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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10주기> 박용길 장로 인터뷰 - "문 목사는 착한 완벽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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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1-09-25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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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님의 부인이신 박용길 장로님이 오늘, 1025일 영면하였습니다. 고문익환 목사님의 부인지이시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 615남북공동선언실현을 위한 통일연대 공동준비위원장 등을 맡으며 자주, 민주, 통일운동에 헌신해 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박용길 장로님의 모습은 더 이상 뵐 수 없지만 박 장로님의 삶의 흔적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박장로님의 생전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글이 통일 뉴스에 실려있기에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래된 기사지만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 편집국

 


<늦봄 10주기> 박용길 장로 인터뷰 - "문 목사는 착한 완벽주의자"

2004년 01월 16일 (금) 02:22:00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늦봄 문익환 목사의 10주기를 사흘 앞둔 15일, 서울 강북구 수유6동 ´통일의 집´을 찾았다.
고인의 미망인 박용길(85세) 장로는 건강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으며, 언론의 관심 탓에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 10주기를 맞아 미망인 박용길 장로를 만났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문패에 문재린, 김신묵, 문익환, 박용길이라고 쓰여있던데.

■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70년도에 이 집을 골라 샀다. 뒤에 소나무가 빙둘러서서 좋았다. 당시 상공부 주택이었는데 수도도 없어서 운동장만큼 크게 우물을 파서 시간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을 줬다. 이집과 뒷집만 원형대로 있고 나머지는 다 개축했다.

□ 집이 춥지는 않으신지?

■ 11년 3개월 동안 목사님이 감옥에 계셔서 가족들은 언제든지 차가운 데서 난방을 안하고 살아 버릇해서 괜찮다.

□ 온 집안이 모두 문 목사님 박물관 같은데.

■ 둘만 살다 감옥에 들어가시면 언제나 혼자였다. 아주 가신 뒤 10년째 혼자다.
3남 1녀가 다 자기집을 가지고 있어 여기는 문 목사 집이니까 유용하게 써야겠다고 나 혼자 ´통일의 집´ 간판을 붙이고 통일을 위해 헌납했다.

그동안 대학생들, 노동자들, 교회사람들, 각 학교에서 모두 와서 하루 이틀씩 자면서 통일논의를 하고 갔다. 편지, 저쪽에 사진첩 50개, 목사님 역사, 저술 책 다 있으니까 맘껏 통일논의하라고 개방했다.

▶건설노동자들이 개축해준 ´통일의 집´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노동자들이 공공연한 집이라고 무료로 고쳐줘서 글씨, 사진, 조명등까지 다 해줬다. 비가 새서 물바다였는데 새집으로 만들어줘서 좋아는 하는데 너무 좁고 진열할 것이 많아 기댈 데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한다.

(벽을 가리키며) 평양어린이궁전에서 보내온 ´수놓은 청포도´도 있고, 북한 자수 ´최후의 만찬´은 동경의 친구가 평양에서 샀다고 보내줬는데 워낙 잘 만들었다고 미국에서 주문받아 팔아서 북한 어린이 돕는다고 대대적으로 팔고 있다. 저쪽 사진은 김정일 장군과 95년 7월 8일 영생관 처음 개관 때 찍은 사진이다.

"김 주석이 마음 푹 놓고 대화"

□ 문 목사님 10주기를 맞으신 소감은?

■ 10년이 어느 틈에 가버리고...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열흘전에 집을 하나 얻어 ´통일맞이 7천만 겨레모임´이라고 이름지어서 간판달고 개소식하고 시작했는데 금방 문닫을 수 없어 용기를 내서 이사장을 맡아 끌고 나오다가 95년 평양 갔다 와서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문 목사 친구분들이 ´늦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회´를 시작했더라고.

얼마 지나니까 이중이 돼서 통일맞이하고 기념회하고 따로 해서는 안되겠다고, 회원들도 불편해 하고, 이것을 합쳐서 ´통일맞이 늦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으로 지금 10년을 끌고 나왔다.

그냥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회원들 회비 5천원 정도 모아 가지고 운영해 나가려니까 힘든다. 집세도 내야하고 소식지도 내야하고, 활동도 해야하고, 여름마다 10년째 휴전선 155마일 여행하고 굉장히 힘들어 어떻게든 버텨서 이렇게 끌고 나오는데 그동안 부족한 일도 많고 그랬지만 그래도 목사님 시작해놓고 가신 길 문닫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통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희생이 되더라도 해야 한다.

