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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도서연재]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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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3-07-29 12:1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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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연재]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 (12) 

 

 


 

 

제 1장 주체사상의 창시와 전일적 체계를 갖춘 학설로의 심화발전



제2장 김일성주의의 견인력의 원천



제 3장 인간위주의 철학적 세계관의 독창성문제

 

 

제 1절 인간위주의 철학의 근본문제



제 2절 주체의 인간본성론 논의

 

 

나: 앞에서 이미 강조된 바와 같이 인간위주의 주체철학에서 <과학적 인간론>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철학의 근본원리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해명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과 일부 문필가들은 주체철학의 인간론에 대하여 여러가지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존재의 개념을 맑스주의 철학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면서 주체의 <인간본성론>을 관념론이라고 왜곡하고 주체의 인간관을 비노동자 계급적 인간관이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일부 문필가들은 인간본성에 대한 주체적 견해를 맑스-레닌주의적 ‘틀’에 맞추어 진화론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그 본의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해 주시지요.

 

주: 제기된 문제를 크게 사회적 존재의 본의와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왜곡된 견해에 대한 비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화론적 고찰의 문제점, 주체적 인간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논의로 묶어서 토론해 보겠습니다.

 

(1) 사회적 존재의 본의, 인간의 본질적 속성

 

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과 일부 문필가들은 인간이 유일한 <사회적 존재>임을 부정하고 사회적 존재의 개념을 맑스-레닌주의적 개념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회적 존재의 본의부터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주: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체사상을 심화발전시키고 있는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습니다.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만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며 자기의 목적을 실현해나갑니다.”(19)

 

<사회적 존재>란 사회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면서 살며 활동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여, 사회적 존재란 공동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사회적 협력의 방법으로 실현하면서 살며 활동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세계에서 사회적 존재는 오직 사람 뿐입니다.

 

그런데 일부 ML 론자들은 맑스-레닌주의 철학이 사용했던 사회적 존재의 개념에 맞추어 주체철학의 개념을 해석함으로써 세계의 지배자, 개조자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모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 철학은 사회적 관계를 떠나 순수인간에 관한 추상적 논의를 일삼은 선행한 철학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해명하려 하였습니다. 맑스주의 철학은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보는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인간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였고 인간을 자연생물학적 존재로 보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인간은 사회의 물질적 존재임을 강조하였으며 사회적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습니다.

 

맑스주의 철학에서 사회적 존재의 개념은 사회적 의식과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사회의 물질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물질-의식 문제의 ‘틀’에 맞추어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면서 “사회적 존재는 사람들의 사회적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이다. 제군이 생활하며 경영하며 어린애를 낳으며 생산물을 만들어 그것을 교환한다는 것으로부터 객관적 사건의 열쇄가 조성된다.”(20) 라고 말했습니다. 레닌은 사회의 물질적 제관계, 즉 물질적 재부와 그것을 생산하고 경영하며 교환하는 경제적 관계와 인간의 자기생명의 재생산을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맑스주의 철학에서 사회적 존재라는 개념은 사회적 의식에 의하여 반영되는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과 경제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씌었습니다. 결국 여기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인간이 사회의 물질적 관계와 사회적 의식 속에 해소되어 버렸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사회적 재부는 인간이 창조하고 이용하는 것이며 사회적 관계도 인간이 주동적으로 맺는 관계이며 인간은 단순한 추상적인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사상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요구와 지향에 맞게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를 변혁해나가는 존재입니다. 사회적 존재의 개념에 인간과 함께 사회적 재부, 사회적 관계를 포함시키면 인간과 사회적 재부, 사회적 관계의 차이가 모호하게 되며 인간이 순수 물질적 존재로 여겨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해나가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이 밝혀질 수 없게 됩니다.

 

사회적 존재에 대한 주체철학의 개념을 맑스주의 철학의 사회적 존재의 개념에 맞추어 해석하면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해명할 수 없으며 주체철학을 물질-의식의 문제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주체철학에 대한 심히 그릇된 이해로 됩니다.

 

나: 그러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는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맑스의 저서 [포이엘바하에 관한 테제]의 6 항에 나오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명제에 기초하여 인간을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존재로 보는 것은 관념론적이라고(21) 주장합니다.

