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회고록 혁명시인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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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9-11-27 09:4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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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혁명시인 김혁 제 2권 4장
6. 혁명시인 김혁
혁명은 동지들을 얻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본가의 밑천은 돈이지만 혁명가의 밑천은 사람이다. 자본가가 돈을 밑천으로 하여 치부의 탑을 쌓아나간다면 혁명가는 동지를 밑천으로 하여 사회를 변혁하고 개조해간다.
청년시절에 내 주위에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들가운데는 인정적으로 사귄 친구들도 있었고 투쟁과정에 뜻을 같이하면서 얻은 동지들도 있었다. 그 한명한명의 동지들은 모두가 억만금을 주고서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사람들이였다.
우리 후대들이 혁명시인이라고 부르는 김혁도 바로 그런 동지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김혁은 나의 청춘시절에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긴 사람이며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오늘까지도 그를 잊지 않고있다.
내가 김혁을 처음으로 만난것은 1927년 여름이였다.
그날 한문시간이 끝나고 복도에서 상월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권태석이 뛰여와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려주었다. 한번도 보지 않던 사람인데 차광수라는 안경쟁이와 함께 정문에 서있다고 하였다.
과연 정문에는 얼굴이 녀자처럼 곱살하게 생긴 초면의 청년이 트렁크를 들고 서서 차광수와 같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그가 바로 차광수가 말끝마다 재사라고 자랑하던 김혁이였다. 그는 차광수가 자기를 소개하기도전에 내앞에 손을 내밀고 《김혁이올시다!》하며 스스럼없이 악수를 청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자기 소개를 하였다.
내가 김혁에게 특별한 친근감을 느낀것은 차광수가 그에 대한 《광고》를 귀에 못이 박히게 한데도 있었지만 김혁의 얼굴모습이 김원우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긴데도 있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김혁형을 데리고 기숙사에 가서 한시간동안만 기다려주지 않겠소? 어지간한 시간같으면 결강을 하겠는데 공교롭게도 상월선생이 담당한 문학시간이구만.》
나는 김혁에게 량해를 구한 다음 차광수한데 이런 부탁을 하였다.
《허허, 상월선생의 문학시간이라면 모두가 오금을 쓰지 못하니 성주도 장차 김혁이처럼 문학가가 되려는게 아니요?》
차광수는 안경테를 추어올리면서 롱을 하였다.
《김성주라고 문학가가 못된다는 법이야 없지. 그런데 혁명을 하자면 반드시 문학을 알아야 할것 같애. 어떻소? 김혁형, 그렇지 않소?》
김혁은 그 말을 듣자 환성을 올리였다.
《길림에 와서 이제야 귀맛이 당기는 말을 듣는구만. 문학을 떼놓고야 혁명을 론할수가 없지. 혁명 그자체도 문학의 대상이고 모체니까. 문학선생이 그렇게 인기있는 선생이라면 나도 만나고싶소.》
《그럼 후날 소개해주기로 합시다.》
나는 이런 약속을 남기고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끝내고 나오니 차광수와 김혁은 정문에서 불변자본이 어떻고 가변자본이 어떻고 하면서 그냥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두 친구의 음성에서 풍기는 열정은 나에게도 그대로 옮겨졌다. 나는 김혁을 타고난 열정가라고 격찬하던 차광수의 말을 되새기면서 좋은 동무를 또 하나 얻게 되였다고 속으로 기뻐하였다.
《숙소에 가서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왜 그냥 여기에 서있소?》
김혁은 한쪽눈을 쪼프리고 금빛해살이 쏟아져내리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좋은 날 바퀴처럼 집안에 들어가박혀선 뭘하겠소. 이왕이면 여기서부터 길림거리를 하루종일 거닐며 이야기나 나눕시다.》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이라는데 점심식사나 한 다음 북산으로 가든가 강남공원같은곳으로 갑시다. 김혁형이 상해에서 불원천리하고 우리를 찾아왔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식사도 안시키면 대접이 너무 소홀하지 않소.》
《길림에 와서 성주동무를 만나니 몇끼 굶어도 배고플것 같지 않소.》
김혁은 성미도 열정적이지만 언행도 활달하였다.
