (8월 11일)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는 8월 11일 함경북도 웅기항에 상륙하여 일본군이 방어에 집중하지 않은 틈을 타 기습점령에 성공했다. 만향고개 전투에서는 고지화된 적의 영구화점을 뚫기 위한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해안선 인근 일본군 후방기지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항일유격대는 내륙으로 진격하며 주요 행정거점을 장악했다.


② 나진 상륙작전 (8월 12일)


8월 12일, 나진항에 상륙하려던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군은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이미 나진인민무장대가 시내를 장악하고 헌병대, 경찰서, 통신소를 접수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일부 항복했고, 상륙은 무혈로 이루어졌다. 이 작전은 민중조직이 군사작전보다 앞서 전투 없는 해방을 실현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③ 청진 상륙작전 (8월 15일)


청진항은 일본군의 마지막 저항지였다. 8월 15일, 해방의 날.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 해군은 청진항 일대에 대대적 상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항복을 거부하며 고지와 항만 벙커를 사수했다. 해상과 시가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백 명의 소련 해병이 전사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청진무장대와 함께 적의 포진지를 점령하며 시내를 해방했고, 전투 종료 후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청진 전투는 해방의 날에 벌어진 유일한 격전이자, 가장 상징적인 자력해방 실천이었다.


이처럼 육상에서는 요새를 돌파하고 해방구를 확장하며, 해상에서는 전략 항만을 장악하고 적의 후방을 붕괴시켰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놀라운 조직성과 전략으로 일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고, 조국광복회를 비롯한 국내 독립운동조직과의 협동을 통해 정치적 해방도 동시에 실현했다.


 

‘국경에서 울린 총성’은 단지 승전의 외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 식민의 족쇄를 끊고, 해방의 주체로 거듭난 자력해방의 선언이었다.



[8.15특집⑤] 일제의 통치기구를 분쇄한 전민항쟁

 



1945년 8월 9일, 항일유격대(조선인민혁명군)이 국경을 돌파하고 해방의 총공격을 개시했을 때, 이에 호응해 전민족이 들불처럼 봉기했다.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기도 전에, 이 땅의 민중은 무장을 들고 일본 통치기구를 분쇄하며 해방의 주체로 나섰다. 이는 우발적인 분노의 폭발이 아닌, 수년에 걸쳐 준비된 조직적 항쟁의 분출이었다.


조국광복회, 반일회, 반제동맹, 청년회, 농민조합, 여성동맹 등 독립운동조직들은 이미 각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이들은 항일유격대와 손잡고 적 통치기구를 해체하는 실질적 무장항쟁을 전개했다. 그 중심에는 “전민항쟁”이라는 전략적 지침이 있었다. 한반도 전역에 자위대, 보안대, 자치대, 적위대, 치안유지대 등 다양한 명칭의 무장조직을 결성했다.


①어랑: 패주하는 일본군을 섬멸하다


함경북도 어랑 지역에서는 8월 16일, 무장대가 편성되어 봉강의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100여 명의 청년을 무장시켰다. 이 무장대는 나남에서 패주하던 일본군을 매복공격으로 타격했다. 퇴각 중이던 일본군은 어랑무장대의 강력한 사격에 사상자를 내고 산길로 도주했으나, 강릉산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집단 투항했다. 이는 지역 무장조직이 일본 정규군을 격파한 상징적 승전 사례였다.


②길주: 철도파괴와 무기노획


길주 성천 일대에서는 8월 16일 조선인민혁명군의 부대가 백암을 해방하고 길주로 진격했다. 남계자치대는 적의 군용열차 퇴각 정보를 입수하고 역 선로전환기를 조작해 열차를 전복시켰다. 충돌과 함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인민혁명군은 28량 분량의 무기, 식량, 군수물자를 노획하거나 파괴했다. 이어 덕산면 민경대는 도목동 골짜기에 집결한 일제 패잔병을 기습해 전멸시켰다.


③성진·삼지연: 도심 내 저항 분쇄


8월 18일 성진 보안대는 일본군 잔당이 시내 고급요정에 집결한 사실을 파악하고 요정을 포위, 격전을 벌인 끝에 무장해제에 성공했다. 이어 성진경찰서를 습격해 악질 경찰들을 처단하였다. 삼지연 노동자돌격대는 8월 19일 퇴각하던 일본군을 매복 공격하여 10여 정의 기관총, 수백 정의 보총, 수천 발의 탄약을 노획하였다. 이들은 청진 전선으로 도주하려던 잔당을 완전히 격멸했다.


