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민주조선】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그리워하며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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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5-04-17 07:2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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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그리워하며 되돌아보다
편집국
4월 17일 【민주조선】은 김일성수령의 탄생일을 4.15일이 다가올수록 인민들은 그리움이 뜨거워진다며 그이의 혁명활동을 되돌아보는 기사 세편을 연달아 게재하였다.
기사들에서는 김일성수령의 혁명활동은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것으로부터 시작되어 한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고 실현하는 인민의 당, 국가, 군대를 건설하시었다고 하였다.
인민을 위한 그이의 생을 돌아본 세편의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활동은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인민들속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신것은 길림에서 공부하시던 때인 1927년 겨울방학때였다. 그때 그이께서는 광범한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기 위한 활동을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힘있게 벌리시였다.
특히 위대한 수령님께서 길림감옥에서 나오시는 길로 이 학교를 중퇴하시고 인민들속으로 들어가신것은 그이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할수 있다.
이때를 회고하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로부터 자신의 지하활동이 시작되였고 직업적인 혁명가로서의 새로운 나의 인생이 시작되였다고 하시였다.
이처럼 인민들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조직동원하는것으로부터 혁명투쟁을 시작하신 위대한 수령님이시기에 국가적후방도 없는 상태에서도 오직 인민을 믿으시고 그들의 지지성원밑에 일제를 반대하는 항일무장투쟁을 승리에로 조직령도하시여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실수 있었다.
해방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을 나라의 주인으로 내세우시고 언제나 그들속에 들어가시여 그들과 무릎을 마주하시고 나라일도 의논해주시였으며 그들의 의견을 나라의 정책에 반영하시였다.
하여 해방된 조선에서는 평생 제땅을 가지고싶어하던 농민들의 소원이 반영된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되게 되였으며 로동자들을 공장의 주인으로 되게 한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 등 제반 민주개혁들이 실시되게 되였다.
인민을 찾아 걸으시는 그이의 걸음은 년대와 년대를 이어가며 조국땅 방방곡곡에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이께서는 혁명과 건설에서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될 때에도 인민들속에 들어가시여 나라형편을 알려주시면서 그들의 힘과 지혜를 불러일으켜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고 혁명과 건설을 승리적으로 전진시켜오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94년 4월 어느한 석상에서 자신의 한생을 돌이켜보시며 인민들속에는 철학도 있고 경제학도 있고 문학도 있다고, 그래서 자신께서는 늘 인민들속에 들어가 인민들에게서 배우고있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의 마지막시기인 1994년 7월에도 세상에 인민대중보다 더 힘있고 지혜로운 존재는 없다고, 인민대중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치는것은 가장 영예롭고 보람찬 일이며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더없는 행복이고 영광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자신께서는 지금까지 인민을 믿고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였으며 인민들속에서 살아왔다고,앞으로도 언제나 우리 인민들과 함께 있을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우리 인민은 인민을 찾아 끊임없이 걸으신 그이의 현지지도를 《인민행렬차》를 타신 현지지도로 높이 칭송하였다.
오늘도 우리 인민은 한평생 인민을 위해 바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고있다.
본사기자 김 련 화
한생의 좌우명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 있던 수난의 시기에 탄생하시여 나라없는 민족의 설음을 체험하시면서 성장하시였다.
1919년 3.1인민봉기때였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벌어진 이 봉기때 시위대렬과 함께 만경대에서 보통문까지 나오는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침략자들과 굴함없이 싸우는 인민들의 용감한 투쟁모습과 적수공권의 군중을 총칼로 무참히 살륙하는 일제군경들의 횡포무도한 살인만행을 보시면서 조선인민의 일제에 대한 불타는 항거의 정신과 희생적인 투쟁정신,영웅적기상을 가슴깊이 새기시였다.