그때 내 수중에는 공교롭게도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돈을 내지 않아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수 있는 삼풍려관으로 갔다. 그 려관집사람들이 마음씨가 고운데다가 국수를 잘 만들었다. 려관집어머니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국수 여섯그릇을 말아 한사람앞에 두그릇씩 내주었다.
김혁은 옹근 사흘밤이나 내가 기숙하고있는 방에서 나와 함께 밤을 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에는 길림일대의 실태를 파악하느라고 차광수가 있는 신안툰으로 갔다.
나는 첫 대면에 벌써 그가 불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차광수가 덜렁덜렁한 사람이라면 김혁은 불같은 사람이였다. 평상시에는 녀자처럼 조용하고 얌전하게 굴다가도 일단 충격만 가해지면 쇠가마처럼 끓으면서 단김을 뿜는것이였다. 차광수처럼 동양 3국을 돌아다니면서 쓴맛단맛을 다 보았다는 풍운아였는데 그런 풍운아치고는 깨끗한 사람이였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견문도 넓고 리론수준도 높았다. 특히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은 사람이였다.
우리는 문학과 예술의 사명을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 때마다 김혁은 문학과 예술은 마땅히 인간에 대한 송가로 되여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그후 길림바람을 좀 쏘이고난 다음에는 견해를 발전시켜 혁명에 대한 찬가로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문학관이 아주 혁신적이였다. 우리는 김혁의 이런 장점을 참작하여 그에게 한동안 군중문화계몽사업과 관련된 과업을 많이 주었다. 그가 연예선전대활동을 자주 지도한것도 그때문이였다.
김혁이 시를 잘 지었기때문에 우리 동무들은 그를 《에젠뽀찌에》라고 불렀다. 그를 가리켜 《하이네》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혁은 실지로 하이네나 에젠 뽀찌에를 그 어느 시인보다도 높이 평가하였다. 우리 나라 시인들중에서는 리상화를 제일 사랑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시들을 보면 대체로 격조높은 문체로 엮어진 혁명적인 시편들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설에서는 주정이 강한 최서해의 작품보다 정서가 짙은 라도향의 작품을 더 좋아하였다.
우리는 김혁의 그런 취미를 두고 세상리치란 참으로 묘한데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우리 생활에는 서로 대조되는것들끼리 결합되여 잘 어울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차광수는 그런 현상을 가리켜 《음과 양의 결합》이라고 적절하게 비유하였다. 김혁의 경우에도 음과 양이 조화롭게 결합되여 남다른 문학적개성이 이루어진것이라고 하였다.
김혁은 어렵고 복잡한 혁명사업을 하면서도 짬을 내여 훌륭한 시작품들을 련이어 써내군 하였다. 우리의 혁명조직에 망라되여있던 길림의 녀학생들이 그의 시를 수첩에 베껴가지고 다니면서 즐겨읊었다.
김혁은 남들처럼 종이장을 놓고 썼다지웠다 하면서 시를 창작하는것이 아니라 첫줄부터 마지막줄까지 죄다 머리속에서 다듬다가 수정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면 비로소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고는 종이우에 옮기군 하였다.
그가 책상을 내려칠 때마다 시가 한편씩 나온다는것을 알고있는 우리 동무들은 《김혁이 또 알(시)을 하나 낳았군.》하면서 기뻐하였다. 김혁이 시를 탈고하는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공동의 경사로 되고있었다.
김혁에게는 공청생활을 하던 승소옥이라는 미모의 애인이 있었다. 몸매가 날씬하고 복성스럽게 생겼지만 정의를 위해서라면 단두대에라도 서슴없이 올라설 그런 기개와 담력을 가진 처녀였다.
