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 | 제주4.3항쟁의 진실과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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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4-04-03 09:3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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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의 진실과 계승
편집국
76년 전 미군정의 조선반도 분단 획책과 조선인 탄압에 반대하여 일어선 제주도민 수만 명이 미군졍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되었고 항쟁은 진압되었다. 지금도 미국은 대한민국 영토 곳곳을 무상으로 점령하고 정치, 군사, 문화, 사회의 모든 영역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4.3 항쟁 76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4.3항쟁의 진실과 미군정의 제주도민 학살의 본질, 그리고 4.3정신 계승의 과제를 상세하게 다룬 [프레시안]의 기획기사 3편을 연이어 소개한다.
자주 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세 차례의 항쟁
장창준 객원기자
제주 4.3 76주년 기획 ①
제주 4.3은 세 차례에 걸친 제주 도민들의 항쟁이었다. 항쟁의 대상은 미군정이었고, 항쟁의 목적은 자주 독립을 쟁취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제주 항쟁을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참히 짓밟았다.
1차 항쟁: 1947년 3월 1일, 3만의 제주도민이 집결한 이유
제주도에 미군이 주둔한 것은 1945년 9월 28일, 그러나 실질적인 군정 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 이때는 이미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제주 전체 지역에서 자치 활동을 본격화하던 시점이었다. 제59군정중대는 인력 부족과 정보 부재로 원만한 군정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제주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관리와 경찰을 등용하면서 반민족 세력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나갔다. 여기서 1946년 8월 제주도(島)의 도(道) 승격은 반민족 세력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였다. 경찰 병력이 증강하고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는 등 공권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맞추어 미군정은 제주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제주 인민위원회의 자치 활동에 불가능해지자 제주도민들은 미군정과의 투쟁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제주도민들은 1947년 2월 17일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계,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3·1투쟁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를 결성했다. 또한 2월 23일에는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이하 제주민전)을 결성한다.
제주 도민의 자주 독립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미군정은 제주 3.1 대회를 봉쇄하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제주민전이 결성되던 2월 23일, 미군정은 충청남도와 북도에서 응원경찰 100명을 제주에 급파하고,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제주도에서 채용한 제주 출신 경찰로는 3.1 대회를 제대로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군정이 육지에서 제주도로 경찰을 파견한 것이다.
제주민전 지도부는 미군정 당국과 여러 차례 접촉하여 3.1 대회 보장을 요구했으나 미군정은 집회 불허 방침을 고수했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투쟁은 막을 수 없었다. 제주민전은 3.1 대회를 강행했고, 3만 명의 제주 도민이 제주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에 집결해, “3·1 정신으로 통일 독립 전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1947년 3.1 대회는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제주 도민의 첫 번째 항쟁이었다. 미군정은 이 항쟁을 봉쇄하기 위해 육지 응원경찰을 동원하고, 집회 불허 방침을 고수했다. 그러나 제주민전을 중심으로 단결한 제주 도민은 3.1 대회를 강행했다. 미군정에 맞선 제주 도민의 첫 번째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차 항쟁: 1947년 3월 10일 총파업, “탄압이면 항쟁”
문제의 발포 사건은 관덕정 부근에서 발생했다.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쳤으나, 기마경찰은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쳤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에 항의하기 시작했고, 관덕정 부근에 있는 무장 경찰이 이에 대응하여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15세 학생, 젖먹이 아이를 안은 여인 등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 응원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미군정 당국은 정당방위였다면서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고, 3.1 대회를 준비한 사람들은 연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립병원 검시 결과 피해자들은 ‘등 뒤에서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났다. 경찰이 인파들의 등 뒤에서 총을 쏜 것이다. ‘시위대의 경찰서 습격에 의한 정당방위’라는 미군정의 발표는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제주도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미군정에 맞섰다. 제주읍내 각 직장 대표자들은 ‘제주읍 총파업단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도청과 우체국을 비롯한 관공서 23개, 중등학교 13개교, 초등학교 92개교, 통신기관 8개소, 교통기관 7개소, 금융기관 2개소, 상사회사 및 공장 15개 소 등 도내 166개 단체 4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3월 10일 총파업에 참가했다.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했을 정도로 3.10 총파업은 제주 도민 전체의 항의 행동이었다.
이들이 내건 구호는 다음과 같다.
가. 발포책임자 강동효 및 발포 경관을 살인죄로써 즉시 처형하라.
나. 경찰관계의 수뇌부는 즉시 책임 해임하라.
