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도서연재]침략과 범죄의 력사 5. 2) 류혈탄압의 주범 .리승만《정권》조작을 위한 류혈탄압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3-06-28 10:46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도서연재]침략과 범죄의 력사
편집국
2) 류혈탄압의 주범
□ 리승만《정권》조작을 위한 류혈탄압
미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남조선인민들의 10월인민항쟁은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통치에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였고 그 통치지반을 뒤흔들어놓았다.
10월인민항쟁에 질겁한 맥아더는 《<미군정>에 대한 증오가 공공연히 증대되고있으며 미국에 의해서 취해지는 어떤 조치도 <미군정>을 연장하거나 미국을 위해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또 하나의 조치라고 맹렬한 비판과 선전을 받고있다.》(《미국외교문서 1946년》 조선편)라고 지껄이면서 남조선에 조성된 위기적사태의 심각성에 비명을 올리였다. 또한 1947년 9월 25일 미합동참모본부가 트루맨에게 제출한 보고에는 《…최소한의 미봉책으로 경제적, 정치적부흥을 위한 계획이라도 세우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결과로 폭력적<무질서>를 포함한 미군부대의 지위를 동요시키는 사태를 가져올것이다.》라고 하면서 남조선에서의 미군의 처지를 실토하였다.
1948년 2∼10월사이에 남조선에 와서 많은 사람들과 만났던 미국의 한 기자까지도 《이 모든 사람들가운데서 미국지배의 결과를 만족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미군의 점령이 파탄으로써 끝날것이라고 보고있다.》고 하였다.
《미군정》을 통한 저들의 직접적지배가 식민지지배의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이러한 조건에서 미제는 겉으로는 남조선에 대한 《통치권》을 조선사람에게 넘겨주고 자기들은 물러서는것과 같은 연극을 꾸미면서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 등 하수인들을 내세워 지배권을 유지할것을 꾀하였다.
미제는 이로부터 우선 친미반동세력들을 긁어모으고 이자들을 기반으로 하여 조작한 정치적조직과 기구들에 민주주의의 보자기를 씌워 그 반동성을 은페하며 《단독선거》를 위한 모든 조건을 충분히 갖추도록 하였다.
그 일환으로 미제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지주, 자본가나부랭이들을 규합하여 《한국민주당》이라는것을 조작하였으며 그 족속들을 《미군정》의 《고문》자리에 들여앉혔다.
미제는 1945년 10월에는 오래전부터 길들인 손때묻은 친미분자인 리승만역도를 미국으로부터 끌어들여 반동분자들을 규합하는 두목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1946년 2월 《군정고문》대신 리승만역도를 《의장》으로 하는 이른바 《남조선민주의원》을 조작하였다.
미제는 1947년 8월에 이른바 《조선림시정부약헌》을 조작하여 《단독정권》조작을 위한 《기본법》을 만들었으며 그에 앞서 6월에는 《보통선거법》이란 악법을 조작하여 리승만《정권》수립을 위한 《단독선거》의 준비를 갖추었다.
미제는 또한 《군정》기관안에서도 기만적인 모자를 씌우는 놀음을 벌렸다.
1947년 2월 《군정청 행정부》의 《민정장관》으로 조선인을 임명하였으며 또 6월에는 《군정청 민정부》를 《남조선과도정부》라고 고쳐부르게 하였다. 미제는 《군정》통치기간에 리승만《정권》을 조작하기 위한 준비로서 우로부터 하부말단까지의 식민지통치기관들에 악질친미파, 친일파, 민족반역자, 해외에서 기여든 반동들을 체계적으로 들여앉혔다.
미제는 다른 한편으로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을 공공연히 위반하면서 통일적인 민주주의림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쏘미공동위원회사업을 고의적으로 파탄시키고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끌고가 리승만《정권》의 조작을 《합법화》하려고 책동하였다.
※ 모스크바3상회의는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이전 쏘련과 미국, 영국외무상들이 모여 진행한 회의이다.
회의에서는 조선을 독립국가로 부흥시킬것을 예견하여 우리 나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의 협의밑에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할것을 토의하고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물론 렬강들이 조선대표의 참가없이 조선문제를 토의하고 채택한것이므로 우리 인민의 의사와 념원을 충분히 반영할수 없었으나 이 결정이 실행되면 38˚선이 철페되고 조선은 민주주의독립국가로 될수 있었다. 때문에 북남조선의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은 이 결정을 지지하였다. 이것은 미제의 대조선정책에 하나의 커다란 장애물이였다.
