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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어머니조국은 나의 생명, 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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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5-28 11:0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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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조국은 나의 생명, 나의 행복

사동구역 송신3동에서 사는 김춘옥녀성에 대한 이야기

 

애국은 그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조국의 귀중함을 말이나 글줄로만 아는 사람은 참된 애국에 대해 말할수 없다. 이 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실생활체험으로, 심장으로 절감하고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칠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말할수 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부강발전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이 참다운 애국자입니다.》


여기에 이런 자료가 있다.

 

1934년생, 1978년부터 지난 40여년간 가정에서 1 180여마리의 돼지를 길러 인민군군인들을 원호하고 사회주의건설장들을 적극 지원…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애국자할머니로 불리우고있는 사동구역 송신3동에서 사는 김춘옥녀성의 소행자료의 일부이다.

 

1 180여마리, 이것은 한 녀성의 성실한 노력의 산물이기 전에 참된 생을 주고 값높은 인생의 행복을 안겨준 어머니조국에 이 땅의 평범한 딸이 제손으로 가꾸고 무르익혀 바치는 애국의 소중한 열매이다.

애국의 뿌리

85살이라고는 선뜻 믿기 힘들 정도로 할머니는 기억력이 똑똑하였고 말씨도 맑았다. 할머니의 소행을 소개하려고 한다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자 김춘옥녀성은 《내가 하고싶어서 하는 일인데 소개는 뭘…》라고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알고보니 김춘옥녀성은 6남매의 어머니였다.

 

《난 정말 해놓은 일이 없수다. 그저 나라의 은덕을 입기만 했을뿐이우다. 꼭 이야기를 듣고싶다면 내 옛말을 하나 하겠수다.》

 

이렇게 말꼭지를 뗀 할머니는 불쑥 이렇게 묻는것이였다.

 

《사람이 사는 과정에 제일 서러울 때가 언제인지 아오? 난 해방전에 태여나서 죽물도 없어 끼니를 번지는 배고픔도 알았고 짚신이 다 해져 맨발로 다니며 남들의 멸시를 받기도 하였다오. 하지만 그 모든것은 견딜수 있었소. 허나…》

 

주름깊은 김춘옥녀성의 얼굴에 추억의 빛이 어리였다. 그의 시선은 창문밖 저 멀리 북쪽하늘가로 향해졌다.

 

해방전 어느날 자강도의 어느 한 산골길로 한 소녀애가 맨발로 타발타발 걸어가고있었다. 한손에는 책보자기를, 다른 손에는 짚신을 들고…

 

그가 바로 김춘옥이였다. 아버지가 삼아준 짚신이 아까와 그는 학교까지 맨발로 오갔던것이다.

 

식량이 떨어져 온 집안이 떫은 도토리를 삶아서 우려낸것을 소금에 찍어먹으며 끼니를 에우는지도 몇달이 되였다.

 

그날 아침도 춘옥이는 이제는 입에 대기조차 싫은 도토리를 억지로 조금 먹고 집을 나섰다. 허기진 몸으로 걷느라니 길이 좀처럼 줄지 않았다. 게다가 배까지 아파나면서 발을 옮겨짚기가 더 힘들었다.

 

겨우 학교에 도착한 그는 교실에 들어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시작되여 얼마 지나서부터 배아픔이 점점 심해졌다. 그는 동통을 참느라 모지름을 썼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내돋았다. 더는 참을수 없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원에게 배가 아파 밖에 좀 나갔다오겠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무나 다급한지라 춘옥이의 입에서는 본능적으로 조선말이 튀여나왔다.

 

일은 그때 벌어졌다. 당시 우리 인민의 민족적인 모든것을 말살하기 위해 피눈이 되여 미쳐날뛴 일제는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 우리 말과 글마저 없애버리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놈들은 통치기구들과 친일단체들을 총발동하여 총칼과 위협의 방법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한편 학교들에서 조선말을 하는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일제에게 강점당한 이 땅에서 산골학교라고 하여 례외로 될수 없었던것이다.