다. 피살당한 동포의 유가족의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며 피상자에게 충분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하라.
라. 3·1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된 인사를 즉시 무조건 석방하라.
마. 경관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바. 경찰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미군정은 탄압으로 대응했다.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해 총파업에 강경 대응했다. 미군정은 또한 3월 19일 조병옥 경무부장을 내세워 2.10 총파업이 북조선과의 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하고,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몰고갔다. 서북청연회 회원 역시 대거 제주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 주도 혐의로 제주민전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여 4월 10일까지 500명을 잡아갔다. 이 중 328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52명이 목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 3월 1일 이후 1948년 4.3 발발 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거되었다.
총파업 등 2차 항쟁에 참여했던 제주도민들은 검거를 피해 한라산 동굴 등으로 피신하면서 투쟁을 계속했다. 이들의 요구는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것이었다. 발포자를 처벌하라는 것, 억울하게 검거된 인사들을 석방하라는 것, 탄압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제주 도민의 2차 항쟁은 “탄압에 맞선 항쟁”이었다. 미군정의 탄압이 계속된 결과 2차 항쟁은 중단되지 않았고, 1948년 분단 정부 수립이 본격화되는 단계에 이르자 3차 항쟁으로 발전했다.
3차 항쟁: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저지를 위한 무장 항쟁”
제주 도민들이 2차 항쟁이 진행되던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는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권고하고, 1948년 2월 26일 38선 남쪽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권고하는 미국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1948년 3월 10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5월 10일 단독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3월 17일 미군정법령 제175호인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표되었다. 단독 선거는 곧 분단 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모든 애국 세력들은 단독 선거 반대에 나서게 되었고, 제주 도민들 역시 단독 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항쟁 즉 3차 항쟁에 나서게 되었다.
4월 3일 새벽 수백 명의 무장 대오가 응원경찰, 서북청년회 숙소, 대동청년단 등 반민족 세력들의 거점을 지목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4.3 문장대가 뿌인 ‘호소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전략> 탄압이면 항쟁이다. <중략>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 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매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후략>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 구국 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전략>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들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중략>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는 4월 3일 3차 항쟁이 2차 항쟁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미군정의 탄압에 저항하여 무장 항쟁에 나선 것이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는 구호는 4월 3일 3차 항쟁이 단독선거와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무장 투쟁에 나선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무장대는 5.10 단독선거를 거부하기 위해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 사무소 등을 집중 공격하였고, 많은 제주 도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5월 10일 입산을 선택하고,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 제주 4.3 발생 뒤 산간 지방으로 피신한 어린이들. ⓒ 제주4.3아카이브
그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표율 과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제주도 선거구 세 곳 중 2곳에서 선거가 무산된 것이다. 미군정은 선거 미달 2개 선거구에서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지만, 끝내 재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
3차 항쟁은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제주 도민의 투쟁이었다. 많은 제주 도민들은 “탄압이면 항쟁이다”, “매국 단선단정 결사 반대”라는 무장대의 투쟁에 호응하여 5.10 단독 선거를 반대함으로써 미국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 정책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왜 제주도였나: 해방 후 가장 강력한 인민 자치활동 전개
4.3 항쟁이 제주에서 발생한 것인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제주 도민에게 해방은 극단적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자주 독립 국가 건설 염원이 그 어느 지역보다 높았다.
1945년 1천 명이던 일본군 제주 주둔 병력은 그해 8월이 되면 7만 5천 명으로 늘어난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700~800개의 동굴 진지를 구축하고, 모슬포 알뜨르비행장과 제주 정뜨르비행장, 삼양 공군기지 등에는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가, 해안가 곳곳 동굴 진지에는 가이텐 자살특공대가 배치되었다.
▲지금도 제주 해안가를 둘러싼 진지동굴을 볼 수 있다.
일본군은 결7호 작전에 동원할 목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소년대, 소녀대, 부녀대, 청년대, 장년대를 편성했고, 이들을 유격 훈련 등 각종 군사훈련에 동원했다. 당시 제주도민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싸이고노 히토리마데” 즉 “최후의 한사람까지”였다.
그래서 제주도민에게 해방은 그 누구보다 각별한 의미였다. 극단적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제주도에서 가장 강력한 자치활동이 전개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상황을 “제주4·3평화재단”은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광복 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 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 제주농업학교에서 제주도 건준이 결성되었다. 중앙의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재편됨에 따라 제주도 건준 또한 9월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을 계기로 1945년 말에 이르기까지 청년동맹·부녀동맹·농민위원회·소비조합 등 각종 사회단체가 속속 조직되었다.”