미제는 3상회의결정을 쏘련(이전)이 내놓은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위한 결정인듯이 외곡선전하면서 남조선반동분자들을 사촉하여 결정을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벌리게 하였다. 미제의 모략과 배후조종밑에 남조선의 우익반동들은 《반탁운동》을 벌리면서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실행을 반대해나섰으며 조선에 친미적인 부르죠아정권을 세우려고 책동하였다.
미제는 기만적인 《반탁》의 구호밑에 회의결정을 공공연히 위반하면서 회의결정의 실현을 위한 두차례의 쏘미공동위원회사업을 고의적으로 지연, 파탄시키고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끌고갔다.
유엔헌장을 란폭하게 위반하면서 조선문제를 유엔에 끌고가려는 미제의 속심은 처음부터 명백한것이였다.
이와 관련하여 미제의 어용신문 《뉴욕 져널 앤드 아메리칸》까지도 미국무부로부터 입수한 《권위있는 보고》에 근거한것이라고 하면서 《38°선 이북에 놓여있는 조선의 절반을 될수 있는대로 빨리 획득하려는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후원을 받게 될 남조선<정부>를 수립》하는것이 그 진의도라고 론평하지 않을수 없었다.
미제는 강요와 압력의 방법으로 유엔을 저들의 침략정책에 복종시키면서 1947년 11월 유엔총회 제2차회의에서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조작하며 그에게 조선에서 실시되는 《선거관리권》을 비롯한 광범한 《권한》을 부여할것을 골자로 한 비법적인 《결의》를 강압통과시켰다.
비법적유엔《결의》에 의하여 조작된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사명은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들로써 《단독정권》을 조작하여 민족을 영원히 분렬시키고 남조선을 미제의 식민지로 전변시키는것이였다.
미제의 이와 같은 민족분렬정책은 정견과 신앙, 계급과 계층의 소속을 초월해서 모든 민족적인 세력의 항거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미제에 기만당하여 그에 추종하였던 일부 우익정객들까지도 미제의 침략적본성을 깨닫고 그에 침을 뱉고 돌아서게 되였다.
1947년 6월에 《립법의원》의 의장이였던 김규식이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후 《립법의원》은 1948년 2월에 이르러 미제의 《단독선거》배격문제로 완전히 분렬되게 되였다. 미제와 그에 추종하는 친미파, 민족반역자들을 반대하여 떨어져나온 정치인들은 1947년 12월 《민족자주련맹》결성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중간세력이라고 불리운 반미적인 애국적정치세력을 이루었다.
※ 당시 김규식은 자기가 걸어온 정치생활을 반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조선민족앞에 큰죄를 진것 같습니다. 미국놈들의 리해와 협력을 얻어 조선민족을 위하여 무얼 좀 해볼가 생각하고 원하는대로 <립법의원> 의장을 하였으나 아무 일도 못하고 큰 망신만 했습니다.
저놈들이 그렇게 교활하고 악랄할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기보다 알았으나 자신이 우둔하고 약했습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민족적량심을 가진 정치인들이 민족의 고통과 불행, 민족이 갈라질 위험성이 조성된 현실을 보고 미제를 반대하여나선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일이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미제는 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소총회에 끌고가 1948년 2월 26일 횡포한 강권을 발동하여 남조선지역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할데 대한 범죄적《결의》를 조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제의 추종국가대표들까지도 《미군점령지역에서만 행하여지는 선거가 전조선선거에 대한 유엔의 권고에 위반》되며 유엔은 《단독선거》를 시행할 아무러한 권리도 못 가진다고 주장하였으며 《유엔림시조선위원단》 성원국의 한 대표는 《소총회결정의 법적정당성에 관하여 의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제는 이 모든 반대를 누르고 《단독선거》를 감행할 흉책을 세웠으며 완전한 폭압적강권행위로 《5. 10단선》을 감행하기 위한 범죄적길에 들어섰다.
리승만《정권》을 조작하기 위한 미제의 이러한 교활한 책동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에 대한 우롱이며 조선을 영원히 둘로 갈라놓기 위한 반민족적범죄행위이다.