④평양: 항공부대까지 소탕한 대중의 힘


평양은 일본 관동군, 17방면군 등의 기계화부대가 집결한 핵심 지역이었다. 8월 16일 조국해방단을 중심으로 조직된 적위대가 일본군을 포위하고 무장을 해제했다. 8월 17일 평양역에서 열차로 도주하려던 일본군은 적위대에게 붙잡혔고, 이어 평천리 병기공장, 선교경찰서, 대동강역 등 주요 시설을 쟁취했다. 평양감옥도 점거되어 정치범으로 분류된 독립운동가 3,000여 명이 석방되었다.


전국 각지에서의 자치와 봉기


함흥, 혜산, 강계, 사리원, 신의주, 경성 등지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벌어졌다. 함흥과 원산을 포함한 함경남도 3개시와 16개 군, 129개 면 전역에는 8월 16일부터 31일 사이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신의주에서는 2만 명이 봉기하고, 삭주에서는 조국광복회가 중대광산을 접수했다. 안변에서는 반일청년회가 군청, 면사무소, 은행을 장악했고, 이천과 해주에서도 유사한 점령과 자치조직 결성이 이루어졌다.


항쟁과 권력 창출의 결합


이러한 전민항쟁은 단지 일본군에 대한 물리적 저항을 넘어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정치적 실천이었다. 경찰서와 면사무소, 신사, 우편국, 은행, 방송국 등 식민통치 기반을 파괴하고, 인민위원회를 세워 치안, 행정, 경제를 스스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무정부 상태의 해방’이 아닌, ‘조직화된 자력해방’이었다.


김일성 사령관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5년 8월에 우리나라에서 적 통치체계가 왜 그렇게 빨리 허물어졌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전민항쟁 조직들이 도처에서 들고 일어나 일본사람들이 틀고 앉아 있던 통치기관을 철저히 짓부수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단 열흘 사이에, 전국 1,000개소에서 반일시위와 무장봉기가 벌어졌다. 전민항쟁은 단지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작전 보조가 아니라, 해방의 실질적 동력이었다.



[8.15특집⑥] 해방의 주역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이유

 



해방 80년이 지났다. 그러나 “누가 조국을 해방시켰나?”라는 물음은 여전히 제대로 답하지 못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도 학교 교과서, 언론, 정치 담론 속에서는 ‘연합군의 승리’가 곧 해방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는 해방의 실체를 절반만 보여주는 시선이다. 진정한 해방은 그 땅에서 살고 싸운 우리 민족의 손으로 쟁취된 것이었고, 이를 되묻는 일은 단지 과거의 해석이 아니라 현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해방을 ‘선물’로 보는 시각은 우리 민족을 수동적인 역사 객체로 전락시킨다. 이 시선은 의도했든 아니든, 식민지 시절 우리 민족의 무장투쟁과 조직적 항쟁을 소외시키며, 외세의 개입을 모든 역사 변화의 중심으로 놓는다. 특히 미국의 원자폭탄과 일본의 항복을 기계적으로 연결한 광복 서사는, 일제가 한반도를 어떻게 통치했고, 우리 민족이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고 조직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김일성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 한반도 각지에서 우리 민족이 주도한 전민항쟁, 국제 반파시즘 전선과의 연대 속에서 이룩된 자력해방의 전개과정을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군정은 우리 민족이 자발적으로 세운 인민위원회와 자치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해체하거나 탄압했다. 이 때문에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을 향해 “해방군인가?, 또 다른 점령군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해방은 일제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과 질서를 새롭게 조직했는가에 달려 있다. 자위대와 인민위원회, 노동자·농민·청년·여성 조직 건설과 학교 운영, 공공시설 보호 활동은 모두 새로운 질서의 씨앗이었다.


해방의 의미는 단순히 8월 15일이라는 날짜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오랜 항쟁과 무장투쟁 그리고 해방을 바라는 전민족이 조직화된 결과였다. 해방이 ‘완성된 사건’이 아니라 ‘쟁취하는 과정’이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이 과정을 잊는 순간, 우리는 다시 외세 의존과 민족 분열을 관성적으로 대하는 오래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2025년 ‘광복 80돌’을 맞이하며 우리는 해방의 주체가 누구였는지, 그 정신은 지금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출처 민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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