미군정은 제주도인민위원회를 “도내의 유일한 정당으로서, 모든 면에서 정부나 다를 바 없는 유일한 조직체”라고 평가했으며, 동아일보 역시 “제주의 인민위원회는 건준 이래 양심적인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분립된 한독(韓獨),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등의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이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극단적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제주도민들은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전 제주 도민의 지지를 받는 사실상 유일한 행정기관이었고, 가장 강력한 자치조직이었던 이유이다.
제주도민들이 1947년 3.1 대회를 대대적으로 준비한 것도, 응원경찰의 발포에 3.10 총파업으로 맞설 수 있었던 것도,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4.3 무장봉기에 나섰던 것도 모두 제주 도민들이 가장 강력한 자주독립 국가 건설 염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제주 도민 학살: 자주 독립과 통일 그리고 주권의 강탈
장창준 객원기자
제주 4.3 76주년 기획 ②
제주 4.3은 냉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발생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냉전 정책을 위해 한반도 분단을 획책했고, 제주 4.3은 그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항쟁이었다.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4.3 항쟁을 진압해야 했고, 조작과 공작을 동원해서라도 제주도민들을 초토화해야 했다.
제주 4.3 항쟁은 미군정의 탄압과 분단에 맞선 반미항쟁이었다. 제주 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누워있다. 백비 앞 안내문에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누워있는 백비가 세워지고 비석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는 날이 올 때, 거기엔 “자주 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제주 반미항쟁”이라고 적어야 한다.
미군정, 응원경찰 보내 총격 사건 일으키고 ‘빨갱이 섬’으로 몰아가
1945년 9월 9일 미군정이 시작되자마자 미군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는 것이었다. 조선 인민의 자주 독립 의지가 인민위원회로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미군정에 제주도민들은 눈엣가시였다. 제주인민위원회는 38선 이남 지역에서 가장 강한 자주 독립 국가 건설 역량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 도민들의 자주 독립 열망을 꺾어야 38선 남쪽 지역에 대한 미군정의 지배는 완성될 수 있었다. 미군정은 1947년 3.1 대회가 준비되던 시기부터 이 대회를 파탄 내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미군정은 육지에서 제주 3.1 대회를 진압하기 위해 육지의 응원경찰을 파견했다. 미군정의 희망대로 응원경찰은 제주 도민에 총격을 가함으로써 3.1 대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제주 도민들은 발포자 처벌 등을 주장하며 3.10 총파업으로 미군에 맞섰다.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제주 도민의 투쟁 의지를 꺾기 위해 미군정은 좌익 색깔 공세를 강화했다.
“3월 10일 총파업이 좌익 빨갱이들의 소행”이라는 3월 14일 미군정의 정보보고서는 조작된 것이었다. 3월 10일 발생한 총파업이 ‘좌익 빨갱이’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4일 만에 내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미국은 제주 도민에 대한 ‘빨갱이 사냥’을 위해 정보보고서를 조작한 것이다.
그 이후 미군정은 자신은 뒤로 빠지고 친일 경찰 출신, 서북청년단 등을 대거 제주도에 내려보내 ‘레드 헌터’(빨갱이 사냥)에 착수한다. 제주도민의 자주독립 의지를 ‘빨갱이 색깔’을 입혀 분쇄하려고 했던 것이다.
47년 12월 미군 보고서, 경찰이 진압 못하면 군대를 파견한다는 결론 내려
‘레드 헌터’라는 극단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미군정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은 제주 도민의 투쟁을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진압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냉전 정책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애초 미국의 전후 아시아 정책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파트너로 하여 미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7년 중반을 거치면서 장개석 국민당군과 모택동 공산당군 사이에 전세가 역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택동 공산당군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양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시아 정책을 새롭게 수립해야 했던 미국은 장개석 정부를 대신해서 일본을 새로운 파트너 국가로 설정했다. 그 결과 한국의 중요성도 더욱 커져갔다. 일본을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한반도 남쪽에서만이라도 확실한 반공 정권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강화된 것이다.