승소옥은 공청조직생활을 아주 성실하게 하였다.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대중적인 투쟁이 벌어지던 그해 가을에 거리에서 그가 선동연설을 하는것을 들어보았는데 연설을 아주 맵시있게 하였다.
수첩에 김혁의 시를 베껴가지고 다니면서 제일 애송한 녀학생도 바로 승소옥이였다. 그가 시도 잘 읊고 노래도 잘 부르고 연설도 잘하는데다가 계절에 관계없이 늘 하얀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입고다니였기때문에 승소옥이라고 하면 길림시내 청년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생활을 언제나 열정적으로 감수하고 시화해온 김혁은 사랑도 역시 열렬히 하였다. 청년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인간성도 없고 인간다운 생활도 없으며 인간다운 사랑도 없는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우리들중 많은 사람들은 혁명을 하면서 사랑을 하였고 탄우속에서 가정도 이루었다.
방학철이 오면 우리는 김혁과 승소옥에게 몇가지 군중공작과업을 주어 고유수로 보내군 하였다. 고유수에는 승소옥의 집이 있었다.
그들은 군중들과의 사업을 하는 여가를 타서 종종 버들숲이 무성한 이통하강변에 나가 산책도 하고 낚시질도 하였다. 김혁이 낚시질을 할 때면 승소옥은 옆에서 고기도 따주고 미끼도 끼워주었다. 경치좋은 북산과 송화강반에서 그리고 이통하기슭에서 혁명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도 나날이 무르익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승소옥의 아버지 승춘학이 그들의 사랑을 달가와하지 않는것 같았다.
승춘학은 삼광학교의 전신이라고 할수 있는 창신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이였다. 몇해동안 쏘련에 가서 연해주지방을 돌아다니며 공부도 하고 문명의 맛도 본 사람인것만큼 그때로서는 상당한 정도로 개명한 인물이였다. 우리가 고유수에 가서 창신학교를 삼광학교로 개조하고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대중조직들을 공산주의조직, 혁명조직들로 개편할 때에도 그는 우리가 하는 일에 선참으로 리해를 표시하고 적극적으로 방조해주었다.
이런 사람이 자기네들의 사랑에 랭담한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남아장부인 김혁이지만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승소옥의 어머니는 김혁을 좋은 사위감이라고 생각하였기때문에 딸이 그와 교제하는것을 눈감아주고 남편앞에서도 은근히 두둔해주었다. 그후 오랜 기간 김혁의 사람됨을 면밀하게 주시해오던 승춘학도 결국은 그가 훌륭한 혁명가임을 알고는 딸의 의향을 따르게 되였다. 승춘학이 그들의 약혼을 허락한 날 김혁과 승소옥은 사진을 찍었다. 그 당시 승소옥이네 집에는 사진기도 있었다.
김혁이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상태에 빠진 승소옥은 이통하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다. 우리 동무들이 강변에서 그를 끌어내다가 겨우 진정시켜놓았다.
승소옥은 그후에도 혁명활동에 성실히 참가하다가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필자인 최일천의 안해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시집을 갔다. 비록 계모가 되여 남의 아이들을 기르는 한이 있더라도 김혁과 같은 혁명가와 일생을 같이하겠다는것이 녀성으로서의 그의 리상이였다.
김혁의 불같은 성격은 혁명실천에서 충실성으로 표현되였다. 그는 높은 책임성과 충실성을 지닌 혁명가였다. 나보다는 나이가 다섯살이나 우이고 일본에 가서 공부도 한 사람이였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내지 않고 우리가 주는 과업을 언제나 성실하게 받아들이였다. 그래서 나는 김혁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
김혁은 1928년 여름부터 차광수와 함께 류하현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의 지도로 고산자동성학교에 사회과학연구회(특별반)가 나오고 반제청년동맹지부가 조직된것도 이무렵이였다.