 

교원이라는자의 눈총이 사나와졌다.

 

《조선말을 하면 안된다. 넌 나가지 못해. 당장 벽에 가서 벌을 서라!》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향하는 춘옥의 눈에서 눈물이 똘랑똘랑 떨어졌다. 얼마 안있어 그는 끝내 교실바닥에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을 차리고보니 교실에 혼자 누워있었다.

 

절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린 마음에도 설음이 북받치는것을 어쩔수 없었던것이다.

 

며칠전에 목격하였던 일이 다시금 상기되였다.

 

그날 춘옥이는 휴식시간이 되여 마당에 나섰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상급생들이 있는 교실이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놀라움은 차츰 공포로 변하였다. 여러명의 남학생들이 두다리사이에 각재를 끼우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는데 왜놈교원들이 그들의 잔등에 물을 붓고 나무로 사정없이 때리고있었다. 학생들의 잔등은 어느새 피로 얼룩졌다. 알고보니 교실에서 조선말을 하였다는것이 죄로 되였던것이다.

 

그날 저녁 어둠이 짙은 산골의 밤길을 눈물범벅이 된채로 걸으며 집으로 돌아온 춘옥이는 방에 들어서자 아버지품에 와락 안기며 소리쳤다.

 

《조선말을 하는것이 왜 죄로 되나요?》

 

참을수 없는 서러움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엉엉 울음이 터져나갔다.

 

딸에게서 사연을 알게 된 아버지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 쪽발이놈들!》 하고 주먹을 틀어쥐던 아버지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짚오래기들을 주어들며 어린 딸을 달래였다.

 

《내 이제 새 짚신을 삼아주마.》

 

아버지는 짚오래기를 으스러지게 비벼댔다. 아버지의 손바닥에 점점이 붉은것이 내배였다.

 

《슬프도다 조선민족아…》 하며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소리가 가슴을 허비였다.

 

(나는 언제면 우리 말을 마음껏 하고 우리 노래를 부르며 학교로 오갈수 있을가.)

 

드디여 그날은 왔다. 그날은 어버이수령님께서 빼앗겼던 나라를 찾아주신 조국해방의 날이였다.

 

《그해에 난 처음으로 공책에다 내 이름 석자를 조선말로 썼지요. 고향땅의 모든것이 다 내것처럼 중하게 여겨지더군요. 사는 보람이 있었지요. 그게 다 제 나라가 있기때문이요.

 

전쟁시기 적기의 폭격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난 설음을 모르고 살았수다. 우리에겐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고 조국이 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공부했고 전선원호사업에도 참가했수다.》

 

김춘옥녀성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이것을 어찌 단순히 추억이라고만 하랴.

 

나라가 없는 설음을 피절게 체험한 이 나라 한 공민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어머니조국의 품에 대한 고마움의 찬가였으며 그 품에 보답할 열망으로 불타는 애국의 참된 뿌리였다.

 

헌신의 42년

김춘옥녀성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몸도 이전같지 않지만 그래도 손에서 일을 놓고싶지 않수다. 자나깨나 40여년전에 내가 다진 결의를 끝까지 지킬 생각뿐이라오.》

 

1979년 2월 김춘옥녀성은 남편이 속한 부대에서 진행된 군인가족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회의에서 토론자들의 경험을 들으며 그는 자책감을 금할수 없었다.

 

사실 그는 전쟁로병이며 군관인 남편에게 시집온 다음부터 직장일을 하는 바쁜 속에서도 집에서 해마다 여러 마리의 돼지를 길러 군인들에게 보내주었다. 자식들을 돌보고 남편의 뒤바라지까지 하면서 집짐승을 기른다는것이 쉬운것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수 없었다.