가진 것 다 털어서 끌고 나왔는데 고맙게도 50년전 아버님이 시작한 한빛교회가 통일상금을 자담한다고 해서 8회째 통일상을 주고 있다.

지금 이사장인 이재정 의원이 성공회 신부인데 폭을 넓히기 위해 가톨릭, 불교, 성공회 어떤 분들도 다 이사로 모실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문 목사도 생전에 종교 구별없이 초월해서 했는데 나는 제일 소화하기 힘든 문제였다. 지금 여러 곳에서 같이 일해줘서 이사들, 회원들도 꾸준히 10년을 해줬고 뜻있는 분들이 돈을 내줘 평생 통일맞이를 위해 일한다는 특별회원인 평생회원이 되어줬다.

□ 89년 문 목사님의 방북 당시 사전에 그 사실을 아셨는지?

■ 얘기 못하고 있다가 며칠 남겨놓고 할머니(시어머니)께는 못했지만 나에게는 이래이래서 평양 갔다 올거야, 그래서 아이 통일을 하루라도 빨리 되게 하려면 가셔야죠 했지. 정경모씨가 다 길을 닦아놨다고.

그런데 노태우 발표를 들어보고 간다고 했는데 그게 취소됐든가 해서 떠나기 전날 종로5가에서 양심수 후원회를 하는데, 아무래도 가는 것을 연기하고 그만둬야 할까봐 그래. 다른 사람이 길까지 다 닦고 했는데 약속 안지키면 어떻게 되나, 그걸 생각한다면 해야지 하고 내가 혼자 집에 가버렸어. 문 목사는 늦게 들어왔는데 노태우 발표가 연기됐는데도 다음날 아침에 그냥 짐을 싸가지고 떠났지.

□ 북에서 돌아오셔서는 만나지도 못했을텐데.

■ 예정대로 가셔서 아흐레 밖에 안 있었고, 동경에 도착해서는 자주 연락되고 이쪽이 삼엄한 것 알고 여기서 친구분들, 목사님들이 여나므명이 몰려서 가기로 했는데 어떻게 방해하는지 이우정씨 혼자갔어. 인명진 목사와 둘이 가기로 했는데 나가보니까 연금 당해서. 문 목사가 이우정씨 보고 당신이 날 보호하러 왔어 하고 깔깔거리고 웃더래.

일본에서는 자원하는 사람 여러 명이 따라왔지만 소용없었다. 철통같이 해가지고 채가지고 달아났다. 한승헌,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님이 면회해서 어느 경찰선지 찾아가 어머님하고 문동환 박사하고 나하고 면회했다.

□ 다녀오신 이야기는 자세히 들으셨는지?

▶95년 김 주석 1주기에 남쪽에서 유일하게 조문
한 박용길 장로.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오자마자 갇혀서 나는 하나도 못 듣고, 기록에 남겨야겠다고 나중에 쓴 것이 기록에 남았다.

옛날 16,7세 중학교 때 가서 공부했던 평양에 갔던 것이니까 너무너무 감격스러워 ´43년만에 찾아온 평양´이라는 시가 나왔다.

김 주석하고 두 번에 걸쳐서 7시간 30분 정도 이야기했다는데 김 주석이 전례에 없이 숙소까지 온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모두 국가원수들이나 대신 같은 높은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목사라 하니까 마음 푹 놓고 만난 것 같다. 김 주석이 자기 어머님 손 붙잡고 교회 가면 어머님이 피곤해서 그냥 잔데, 끝났어 집에 가자 하면 손잡고 집에 온 그런 생각이 나니까. 문 목사도 김 주석 사투리가 할아버지, 아버지가 쓰시던 사투리와 너무 같으니까 옛날 생각나고 너무 친근해 할 말 못할 말 다 했다.

내가 갔을 때 문 목사가 만났던 주석궁하고 숙소에서 사진사가 사진도 찍어줬다. 묘향산 숙소 호텔 주인은 나한테 인사하면서 장군님께서 목사님 계시던 방에 장로님을 꼭 모시라고 연락이 왔다고 안내하는데 아무튼 생각들은 잘 한다 싶어.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잘 해주려고 애써.

□ 95년 김 주석 1주기 때 장로님이 남쪽에서는 유일하게 조문을 가셨는데.

