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유언이 된 한마디, 《입에 말아 넣으시오》/ 안영민 전 민족21 대표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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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 마지막 유언이 된 한마디, 《입에 말아 넣으시오》/ 안영민 전 민족21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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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7-11 11:5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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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유언이 된 한마디, “입에 말아 넣으시오”아버지의 뜻을 함께 이어가겠습니다 

안영민 / 안재구 선생 유족 대표, 전 <민족 21> 대표

 

 

▲ 지난 9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에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는 안재구 선생의 차남 영민 씨. [통일뉴스 자료사진]

 

                                       1.

“영민아, 아버지가 드디어 말씀을 하셨다.”

 

“그래? 뭐라고 하시던데? 누나를 알아보셨어?”

 

“아니, 알아보시지는 못하는데…, 내 손을 잡고 손에다 뭘 쥐어주는 것처럼 하시더니 ‘입에 말아 넣으시오’ 이렇게 말씀하셨어.”

 

작은누나(소영)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가보았습니다. 여전히 천정만 응시한 채 아무 말씀 없이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뵙고, “아버지, 저 영민입니다. 알아보시겠어요?”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흘낏 보시더니 다시 천정만 바라보셨습니다.

 

“아까 그 한마디 하시고는 다시 입을 꾹 다무셨다.”

 

6월 4일 밤늦게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산소포화도가 50대로 떨어져 빨리 응급실로 모셔야겠다고 했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오신 아버지를 100일 만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월 13일 요양원으로 가셨는데, 2월 말부터 코로나로 면회가 금지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요양원에서 식사를 잘 못 하신다는데 어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100일 만에 만난 아버지는 많이 여윈 모습에 기력도 쇠하셔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급히 인공호흡기를 장착하고 바로 중환자실로 이동했습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2주간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며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호흡기를 떼고 일반병실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병실에서는 거동도 못하고 식사도 코줄로 공급받으며 누워계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호흡도 맥박도 혈압도 모두 정상수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있거나 천정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자식들도 못 알아보고, 말을 걸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답답한 제가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드리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설명을 해드렸는데, 그때 갑자기 저를 날카롭게 노려보곤 다시 천정만 바라보았습니다. 또 누군가 곁에 오면 항상 손을 꽉 쥐고 계셨고, 팔다리에도 힘을 주고 버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작은누나가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쓰신 책도 읽어드리고, 라디오에서 클래식 방송도 들려드리곤 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습니다. 다만 책에 나오는 어린 시절 할배들의 이야기를 읽어드리니 한 번씩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러길 여러 차례, 마침내 아버지가 입을 여신 겁니다. 그 한마디가 바로 “입에 말아 넣으시오”였던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저는 아버지가 처한 상황, 현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생사를 걸고 지난한 투쟁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병실은 끌려온 취조실이었고,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던 저는 취조하는 수사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묵비하고, 천정만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던 누나를, 어렵게 연락선을 갖고 면회 온 동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에 꼭 쥐고 있던 문서를 건네주며 “입에 말아 넣으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쓰신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을 보면 1948년 2.7 구국투쟁 후 모든 투쟁이 비합법화되고, 모든 조직이 지하로 들어가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남로당 밀양군당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는 군당의 연락문서를 들고 아지트를 찾아갔지만 이미 그곳은 적들의 침탈로 풍비박산이 난 상황이었습니다. 어렵게 찾아낸 마지막 비선도 끊어진 상황에서 아버지는 홀로 산속을 헤매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문서를 입에 말아 넣어 씹어 삼키고, 갖고 있던 총도 계곡물에 던져버린 뒤 살길을 찾아 나섭니다. 절절하게 묘사되는 그 대목이 아버지의 오늘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현재가 바로 그 참담한 날들의 순간순간이었던 것입니다.

 

                                      2.

아버지의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였습니다. 기억은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기억이 비연속적으로 사라지더니 어느 때부터는 구국전위 사건을 기억 못하셨습니다. 최근 20~30년의 기억 중에는 2005년 아리랑 참관단으로 많은 분들과 함께 평양에 간 기억이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평양 방문 이야기를 꺼내면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꺼내시곤 했습니다.

 

그러다 남민전 사건의 기억에 한참 머무르며 이재문 선생님을 그리워하셨고, 인혁당 사건의 여정남 열사를 떠올리며 눈물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또 경북대 수학과 은사인 박정기 총장님을 찾아뵈어야겠다고 하셨다가 1960년대 경북대 수학교실의 세미나 수업 속에 한참을 머무르기도 하셨습니다. 그랬던 기억이 다시 거슬러 올라가 해방 정국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아버지께 가장 강렬한 기억은 아마도 감옥살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집 곁으로 새로 이사 오신 다음에는 그 집을 감옥이라고 여기셨고,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제게 “당장 보안과장을 불러오라”고 호통도 치셨습니다. 식사를 챙겨서 가면 제가 취사장의 소지를 통해 밥을 받아오는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다 한 번씩 바깥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새로운 곳으로 이감 왔다고 여기셨는지 집안 곳곳을 둘러보더니 “그래, 또 한번 살아보는 거지”하며 껄껄 웃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4년을 지내시다 새로 가게 된 요양원도 교도소 병사라고 여기셨다고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요양원 이사장께 불호령을 내리곤 하셨답니다.