미국이 1947년 하반기부터 단독정부 수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이 이렇게 바뀌자 38선 이남의 미군정은 더욱 다급해졌다.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단독 선거가 치러지기 전에 제주 도민의 투쟁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1947년 12월 13일 제주도 정세에 대한 미군 CIC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 보고서에서 미군정은 만약 현재와 같은 혼란 상황이 경찰이 수습하지 못하면 제주도는 더 큰 혼란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보고서가 아니었다. 경찰이 수습하지 못하면 더 강력한 공권력으로 제주도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지침서’였다. 경찰보다 강력한 공권력 즉 군부대 투입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군대를 동원한 제주 항쟁 진압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4.3 항쟁 일어나는 즉시 계엄령 선포, 경비사령부 설치
4월 3일 제주도민은 역사적인 세 번째 항쟁 즉 4.3 항쟁에 돌입했다. 완전한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애국적 반미항쟁에 나선 것이다.
미군정은 즉각 군부대 투입에 착수했다. 4월 5일 제주도에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각 도에서 대규모 군대와 경찰, 반공단체 회원들을 제주도에 급파했다. 제주 해상교통은 차단되었고, 미군 함정은 해안을 봉쇄했다. 군병력으로 제주 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4월 27일 미군정은 경비대의 진압 작전 투입을 결정했다. 이로써 제주 항쟁의 진압 주체는 경찰에서 군부대로 바뀌게 되었다. 미군정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제주도민을 학살하는 것이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4월 28일 미군정이 미처 상상하지 않았던 사태가 발생했다. 진압부대의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책임자 김달삼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경비대와 무장대 쌍방은 3일 동안 교전을 중단하고, 무장대는 3일 안에 무장을 내려놓고 하산하면 경비대는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 평화협정의 요지였다. 미군정에 있어 평화협정의 이행은 제주 도민들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미군정에 있어 제주 도민들은 언제 다시 항쟁에 나설 지 모르는 불안한 세력이다. 따라서 그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미군은 4.28 평화협정을 파탄내기 위한 공작에 착수한다.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 제주 도민 초토화를 위한 미국의 조작
5월 1일 제주도 오라리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으로 4.28 평화협정은 폐기되었다. 미군정은 제주도 좌익 세력이 4.28 평화협정을 파기하기 위해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켰다고 결론내리고, 초토화작전을 본격화한다.
▲ 미군이 항공기에서 불타는 오라리 마을을 촬영했다.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그러나 오라리 방화 사건은 우익청년단의 소행이었다. 우익청년 30여 명이 오라리(지금의 연미마을)의 5세대 12채 민가를 불태웠던 것이다.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 후 우익청년단체의 방화라고 미군정에 보고했으나 미군정은 이 보고를 묵살했다.
당시 오라리 방화 사건은 미군 촬영반에 의해 촬영됐다. 미군 비행기가 불타는 오라리 마을을 공중에서 찍은 것이다. 이 영상 필름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다. 미군정이 사전에 방화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다면 항공 촬영은 가능하지 않았다. 미군의 촬영은 미군정의 조작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미군정은 오라리 방화 사건 이후 김익렬 연대장에게 초토화작전 전개 필요성을 강조했다. “10만 달러를 주겠다”,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을 알선하겠다”라며 유혹했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끝내 초토화작전을 거부했다. 5월 6일 미군정은 김익렬을 연대장에서 해임하고 박진경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미군정의 충실한 하수인 박진경에 의해 초토화작전은 시작되었고, 이 초토화 작전은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되었다.
제주 4.3: 자주 독립과 통일 그리고 주권을 강탈하기 위한 미군정의 학살
미군정은 본격적인 초토화작전은 이승만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왔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은 미군정의 오라리 방화 사건 조작으로 본격화되었다. 미군정에 의해 시작된 학살이었다.
▲ 제주도에 파견된 미고문관 러취 대위가 경비대 장교와 함께 작전지도를 펴놓고 진압작전계획을 숙의하고 있다.(1948.5.15.)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또한 이승만 정부 수립 후에도 미군의 학살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하여(1948.8.24) 한국군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협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에 대한 지휘책임을 갖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의 학살 역시 미군정이 지휘 책임을 갖는 한국군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제1조 주한미군사령관은 본국의 지시나 자신의 직권 범위 내에서 대한민국 국방군을 계속적으로 조직, 훈련, 그리고 무장할 것에 동의한다.
제2조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 공동안전에 부합될 경우에 점진적이며 가급적 속히 전 경찰, 해안경비대, 현존 국방경비대의 지휘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이양하기로 동의한다. |
제주 4.3은 반미 항쟁에 나선 제주 도민에 대한 미군정의 학살이었다. 자주 독립과 통일 그리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제주 도민의 투쟁은 미군의 학살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다.