■ (사진을 가리키며) 영생관에다 미이라 만든 것을 굉장한 비용과 정성을 들여 개관을 하는 날 들어가는 건데, 내가 자꾸 한발짝 뒤로 갈라고 하면 김정일 장군이 자꾸만 앞으로 오라고 끌고. 정경모씨랑 같이 갔다.

2003년 고구려전시회 준비하러 갔었는데 보니까 퇴색해서 달라졌는데 보존하기가 어려워 보이더라. 95년에는 참 보존이 잘 되고 그러더니 8년만에 보니까 많이 안되겠어. 모택동은 음침하고 옷도 회색인데 여기는 너무 잘해놨어 꽃도 많이.

까는 것도 크고 호화로운 큰 방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까 여러 사람이 들어오는데 김정일 장군이 악수하면서 첫 마디가 가신 분들의 유지를 받들어서 통일사업에 매진해야 겠습니다. 그게 첫 마디고 그 다음에 정 선생과 악수하고.

나는 여기서 흰옷 입고 갔는데 거기서는 대개 여성들이 검정옷을 입고 있는데 김성애씨 만나 얘기하면서 주석님이 과로로 외교하시면서 힘드셨을 거라고. 오는 사람이 대개 내외분인데 혼자서 꼭 접대하더라, 카터 대통령 부인이 왔을 때 파란옷을 입고 접대하니 참 보기 좋더라고 얘기했더니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만 대답해.

"김 주석 조문 안간 것은 정말 잘못"

그땐 나도 기록물 보고 그러면서 이 분이 너무 과로를 했구나. 김영삼 만나는 것 때문에 묘향산 집을 다 돌아보고 냉장고까지 열어보고, 통일 위해 다 양보해서 대통령을 남에서 하면 어떻고 북에서 하면 어떠냐 양보해서 좋은 성과를 내야지 이런 같은 얘기를 또 했다고 해. 그리고 갑자기 쓰러졌는데 묘향산까지 기차 타고 와서 여관도 돌아보고 과로였어.

평양같지 않아서 의사도 측근이야 갔겠지만, 리인모 선생한테도 의사가 67명이 붙었는데, 김 주석 의사가 갔대야 1,2명인데 급해서 평양에서 데려오려 했는데 데려오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어.

□ 94년 당시 남쪽에서는 단 한 명도 조문을 가지 않았는데.

김영삼씨 접대하기 위한 준비하면서 너무 과로해 쓰러졌는데 여기서 몰라라 하고 안간 것은 정말 잘못한 것이다. 만주에 가서 기자들을 만났는데 너무 챙피해 죽겠습니다, 정상회담을 눈앞에 맞이할 손님이었는데 돌아가셨으면 자기가 오든지 사람을 보내야지 말이 됩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하더라.

94년에 조문 안한 것 때문에 들끓었다. 강희남 목사랑 택시타고 갈려고 그랬는데 다 갇히고. 그게 북한에게는 맺혀서 내가 (1주기 조문가서) 길에만 가면 너무 좋아 만세 부르고 난리였다.

□ 장로님은 어떻게 1주기 조문을 가게 됐는지?

■ 내 신학교 옛날 친구가 동경에 있는데 그 사람이 내 전기를 써주겠다고, 자기 남편 전기도 써봤다고 자꾸 오라고 연락이 와서 떠나가 만났다.

일본에 정경모씨하고는 친하니까 만나 이야기 하다가 정경모씨가 나는 1주기 조문가려고 하는데 아주머니 안가세요 그래. 나는 여권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그랬더니 제가 해볼까요 하더니 그이가 며칠 사이에 준비를 해줬다. 북경 가서 내려서 1,2시간 기다렸나, 준비됐다고 고려항공기 조그만 것 타니까 금방 평양왔다고 그래. 그래서 목사님 가실 때도 저 갈 때도 정경모씨가 다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우리한테는 알리지 않고.

정경모씨는 목사님이 주례를 서주셨는데 하숙 주인집 딸이 정 선생을 한 20년 그냥 기다렸는데 자기는 일본 사람이라 내키지 않는다고, 문 목사가 펄펄뛰면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하면 죄받는다고 해서 주례 서서 결혼식해 아들 둘 낳고 손주 손녀 거느리고 살고 있다. 부인이 일편단심이야. 부잣집 외딸인데 시부야에 있는 처가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 문 목사님은 94년 1월에 김 주석은 7월에 돌아가셨다.

