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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 [안광획의 새세대 청춘송가] 만선역사지리조사부부터 청구학회까지 식민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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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5-03-21 08:4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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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획의 새세대 청춘송가] 

만선역사지리조사부부터 청구학회까지 식민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기자명 안광획 연구위원   

 

지난 글에서 짤막하게 다뤘듯이, 1908년에 만주철도주식회사 내부에 만주와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만선역사지리조사부가 설치되었다.


이를 도쿄제대 교수 시라토리 구라키찌(白鳥庫吉)가 주도하였고, 시라토리는 만선역사지리조사부 내에서 후학으로 이케우찌 히로시(池內宏), 이나바 이와키찌(稻葉岩吉), 쯔다 소키찌(津田左右吉) 등을 양성했다.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1914년에 폐지되었고, 일본군 참모본부가 그러했듯 이들의 연구성과들은 일본 내 대학들에 전파, 수용되었다. 또한, 이나바 이와키찌, 이케우찌 히로시, 쯔다 소키찌 등 주요 연구자들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역사편찬’ 활동에 참여해서 식민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저자: 안광획.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글에서는 일본군 참모본부 역사 연구를 필두로, 일본군 주도로 일본 근대역사학이 태어나고 일본 학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역사학이 시작부터 천황제와 침략전쟁을 적극 옹호하는 수단이었으며 과학과 중립성과는 완전히 배치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침략 수단으로서의 일본 역사학이 식민지 조선에 어떻게 ‘이식’되어 식민사학으로 이어졌는지 이번 글에서 살펴보자.

 

만선역사지리조사부 – 식민사학의 토대가 되다

 


(일제 식민사학의 계보도)

 

지난 글에서 짤막하게 다뤘듯이, 1908년에 만주철도주식회사 내부에 만주와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만선역사지리조사부가 설치되었다. 이를 도쿄제대 교수 시라토리 구라키찌(白鳥庫吉)가 주도하였고, 시라토리는 만선역사지리조사부 내에서 후학으로 이케우찌 히로시(池內宏), 이나바 이와키찌(稻葉岩吉), 쯔다 소키찌(津田左右吉) 등을 양성했다.

 

만선역사지리조사부의 행적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1908년부터 1914년까지 7년에 걸쳐 활동했는데, 내부에는 만주역사지리와 조선역사지리 두 개 부서를 두고 각각 만주와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하며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다.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연구 성과로 [만주역사지리] 1, 2권과 [조선역사지리] 1, 2권, [분로쿠-게이초의 역(임진왜란)] 등을 내놓았다.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일제의 조선지배와 대륙침략을 정당화를 연구의 주된 목적으로 내세웠다. 이들이 내놓은 연구성과는 대체로 중국 한나라의 ‘한사군’을 통한 조선 지배나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고([조선역사지리])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조선 침략 정황을 고찰한 것([분로쿠-게이초의 역])으로 하나 같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한 것들이다.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1914년에 폐지되었고, 일본군 참모본부가 그러했듯 이들의 연구성과들은 일본 내 대학들에 전파, 수용되었다. 또한, 이나바 이와키찌, 이케우찌 히로시, 쯔다 소키찌 등 주요 연구자들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역사편찬’ 활동에 참여해서 식민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총독부의 ‘식민지 역사 만들기’ – [조선반도사], 조선사편수회

 

 


(사진: 조선사편수회의 봄 야유회 사진과 조선사편수회가 1938년에 내놓은 사료집 [조선사](잔38권)

 

한편, 한일병합 직후부터 일제는 식민지배 정당성 확보를 위해 조선 역사편찬 사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나왔다는 동조동근론과 조선의 낙후성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1918년부터 총독부 산하 중추원에서 오다 쇼고(小田省俉)와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주도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5개년 사업으로 추진했으나, 지지부진하다가 얼마 안 가 중단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총독부는 다시금 조선 역사편찬 사업을 꺼내 들었다. 3.1운동에서 나타난 우리 민족의 뜨거운 독립 열망과 민족의식을 뼈저리게 경험한 그들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와 민족의식을 죽이지 않고는 식민지배를 이어나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와 민족의식을 거세하기 위한 역사편찬 사업을 다시 추진한 것이다. 특히, 박은식, 신채호, 안재홍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역사 연구가 당시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일제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상황이었기에 이에 대응할 목적도 있었다. 