유엔의 비법적《결의》가 조작되여 또다시 외래제국주의의 식민지노예가 되느냐, 자주독립국가의 길을 고수하느냐를 결정하는 민족적위기가 닥쳐오자 우리 겨레는 분연히 거족적인 투쟁에 떨쳐일어났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보다 싸워서 조국통일을 이룩하자는것이 우리 민족의 신념이고 의지였다.
1948년 1월 미제의 침략도구인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이 남조선에 기여든것을 계기로 남조선각지에서는 로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나고 그에 호응하여 200만명이상이 반미구국투쟁에 일떠섰다.
영등포의 경성방직공장을 비롯한 여러 공장 로동자들은 《국운이 위태롭게 된 오늘 우리 로동계급은 용감하게 나설 때가 왔다.》고 웨치며 파업에 들어갔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투쟁은 서울과 인천지구에로 확대되여갔다.
투쟁은 2월 7일에 이르러 남조선 전지역을 휩쓸었다. 서울을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시위투쟁과 함께 경찰기관들을 습격하는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농민들과 청년학생들도 투쟁에 합류하였다.
이에 질겁한 미제는 수많은 무력을 동원하여 남조선인민들의 애국적인 투쟁을 야수적으로 진압해나섰다. 2월 7일부터 2월 25일까지의 기간에만도 수십명의 인민들이 미군의 총탄에 맞아죽었으며 8 400여명이나 체포되였다.
2. 7구국투쟁은 민족을 분렬시키고 남조선에 《단독정권》을 세우려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계획에 대한 남조선인민의 정의의 대답이였으며 미제의 침략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 거족적인 투쟁은 미제의 침략도구인 《유엔림시조선위원단》안에서까지도 미제의 흉계를 일치하게 지지하여나서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엔림시조선위원단》안에서는 미제의 지시에 맹종하여 조선인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단독선거》음모에 가담할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위원단》사업을 포기하고 조선에서 철수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의견이 대립되였다. 그들속에서는 남조선《단독선거》가 《비합리적이며 비법적》일뿐아니라 설사 《선거》를 한다 하여도 남조선에는 그를 위한 자유분위기가 없으므로 《선거전에 남조선경찰조직의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터지게 되였다.
그러나 미제는 이에는 아랑곳없이 《5. 10단선》조작을 위한 더욱 로골적인 책동에로 나왔다. 미제는 《선거》를 앞두고 《특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폭압무력을 2주일동안에 약 50%가량 증가하였으며 남조선전역에 땅크와 대포,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기동부대를 배치해놓았다. 하늘에는 비행기를 띄우고 부산과 인천 등지에 침략함대를 대기시켜놓았다.
당시 서울에 와있던 미국통신사 특파원은 이에 대하여 《분위기는 계엄령하의 도시와 같았다.》고 평하였다.
미제는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선거》장에 강제로 주민들을 내몰았다. 《선거》를 거절하는 사람은 더 말할것도 없고 주저하는 주민들에 대하여서도 마구 때리고 닥치는대로 잡아가두었으며 무리로 학살하였다.
미제가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미군은 5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기간에 5만여명에 달하는 인민들을 체포하였고 《선거》당일에는 500여명을 학살하였으며 85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미군의 탄압만행은 제주도인민들이 일으킨 인민봉기를 계기로 최절정에 이르렀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인민들은 《매국단선을 반대한다》,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인민의 원쑤 반동무리들을 처단하자》, 《조국통일독립 만세!》 등의 구호를 웨치며 침략자 미제와 그 앞잡이 리승만역도의 망국적인 《5.10단선》을 반대하여 결연히 대중적인 항쟁에 일떠섰다. 인민들은 각지에서 시위투쟁을 벌리고 악질반동들을 처단하면서 완강히 싸웠다.
이에 당황한 미제는 리승만역도와 함께 제주인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학살만행을 감행해나섰다.
당시 《미군정》 장관이란자는 《미국은 제주도가 필요하지 제주도민이 필요치 않다. 제주도민을 다 죽이더라도 제주도는 확보해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전섬에 휘발유를 붓고 모두 죽여도 좋다.》는 살인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가 설치되고 비행기, 함선 등 방대한 규모의 탄압무력이 제주도에 들이닥쳤다.
《미군정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도해안을 완전히 봉쇄하였으며 주민들의 통행마저 금지시켰다. 그리고 미제와 리승만역도의 륙해공군 합동《토벌》작전을 개시하였다. 바다에서는 18척의 미제침략군함선이 연안을 봉쇄하고 련일 섬을 포격하였고 하늘에서는 미군전투기들이 주민지역들에 줄폭탄을 퍼부었으며 땅에서는 남조선군경들이 반땅크포와 박격포,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미제는 제주도인민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내몰린 야수들에게 《공적을 위한 살륙경쟁》까지 붙였다.