■ 같은 해 반년을 사이로 돌아가신 것도 이상하다. 더구나 1월 18일하고 7월 8일 같은 8자가 들어가 있다. 모두들 그 두 분이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텐데, 더 빨리 돌아가셔서 통일이 늦어진다고 생각한다.

□ 당시 문 목사님 건강이 어떠했는지?

■ 팔팔했다. 그날 아침도 전태일 어머님께 전화하고 자꾸 몸이 아프신데 건강해지셔서 통일되면 춤도 추고 건강하셔야 한다고 말하니까 전태일 어머니도 목사님도 너무 일이 많아 혹사하는데 건강하시라고 하자 걱정마라 청년보다 더 건강하다고 말했다.

자기 몸 가지고 하는 것은 완벽하게 해서 조금만 아파도 치료하고, 자기가 연구해서 한 것이니까. 안동교도소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미국사람들에게 얼마나 분개를 하고 애를 태웠는데"

□ 당시 통일운동 안의 내부 갈등이 많았는데.

■ 나는 그런 심각한 것 몰랐는데 그날 누굴 좀 만나야겠다고 지방에 가시겠다길래 추운데 거기까지 가느냐고. 그러다 말겠죠 뭐, 소문 떠돌다가 아니면 아닌거지 그랬는데, 그게 아니라 말로 소문이 도는 것은 아니면 스러져 버리는데 문서로 돼 나와 돌면 증거물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겠다고 하더라고.

통일운동이 캐나다나 미국, 일본 이런 데는 조금 덜 주목도 받고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조금만 해도 문제가 되고 그런데 범민련 일하는 분들이 전부 아는 분이고 뭐가 진행이 될 적에 다 같이 의논하고 진행되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자꾸 여기는 제외되는 기분이 있어서 편향적으로 나가면 대중적으로 못된다, 많은 사람이 같이 호흡하는 운동을 해야지 한쪽으로 밀려 탄압만 받으면 되겠냐고 넓히려고 했다.

내가 영국에 갈 일 있어 가니까 목사님을 안 좋게 이야기한다는 얘기가 들려서 그거야 그럴 수 있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했다.

▶문 목사 생전의 수의와 수번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목사님은 자기 신명을 바쳐 감옥에 6번이나 갔는데. 제일 직접적인 동기가 조성만, 김세진, 이재호 같은 청년들이 자꾸 죽으니까 외국 기자들이 물어. 공부 잘해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는데 한국 아이들은 자꾸 목숨 내놓고 희생하느냐. 직접 조성만 떨어져 죽는 것을 목격하고 백병원에 실려가 임종까지 봤으니까. 비참한 것 겪으시면서 애를 태웠는데. 일일이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 다들 너무 뜻 밖에 목사님의 부음을 접했는데.

그날 점심에 점심 잡수면서 큰소리도 냈다고 그러는데 가슴이 아팠는데 세브란스에 가니까 도떼기시장 같아서 진찰받을 수도 없고, 집에 오니까 우리는 세브란스로 가고. 집에서 만나니까 허탕치느라고 수고했는데 하면서 우리를 위로해.

강화에서 친구분들이 와서 잠깐 나가서 얼굴보고 들어와서 그냥 사르르 가버려. 그날따라 전화를 해도 안되고 다 안돼요. 유언도 한마디도 못하고 그냥 가셔. 젊은 의사가 백병원에서 오는데 앰블란스 가져갈까요 물었는데 무슨 앰블란스냐고 해서 전철타고 천천히 와서 보고 체한 것 같다고 미음을 처방해서, 미음 쓰려고 좁쌀 사고 했는데 이 의사가 지하철 탔는데 돌아가셨다고 뉴스에 나오드래. 나중에 의사된 것을 후회했다고 장문의 편지가 왔어. 심장으로 갑자기 오는 것이지.

□ 너무 아쉬움이 많이 남을텐데.

문 목사가 자기 욕심으로 통일운동 하는 것도 아니고, 평양 갔다와서 옥고 치르고 나왔는데 나온지 1년도 안돼 그러는 것을 보면 동지애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정경모씨 같은 이는 지금이라도 밝히자고 난리지만 나는 밝히면 통일단체에서 불화가 인다고 그러고 싶지 않고 통일만 되면 되지 생각해.

□ 문 목사님의 과거 미군부대 행적까지 거론된 적이 있는데.

