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는 ‘미완의 혁명’이 아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전민중의 투쟁이었다. 중고등학생, 대학생, 농민, 노동자 가리지 않고 모든 민중이 항쟁에 떨쳐나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승리의 항쟁이었다.
4.19는 4월 항쟁이었다. 4월 19일 하루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날 시작된 것도, 그날 끝난 것도 아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서 출발한 항쟁은 4월 들어와 정권 퇴진 투쟁으로 상승하였고, 이승만이 하야를 결정한 4월 26일까지 항쟁은 계속되었다. 87년 민주화운동을 6월 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4.19 혁명 역시 4월 항쟁이라고 명명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
3월 15일은 4대 대통령과 5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일이었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문제는 부통령.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에 밀리는 상황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3.15 선거 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내무부 관료들과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부정선거와 개표 조작을 준비했던 것.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고, 가짜 투표용지를 만들어두었다가 투표함에 무더기로 투입하는 등 다양한 계획 등을 세웠다. 선거 당일인 3월 15일엔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가 하면 한 명이 투표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 선거 조작 행위가 저질러졌다.
개표 과정에서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부정선거가 들통날 것을 우려하여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라는 지시가 내려가기도 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당연한 일. 3월 15일 오후와 저녁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권 퇴진의 불씨를 지핀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이때까지만 해도 시위의 주된 구호는 부정선거 규탄이었다. 이승만 정권 퇴진의 구호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본격적인 정권 퇴진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다가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4월 11일.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사망한 것이다. 경찰은 시신에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버렸지만, 밧줄이 풀리면서 27일 만에 시신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목격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마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경찰서장실 앞뜰에 수류탄을 투척할 정도로 극에 달했다.
4월 19일엔 전국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가 이승만과 이기붕의 퇴진, 김주열 열사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승만 정권은 경무대에 몰려든 대학생들에 총격을 가했고,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4.3 제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무참히 짓밟으려 했다.
계엄령 선포 후 전국민적 정권 퇴진 항쟁 폭발
전국민적인 정권 퇴진 투쟁이 폭발한 것은 계엄령 선포 이후였다. 계엄령으로 서울에서의 투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인천에서 투쟁이 발생했다. 4월 23일 인천에서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고, 4월 24일 마산 지역의 ‘마산애국노인회’ 할아버지들이 “책임지고 물러가라”, “갈아 치울 때가 왔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투쟁을 벌였다. 할아버지들의 투쟁에 자극받은 것이었을까. 4월 25일엔 마산 지역의 할머니들이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결정타는 4월 25일 서울이었다. 이날 대학교수들이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 및 대법관들은 책임지고 물러서라”라는 내용이 담긴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지역에서의 투쟁과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자극받은 서울 지역의 학생들과 시민들 역시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4월 25일 서울에서의 시위는 4월 26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 퇴진까지 돌아가지 않을 기세였다. 4월 26일 오전 7시 45분 경 동대문 부근에 1만 5천 명의 인파가 집결해 있었고, 8시 30분 경엔 7만 5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시위대는 재선거 실시, 이승만 퇴진을 요구했다.
이승만 하야 성명, 부패 독재 정권 몰아낸 승리의 4월 항쟁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서울 도심 거리는 시위대로 가득 찼고, 시위대는 경무대를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예상치 않은 이승만 대통령 사임 성명을 들어야 했다. 광화문 인근에 모여있던 시위대는 계엄군의 마이크를 통해 이승만 사임 성명을 듣는 ‘희극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성난 항쟁 대오를 진압하려 했다. 그리고 이승만 퇴진 구호가 전국적 범위에서 폭발한 것은 4월 25일의 일이었다. 길게 보면 일주일, 짧게 보면 하루 만에 이승만은 강경 진압 태세에서 물러나 사퇴 즉 하야를 선택한 것이다.
이승만은 4월 24일 자신이 자유당을 탈퇴하고, 국무위원들의 사직서를 수리해서 개각하겠다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하야 결심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승만의 하야는 4월 25일 어떤 변수가 작동한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승만이 돌연 하야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건 간에 4월 항쟁은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승리의 항쟁이었다.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200명 가까운 사망자와 6천 명이 넘는 부상자를 양산할 정도로 폭력 진압을 서슴지 않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까지 동원했던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맞서 굴함 없이 싸워 승리한 민주 항쟁이었다.
ⓒ4.19혁명디지털아카이브
4월 항쟁 당시 미국은 어떻게 움직였나
- 장창준 객원기자
4월 항쟁과 미국 ②
시야를 돌려 4.19 항쟁 과정 당시 미국의 움직임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움직임을 보면 이승만이 돌연 하야를 발표한 이유가 확인된다.
미국에 있어 이승만은 ‘계륵’과도 같은 인물이다. 미국은 이승만 집권 기간 ‘에버레디 계획’이라는 이승만 제거 계획을 여러 차례 수립할 정도로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에버레디 계획’은 단 한 번도 추진된 적이 없다.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우나 고우나 한국 정치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줄 인물은 이승만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내정불간섭 원칙 내세우며 이승만 독재 지지
3.15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다. 당시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은 3월 11일 주한미부대사 마셜 그린을 찾아가 왜 미국이 부정선거에 가만히 있느냐는 항의를 했다. 그린 부대사는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반복했다.
이때만 해도 미국은 ‘계륵’ 이승만의 권력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3월 15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고 마산 일대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미국은 이에 우려를 표명했지만, 내정불간섭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은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우려하는 기색을 보였을 뿐이다.
3월 17일 주한미국대사관은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미국이 한국에서 추구하는 목표, 즉 친미적이고 반공적이며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한국을 만드는 것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또한 미국이 부정선거에 대해 인정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 한국 정부가 더 억압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담긴 정세보고서를 미 국무부에 전달했다.