인간살륙에 미친 야수들은 《삼광작전》(모조리 죽이고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는 작전)과 《삼진작전》, 토끼몰이식《투망작전》 등 악착한 인간도살방법으로 제주도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광란적인 인간살륙만행으로 매일같이 무고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밭에서 일하던 사람도, 길가던 사람도, 미역을 따던 해녀도 《폭도》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으며 가족중에 누군가가 산으로 들어갔거나 어디로 간지 알수 없으면 그 가족전체가 《폭도》로 간주되여 몰살당하였다. 제주도는 불바다, 피바다로 변하였다. 제주도는 그야말로 인간살륙장으로 전변되였으며 그로 하여 수많은 제주도주민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 1948년 4월부터 10월까지 근 7개월동안 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의 직접적인 지휘밑에 제주도에서 3만 5 0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되였다.
※ 남조선의 한 출판물에 실렸던 장편시 《한나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이 땅은 미국의 하나의 주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여온
수많은 나날 그 많은 신음의 밤을
그 누가 잊을가보냐
그 누가 잊으라느냐
1948년 4월 3일
밤마다 앞서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었다
혹한의 한나산
그 눈덮인 강산, 붉은 피를 흘리며
마침내는 숨을 거두었다
이름없는 해방전사들의
끊어질듯 끊어질듯 이어져온
저 붉은 피 흔적
누가 잊으랴
누가 잊으라고 강요하느냐
《4. 3봉기》에 대한 미제의 탄압만행은 식민지파쑈통치와 《단선단정》조작책동을 반대하여 봉기한 제주도인민들에 대한 전대미문의 대학살만행이였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미제는 제주도참변이 마치도 조선민족자체에서 벌어진 내부문제인듯이 오도하면서 이를 흑막속에 묻어버리려고 책동하였다.
하지만 력사는 외곡한다고 하여 절대로 가리울수 없으며 진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밝혀지기마련이다.
남조선의 《MBC》방송은 1999년 미국방성 비밀문서의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전하였다.
《최초로 공개되는 미국방성의 극비문서는 <미군정청>의 당시 제주도 상황보고내용을 담고있다.
당시 경찰이 <미군정청>의 지휘를 받고있었다는 내용도 확인할수 있다. 실제로 1948년 5월 <미군정>장관이 제주를 방문한 뒤 강경진압이 시작되였다. 그 과정에 많은 죄없는 량민들이 숨졌다. 이런 사실을 미국은 자세히 알고있었다. 문서들에는 1948년 4월부터 7월까지의 피해상황기록도 있다. 미군은 책임을 면할수 없다.》
그리고 일본잡지 《세까이》도 《이것은 지금까지 전혀 력사에서 은페되고 사라져버린 사건이다. …
미국은 남조선주둔 미군고문단 초대단장이며 미국방성안에서도 극우파로 알려진 윌리암 엘 로버트를 현지에 파견하여 대규모증원부대를 미군상륙함정으로 섬 여기저기에 상륙시켜 <토벌전>을 벌리게 하였다.》라고 제주도인민들에 대한 대량학살만행이 바로 미군의 지휘밑에 감행되였다는데 대하여 지적하였다.
바로 이러한 피의 살륙전속에서 1948년 5월 《단독선거》가 강행되였으며 1948년 8월 15일 미제는 드디여 매국역적 리승만을 괴수로 하는 《단독정권》을 조작하기에 이르렀다.
미제가 강제와 회유, 기만으로 조작한 남조선《정부》라는것은 미제의 하수인, 매국노들로 꾸려진 철저한 반동《정부》였으며 그것은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가리우는 허수아비정권이였다.
남조선에 대한 리승만통치는 미제의 《군정》통치의 연장이였다. 1948년 9월에 맺은 이른바 《협정》에서 리승만《정권》은 《<미군정청>의 일체 법률, 법령 및 규칙들을 전면적으로 계승하고 시행해야 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리승만《정권》이야말로 《미군정》의 연장이며 새로운 변종이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것은 이 땅에 기여든 미군이야말로 최대의 범죄무리이라는 뚜렷한 실증으로 되였다.
관련기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