■ 미국사람들에게 얼마나 분개를 하고 애를 태웠는데.
우리는 옛날 어려서부터도 한국사람들은 개개인은 우수한데 연합하는 합동정신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정치판도 서로 헐뜯으니까 다 인재들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문 목사는 요만한 얘기도 나쁜 얘기는 나한데 안 해 나는 전혀 모르고 살았다.

□ 큰 아들 문호근씨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 너무너무 그렇지 뭐. 그날 어디 가기로 했는데 아프다고 못 가겠다고 해서 우황청심원 갖다주고 왔는데 병원에도 안가고 자다가 그냥 갔으니까.

□ 그 후에는 문성근씨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

■ 요새는 형이 하나는 가고 하나는 미국에 있으니까 저밖에 없다 싶어서. 누나가 물론 하지만 바쁘니까. 성근이가 통일맞이 이사가 되고 평양 가서 예비회담 하는 것도 성근이가 같이 가서 하고 오고 그렇지. 형이 있고 그럴 때는 통일맞이 하고 관계가 없었는데 형이 가고 인사말을 해도 지가 해야 되니까 통일맞이에 들어가게 됐다.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 두 김씨가 경쟁해도 안되는 것 보고 굉장히 쇼크를 받아 이번에 민주화 쪽에서 대통령이 돼야지 아주 뺏긴다고 기어이 노무현 대통령시킨다고 오래 전부터 자꾸 그러더라고. 걔는 정치 안해요. 정치 못해. 정치가 얼마나 하기가 힘든데.

북 손님, "우리집에 17일 점심때 들른다"

□ 장로님 요즘 건강은?

■ 정말 11년이나 옥바라지 하면서 내 건강을 전혀 생각 못하고 뛰어다녔는데 95년에 평양 가니까 의사 하나, 간호원 하나가 내 옆방에서 자면서 체중 재고, 키 재고 매일 진찰을 해. 약도 보내오고. 거기서 오히려 병이 생긴 거야. 당뇨기가 조금 있고 심장이 어떻다나 뭔지도 몰라.

▶갑자기 몸무게가 5키로나 줄었다
지만 아직도 정정한 박용길 장로.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더군다나 감옥에서는 심장이 여러번 아팠거든. 어떻게 누굴 불렀는지도 몰라. 자다가 문만 두드리고. 삼성병원에 감옥 대신 가 있는데 병실까지 경찰이 들어와서 지키고 야단이야. 그때 조금 치료받고 나온 후에도 조금 다니다가 요즘은 안가.

어제 양심수 후원회에서 여의사가 나더러 보니까 굉장히 말랐다고 아픈 것 아니냐고, 나는 모르겠다고. 그런데 체중이 갑자기 줄면 진찰을 받아야한다고 하더라고. 나는 싫은 게 80이 넘어서 병원 가면 의사들이 업신여겨. 그냥 빈정거리고 늙으면 다 그런 것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모시고 가면 아주 기분 상해하셔서 그 생각이 나서 지금 86인데 아유 고만 둔다.

뭐든지 내가 해버릇 해서 오는 사람들 이부자리부터 물마시는 것, 청소, 빨래 혼자하고 세끼 밥 해먹고. 몰랐는데 거울 보니까 굉장히 늙었더라고. 80넘으면 그러겠지 뭐. 갑자기 체중이 5키로 줄었어.

□ 95년 이후에도 방북하신 걸로 아는데.

■ 작년에 8.15때 가고 고구려전 때문에 갔고 노동당 창건 55돌, 그전에도 너댓번 갔다. 금강산도 몇 번 갔고 육로관광 시작할 때도 정몽헌씨랑 같이 가 연설도 다 들었다.

방문해보면 갈 적마다 달라져 있다. 서먹서먹함이 없어지고 음식이나 뭐나 대하는 태도도. 김 주석을 조문하러 왔다고 처음부터 환영받았지만 점점 친해지고 접대원도 그렇고 어디 가든지 환영받고 어디 가든 헤드테이블에 앉혀 긴장이 돼. 며느리 딸도 갔는데 보러온다고 그러고 닮았다고 그러고.

윤동주 친구 백씨가 윤동주 사진이랑 시집도 주고 그래서 받아가지고 왔는데 압수해서 하나도 못가져 왔다. 윤동주 사진 같은 거를 왜 압수하는지.