 

주: 먼저 맑스의 [포이엘바하에 관한 테제]의 6 항 자체의 본의와 그 역사적 공적과 한계성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위의 테제에서 “...인간의 본질은 개개인에게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라 사람의 본질은 실지로는 사회적 제관계의 총체이다.”(22) 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명제는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확립하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맑스가 이 명제를 내세우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포이엘바하의 인간관을 비판 극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포이엘바하는 인간을 본질상 ‘자연적 존재’로 보았고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으로 파악했습니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인간의 “류적 본질”의 내용을 이루는 ‘이성,’ ‘심정,’ ‘의지’도 사회적으로 제약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자연인'으로서의 '류적 존재’로 파악하는데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포이엘바하의 ‘인간관’을 비판하면서 맑스는 인간의 본질이 결코 ‘자연적 유대'에 의하여 결합된 '자연인,’ ‘생물학적 존재’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합된 ‘사회인, 사회적 존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맑스는 인간이 개인으로서는 결코 ‘사회적 존재’로 될 수 없고 단지 ‘사회적 제관계의 총체,’ 사회라는 체계안에서만 사회적 존재로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하여 맑스는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제관계의 총체’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을 구체적인 사회관계와 역사적 활동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추상적 인간관을 극복하는 데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이 명제에서 인간은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관계에 의하여 결합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해명하는 데서 커다란 의의가 있었지만 인간과 사회관계의 연관성을 해석하는 데서는 일면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맑스가 사회적 존재의 개념을 사회의 물질적 존재의 의미로 이해하였으며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해명하는 데로 나가지 못한 데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맑스의 이 일면성을 띤 명제를 유일한 척도로 하여 거기에 맞으면 유물론이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관념론이라고 하는 교조적 흑백논리가 바로 이남의 ML 론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나: 그러면 인간과 사회관계의 연관에 대한 맑스주의적 견해의 일면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주시지요.

 

주: 인간과 사회관계의 연관에 두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면, 사회관계에 의존되는 면과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 두 면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면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사회관계에 의하여 제약되고 의존되기만 한다면 사회관계를 개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켜 나가지 못할 것이며 인간은 사회관계에 종속되어 자기운명을 개척해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회의 발전에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면은 인간이 자기를 제약하는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해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인간이 사회관계에 의하여 제약된다는 면을 무시하는 것은 관념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면을 밝히는 것만이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이고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면을 밝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제약하는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해야만 자신과 사회를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주체철학은 바로 인간이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한다는 것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속성으로 명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주체철학은 인간이 사회관계와 자연을 지배하는 속성을 “자주성”이라고 부르고, 사회와 자연을 개조하는 속성을 “창조성”이라고 부르고,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활동을 자체로 규정하는 속성을 “의식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집대성하여 주체철학은 인간이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관념론적, 형이상학적 견해의 비과학성을 초극하고 맑스주의 철학의 일면성도 극복한 인간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이해입니다.

 

나: 그러면 이번에는 주체철학이 밝힌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는 경향에 대하여 논의해 보지요.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과 일반적 속성을 동일하게 보는가 하면 인간의 자주적 요구를 관념적 요구로 왜곡하고 자주적 존재와 노동하는 인간을 대치시키며 또한 의식성을 관념론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 먼저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과 일반적 속성을 동일시함으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주체적 이해의 독창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사회적 속성으로는 왜 하필이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 뿐인가, 이성, 애정, 의지 등 무수한 성격이 다 속성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23)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질적 속성은 사물의 존재와 운동을 규정하는 속성이며 비본질적인 일반적 속성은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을 구별짓는 개별적, 부차적 측면들을 특징짓는 규정성입니다. 따라서 본질적 속성이 달라지면 사물의 존재와 운동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그 사물이기를 그만두고 다른 사물로 전환됩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입니다. 물론 인간의 속성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이성, 애정, 의지와 같은 것도 속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니는 성질이 다 본질적 속성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과 함께 이성, 애정, 의지도 자연적 존재는 지닐 수 없고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만 고유한 성질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성, 애정, 의지를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과 동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성, 애정, 의지 등의 속성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에 의해 규제되며 의식성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이성, 애정, 의지 등의 속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심중한 오류입니다.

