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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조국소식 | 평양의 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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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10-12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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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인류력사의 려명기로부터 사람이 살아온 세계적인 문화발상지의 하나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원시사회로부터 고대사회에 이르는 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은 그것을 실증해주고있다.

대표적으로 평양시 동남방 상원군 검은모루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100만년전의것이다. 거기에는 동굴이 많고 원시적인 석기와 원시인들이 먹다버린 짐승뼈의 화석층이 있다. 력포구역 대현동의 동굴로부터는 《력포사람》화석이 나왔으며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로부터는 《만달사람》화석이 나왔다.

기원전 6천년기부터 3천년기의 신석기시대에 와서는 평양교외의 여러곳에서 조선사람의 선조인 《조선류형사람》들이 생활하고있었다.

그것들을 통해서도 조선인민의 선조들이 옛날부터 씨족 혹은 종족별로 대대로 평양일대에서 농사나 수렵, 어업 등에 종사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켜왔음을 짐작할수 있다.

평양은 고대에 형성된 오랜 도시이다.

조선사람의 선조들은 최초의 국가를 신선한 아침의 나라라는 의미에서 조선이라고 불렀다. (후세의 리씨 왕조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이때 세워진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이 고조선은 노예소유자국가였다. 처음 료동지방이 중심이였던 고조선은 기원전 3~2세기경에 평양도 중심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것은 평양이 2 000여년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음을 말해주고있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가 된 때로부터도 1 5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다. 조선의 첫 봉건국가였던 고구려 25대왕인 장수왕은 413년부터 수도를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기기 위하여 대성산성을 보강증축하고 안학궁건설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427년에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졌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로서 수백년간 넓은 면적과 많은 인구를 가진 대도시로 장성발전하였을뿐아니라 나라의 과학기술과 문화발전의 중심지로 되였었다.

918년에 왕건은 조선최초의 중앙집권적통일국가인 고려봉건국가를 세웠다. 이때로부터 조선은 《코레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고려시기에 평양은 서경으로서 제2수도로 있었다.

1392년 고려가 멸망한 후 리조시대에 들어와서도 평양은 대도시로서 정치, 경제, 문화 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평양사람들은 예로부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용감하였다. 실례로 1592년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쳐들어왔을 때 평양과 그 주변 인민들은 완강한 방어전을 전개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시 성을 내주게 되자 김응서장군은 기생 계월향과 짜고들어 적장을 살해하고 적들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반격을 가하여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주고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평양인민들은 1866년 미국침략선 《셔먼호》가 대동강에 기여들어와 강도적인 요구조건을 들이대고 폭행을 감행하였을 때 한사람같이 떨쳐나 싸워 그를 불태워 바다에 수장해버렸으며 1868년에 또다시 미국침략선 《쉐난도》호가 《셔먼호》에 대한 《배상금》을 받으려 쳐들어왔을 때에도 그를 용감히 물리쳤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점한 후 평양은 반일운동의 거점으로 되였다. 1919년 3월 1일 전인민적인 반일봉기는 평양에서 제일 크게 일어났다. 특히 일본통치시기에 평양사람들은 항일무장투쟁에 호응하여 여러가지 형태의 대중투쟁과 지하투쟁을 줄기차게 벌리였다.

평양의 새 력사는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로부터 조선이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에 시작되였다.

평양에서는 1945년 10월에 조선로동당이 창건되였으며 1946년 2월에는 인민정권이 수립되였다.

평양은 민주수도로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민주개혁과 새 조선건설의 앞장에 섰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된 후 평양은 수도로서의 위용을 더욱 떨치게 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의 새 생활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하여 중단되게 되였다.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1950. 6. 25 ~ 1953. 7. 27)은 조선인민에게 있어서 커다란 시련이였다. 평양은 미제의 야수적폭격에 의하여 재더미로 되였다. 미제는 전쟁 3년동안에 평양에 1 400여회에 걸쳐 42만 8 748개의 폭탄을 떨구었다. 당시 평양시 인구가 40여만이였는데 이것은 인구 한 사람당 한개에 해당된다. 전쟁이 한창이였던 1951년 5월 전화에 불타는 평양을 시찰하고 돌아간 국제조사단은 그 보고서에서 《현재의 파괴상태는 실제상 100%에 달하고있다.》라고 썼다.

미제는 조선을 지도상에서 영영 없애버리려고 발광하였으나 조선인민은 추호도 굴하지 않았다. 평양은 언제나 싸우는 조선의 심장이였으며 중추였다. 평양시민들은 《후방도 전선이다》라는 구호밑에 적기의 맹폭격속에서도 하나를 파괴당하면 열, 백을 고쳐세우는 기세로 불사신처럼 싸웠다. 이 나날에 평양은 영웅도시로, 평양시민들은 영웅도시의 시민으로 이름떨치였다.

전쟁이 끝나자 평양시민들은 싸우던 그 기세로 복구건설에 떨쳐나섰다.

백악관의 광신자들은 《평양은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떠서지 못할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1951년부터 예견성있게 전후 평양시복구건설설계도를 준비해온 조선인민은 《피로 지켜낸 영웅도시 평양을 땀으로 복구하자!》, 《우리의 수도를 더 아름답게, 더 빨리 건설하자!》라는 구호밑에 100년이 아니라 불과 10여년동안에 훌륭한 현대도시로 일떠세웠다.

오늘 평양은 번영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로서 세계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고있다.

 

[출처: 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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