□ 요즘 정부의 통일 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

■ 김대중 때부터 그새 그만큼 해놨으니까. 김대중씨는 아직도 답방을 와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결국은 미국에 의해서 방해받는 것 아닌가. 핵이니 뭐니 조그만하고 가난한 나라가 일대 일로 버티는 것 보면... 핵이 얼마나 개발이 된 건지 모르겠고. 난 목사 닮아 낙관주의여서 그저 잘되려니 그렇게만 믿으니까.

□ 이번 문 목사님 10주기를 맞아 북측 대표단 7명이 오는데.

▶´통일의 집´은 늦봄 전시관이나 다름없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우리집에 17일 점심때 들른다. 처음에는 여기서 음식 대접을 준비하려고 그랬더니 너무 무리라고. 집도 좁고 사람도 많고. 그냥 큰 식당으로 가겠다고.

북 사람들은 처음인데 북 기자들이 와서 목사님 계실 때 임수경이 집에는 쳐들어 갔는데 여기는 처음이다.

환영만찬, 이튿날 성묘, 추모식, 떠나는 날 오라고 하는데 다는 안 참여 해도 될 것 같다. 이제는 나 혼자 생각이 80 지난 노인이 어디든지 다 쫓아다닐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 북측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은?

■ 처음에 연예단이랑 50명이 온다고 했는데 내 생각에는 선거도 가깝고 10주긴데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것이 안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 일곱 분이 오는 것은 전에 같으면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목사님도 10주기에 북에서 온다고 하니까 좋아하실 것이다. 같은 피를 받은 사람이고 더군다나 유학가 살았던 평양은 다 친척 같고, 일가친척 사는 사람이 여럿 있고, 굉장히 좋아할 거라 생가해 반갑다.

□ 문 목사님 두루마기를 작년에 한상렬 목사에게 주신 걸로 알고 있다.

■ 목사님 두루마기가 여러 개인데, 한겨레신문사에서 백화점 같은데서 북한 물건 팔기도 하고 목사님 것도 달라고 해서 두루마기랑 여러 가지 기증했는데 안 팔렸다고 통일맞이가 가져왔어.

한상렬 목사가 어디든지 한복 입고 다니잖아. 지난번 미국 가서 ´자주 통일´ 혈서까지 쓰고  미국도 깜짝 놀라고. 목사님 한신 후배고, 같은 목사고 같은 계통이고 그분이 광주 보상금 좀 탔는데 특별히 통일맞이에 돈을 보내오고 가깝게 지냈다. 내외가 다 목산데 의견 맞기가 참 어려울 것 같은데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두 분 다 애기 안낳고.

기특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바느질한 두루마기가 있어서, 그게 문 목사한테는 좀 작아. 작은 두리마기를 드렸는데도 길더라고. 그거 입고 평양 가서 연설도 했다. 물론 다른 민주와 통일 후계자가 많지만 이 이는 내놓고 여러 가지로 통일 위해 몸바쳐 일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목사님 것 다 나눠주고, 동생도 주고, 조카도, 사위도 주고 얼마 없지만 한복은 다 버릴 건데 요긴하게 쓰면 되지 않겠나 싶어 바지 저고리 두 벌하고 두루마기 하고 드린거다. 목사님 옷을 입으니까 후계자가 된 것 같아 짐이 무겁고 기쁘다고 얘기하더라.

"훌륭한 배필을 만났고 행복했다"

□ 문 목사님과는 중매로 만났는지?

■ 연예 결혼이다. 나는 요코하마 신학교, 목사님은 동경신학에 37년, 38년에 입학했는데 38년에 동경 신학생들이 요코하마로 친목모임에 몰려왔다. 윤보선 부인 공덕귀씨하고 나는 같은 반 늘 같이 다니는 단짝인데 문 선생이 쑥 들어오니까 만주 황제 같은 사람 왔다 그래가지고 우리가 킥킥거리고 웃었지.

▶늦봄 생전의 부부의 모습. 박용길 장로는 다투거나 싸울 일이 없었다고...
[사진제공 - 통일의 집]
졸업하고 동경 품천 교회에서 문 목사는 신학생이면서 무보수로 돕고 나는 전도사로 취직해 일하는데 나는 몰랐는데 교회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결혼하면 좋겠다고 그랬다더라고. 나중에 동생 문동환 박사한테 들은 얘긴데 문 목사가 밤 예배를 안나갔는데 꼭 나가 이상하다 했었다고.

