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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뿌린 독으로 신음하는 에리트레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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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1-08-11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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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뿌린 독으로 신음하는 에리트레아 역사

미국의 배신과 UN의 제재로 목 졸라 매는 오늘의 부당한 현실

 

 유태영 박사(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원)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지방에서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정상 지점에 위치해 있는 나라이다. 면적은 121,144km으로 한반도의 ½ 정도이며 인구는 약 4,8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에리트레아 동쪽은 홍해와 인도양에 면접하고 있으며 해안선이 장장 1,000km에 걸쳐 있다. 서쪽에는 수단이 있고 남동쪽에는 지브티가 있으며 그리고 서쪽과 남서지역은 에티오피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에리트레아는 홍해를 가운데 두고 바로 맞은편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과 가까운 지역에 있기 때문에 에리트레아인은 자기네들은 아프리카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중동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탈리아의 오랜 식민지 통치를 받았음으로 상류층의 에리트레아인들은 이탈리아식 생활양식과 언어에 익숙해 있다.

 

에리트레아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는데 티그리어를 쓰는 종족이 최다수 종족으로 전체 인구 ½가량 된다. 티그리어를 쓰는 종족은 남부의 콥트 가톨릭과 북부 고지대의 이슬람교로 양분되어 있다. 그외에 아파르족, 베자족, 사호족, 쿠나마족등 9개 종족이 있으며 이들 종족들은 아랍어를 쓰는 종족과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종족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에리트레아인들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51%이고 이탈리아 가톨릭은 46%이다. 기독교의 개신교는 1.5%에 불과하다.

 

에리트레아의 고대 역사에 대한 고찰은 에리트레아 역사를 단독으로는 고찰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 왜냐하면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고대 역사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고대 역사이기 때문이다.

 

서방의 강대국들이 에티오피아를 침략할 때 에리트레아를 제외하고 에티오피아를 침략을 할 수 없었으며 또 에리트레아를 침략하는 것은 곧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는 것과 동등한 침략이었다. 그럼으로 두 나라의 고대 역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고대 역사이다.

 

에리트레아의 간추린 고대 역사 (BC 500-AD1897)

) 에티오피아의 고대사에 의하면 악숨왕국이 지금의 에리트레아의 북부에 티그리족이 살고 있을 때 악숨왕국을 창건 했다. 악숨왕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 온 아랍인들이였다.

 

아랍인들은 에리트레아 고지대로 진출하여 에티오피아를 향했다. 하지만 티그리족은 반대로 해변의 저지대에 자리를 잡고 오래 동안 살고 있었다. 그 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수세기의 오랜 세월동안 고대의 역사를 공유하면서 여러 종 족들이 함께 번성하고 있었다.

 

) AD 10세기경에 이르러 에티오피아의 제국이 형성되어 바하 나가쉬 황제는 에리트레아를 점령하여 에티오피아의 속령으로 삼고 북방 에리트레아주로 만들고 통치를 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 홍해를 마주하고 있는 보배로운 땅 에리트레아의 운명은 에티오피아의 손에서 부터 떠나 터키 오토만 제국의 손으로 이전이 됐다. 에티오피아는 터키 오토만 제국에 패망하여 에리트레아에 대한 통치권을 오트만 제국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1557년부터 에리트레아는 오토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으면서 홍해 연안에 있는 여러 항구를 이용한 중요한 무역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에리트레아에 대한 통치는 장장 200년을 넘기고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다시 오트만 제국이 이탈리아에 패망함으로 에리트레아를 포기하고 떠나갔다.

 

) 1869년에 이번에는 3번째로 이탈리아가 도착했다. 그 당시 수에즈 운하가 새로 개통되어 지중해와 홍해가 연결되었으며 항해하는 배들의 교통량이 증가됨으로서 에리트레아의 홍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의 중요성이 높이 부각됐다.

 

1889년에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탈리아는 1890년에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만들고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전쟁이 7년 동안 계속했는데 1896년에 두나라는 Addis Ababa조약을 맺고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는 7년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독립국으로 복귀 했는데, 도대체 에리트레아의 운명은 어찌 됐는가?