 

이에 1922년에 총독부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총독부는 도쿄제대 교수 구로이타 가쯔미(黑田勝美)를 책임자로 내세우고 40여 명의 역사학자들을 편수관 및 수사관 등으로 위촉했다. 이나바 이와키찌, 세노 우마쿠마(瀨野馬熊) 등 만선역사지리조사부 출신 인사들과 이마니시 류, 오다 쇼고, 스에마쯔 야스카즈(末松保和),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 등 일본인 연구자들이 주류를 이뤘고, 이병도, 신석호 등 일부 조선인 학자들도 포함되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 역사편찬 이전에 ‘정확하고 공평한 연구를 위한 사료수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고 사료수집 및 정리, 사료집 발간에 공을 들였다. 1920년대 중・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조선사편수회는 총독부와 지방 관청의 지원을 받아 사료수집 및 정리에 공을 들여 1938년에 사료집인 [조선사](총 37권)를 세상에 내놓았다. 물론, 조선사편수회가 내세운 ‘정확하고 공평한 역사 연구를 위한 사료 수집’과 달리, 사료집 [조선사]는 실제로는 조선 역사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 및 침략을 정당화하는 사료들을 취사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선사편수회는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신화’로 치부하여 없애 버리고, 그 기원을 삼한 및 한사군으로 보았다. 또한, 그 뒤로 삼국시대 및 임나일본부-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 순으로 시대를 나누었다. 이와 같은 조선사편수회의 우리 역사 시대구분은 식민사학을 거쳐 그대로 해방 후 한국 사학에도 이어져 오늘날에도 고조선은 애매모호하게 처리되고, 남북국시대를 표방해도 ‘통일신라’ 용어는 그대로 이어지는 등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한편, 조선사편수회에 참가한 일본인, 조선인 학자들은 동시에 일본 대학과 경성제대에서 역사 연구를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사편수회가 수집하고 정리한 사료들은 조선 역사 연구의 밑천이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조선사편수회가 원천을 제공했다면 실제 조선 역사편찬은 경성제대 및 청구학회로 대표되는 학계에서 진행한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은 상황은 ‘총독부가 주도해서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편찬하겠다’는 초창기 기획에서 벗어난 것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사료 수집 및 정리를 통해 총독부가 조선 역사편찬을 사실상 좌지우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식민사학의 심화와 보급, 확산 – 경성제대 사학과와 청구학회

 

 


(사진: 경성제대 법문학부 풍경(서울대 고문헌자료실 소장)과 청구학회의 학술지 [청구학보])

 

한편,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지 조선 역사 사료 수집 및 정리가 활발히 벌어지고 있던 때,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을 위한 학문 토대 산실이자 고등교육기관인 경성제국대학을 1924년에 설립했다. 이어서, 1926년엔 경성제대 내에 법문학부를 설치, 산하에 사학과(국사(일본)학, 조선사학, 동양사학, 서양사학)를 두었다.

 

특히,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사학과의 경우 오다 쇼고, 이마니시 류, 스에마쯔 야스카즈 등 조선사편수회 참여 인원들이 교수를 겸직, 조선사 강좌를 진행하여 총독부의 ‘역사편찬’을 학계로 끌고 오는 한편, 식민지 조선 학생들에 식민사관을 전파하며 식민사학을 심화시켰다.

 

여기다가 1930년에는 경성제대 교수 및 졸업생・재학생, 총독부 및 조선사편수회 인사들을 총망라한 역사 연구학회인 청구학회(靑丘學會)가 조직되었다. 청구학회는 1939년 해산될 때까지 10여 년에 걸쳐 활동했는데 조선 및 만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 보급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청구학회는 계간 학술지 [청구학총]을 발간하여 총 30호에 걸쳐 조선 및 만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청구학회는 초창기 대중을 상대로 한 공개 역사, 문화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말하자면 경성제대에서 식민사관 하에 역사연구를 진행하고, 청구학회는 그 연구성과를 대중들에게 확산, 보급한 것이다.

 

이렇듯, 만선역사지리조사부에서 토대를 닦은 식민사학은 조선사편수회, 경성제대 사학과, 청구학회 등 일제강점기 전 기간에 걸쳐 총독부의 지도하에 체계적으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 확산된 것이다.

 

2025.03.25

[통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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