 

바로 몇해전 어느날 네 자식이 한날한시에 모자며 교복, 신발 등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의 선물을 한가득 받아안았을 때 그는 꿈같은 현실앞에 온밤 눈물지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럴수록 이런 고마운 조국을 위해 내 지금껏 한 일이 무엇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조국의 귀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던 내가… 더 많은 돼지를 길러 군인들에게 보내주자. 군인들이 건강해야 나라가 굳건한것이 아닌가.)

 

그는 이런 마음을 안고 이악하게 노력하였다.

 

하여 한해에 38마리의 엄지돼지를 키워냈다.

 

그런데 토론에 참가한 군인가족들이 해놓은 일에 비해볼 때 자기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였던것이다.

 

군인가족회의에서 돌아온 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의다지였다.

 

해마다 1t이상의 고기를 생산하여 초소의 군인들뿐아니라 사회주의건설장들에도 보내주자.

 

그것은 이 땅의 평범한 한 공민이 어머니조국앞에서 한 애국의 선서였다.

 

지방에서 살던 김춘옥녀성은 남편을 따라 사동구역 송신3동의 아담한 살림집에 이사짐을 풀어놓게 되였다.

 

그때 김춘옥녀성의 결심을 알게 된 남편은 말없이 밖으로 나가 돼지우리를 지을 알맞춤한 장소를 잡아놓았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온 가족이 달라붙어 8칸짜리 돼지우리를 지었다.

 

김춘옥녀성은 그 우리에 새끼돼지를 가져다넣었고 후에는 자체로 새끼돼지를 생산하면서 평양에 이사온지 한해가 지나서부터 해마다 2t이상의 고기를 생산하였다. 어느해에는 6t이상의 고기를 생산한적도 있었다. 그렇게 생산한 고기를 초소의 병사들과 중요대상건설장들에 보내줄 때마다 김춘옥녀성은 더없는 삶의 보람을 느끼군 하였다.

 

집짐승을 기른다는것이 헐한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매일 새벽과 저녁이면 손달구지를 끌고 인민반들과 수십리가 넘는 먼곳에까지 가서 부산물을 모아들이였다. 집짐승우리옆에도 먹이풀을 심었으며 가을이면 수확한 남새밭들을 찾아다니며 배추, 무우시래기를 거두어들여 소금에 절이였고 다음해까지 먹여야 할 집짐승먹이도 넉넉히 장만하였다.

 

집짐승먹이를 마련하는 일외에도 무거운 먹이바께쯔를 수십번이나 드다루느라 하루에 겨우 1~2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하였지만 나라를 위해 조금이나마 이바지하며 산다는 생각으로 그는 힘든줄을 몰랐다.

 

어느해 겨울 뜻밖의 일로 여러 마리의 돼지가 죽었을 때에도 그는 락심하지 않고 돼지우리를 20여칸으로 더 크게 늘이고 집짐승먹이도 더 이악하게 모아들이였다.

 

한마리의 돼지라도 더!

 

그의 머리속에는 오직 이 생각뿐이였다. 그러다나니 자식들의 곡해를 받기가 일쑤였다. 응석받이인 막내마저 어머니는 자식들보다 돼지를 더 고와한다고 말한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김춘옥녀성은 아픈 가슴을 혼자 달래며 속으로 외웠다고 한다.

 

(너희들도 크면 이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될거다.)

 

김춘옥녀성이라고 왜 자식들을 위해주고싶은 생각이 없었으랴. 하지만 제 집, 제 자식들부터 생각한다면 그게 무슨 당원이고 백성된 도리이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집짐승을 길렀다.

 

한해두해 세월이 흐르며 김춘옥녀성도 나이가 점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안고 집짐승기르기를 더 힘있게 벌리였다.

 

그 열정, 그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것인가.

 

오늘도 맏딸 박군녀동무는 어느해 공화국창건기념일을 잊지 못하고있다.