이때를 회고하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3.1인민봉기는 나를 인민의 대오속에 세워주고 나의 망막에 우리 민족의 참다운 영상을 새겨준 첫 계기였다.》고 하시였다. 그후 그이께서는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신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중국의 팔도구에서부터 고향 만경대에 이르는 배움의 천리길을 걸으시면서 조선인민이 어떤 인민인가 하는것을 더 잘 아시게 되였다.
조국에 나오시여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실 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어떤 힘으로써도 꺾을수 없는 조선민족의 존엄과 굳센 독립의지를 뜨겁게 감수하시였으며 이런 인민대중을 잘 조직동원하면 얼마든지 조선인민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찾을수 있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시였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님께서 일제에게 체포되시였다는 소식을 들으시였을 때에는 아버지의 원쑤, 일가의 원쑤, 조선민족의 원쑤를 갚기 위해 일제와 사생결단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품으시고 광복의 천리길을 걸으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님으로부터 이어받으신 지원의 사상을 사상정신적원천으로 하여 시대와 혁명실천이 요구하는 새로운 지도사상을 창시하기 위한 사색과 탐구를 거듭해나가시였다.
이 과정에 그이께서는 혁명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인민들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여야 혁명투쟁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진리, 주체사상의 출발점의 하나로 되는 혁명의 진리를 발견하시였다.
이렇게 창시된것이 바로 주체사상이며 그에 의해 건설된 사회가 바로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사회인 조선식사회주의사회이다.
이민위천을 한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혁명과 건설을 해오신 어버이수령님이시기에 당도 국가도 군대도 광범한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고 실현하는 인민의 당, 인민의 국가, 인민의 군대로 건설하시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국호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권기관도 최고인민회의, 군대도 조선인민군으로 불리우고있으며 수많은 대기념비적건축물들과 명예칭호들도 인민문화궁전, 인민대학습당, 인민예술가, 인민배우, 인민교원, 인민체육인 등 인민이라는 고귀한 부름과 더불어 빛나고있다.
본사기자
농민들을 위해 쓰신 분배돈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일인 4월 15일이 다가올수록 수령님에 대한 평원군 원화농장의 일군들과 농장원들의 그리움은 더욱 뜨거워지고있다.
위대한 수령님을 자기 농장의 명예농장원으로 모시고 수령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많이 받아온 그들이다.
지금도 그들의 가슴속에 뜨겁게 간직되여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한량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중에는 분배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1993년 11월 어느날 평원군 원화협동농장(당시)에서는 결산분배모임이 진행되였다.
모임에서는 전후 사회주의농업협동화시기부터 명예농장원으로 등록되여계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지난 기간 저금하여두었던 10만 2 485원의 분배몫을 정중히 올리는 결정이 채택되였다.
불비 쏟아지는 전화의 나날 농민들과 함께 봄씨앗을 뿌리시던 그때로부터 농장이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며 농장의 살림살이를 일일이 돌보아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심혈과 로고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분배모임에 대한 보고를 주의깊게 듣고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0만원이라,10만원이면 부자지,협동조합을 조직할 때에는 이불 한채도 변변한것이 없었는데…이 많은 분배를 어디에 다 쓸가…라고 노래가사를 외우시며 몹시 흐뭇해하시였다.
이윽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도 부자가 되였으니 한턱 쓰겠다고 하시며 그 돈으로 농장에 뜨락또르와 자동차,농기계를 사서 보충해주자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어버이수령님의 은정속에 마련된 22대의 뜨락또르와 련결차,자동차가 10리밖에까지 마중나온 농장원들의 노래와 춤속에 파묻혀 농장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감격없이는 들을수 없는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럽의 한 정치활동가는 《나는 세상에 한 나라의 수령이 명예농장원이 되여 분배몫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처음 들었고 그 분배돈으로 농민들을 위해 뜨락또르며 자동차를 사서 보내주었다는 이야기도 처음 들었습니다.인류가 농사를 시작한 때로부터 수만년이 흘렀지만 이것은 정말 전설같은 이야기입니다.》라고 격찬하였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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