그때 김혁은 인류진화사와 세계정치지리, 문화, 음악과목의 강의를 담당하였다. 고산자의 청년학생들속에서 그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내가 감옥생활을 마치고 동만쪽으로 나갈무렵에 김혁은 고유수와 길림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조직이 준 과업을 집행하고있었다. 나는 돈화로 가면서 그에게 서면으로 강동, 길림, 신안툰의 혁명조직들을 지도하면서 새 출판물발간을 준비하라는 일거리를 더 맡기였다.
얼마후 돈화에서 일을 마치고 카륜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혁을 찾아갔더니 그는 우리가 준 과업을 착실하게 수행해나가고있었다. 내가 옥중에서 무르익힌 생각과 카륜에 가서 할 사업내용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흥분해서 자기도 당장 나를 따라 카륜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나는 카륜으로 오되 맡은 일을 다 수행한 다음 천천히 뒤따라오라고 하였다. 김혁은 몹시 서운해하면서도 내 말대로 신안툰에 그대로 눌러앉아 새 출판물발간준비를 다그치였다. 그런 다음에야 카륜에 왔다.
카륜회의가 있은후 우리는 새 출판물을 발간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였다. 새로운 혁명로선이 일정에 오르고 그 실현에로 대중을 조직동원할 사명을 지닌 첫 당조직이 세상에 태여난 조건에서 그 사상적대변자의 역할을 수행할수 있는 출판물을 발간하는것은 한시도 미룰수 없는 절박한 과업으로 나섰다.
김혁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있었으므로 카륜에 와서도 밤잠을 자지 않고 출판물에 낼 원고를 썼다. 그의 제의에 따라 새 출판물의 제호를 《볼쉐위크》로 달았다.
우리는 《볼쉐위크》를 잡지형식으로 만들어 대중을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면서 물질적준비를 충분히 갖춘 다음 점차 신문형식으로 크게 만들고 부수도 늘이기로 계획하였다. 1930년 7월 10일에는 마침내 《볼쉐위크》창간호가 세상에 나왔다.
이 잡지를 공청, 반제청년동맹지부들과 여러 반일혁명조직들, 조선혁명군 소조들에 배포하였으며 우리가 장악하고있는 학교들에도 보내여 교재로 리용하도록 하였다. 내가 카륜에서 한 보고를 해설하는 글도 그 잡지에 실리였다. 카륜회의방침을 소개하고 선전하는데서 《볼쉐위크》가 참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처음 얼마동안 월간잡지형식으로 발간되던 《볼쉐위크》는 그후 발전하는 혁명정세와 독자들의 요구에 따라 주간신문으로 되였다.
김혁은《볼쉐위크》의 첫 주필로서 카륜을 떠날 때까지 원고집필로 밤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불덩이같은 정열가여서 좀처럼 휴식이라는것을 몰랐다.
그러다가 그는 조선혁명군 소조를 책임지고 할빈으로 갔다. 김혁이 할빈에 파견된것은 1930년 8월초였다. 길림, 장춘, 류하, 흥경, 회덕, 이통일대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에게 있어서 할빈은 생소한 고장이였다. 나도 이 도시에 대해서는 별로 파악이 없었다.
우리는 길림에 있을 때부터 할빈을 중시하였다.
이 도시의 주민구성을 보면 로동계급이 많았다. 로동계급속으로 들어가자면 장춘이나 할빈과 같은 큰 도시들에 대담하게 진출하여 우리의 력량을 키워야 했다.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과 중동철도를 공격한 군벌의 배신적인 반쏘행위를 반대하는 투쟁과정이 보여준바와 같이 할빈의 로동계급과 청년학생들은 혁명성이 강하였다. 이런 고장에 가서 줄만 잘 늘이면 많은 군중을 조직에 묶어세울수 있었다.
우리가 할빈을 중시한것은 거기에 국제당련락소가 있는 사정과도 관련된다. 내가 길림육문중학교에 조직한 공청과 련계를 가지고있던 국제당산하의 공청조직도 할빈에 있었다. 국제당과의 련계를 가지자면 어차피 이 도시에 우리의 통로를 내고 할빈을 우리가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곳으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혁을 할빈에 보낸 중요한 목적은 할빈일대에서 우리의 혁명조직을 늘이는 한편 국제당과의 련계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김혁이 그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가 주는 임무를 흔연히 받아들이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에게 국제당에 보내는 소개신을 써준 사람은 김광렬(김렬) 이였다.