 

그랬던 아버지이기에 생의 마지막도 끝내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조직을 지키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만 하는 마지막 저항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조직선을 만나고, 그 사람의 손에 문서를 전달해주신 아버지는 전과는 다르게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누나에게 첫 마디를 건네고 며칠 후, 퇴원을 하루 앞둔 날에 아버지는 저와 형에게도 처음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오랜 만이구나, 별일 없지?”라고.

 

퇴원을 하고 예전 요양원으로 다시 가신 날, 아버지는 한결 마음이 편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살아온 생을 알고 있던, 그래서 더욱 각별히 아버지를 챙겨드렸던 요양원의 직원들도 따뜻하게 반겨주었습니다. 하모니카로 연주해주는 고향의 봄을 들을 때도, “안재구 교수님!”하고 부를 때도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이발도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주무시다가 7월 8일 새벽 4시 30분 심정지로 기나긴 전사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당신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마침내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당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주셨던 분을 따라가시기라도 하듯 바로 7월 8일, 그렇게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3.

 

 

▲ 안재구 선생이 영면해 있는 묘소. [사진제공-안영민]

아버지께서 생사를 다투며 중환자실에 계실 때, 권낙기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서운하게 듣지는 마라.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이렇게 내려오는 우리 운동의 전통이란 게 있다. 아버지 장례 문제는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니 우리 동지들이 생각을 하고 있겠다.”

 

범민련의 원진욱 사무처장도 제게 전화를 해서 “만약 큰일을 치러야 한다면 실무적인 건 후배들이 잘 할 테니 선배님은 염려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7월 8일 새벽에 연락을 받고 뛰쳐나가는데 머릿속만 하얘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일단 미리부터 생각해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잡아놓고 이동하는데 남민전 출신의 김경중 선배께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서울두레생협에 조합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장례 실무적인 부분은 두레생협에서 맡겠다고 하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직 빈소도 꾸려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급히 서울대로 달려오신 권낙기 선생님이 장례위원회 구성 논의를 바로 진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날 오후에 남민전 동지회와 범민련, 진보연대 등 많은 통일사회단체가 참여해 장례위원회 구성을 위한 회의가 열렸고,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유족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며, 그 덕분에 저희 가족은 문상 오신 분들을 예를 갖춰 맞이하는 역할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분들이 조문 오셨습니다. 아버지와 생전에 조직적인 인연을 맺고 함께 활동한 분들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참 많은 분들이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또 많은 곳에서 빈소와 복도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로 조화와 조기를 보내주셨습니다. 저희 가족에게는 장례 기간 내내 큰 힘이 되었습니다.

 

7월 9일 오후 7시30분 열린 추모식에도 많은 분들이 오셔서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추모사를 해주신 남민전 동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님, 아버지에게는 마음의 터전이었던 범민련의 이규재 의장님, 1980~90년대부터 함께 투쟁했던 한국진보연대 한충목 상임대표님, 그리고 아버지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 모두에게 항상 큰 힘이 되어주셨던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선생님의 귀한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작사작곡한 노래 <철창 안의 봄>을 불러준 희망새와 아버지의 삶을 춤으로 표현해준 이삼헌 선생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호상 역할을 해주신 아버지의 중학교 후배인 인혁당 사건의 박중기 추모연대 의장님과 아버지와 함께 감옥살이를 하셨고, 아버지께 싫은 소리도 마다 않으셨던 통혁당 재건위 사건의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7월 10일 오전 6시 발인을 마치고 수원 연화장을 거쳐 밀양의 선영으로 내려가는데 아침부터 밀양에 폭우가 내린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도착할 무렵 비가 그치기 시작하더니 하관과 추모식을 마치니 해가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대구경북지역과 부산경남지역, 또 고향인 밀양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마지막 배웅을 위해 모였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를 따랐던 후배 동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길이어서 아버지 마음도 정말 푸근했을 것입니다. 마치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상징하듯이 추모식을 끝내니 숲에서 새가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그 순간 하나하나가 제게는 너무나 뜻 깊었고,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남은 일들을 정리하는데, 참으로 많은 분들이 정성을 보내주셨더군요. 장례식 비용을 모두 지불하고도 꽤 많은 금액의 돈이 남았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의 마음들이 하나로 모인 것인 만큼 주위 분들과 잘 상의해 ‘통일애국지사 안재구 선생’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뜻을 잇는 일에 귀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희 가족들에게 큰 힘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들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는 저희 가족에게도, 또 이 땅의 자주와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 기억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2020년 7월 11일

