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두 제도, 두 생활체험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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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3-01-27 13:5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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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제도, 두 생활체험자의 이야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은 인민들에게 참된 삶과 행복을 안겨주는 진정한 조국입니다.》
조희승,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를 사랑하고 력사책을 즐겨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있는 이름이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연구사인 조희승선생은 《가야사연구》, 《독도이야기》를 비롯한 수십권의 력사도서들과 450여건에 달하는 력사적가치가 있는 론문들을 집필하였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력사학자로서 그처럼 성공적인 인생길을 걸어올수 있게 되였는가 하는 물음을 받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군 한다.
《어머니품에서 처음 태여났을 때 나는 분명 불운아였습니다.》
우리와 만난 자리에서도 그의 운명적인 체험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조희승선생은 저주로운 일본에서 태여났다. 6명이나 되는 자식을 먹여살리려고 별의별 일을 다 하던 아버지는 끝내 몸져 자리에 누웠고 어머니는 막내아들 하나만이라도 공부시켜보려고 그를 일본의 어느한 학교에 보냈지만 차례진것은 민족적멸시와천대였다.
부모의 피땀에 젖은 푼전으로 그가 학교에 다니던 어느해 가을이였다. 우리 나라 력사와 관련한 책을 가지고다니는것을 본 왜놈새끼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주제에 무슨 력사공부인가고 뇌까리며 놈들은 그의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뭇매를 안기였다.
그날 저녁 온몸에 피멍이 든채 돌아온 그를 보고 아버지는 절통하여 가슴을 쳤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신세이니 억울하게 매맞아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데가 없구나.》
조선사람이라는 단 한가지 리유로 민족적멸시를받을 때마다 그의 가슴에는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기어이 조국의것을 지키려는 애국의 감정이 싹트게 되였다.
조국의것이라면 더 알고싶고 듣고싶은 마음으로 그는 우리 민족의 반만년력사를 더욱 파고들었고 나날이 지식의 탑을 쌓아나갔다.
내 나라의 력사와 날로 발전하는 조국의 현실에 대해 연구하는 나날 그의 가슴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조국에 가야 자기의 희망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였으며 주체61(1972)년 3월 용약 귀국의 길에 올랐다.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 그는 희망대로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조국으로 귀국한 학생이 자기 학부에서 공부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교원들과 학생들이 좋은것이 생기면 제일먼저 그에게 가져다주었고 생일날이면 모두가 모여앉아 축하의 노래를 불러주며 자그마한 설음도 느끼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뿐인가. 무상으로 공급해주는 새 교복과 장학금, 그가 희망대로 재능의 나래를 활짝 꽃피울수 있도록 아낌없는 방조를 준 권위있는 선생들.
어느날 그가 날씨가 찬데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류의해야 한다며 배띠를 가져온 학급동무에게 무엇때문에 이토록 극진히 위해주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 학급동무는 일본에 부모를 두고 귀국한 자녀들이 걱정되시여 그들의 기숙사를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동포자녀들에게 너희들은 당의 딸, 당의 아들로 생각하고 모든 생활을 잘해야 한다고, 모두 훌륭한 혁명가로자라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신 사실을 전해주며 우리는 모두 당의 품속에서 사는 친형제들이라고 이야기했다.
조희승선생은 스승들과 동무들이 자기에게 기울인 고마운 정이 다름아닌 사회주의조국의 사랑이라는것을 심장깊이 절감하게 되였으며 우리 조국의 찬란한 력사와 문화를 세상에 소리높이 자랑하는 력사학자가 되려는 결심을 더욱 가다듬었다. 대학졸업후 그는 력사연구에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쳐갔다.
그 나날 우리의 력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수많은 도서들을 집필하여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였으며 여러 나라에서 진행된 연구토론회들에 참가하여 자기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언제인가 조희승선생과 만났던 다른 나라의 력사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여러 력사책에서 이름을 익힌 그가 머리희슥한 사람인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은 나이인것이 놀랍다, 그 나이에 벌써 관록있는 력사학자가 되였다는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감동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암흑과 광명의 두 세계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사회주의 우리 조국은 찬란한 태양의빛발이 넘치는 나라이다. 그 품에서 우리 인민은 누구나 빛나는 삶을 누리고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40대에 박사, 50대에 교수, 60대에 후보원사.
그가 오른 성공에로의 계단들에는 한 력사학자를 위해 줄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돌려준 어머니당의 따사로운 손길이 뜨겁게 어리여있다.
몇해전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는 조희승선생이 집필한 여러 론문을 보아주시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지난해 그는 어머니당의 크나큰 사랑속에 경루동의 새 살림집도 받아안게 되였다. …
조희승선생의 이야기는 경루동에 자리잡은 그의 집 창문가에서 끝났다.
창문밖으로 그의 손자애가 뛰여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손자애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조희승선생은 말하였다.
《난 과거를 연구하는 력사학자이지만 우리 후대들의 창창한 앞날이 환히 보이오. 밝은 해빛이 가득찬 사회주의조국에서 나의 인생이 빛난것처럼 저 애들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살게 될거요.》
두 제도, 두 생활체험의 총화와도 같은 그 말은 손자애를 사랑하는 할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 공민으로서, 력사학자로서 력사에 새기는 진리이고 그가 후대들에게 꼭 하고싶은 말이였다.
조희승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
[출처: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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