김혁은 떠나면서 내 손을 붙잡고 오래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가 주는 과업이라면 경중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부리나케 해제끼는 사람이였지만 단독임무를 받아가지고 떠나갈 때에는 매번 그렇게 쓸쓸해하였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럿이서 함께 하는것을 좋아하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것은 고독이였다.
시인이 고독을 자주 체험해보는것도 문학수업을 위해서는 나쁘지 않을텐데 왜 동무는 그것을 그렇게도 두려워하는가고 언제인가 물었더니 김혁은 지난날 울분을 안고 세상을 떠돌아다닐 때에는 고독도 하나의 좋은 길동무였는데 그런 생활을 끝장낸 다음부터는 싫어진다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는 강동에서 몇달동안 외롭게 지내다가 카륜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밤을 밝히며 일하는 재미를 좀 볼만하니까 또 헤여지게 된다고 하면서 못내 아쉬워하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어린아이들을 달래듯이 말했다.
《김혁이, 혁명을 하자니까 이런 리별도 있는것이 아니겠소 할빈에 갔다오면 우리 동만에 나가서 같이 일해보자구.》
김혁은 쓸쓸하게 웃었다.
《성주, 할빈의 일은 걱정하지 마오. 어떤 일이 있어도 조직에서 준 임무를 수행하고 웃으면서 동무들곁으로 돌아오겠소. 앞으로 동만에 나갈 때에는 맨 선참으로 나를 불러주오.》
그것이 김혁과의 마지막 리별이였다.
그와 헤여지고보니 내자신도 마음이 허전해졌다.
우리의 선이 처음으로 할빈에 뻗치기 시작한것은 1927년말부터였다. 그 당시 길림제1중학교에서 고학을 하던 몇몇 학생들이 조선민족을 모독하는 강의를 한 반동적인 력사교원과 대판싸움을 하고나서 할빈으로 들고뛴 일이 있었다. 그 학생들가운데는 우리의 지도를 받아오던 류길학우회 성원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할빈에 가서 조직을 내올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그들은 할빈학원, 할빈고등공업학교, 할빈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조선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인학우친목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였으며 이 조직의 골간들로 1928년 가을에는 반제청년동맹 할빈지부를, 1930년초에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할빈지부를 결성하였다. 우리는 방학때마다 한영애를 파견하여 할빈의 조직들을 지도하였다.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이 만주를 휩쓸 때 할빈의 청년학생들이 그에 호응하여 큰 규모의 투쟁을 벌릴수 있은것은 바로 이 조직들이 은을 냈기때문이였다.
할빈의 혁명조직들에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 지금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사업하고있는 서철동무도 그때 할빈의 공청지부에서 일하였다.
김혁을 책임자로 한 조선혁명군 소조가 도착하였을 때 할빈의 공기는 매우 살벌하였다. 학우친목회나 독서회와 같은 합법적조직들까지도 지하에 들어가야 할 형편이였다. 공청을 비롯한 비합법적조직들은 철저히 자기를 위장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혁은 할빈동무들과 함께 조직을 지켜내고 조직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도를 토의하였다. 그의 제의에 의하여 이 도시의 모든 혁명조직들은 여러개의 조로 분산되여 지하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김혁은 무장소조원들과 함께 부두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 카륜회의 방침을 정력적으로 해설하였다. 그는 능숙한 조직적수완과 담력을 가지고 청년들을 교양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기층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도 힘있게 밀고나갔다. 적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가며 국제당련락소와의 련계도 지어놓았다.