 

나: 인간의 자주적 요구를 관념적 요구라고 하며 자주적 존재의 개념과 노동하는 존재를 대치시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지요.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주체철학이 밝힌 인간의 자주적 요구는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추상적 관념적 요구(24)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 자주성이란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으로 살려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며 자주적 요구는 자주성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자기의 이익에 맞게 개조하여 자기에게 복종시키며 지배하여 나간다는 데 그 과학적인 근거, 객관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관념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데아,’ ‘생득관념’을 기준으로 하여 사물이란 ‘감각’이라느니 사물현상의 존재와 운동의 기준은 ‘이데아’라느니 하는 관념론적 방법론에 자주적 요구를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자주적 요구는 관념적 주관적 요구이기 때문에 객관적 기준이 없다고 주장하며 주체철학을 관념론으로 몰아붙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며 자주성을 실현해나가는 인간활동을 외면한채 자주적 요구를 그 어떤 인간의 심성과 같은 것으로 변조시키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체철학에 대한 심한 왜곡입니다.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주체사상이 주장하는 자주적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유물론적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고대신문”)고 주장합니다. 맑스주의 창시자들은 인간의 진화적 발전에서 <노동>이 노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이 인간자체를 창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ML 론자들은 인간을 고찰할 때 노동하는 인간을 공식처럼 외우게 되었습니다. 노동을 출발점으로 하여 인간의 진화적 발전을 고찰하는 것이 “노동하는 인간”이 안고 있는 맑스주의적 개념의 핵심적 근거입니다.

 

그러나 노동 그 자체는 인간의 목적의식적 창조적 활동입니다. 노동활동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의 발현의 한 형태입니다. 맑스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이 왜 노동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노동하는 존재로 되었는가, 노동은 인간의 어떠한 본성의 발현인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데까지 심화되고 승화되지 못했습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속성이며 근본바탕입니다. 인간의 자주적 요구와 창조적 힘은 노동활동의 원천이며 노동활동은 인간의 자주적 요구 실현의 한 담보입니다. 따라서 자주적 인간은 세계를 개조하는 노동하는 인간이며 노동활동도 자주적 인간활동의 한 분야입니다.

 

그러므로 노동하는 인간과 자주적 인간을 대치시키면서 자주적 인간을 관념적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노동하는 인간’에 관한 맑스주의의 ‘틀’에 맞추어 그에 맞으면 유물론적 인간이고 그에 맞지 않으면 유물론적 인간이 아니라는 극심한 교조주의적 사고방식, 유아적 흑백논리가 낳은 궤변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특히 <의식성>을 가지고 주체철학에 대하여 많이 비판하고 그것을 관념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의식성에 관한 주체적 이해를 관념론으로 몰아붙이는 많은 궤변들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사상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었습니다.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자신을 파악하고 개변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25)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자신을 파악하고 개조변혁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이 의식성을 본성으로 체현하고 있다는 것은 곧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체철학은 의식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과학적 해명에 기초하여 인간의 인식활동과 실천활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사상의식>이라는 것을 독창적으로 밝히고 <사상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의식의 본질과 역할에 관한 맑스주의적 이해를 유일한 척도로하여 주체철학의 의식성, 사상론을 비판하면서 그에 맞지 않기 때문에 주체철학은 유물론에서의 '이탈'이며 관념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 철학은 <의식>이 <객관적 물질세계의 반영>이라는 것을 해명함으로써 유물론을 근거지었습니다. 그러나 의식을 객관적 물질세계의 반영이라고만 규정한 것은 의식의 본질의 한 측면만을 지적한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의식을 통하여 객관적 물질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인식의 대상인 물질세계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체인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데 있습니다. 의식은 객관적 물질세계를 반영하는 기능 뿐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크게 <지식>과 <사상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원천은 객관적 물질세계이고 그 내용은 물질적 대상의 본질과 운동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세계를 개조하는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요인으로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요인, 결정적 요인으로 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사상의식의 원천은 인간의 <자주적 요구>이며 내용은 <자주적 이해관계>입니다. 인간의 이해관계는 자주적 요구와 그 실현조건과의 관계에서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자주적 사상의식>은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됩니다. 지식은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되며 그것은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요인의 하나로 됩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의식의 기능이란 자기의 생활적 요구를 자각하고 행동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게 행동을 조절통제하는 의식작용을 말합니다. 이처럼 의식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주체적 이해가 밝혀짐으로써 <의식>은 가장 발전된 물질인 <뇌수가 갖고 있는 속성의 기능>이라는 가장 과학적인 정의가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의식은 물질세계의 반영이라는 이해 뿐 아니라 주위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주동성을 근거짓게 되었고 인간의 활동에서 의식이 노는 역할을 전면적으로 해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식을 단순히 객관적 물질세계의 반영으로만 본 맑스주의 철학은 의식의 역할을 객관적 물질세계에 대한 능동적 반작용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맑스주의 철학은 물질-의식의 상호관계문제의 ‘틀’ 속에서 의식의 본질과 역할을 해명함으로써 주위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동적 작용을 해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맑스주의 철학은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상의식>이 인간활동의 목적과 방향을 규정하며 의지와 투쟁력도 규정한다는 것, 인간의 활동에 미치는 지식과 물질적 수단의 작용도 규제한다는 것을 해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의식의 본질과 역할에 관한 맑스주의 철학의 이해를 유일한 척도로 하여 사상의식이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규정한다는 사상론은 유물론의 원리에 어긋나는 관념론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말하여 의식의 역할과 세계의 시원문제를 올바로 식별하지 못하고 혼동하고 있습니다. 유물론이냐 관념론이냐 하는 문제는 세계의 시원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지만 사상의식의 역할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요인에 관한 문제입니다. 물론 양자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 시기의 관념론철학은 의식의 역할을 신비화하였으며 인간의 의식을 객관세계의 수동적 반영으로 본 관조적 유물론은 의식의 역할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체철학은 세계의 물질성을 시인하는 기초위에서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가장 힘있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가장 힘있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물질세계의 지배자, 개조자라는 것이 주체사상이 밝힌 세계에 대한 견해입니다. 이것은 주체철학이 세계의 시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철저히 유물론적으로 해명한 기초위에서 정립된 철학이며 물질세계에서 주인이 누구냐 하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에 해답을 준 철학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상론은 바로 물질세계의 주인인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요인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인간이 어떻게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의 기초적 근거를 밝혀줍니다. 즉 세계의 물질성을 시인하는데 기초하여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주동적으로 개조하고 자기운명을 개척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의 과학적 기초를 해명한 것이 사상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시원문제와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요인에 관한 문제의 차이성을 식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철학자’와 ‘사상가’에게 있어서 자기자신을 기만하는 희비극일 따름입니다.