 

에티오피아는 독립을 쟁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리트레아는 계속하여 이탈리아의 강점 하에서 식민지로 그대로 남아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사이에 있는 Mareb강을 이용하여 두 나라의 국경선을 새로 설정하도록 이탈리아와 에티어피아 양국은 서로 합의를 했다. 이때부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사이에 분열의 국경선이 새로 설정되어 불행 불행한 역사가 시작됐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두 나라는 일방적으로 합의하여 에리트레아를 고립킬 뿐만 아니라 에리트레아를 합법적으로 이탈리아의 민지가 되도록 두 나라는 서로 합의를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BC 고대부터 수천 년을 함께 살아 온 길고긴 같은 지역의 역사적 유대의 인연을 끝장내고 말았으며 앞으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두 나라 사이에 적대국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두 나라는 저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하여 에리트레아를 고립시켜 놓고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 (1897-1941)

 

그때 당시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국제적 정치상황은 매우 격동적 이였다. 아프리카, 중동, 유렵 그리고 인도양을 넘어 아시아 국가들의 홍해를 중심하여 무역 전쟁이 격심했는데 에리트레아는 바로 그 중심지에 놓여 있다.

 

영국과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영토 확장과 그리고 oil을 생산하는 아프리카 나라들을 독점하기 위하여 경쟁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에티오피아에서 완전히 분리된 에리트레아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식민통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우선 대량의 이탈리아인들이 이동하여 에리트레아로 밀려들어 왔으며 이들은 로마 케톨릭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에리트레아에 이식했다.

 

식민통치 초기에 이탈리아인이 4,600이였는데 수년 안에 75,000명으로 증가했다. 에리트레아의 공무원은 대부분 이탈리아인으로 채워졌다. 신흥 도시들이 건설됐으며 에리트레아의 수도로 아사마라시를 건설했다.

 

이탈리아 식민통치 정권은 에티오피아와 수단등 내륙 지방과 직접 연결하여 무역을 촉진하기 위하여 우선 에리트레아에 철도와 Cableway를 건설하였다. 홍해의 연안 항구들과 교통을 연결시킴으로서 에리트레아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이탈리아에 <무솔리니 제국>이 창건됐다. 무솔리니 제국 의 통치하에서 에리트레아에 2,000여 공장들이 가동되었으며 수없이 많은 다양한 물품들이 생산됨으로서 이탈리아 <무솔리니 식민통치>는 일시 전성기를 과시했다. 그러나 무솔리니 제국은 에리트레아 민중을 무섭게 탄압했다.

 

무솔리니 제국은 에리트레아에 대하여 멸시와 탄압을 더욱 더 증가할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무솔리니 제국은 1935년 에티오피아를 또 다시 두 번째 침략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 무솔리니 제국에 대항하여 영국과 에티오피아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과 에티오피아 연합군은 1941년에 에리트레아에 대한 이탈리아 식민통치 정권을 붕괴시킴으로 에리트레아는 해방됐다.

 

무솔리니 제국의 에리트레아에 대한 식민통치가 붕괴됨으로 에리트레아는 44년 만에 이탈리아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됐던 것이다. 에리트레아가 해방된것은 영국과 에티오피아의 연합군의 힘에 의하여 해방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 조선반도는 서방의 연합군의 승리로 인하여 8 15 해방이 됐고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부터 36년 만에 해방됐다. 조선반도의 해방의 역사와 에리트레아가 44년 만에 이탈리아의 식민통치에서 부터 해방된 역사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또한 그 후에 자주와 자립의 독립을 위하여 반제반미 투쟁의 역사도 또한 두 나라는 공유하고 있다.

 

미국의 배신으로 에리트레아 비극의 역사

 

1941년에 에리트레아를 강점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44년간의 식민 통치는 완전히 끝장이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탈리아가 떠나간 후에 대신으로 또 다시 영국이 에리트레아를 지배하는 새로운 점령군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영국은 즉시 이탈리아 식민통치 44년의 잔재들을 말끔히 제거했다. 영국은 심지어 이탈리아 식민통치 때 설치해 놓은 철로의 일부를 철거시키기 까지 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무솔리니 제국을 붕괴시키고 재빠르게 에리트리아를 점령했던 것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완전히 끝난 후에도 영국은 1950년까지 에리트리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트레아에 대한 국제적 쟁탈전은 영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때 당시 에리트레아에 대한 국제적 쟁탈전의 양상을 살펴본다.