안재구 선생 유족을 대표하여

아들 영민 올림  

 

 


“저승에 가셔서도 계속 싸워 주십시오”‘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 엄수


  
▲ 9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영결식장에서 열린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에서 고인의 남민전 동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저승에 가셔서도 계속 싸워 주십시오.”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이 9일 오후 7시 30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영결식장에서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서 고인의 남민전 동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추도사에서 “그 누를 길 없는 정열을 익히 알고 있는 저로서는 이제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쉬시라는 입에 발린 인사는 드리지 않겠다”며 이같이 요구했다

 

임 소장은 “그러나 싸우지만 마시고 거기서 만나고 싶었던 그리운 선배 동지 후배들과 가족들과 즐거운 회고담도 펼치시기를 빈다”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독서회 동무들, 대구시절의 인혁당 선후배, 미리 가신 남민전 동지들...”이라고 열거해, 고인이 활동을 하며 만난 동지들을 상기시켰다.

 

특히 임 소장은 고인이 해방공간에서 최덕출이라는 생애 첫 가명을 시작으로 남민전에서 김대성, 그리고 구국전위 조직사건 때 남광민까지 합해 “일생 동안 3가지 가명을 썼으니 세 사람 몫의 투쟁을 수행하신 셈”이라고 기렸다.

 

  
▲ 고인의 남민전 동지인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고인의 약력소개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앞서, 역시 고인의 남민전 동지인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고인이 걸어오신 길’ 약력소개에서 “선생님께서 운명의 마지막 어느 순간, 머릿속에 입력되었던 남민전 전사의 조직보위 수단의 한 장면을 보여주셨다”며,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있었던 한 사건(?)을 소개했다.

권 명예회장은 “따님조차 알아보시지 못한 상태에서 종이 한 장을 주시며 ‘이 종이를 말아서 입에 삼키시요! 그래야 조직을 지킬 수 있다!’라고 참으로 눈물겨운 장면이 있었다”고 밝혔다. 고인이 눈을 감을 때까지 ‘영원한 조직인’, ‘영원한 남민전 전사’였다는 것이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과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의 추도사에 이어 해외에서 재일 한국민주통일연합 등의 조전이 소개되었다.

 

  
▲ ‘영혼의 춤꾼’ 이삼헌 춤꾼의 추모꿈.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노래극단 희망새는 고인이 감옥 안에서 만들었다는 ‘철장 안의 봄’ 노래를 불렀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계속해서 ‘영혼의 춤꾼’으로 불리는 이삼헌 춤꾼의 추모꿈에 이어, 노래극단 희망새의 추모의 노래가 이어졌다. 희망새는 고인이 감옥 안에서 만들었다는 ‘철장 안의 봄’ 노래를 불러 새삼 고인을 상기시키며 장내 분위기를 숙연케 했다.

 

  
▲ 고인의 차남인 안영민 전 <민족 21> 대표는 유족 인사에서 “아버님의 ‘끝나지 않은 길’을 오늘 오신 여러분들과 함께 걸어가겠다”며 결의와 함께 고마움을 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고인의 차남인 안영민 전 <민족 21> 대표는 유족 인사에서 “아버님이 2011년 <통일뉴스>에 연재했던 자서전을 책으로 내면서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는데, 아버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아버님이 아직 해방공간에 계시는구나, 아직 소년시절에 계시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면서 “그래서 자서전 책 제목을 ‘끝나지 않은 길’로 정했다”고 저간의 비화를 소개했다.

 

안 전 대표는 “이후 아버님께서 못다 쓴 자서전을 계속 쓰려고 했으나 기억상실 때문에 완성하지 못했다”면서 “아버님의 ‘끝나지 않은 길’을 오늘 오신 여러분들과 함께 걸어가겠다”며 결의와 함께 고마움을 표했다.

 

호상 인사에서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은 고인과의 동향임을 소개하며 “고인은 참지식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셨다”고 기렸으며,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장례일정을 성의껏 진행한 일꾼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 이날 추도식에는 고인이 몸담았던 남민전 동지회를 비롯해 통일사회단체 인사들 150여 명이 참석해 엄수됐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정용일 전 <민족 21> 편집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도식에는 고인이 몸담았던 남민전 동지회를 비롯해 통일사회단체 인사들 150여 명이 참석해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엄수되었다.

 

한편, ‘신념의 쪽배로 분단을 헤쳐온’ 통일원로이자 수학자인 안재구 선생은 지난 8일 새벽 요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0일 오전 6시 발인 후, 운구는 장지인 경남 밀양 선영으로 향한다. 

이계환기자

[출처: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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