 

(2)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화론적 고찰의 문제점

 

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주체철학이 밝힌 인간의 본질적 속성의 형성문제를 놓고 많은 비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주체적 이해를 ‘천성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주체철학이 해명한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선험적 개념,’(26) ‘천성’(27)이라고 지적하면서 주체철학을 관념론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속성을 깊이 연구하신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었습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입니다.”(28)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생득적 속성,’ ‘천성,’ ‘본능’이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입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자연적 속성>, <생물학적 속성>을 부여한다면 사회는 인간에게 <사회적 속성>을 부여합니다.

 

물론 사람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될 수 있는 것은 발전된 유기체, 특히 가장 발전된 뇌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발전된 유기체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생물학적 바탕으로 됩니다. 그러나 발전된 유기체 그 자체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인간이 사회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사회역사적 과정에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집단의 한 구성으로 되면서, 즉 사회적 집단의 공동의 요구를 자기의 근본적 요구로 하는 존재, 사회적인 협력으로 공동의 요구를 실현해 나가는 존재로 되면서 비로소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생물학적 개체로서는 주위세계에 순응하는 생물학적 본능적 속성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어디까지나 사회역사적 범주이며 따라서 그것은 사회역사적 견지에서 보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본능,’ ‘생득적 속성’과 같은 자연적 속성으로 본다면 결국 사회적 존재인 인간과 생물학적 존재와의 근본적인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며 세계의 지배자, 개조자로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생물학적 존재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게 됩니다.

 

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 속에서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문제를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물질적 존재로서의 발전수준 문제로 보면서 인간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게된 출발점을 물질의 구성요소의 다양성과 결합구조의 복잡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논의를 펴고 있습니다.

 