나는 어머님이 아파서 이리로 나와 인사동 승동교회 전도사로 전근해왔고. 문 목사는 몸이 나빠서 금강산으로 휴양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문 목사는 폐병으로 휴양까지 했으니 결혼하면 안된다고 해서 어머니 얘기 듣느라고 몇 년을 끌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안되겠다 싶어 문 목사가 만주 만보산에 있는데 나오라고 해서 아버지가 가서 엑스레이 찍어와. 해서 찍어오니까 깨끗이 나아 있었어. 문 목사가 엑스레이까지 내대고 장가간 사람은 나뿐일 거야 하곤 했지.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약혼식까지 해줬다.

안국동 교회에서 결혼식하고 혼자 보내기 안돼서 용정까지 같이 갔는데 언니들이 당돌하게 어디 천리길을 시집을 가냐고 했는데 용정으로 갔다가 신경으로 가서 그 고생을 하고 6.25를 만나 걸어서 나왔다.

□ 사시면서 서로 다투거나 싸우시지는 않았는지?

■ 싸울 일이 없어. 일본시대 때 경기 다니면서 일본사람이 맨날 현모양처 노릇만 하라고 배워서 그런지. 내 생각에 한번도 할아버지, 아버님, 남편 하는 일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고 무엇을 하든지 찬성하고 옳은 일,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애국지사 집안이고 어머니는 독립 결사대였고 정월에도 세배하면 통일꾼되라, 고구려땅 찾아야 된다. 전적으로 시댁 하는 일을 믿었기 때문에 한번도 싸운 적이 없어.

나중에 문 목사가 자기는 몸이 약하고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인데 50년간 한번도 불평 없었다고 나 아니면 못살았을 것이라고...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못한 것만 생각되고.

□ 문 목사님이 살아서 6.15 정상회담을 봤더라면 좋아하셨을 텐데요.

■ 그럼. 덩실 덩실 춤을 췄겠지. 얼마나 신나했겠어. 고은 선생도 길에서 큰절을 하고 강만길씨랑 좋아했는데. 모두들 덩실덩실 춤췄겠지.

□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 웬만한 건 서로, 그야말로 결혼 50년 생활에 시댁식구 나무람을 받아본 일이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서로 잘했다고 칭찬하고 서로 도우면서 난관을 헤쳐나가야지.

약소국이 자기네끼리 헐뜯으면, 노무현을 옆에서 헐뜯는 것도 못마땅하다. 일단 세웠으면 보필해야지 자꾸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면 되나. 성근이가 자기가 판단력이 있어 눈물 흘리며 대통령 만드는데 지원했는데 임기를 잘 마치고 우리나라도 통일되고 다른 나라가 우러러 볼 나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 목사님께 나쁘게 했다는 얘기를 들어도 반갑게 인사하고 원수 맺고 싶지 않다.

□ 소설가 김형수씨가 문 목사님 평전을 거의 완성한 것으로 아는데.

■ 이번 기일에 맞추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 번 나오면 돌이키기 어려우니까 여러번 독회를 하고 3월중에 내자는 얘기다. 김형수씨는 갔던 발자취를 다 따라야 쓰겠다고 해서 일본, 중국, 평양도 가보고 쓴 것이니까 애를 많이 썼다. 나하고 목사님 친구한테도 가고 취재를 같이 다녔다. 아무래도 76년 동안의 행적을 다 하려고 하니까 그래도 부족하고 그렇다.

□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은?

■ 목사님 것들이 원체 뭐가 많다. 편지, 논문, 노트 하도 많아서 어느정도 정리한다고 정리하고 이번에 기념사업회가 생겨 많이 보냈지만 너무 많아 내가 가면 너무 골치가 아플 것 같아서 정리하느라고 바쁘다. 이전에 호근이는 글자 하나라도 버리면 안된다고 어찌나...

전집도 해놓고 나면 뭔가 미진한 것이 있고, 전기도 어린이, 청년, 어른 것도 나오는데 100점 만점 완성은 힘들겠다.

□ 끝으로 문 목사님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떤 분이셨는지?

■ 착하고 완벽주의자다. 뭐든지 열심이고 말하자면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평을 하든지 옳은 일을 하다 갔다고 생각된다.

훌륭한 배필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문 목사님을 잘 만나서 잘 지내 50년을 해로했다. 행복했고 시댁도 유명한 댁인데다 시부모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훌륭한 가정에 와서 내가 부족한게 많은데 사랑만 잔뜩 받고 평양이나 외국 어딜가도 찬양만 받으니까 황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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