할빈의 일을 추켜세우는데서는 김혁의 공로가 컸다. 그는 혁명의 한개 지역을 담당한 책임자답게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가 할빈도리의 비밀련락소에서 불의에 달려드는 적들과 총격전을 벌리던 끝에 최후를 결심하고 3층에서 뛰여내렸다. 그런데 강철같은 육체가 그의 뜻을 배신하였다. 김혁은 자결에 성공하지 못한채 적들에게 붙잡혀 려순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옥사하였다고 한다.
김혁은 우리 혁명대오에서 백신한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삶과 젊음을 바친 첫 세대의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한명의 혁명동지가 천금보다 더 귀중했던 그때 김혁과 같이 훌륭한 재사를 잃은것은 우리 혁명에 있어서 참으로 가슴아픈 손실이였다. 그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나는 할빈에 갔을 때에 김혁의 발자취가 찍혀있는 거리와 선창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그가 생전에 지은 노래를 입속으로 조용히 불러보았다.
차광수나 박훈과 마찬가지로 김혁도 조선의 진로를 찾아 만리타향을 속절없이 떠다니다가 우리와 손을 잡은 사람이였다. 상해 프랑스조계지의 어느 하숙방에서 남의 눈치밥을 얻어먹으며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차광수가 편지로 우리에 대한 소식을 알렸다. 상해에서 아까운 인생을 썩이지 말고 길림으로 오라, 길림에만 오면 네가 찾는 지도자도 있고 리론도 있고 운동도 있다, 길림은 너의 리상향이다! …이런 편지를 한번도 아니고 세번, 네번 보냈다. 그래서 김혁이 우리 한테로 왔다. 우리와 통성을 한후 길림시내를 며칠 돌아보고는 내 손을 덥석 틀어잡고 《성주, 나는 여기서 닻을 내리겠소. 내 인생은 이제부터요.》라고 말했다.
차광수와 김혁이 막역한 벗으로 된것은 일본 동경류학시절부터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도 공청을 창립하던 날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인터나쇼날》의 노래를 선창하던 모습을 잊을수가 없다.
그날 김혁은 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때 상해에서 중국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한적이 있다, 그들이 반일구호를 부르며 행진해나가는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동하여 시위대오에 뛰여들었다, 시위가 좌절되면 숙소에 돌아와서 이제는 어떻게 할것인가, 래일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고 혼자서 모대기였다, 그 어떤 당파나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청년이니 어디에 모이라고 찾는 사람도 없었고 래일은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고 지시하거나 의논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시위를 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시위를 하다가 맥을 놓을 때 앞으로 나가라고 소리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시위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래일은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는 조직이 있고 지도자가 있다면 얼마나 힘이 날가, 내가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 나를 붙안고 《김혁아!》, 《김혁아!》하고 부르며 눈물을 뿌려줄 동지들이 있다면 또 얼마나 행복할가 그리고 그것이 조선사람들이고 조선의 조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총구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이런 생각이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는데 길림에 와서 좋은 동무들을 만나는 행운을 지닌데다가 오늘은 공청에까지 가맹하고보니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김혁의 이 말에는 가식이 없었다.
그는 늘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좋은 동지들을 찾은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인생체험이 있었기때문에 김혁은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까지 지어가지고 혁명조직들에 보급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신안툰에 내려가니 그곳 청년들이 그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김혁은 우리 몰래 차광수, 최창걸 동무들과 의논해가지고 길림일대에 그 노래를 보급하였다. 그때 나는 우리를 별에 비기고 노래까지 지어 부르는데 대해 아주 엄하게 꾸짖었다.
《조선의 별》이 보급되던 그무렵부터 우리 동무들은 내 이름도 한별이라고 고쳐 불렀다. 저희들끼리 이름을 지어가지고는 내 의향에는 관계없이 《한별이》,《한별이》하고 불렀다. 한문자로 표기하면 一星(일성), 즉 한별이라는 뜻이였다.
우리 동무들과 함께 내 이름을 김일성(金日成) 으로 고치자고 발기한것은 변대우를 비롯한 오가자의 유지들과 최일천과 같은 청년공산주의자들이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성주》,《한별》,《일성》이라는 세가지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김성주는 아버지가 지어 준 나의 본명이였다.