주: 그러한 견해는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진화론적으로 고찰하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그들은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모든 물질이 가지고 있는 반영의 속성이 물질의 발전에 따라 발전완성된 것으로 인간의 의식을 고찰한 진화론적 고찰방법을 기계적으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고찰하는 데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마하주의를 비롯한 주관관념론을 격파하기 위하여 물질의 일차성, 의식의 이차성 문제를 해명하는 데 주되는 주의를 돌리면서 의식은 그 어떤 신비한 속성이 아니라 모든 물질이 가지고 있는 반영의 속성이 발전완성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모든 물질이 가지고 있는 반영의 속성이 유기물질, 무기물질에서는 물리화학적 반영으로 나타나고 생명물질에서는 생물학적 반영으로 나타나며 가장 발전된 고급한 물질인 뇌수에서는 심리적 반영으로 그리고 의식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일부 ML 론자들은 이러한 고찰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물질이 단순하고 저급한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고급한 물질에로 발전하는 과정에 그 속성이 발전되며 가장 발전되고 고급한 물질인 인간의 속성에로 발전되어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결국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자연적, 생물학적 속성의 연장으로 그 발전완성으로 보는 심히 그릇된 견해입니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지만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진화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사회가 생기기 이전에는 그 어떤 맹아적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게 된 출발점은 다른 물질적 존재와의 공통성의 발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물질적 존재도 가질 수 없는 특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의 유기체가 아무리 발전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존재로 발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적 존재가 가지는 고유한 속성입니다. 생물학적 속성은 개체의 발전과정, 즉 주위환경에 순응하는 개체적 활동과정에 형성되는 속성이며 생물학적 유전의 형태로 후세에 유전되는 개체적 속성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는 과정에 비로소 형성되는 사회적 속성이며 사회역사적으로 계승되고 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입니다. 본능에 의해 생존하는 생물학적 존재는 주위환경에 순응하는 존재, 주위환경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되는 자연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인간은 세계를 자기의 요구에 맞게 개조하면서 자기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세계의 주인, 세계의 개조자입니다.

 

사회의 발전역사가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발전역사라고 하는 것은 곧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이라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데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된 성질이라는 것은 인간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간이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한다는 것은 모순되는 주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 그것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해석하는 데서 ‘발생, 형성’의 문제와 ‘기능, 역할’의 문제의 관계를 잘못 인식한 데로부터 나온 그릇된 이해입니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그 발생, 형성의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사회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 갖게 되는 사회적 속성입니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사회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 형성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사회관계에 의해서 지배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사회관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존재입니다.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지난 시기의 맑스주의적 사고방식에 교조적으로 매달려 인간의 속성, 성질에 대해서도 단지 발생, 형성의 견지, 시원의 견지에서만 사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속성이 사회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바로 자연과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속성으로서의 자주성,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속성으로서의 창조성,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목적의식적 활동을 조절통제하는 속성으로서의 의식성이기 때문에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일단 형성된 다음에는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사회관계에 기초해서 발생되었다는 데로부터 인간이 사회관계에 의하여 제약되는 존재라는 면만을 보고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지배하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기능과 역할의 면을 보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연과 사회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되는 존재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의 고찰에서 발생, 형성의 면과 기능, 역할의 면을 통일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3) 주체적 인간관의 계급적 성격논의

 

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과 문필가들은 주체철학의 인간관이 초계급적인 것이며 계급폐기의 주장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체철학의 인간관이 추상적인 비역사적 인간관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주: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주사에서는 인간에 대한 역사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추상적 인간에 의해 세계가 인간의 요구대로 개조된다면 그것은 곧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가는 첫 걸음이다.”(29)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물질적,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 인간입니다. ‘추상적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철학적 관념론자들이 들고나온 인간입니다. ‘추상적 인간’은 물질세계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며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론적 인간, 즉 역사밖에 존재하는 인간입니다.

 

칸트, 쉐링, 헤겔의 인간, 실존주의에 등장하는 인간, ‘철학적 인간학’에 등장하는 인간이 바로 그러한 ‘추상적 인간’입니다. ‘철학적 인간학’을 처음으로 들고나온 쉴레르는 “인간은 신의 모습을 닮은 작은 신”이라고 규정하였고 파스칼은 [명상록]에서 “인간은 무한과 허무의 두 심연 속에 놓여 있는 존재” 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인간이 바로 추상적, 비역사적, 관념적 인간입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인간은 보통의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발전된 물질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재부를 지니고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합되어 생존하고 발전하는 사회적, 역사적, 현실적 존재입니다.

 

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과 문필가들은 주체철학의 인간관에는 계급분석의 ‘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체철학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과학적 분석의 틀인 계급의 개념을 폐기해 버리고 인간을 개별적이고 추상적인 원자들로 환원시켜 놓는다.”(30) “...노예주도, 농노도, 봉건영주도, 노동자 계급도 자본가 계급도 모두 ‘사람’이라는 공동의 본질 속에 포함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전혀 과학적인 사상이 되지 못한다.”(31)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 주체의 철학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은 <자연적 존재>와 구별되는 <사회적 존재>의 근본특성을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살며 발전하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구체적 과학적 해명으로 됩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어느 사회적 집단에 소속된 인간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역사관에서 해명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철학적 세계관에서 인간을 사회적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존재로 정식화한 것이야말로 인간을 계급적으로 분석하고 사회적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어떻게 발전되며 실현되는가를 전개하고 밝힐 수 있는 이론적 기초로 됩니다.