 

남들이 기쁨에 넘쳐 즐겁게 명절을 쇠는 그날도 김춘옥녀성은 맏딸과 함께 손달구지로 부산물을 날라오고있었다. 그들이 땀흘리며 동뚝에 이르렀을 때였다.

 

수도의 밤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경축의 축포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딸과 함께 가슴을 설레이며 불꽃이 피여나는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김춘옥녀성의 귀전에는 김일성광장에서 울려퍼지는 만세의 환호성이 들리는듯싶었고 바다처럼 설레이는 환희의 꽃물결이 보이는듯싶었다.

 

그는 멀리 불밝은 광장의 하늘가를 우러렀다. 그리고는 나직이 뇌이였다.

 

올해에도 꼭 1t이상의 돼지고기를 생산하여 군인들에게도 보내주고 건설장에도 보내주겠다고.

 

누구도 보지 않는 깊은 밤 수도교외의 한적한 길가에서 뜻깊은 창건일을 맞는 어머니조국앞에 자기 일을 스스로 총화짓는 김춘옥녀성,

 

박군녀동무는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없이 돋보였다. 늘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손달구지를 끄는 소박한 어머니였지만 그 순결하고 진실한 애국의 마음을 소리쳐 자랑하고싶은 심정이였다.

 

《어머니, 저희들도 어머니를 힘껏 돕겠어요.》

 

《고맙구나. 나라를 받들자면 말이 아니라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자, 더 힘을 내서 걸음을 다우치자.》

 

어머니도 딸도 씨엉씨엉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은 다는 알수 없었다.

 

어머니당은 사려깊은 눈길로 김춘옥녀성의 걸음걸음을 지켜보았고 순결한 량심으로 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걷고 또 걷는 그를 온 나라가 다 알도록 값높이 내세워주었던것이다.

 

김춘옥녀성의 집에는 그가 수여받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표창장과 여러 대회에 참가하여 절세의 위인들을 모시고 찍은 영광의 기념사진이 정히 모셔져있다. 중앙사회주의애국공로자의 영예를 지닌 그의 앞가슴에는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하여 많은 훈장과 메달이 빛나고있다.

 

어느덧 김춘옥녀성의 나이도 85살, 인생의 황혼기라고 할수 있는 지금에도 그는 일손을 놓지 않고있다. 시와 구역의 일군들도, 마을사람들도 이제는 나이도 많고 해놓은 일도 적지 않은데 여생을 편히 쉴것을 권고할 때면 김춘옥녀성은 이렇게 말하군 한다.

 

《아들딸 6남매를 낳았어도 먹이고 입힐 걱정, 학교에 보낼 걱정을 모르고 살아왔소. 이 고마운 조국을 위해 생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오금을 놀려야지. 1978년부터 시작하면 내 나이 이제야 겨우 42살이웨다. 끝까지 이 길을 가야지.》

 

42년, 그것은 육체적나이가 아니다.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해 산 애국의 나이이다.

 

인간의 육체는 로쇠할수 있어도 애국의 나이는 로쇠를 모른다.

 

한해가 가고 다음 한해가 흘러가도 김춘옥녀성은 이 길을 가고 또 갈것이다. 지금은 아들딸들인 박군녀, 박군순, 박군미, 박군실, 박군남동무와 며느리, 사위들이 어머니의 일손을 돕고있다. 어머니를 도와 애국의 길, 원군의 길을 함께 걷다가 먼저 간 아버지와 가문의 맏아들, 맏사위, 막내사위의 몫까지 합쳐.

 

애국의 나이는 이렇게 청춘기로 빛나고있다. 애국의 마음은 이렇게 굳건히 이어지고있다.

 

바로 어머니조국을 생명으로, 행복으로 여기는 이런 애국자들의 고결한 마음에 떠받들려 내 조국이 더 활력있게, 더 힘차게 전진하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글 본사기자 김진욱
사진 본사기자 리경미

 

[출처: 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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