유년시절에는 증손이라고 불렀다. 증조할머니가 생존해계실 때 나를 증손이라고 불렀기때문에 우리 집안사람들이 그 본을 따서 《증손이》,《증손이》하고 불렀다.
나는 아버지가 지어준 본명을 무척 귀중하게 여기고있었기때문에 내 이름을 다르게 지어부르는데 대하여 달가와하지 않았다. 더구나 나를 별이나 태양에 비기면서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추대하는데 대하여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엄하게 단속하고 설복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동무들은 내가 달가와하지 않는다는것을 알면서도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하였다.
김일성이라는 나의 이름이 공식 출판물에 처음으로 소개된것은 1931년 봄 내가 고유수에서 군벌들에게 체포되여 20일가량 감옥생활을 할 때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를 알고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전날의 습관대로 나를 그냥 성주라고 불렀다.
내가 동무들속에서 김일성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운것은 후날 동만에 나와서 무장투쟁을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동무들은 이처럼 새 이름을 지어주고 노래까지 지어부르면서 나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나를 내세우려는 그들의 성의는 참으로 극진하였다.
내가 나이도 어리고 투쟁경력도 짧았지만 그들이 나를 내세우지 못해 그처럼 애쓴것은 통일단결의 중심도 없이 각당, 각파가 저마끔씩 영웅호걸행세를 하면서 파쟁으로 혁명운동을 말아먹던 전 세대의 운동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고 나라를 찾자면 2천만 민중이 합심해야 하며 2천만 민중을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하자면 령도의 중심, 통일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았기때문이였다.
내가 김혁, 차광수, 최창걸과 같은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하고 잊지 못해하는것은 그들이 나에 대한 노래를 짓고 나를 지도자로 내세워서가 아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 민족이 그처럼 절절하게 바라면서도 실현할수 없었던 통일단결, 우리 인민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에서 령도자와 대중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새 력사를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기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혁명을 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자리다툼때문에 대오에 불화를 조성한적도 없고 의견상이로 하여 우리가 생명으로 내세운 통일단결을 파괴해본적도 없었다. 통일단결은 우리 대오에서 진짜혁명가와 가짜혁명가를 가르는 시금석으로 되여있었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감옥과 교수대로 끌려가면서도 이 통일단결을 목숨으로 사수하였다. 그리고 다음세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그것을 재보로 넘겨주었다.
그들의 첫째가는 력사적공적이 바로 거기에 있다.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를 핵으로 통일단결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넋은 오늘 우리 당이 일심단결이라고 부르는 통일단결을 낳은 위대한 전통으로 되였다.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의 두리에 한마음한뜻으로 뭉쳐 혁명투쟁을 전개한 바로 그때로부터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은 파쟁과 혼란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김혁이 우리의 곁을 떠나간 때로부터 반세기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혁명때문에 밤도 패고 배도 곯고 발도 얼구면서 만주의 설한풍속을 헤쳐가던 김혁의 모습은 지금도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있다.
그가 지금 살아서 우리의 곁에 있다면 많은 일을 할수 있을것이다. 혁명앞에 모진 시련의 고비가 닥쳐올 때마다 나는 지난날 온몸을 애국으로 불태우며 투쟁속에서 젊음을 빛내던 살틀한 동지 김혁을 생각하며 그가 너무도 일찌기 세상을 떠나간데 대하여 애석한 심정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후대들에게 김혁의 모습을 영원히 전해주려고 대성산혁명렬사릉 맨 앞줄에 그의 반신상을 세웠다.
김혁이 사진 한장도 남기지 않았고 또 그때 같이 싸우던 동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다보니 그의 얼굴모습을 알길이 없었다. 그래서 반신상을 세울 때 우리 조각가들이 수고를 하였는데 김혁의 얼굴모습은 내가 알려주어 완성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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