 

. 영국은 할 수 없이 에리트리아를 떠나가면서 기독교와 이슬람 진영으로 둘로 분단하여 기독교 세력을 위주로 하여 친미 정권인 에티오피아에 예속시키는 분단 정책을 주장했다.

 

. 아랍세계는 에리트레아에 있는 막강한 이슬람교의 역사성을 중요시하여 에리트레아를 이슬람 국으로 독립할 것을 주장했다.

 

. 소련은 어떠했는가? 소련은 아프리카와 에리트레아 내부에서 투쟁해 온 좌익 게릴라 투쟁의 역사를 강조하면서여 에리트레아의 독립은 주장했다.

소련은 영국과 에티오피아가 동조하여 에리트레아를 UN의 이름으로 미국에게 넘겨주는 것을 적극 반대하고 있었다.

 

. 에티오피아는 어떠했는가?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에 대한 배신행위를 하여 44년 동안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도록 음모를 꾸민 배신자 장본인 이였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그런 배신행위를 아주 망각하고 이번에는 또 다시 미국의 앞잡이 역할을 하면서 에리트레아의 자주 독립을 반대하는 망동을 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미국의 주장에 편승하여 에리트레아의 자주 독립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의 품안으로 다시 예속되어 돌아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연합하여 잠깐 동안 무쏠리닌과 싸웠던 경력을 과시하여 에티오피아는 전승국행세를 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쎌라시에 황제는 무솔리니에 쪼기여 영국에서 망명 중에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또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여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즉위하고 친미적 왕정을 통치하고 있었다.

 

쎌라시에 황제는 미국의 루주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로 탄원하여 에리트리아를 에티오피아의 속령으로 환원시켜 달라고 탄원했다. 미국과 영국은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에게 예속되는 속령이 되도록 비밀로 결의를 하고 있었다.

 

영국은 무솔리니와 싸울 때 에티오피아가 동참해 준데 대하여 보답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미국은 아프리카와 중동 정책에 있어서 에리트레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에리트레아를 친미 정권인 에티오피아에 예속시켜 묶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에리트리아 민중이 에티오리아에 예속되는 것을 결사반대하고 자주독립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은 에리트레아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북부 이슬람과 남부 기독교 세력이 팽팽히 대립되어 있음으로 앞으로 분쟁의 불씨가 될것도 분명히 미리 다 알고 있었다.

 

훗날에 폭로된 사실은 이러하다. 영국이 제안한 이른바 Bevin Plan을 에티오피아가 적극 지지하고 미국이 승인했다. Bevin Plan에 의하면 이탈리아에서 해방된 리비아와 소말리아는 UN의 감시 하에서 친서방 국가가 되도록 보장하는 조건하에서 두 나라는 독립 할 것을 승인했다.

 

하지만 에리트레아는 오욕의 진창에 빠뜨렸다. 그 때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이였던 John F. Dulles는 에리트레아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에리트레아 민중이 독립을 요구하는 것을 잘 아고 잇다. 하지만 홍해를 중심한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이익과 세계적 평화를 고려한다면 에리트레아는 불가불 미국의 우방국인 에티오피아에 예속하도록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Dulles가 주장하는 예속은 넓은 의미의 예속이 절대로 아니다.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의 한 개의 “주”로 규정되어 있음으로 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을 하면 당연히 불법으로 처벌을 받게 되여 있으며 에리트레아 민중은 독립을 위하여 어떠한 정치적 활동이나 정견을 발표할 권한마저 완전히 박탈당했다.

 

에리트레아 민중의 독립전쟁 (1961- 1991)

미국과 영국의 배신으로 그리고 당사국인 에티오피아의 야심으로 인하여 UN은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원천봉쇄하고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의 예속령으로 확정했다.

 

에리트레아의 민중들이 독립을 요구한다는 것은 감히 꿈이라도 꿀 수 없는 국제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미국은 UN이 주도하는 국제적 질서라고 주장하면서 에리트리아의 민중의 독립운동을 묵살하고 원천봉쇄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8년에 학생, 지식인들과 주로 도시 노동자들이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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