 

주체철학은 인간이 사회적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사회적 인간에 대한 계급분석의 확고한 ‘틀’을 이미 철학적 세계관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란 노동자 계급이다.’ 라고 해야 ‘계급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그 어떤 계급적 구분도 없이 초계급적인 인간을 취급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철학적 세계관에서 자연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명시해야 할 때에는 계급의 구분이 없다고 비판하던 그들이 정작 사회역사관에서 민중의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투쟁을 논할 때에는 계급의 구분을 명백히 할 대신에 초계급적인 인간, 계급의 차별이 없는 ‘인간의 본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도 없거니와 자기 운명을 남한테 의존하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않은가? 특히 자본가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려고 애쓴다. 그 결의가 굳으면 굳을수록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려는 노동자의 결의가 꺽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전두환이나 노태우도 이러한 결의가 자본가들보다 더 굳다. 그 결의가 굳으면 굳을수록 우리 민중의 고통은 더 심해지고 그 결의의 실현이 짓밟히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32)하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동적 집권세력의 시녀로 타락한 일부 문필가들이 자기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통해서만 생존을 유지하는 기생적 계급이 ‘그 누구보다도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려고 애쓴다,’니 이러한 주장 하나만으로도 자본가들로부터 수억만금을 받을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외세를 등에 엎고 매판재벌의 시녀가 되어 국토도 민족도 다 팔아먹고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인권과 생존권을 박탈한 매국자가 자주적으로 살아나가려는 결의가 굳다고 지적하고 있으니 그들이 ‘계급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계급적’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고 하여 노동자계급성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분석해야 노동자계급성이 관철되는 것입니다.

 

맑스주의는 사회적 존재의 본질을 물질적 생산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철학적 세계관에서 사회적 인간의 계급성을 예시하였습니다. 계급분석의 맑스주의적 ‘틀’이란 생산에서 차지하는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계급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의해 구분되는 사회적 집단으로서 정권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의해 규정됩니다. 주체철학은 사회적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된다고 밝힘으로써 계급분석을 예시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과 근로민중이야말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참답게 체현한 세계의 지배자, 개조자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 어떤 철학이나 다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것은 여러 철학에 따라 다릅니다. 그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요.

 

주: 그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은 간단히 말하여 그 철학의 “계급적 입장과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불안과 죽음에로 가는 존재로 본 실존주의적 인간은 파국과 멸망에 직면한 현대 부르조아지를 일반화한 인간입니다. 종교철학에서는 인간이 ‘신앙심을 가진 존재’로 규정되는데 그것은 종교신자를 일반화해서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쓰는 경우에도 그 인간을 일반화하는 소재를 어디에서 찾는가에 따라 인간에 대한 일반적 규정자체도 달라집니다.

 

주체철학은 바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근본특징’을 일반화하여 ‘인간’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바로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에게 고유한 본질적 특성입니다. 자본가계급을 비롯한 착취계급은 근로민중의 피와 땀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적 계급입니다. 원래 사회적 인간은 그 본연의 자세로 볼 때 마땅히 사회 속에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인간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보면 착취계급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회적 인간의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지배한다고 할 때 인간의 자주성을 유린하고 짓밟는 사회세력으로서 지배와 개조의 대상으로 됩니다.

 

 

                   

(19)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2 페이지

(20) “레닌전집,” 14권, 334 페이지

(21) "남한 NL론 비판,” 201 페이지 참조

(22) “맑스 엥겔스 전집," 3권, 3 페이지

(23) "남한 NL론 비판," 274 페이지

(24) "혁명의 철학" 전진, 13, 82, 92, 128 페이지 참조

(25)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1페이지

(26) "혁명의 철학," 전진, 123 페이지

(27) "남한 NL론 비판," 274 페이지

(28)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0 페이지

(29) "남한 NL론 비판," 207 페이지

(30) “혁명의 철학," 전진, 105 페이지

(31) "한국사회변혁과 철학논쟁," 사계절, 288 페이지

(32) 위와 같은 책, 31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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