미 국무부는 미국이 부정선거에 무관심하거나 인정하는 듯이 보이는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주한미대사관에 전달했다. 다만 4월 7일 미 국무부는 한국의 여야 정치인 중 온건한 인물들과 접촉해 타협적 해결을 모색하라고 대사관에 지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한국의 상황을 지켜봤을 뿐이었다.
재선거 요구로 방침 전환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고 대규모 시위가 촉발하자 미국은 한국 정치 상황에 직접 개입하는 정책을 결정했다. 4월 15일 미 국무부는 주한미대사에게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미국 정부가 작성한 각서를 전달하라고 했다. 각서에는 1) 부정선거 책임자의 퇴출 2) 선거법의 개정 등의 권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에서의 시위가 폭발했던 4월 19일 밤 9시경 미국 대사는 경무대를 찾아 이승만을 만났다. 매카너기 대사는 부정선거 사실을 인정하고 시정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내각 장관들은 부정선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사태 해결 방법으로 재선거를 결정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국무부는 재선거를 수용하라고 이승만을 압박해야 한다는 방침을 주한미대사관에 전달했고, 4월 21일 주한미대사는 다시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경무대를 찾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이승만은 소요 사태의 원인을 장면과 가톨릭의 음모 때문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기록에 따르면, 주한미대사는 재선거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이때부터 미국의 분위기가 심각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4월 21일 면담 내용을 보고받은 미 국무부는 분개했고, 이승만 정권이 사태 해결책 즉 재선거를 제시하기 전까지 접촉하지 말 것을 미대사관에 주문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승만 사퇴까지는 검토하지 않았다. 4월 23일 주한미대사관에서 미국무부에 보낸 전문은 미대사관 측에서 학생, 교수들과 접촉해 본 결과 이들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사태 수습 조치는 이기붕 사퇴, 재선거, 경찰 처벌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승만 사퇴 이야기는 없었다.
4월 25일부터 이승만 사퇴로 방향 전환하고 압박 시작
4월 25일 오전 미대사관이 작성한 전문에는 4월 24일 미국 대사관 직원이 고려대학교 교수를 만났고, 4월 25일 교수단 시위를 벌일 예정이며, 교수단의 요구에는 이승만 사퇴가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4월 26일 오전 9시 10분 미국 대사는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의 심각성을 전달했다. 미국 대사는 김정렬에게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재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라고 압박했다. 또한 김정렬에게 자신과 이승만의 회담을 주선할 것을 요청했다. 한국 사태에 대한 미국의 긴박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각 시위대가 서울 도심을 메우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미국 CIA 한국 지국장 피어 드 실바 역시 대통령 비서 박찬일에게 전화를 걸어 걸어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한편 미국 대사는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함께 경무대를 가자고 제안했고, 매그루더는 이를 수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렬 국방장관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라는 ‘조건부 하야’를 결정했다.
김정렬은 10시 15분경 이승만이 조건부 하야 결정을 내렸다고 주한미대사에게 전화로 알렸으나 미국은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10시 27분경 주한미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이 경무대로 출발했고 이승만을 만나 조건부 하야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주한미대사는 이승만의 무조건 하야가 한국민의 정당한 요구일 뿐 아니라 ‘근본적인 미국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미 대사는 이승만에게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온 연로한 정치가는 그의 책무에서 벗어나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고, 특히 지금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정부의 부담을 젊은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라며 이승만의 즉각 사퇴를 압박했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7일 국회에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미국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이승만을 사퇴시킨 이유: 민주주의 아닌 예방 혁명
사태를 방관하던 미국이 이승만 사퇴를 결정한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4월 17일 미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 당시 미국의 우려가 잘 담겨있다.
“이러한 상황을 통제하려는 심하게 억압적인 한국 정부의 조치들은 대중들의 적대감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의 위신에 먹칠을 하고, 이 나라를 공산주의자들의 전복 활동에 더 취약하도록 만들 것이다. 권위주의적 경향들은 다른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 특정 국가들에서 미국 정부에 의해 용인되어 왔지만, 여기의 상황은 권위주의의 강화가 권위의 약화로 가고 있는 경우이다.”
이승만 정부의 억압적인 조치는 “미국이 한국에서 추구하는 목표” 즉 “친미적이고 반공적이며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강력한 한국”(3.17 보고 전문)을 만들려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담겨있는 보고이다. 미국의 우려는 심각해지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억압 통치는 계속되었다.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결국 미국은 직접 개입에 나섰지만, 첫 조치는 ‘재선거 요구’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재선거 요구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 사퇴를 결정한 것이다.
미국이 이승만 사퇴를 결정한 이유는 이승만이 더 이상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권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상황이 방치된다면 시위는 “친미적이고 반공적이며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강력한 한국”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상황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가 결정적이었다. 즉 미국은 예방 혁명 차원에서 이승만 사퇴를 결정한 것이다.
이승만의 하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한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미국 합동참모본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낸다.
“이제는 더 이상 법과 질서를 무시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 이후에 일어나는 봉기(uprising)는, 만약 그것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급진적인 요소들에 의해, 또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또는 깡패들에 의해 선동된 것일 것이다.”
이승만 하야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계속된다면 엄단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사 피력이다. 주한미대사가 미국무부에 보낸 전문이 아니라 유엔군사령관이 미 국방부에 보낸 전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그루더는 향후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에 최루탄 가스 사용을 포함한 '폭동 진압훈련'을 시킬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또한 이미 최루탄 가스를 공수받을 있도록 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승인을 받기도 했다.
장면 내각이 등장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 정치 상황은 미국의 근본 이익을 위협하는 수준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즉 이승만 사퇴만으로는 혁명을 예방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미국은 다른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민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