자주독립과 주권 회복: 4.3 항쟁 정신을 계승하는 현시기 다섯 가지 과제
장창준 객원기자
제주 4.3 76주년 기획 ③
미국은 제주 4.3 항쟁을 무참히 짓밟고 한국의 정치, 군사, 경제를 지배했으며, 미국의 지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3만 명에 가까운 미군이 대한민국 영토 곳곳을 무상으로 점령하고 있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주둔권을 대한민국은 허여하고, 미국은 수락한다”라고 규정했다. 미군의 주병권을 완전무결하게 내놓은 동맹 조약은 한미조약이 유일하다.
대한민국 군대에 대한 전시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의 수중에 놓여 있으며, 반환된 미군 기지의 토지 오염 정화 비용은 오롯이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미군에 대한 사법권 역시 대한민국은 온전하게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100% 미군의 범죄로 인한 벌금마저 국민의 세금에서 25%를 부담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처지다.
이런 처지를 식민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식민지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사라져야 한다. 일제에서의 식민 지배에서 ‘미국의 식민 지배’로 바뀌는 개탄스러운 현실의 길목에 4.3 제주 항쟁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4월 3일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제주 4.3 정신 계승이 회자된다. 그렇다면 4.3 항쟁 76주년을 맞는 올해, 제주 4.3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4.3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4.3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4.3 학살에 참여했던 공범으로서 대한민국의 사과였을 뿐이다. 4.3 학살의 주범은 미국이다. 미국의 사죄를 받아내는 것은 4.3 정신을 계승하는 첫걸음이 된다.
둘째, 자주를 실현하고 주권을 오롯이 회복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자주독립을 이룩한 주권 국가가 아니다. 미군의 무단 점령을 종식하고,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영향력과 지배에서 벗어나야만 자주는 실현되고 주권은 회복된다. 76년 전 제주 도민의 외침은 “자주독립, 통일, 주권 쟁취”였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셋째, 반통일, 반민주, 반민족 세력을 청산하는 것이다. 미군정과 함께 4.3 제주 도민을 학살한 세력은 바로 반통일, 반민주, 반민족 세력이다.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할 세력들이 제주 도민들을 학살하고 대한민국의 ‘주인’이 되었다. 이들은 8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좌지우지하면서 한국 사회에 군림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는 실종되고, 경제는 파탄나고 있다.
넷째, 반전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언제 어디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정세가 조성되었다. 북(조선), 중국, 러시아를 적으로 삼는 미국의 신냉전 정책과 그의 선봉장 역할을 담당하는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적대 정책이 한반도 전쟁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거의 매일 진행되는 한미, 한미일 군사연습은 한반도 전쟁 위기의 주범이다. 윤석열 정부를 퇴진시키고, 한미, 한미일 군사연습을 중단시키고,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 몰아넣는 한미 동맹을 해체했을 때 반전 평화는 가능하다.
다섯째, 얼마 남지 않은 4.10 총선에서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힘을 심판하고, 자주 독립, 반전 평화, 주권 회복을 지향하는 정치 세력이 대거 국회에 입성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오직 진보정당만이 자주 독립, 반전 평화, 주권 회복을 위한 자주 정치, 평화 정치를 펼쳐왔다는 사실은 지난 정치사가 입증한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진보정당이 자주와 주권을 위한 자주 정치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문제와 자주 문제를 지속해서 거론했던 진보정당, 그 결과 냉전수구세력으로부터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던 진보정당만이 자주정치를 전면화할 수 있다. 그런 진보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을 때 비로소 자주정치는 가능해진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또다시 항쟁을 요구한다. 미국의 영향력과 지배에서 벗어나고, 반전 평화를 실현하고, 파탄 난 민생을 회복하고, 사면초가에 빠진 대한민국을 정상 발전의 길로 돌려놓기 위한 거대한 투쟁이 요구된다.
4.3 제주 도민들이 미군정의 지배와 학정을 종식하고,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한 세 차례의 항쟁에 일떠서고, 미군정의 탄압과 학살에 맞서 물러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제주민전이라는 하나의 투쟁 조직으로 단결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 제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내건 건국 5원칙
또다시 항쟁이 요구되는 대전환기,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민중의 단결이 필수이다. 하나의 정치조직, 하나의 투쟁조직으로, 자주 독립과 주권 회복이라는 정치강령으로 노동자 민중이 단결했을 때 4.3 항쟁 정신은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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