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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영웅 한니발의 후예들 제스민혁명으로 되살아난 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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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1-08-01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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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영웅 한니발의 후예들

제스민혁명으로 되살아난 튀니지

 

프랑스 식민 75, 독립한 뒤 단 두 명 대통령이 55년간 통치

친미독재와 부정축재로 튀니지를 망친 벤 알리 대통령

 

유태영 박사(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원)

 

튀니지는 북아프리카 대륙 끝에 위치한 나라인데 면적이 162,150km2이며 조국반도의 ¾에 불과한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튀니지는 북 아프리카의 보물 상자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랍세계와 가교의 역할을 하면서 번성했던 나라이며 풍부한 문화유산으로 가득하다.

튀니지는 고대 카르타고 제국의 전성기를 BC 4세기경에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 제국에 의하여 멸망했으며 그 후에 비잔틴, 아랍 이슬람, 오스만 그리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다민족의 다양한 문명을 수용하면서 발달시켜 나갔다.

튀니지는 영화 스타워즈, 글래디에이터,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배경이 된 광대한 사막과 이국적인 건축물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 같은 튀니지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튀니지의 해변마을에는 하늘보다 푸른 지중해의 바람이 골목마다 가득한데 이곳의 단골카페에는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생텍쥐페리의 체온이 담긴 곳으로 유명하다.

튀니지는 분명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는 나라이지만 남유럽의 짙은 잔상들로 가득 차 있는 지중해 해변의 나라이다. 소설가 모파상, 화가 파울 클래등이 살다 간 시티 부사이드는 그리스의 산 토리니섬을 닮았다고 해서 “튀니지의 산토리니”로 불린다.

튀니지에는 세계문화의 유산인 1300년의 역사가 담긴 이슬람 지투나 모스크 사원이 있고 모자이크로 유명한 바르도 박물관이 있다. 튀니지는 이슬람의 4대 성지이며 또 로마의 콜로세움에 버금가는 원형경기장도 있다. 또 튀니지는 올리브 생산으로 세계 2위 국가이기도 하다.

튀니지의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었으나 카르타고 제국과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또 아랍의 지배 하에서 오랜 세대를 지냈음으로 아랍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튀니지의 대다수 인종은 아랍인이며 순수 베르베르인은 1%정도 밖에 안 된다.

오랜 세월동안 정복자들의 지배를 격음으로 혼혈이 생겨났고 튀니지 남부에서는 흑인의 혼혈까지도 섞여 있으며 유대인도 함께 살고 있다. 튀니지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프랑스의 영향으로 북아프리카에서는 가장 서구화된 나라이다. 국어는 아랍어이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식층이 많이 있다.

1. 한니발 후예들의 고대 역사

기원전 814년경에 카르타고 제국이 건설되어 시칠리를 중심하여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신흥 세력으로 등장한 로마가 시칠리의 패권을 둘러싸고 카르타고 제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기원전 264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됐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장군이 군대 기병과 코끼리 40마리의 수송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지나 알프스를 넘는 과감한 승리의 행진을 계속 했다. 한니발 장군의 군대는 로마를 공격해 점령해 버렸다.

하지만 한니발 장군의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의 반격이 시작 되였으며 카르타고 제국의 항전과 봉기가 잇달았다. 로마제국의 군대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기원전 202년에 62년간 계속된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완전히 끝났다.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여 로마제국의 제2의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마제국은 카르타고의 재기를 철저히 봉쇄하기 위하여 대학살과 추방을 자행했으며 불에 탄 카르타고 시에 몇 겹의 소금을 뿌려 다시는 풀 한 포기도 자라나지 못 하게하는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카르타고 제국의 멸망 후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한니발의 후예들은 튀니지인 이라고 하는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 되였으며 튀니지 영토는 로마 제국의 속령이 되고 말았다. 이 때 리비아도 튀니지와 함께 로마 제국의 통치령이 됐다.

1) 로마 통치시대 (기원전 146- 647)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 제국이 무너지고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된 튀니지는 로마 제국에 예속된 “아프리카 주” 로 간주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제2 도시가 됐다. 뿐만 아니라 튀니지는 로마의 주요 곡창지대가 됐으며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라틴문화권의 지배와 기독교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져서 한때 기독교국이 됐다.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튀니지는 농업이 발전하여 곡식 생산이 1년에 100만 톤이었으며 올리브와 대리석, 귀금속 그리고 희귀한 동물 수출 등으로 로마제국의 보물창고의 역할을 수백 년 동안 하고 있었다.

하지만 395년에 로마 제국은 분열되었다. 서로마와 동로마 (비잔틴)로 분열되어 두개의 제국이 팽팽히 병존하고 있었다. 튀니지는 서로마 제국에 그대로 종속되어 94년 동안 서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동서로 분열된 로마제국은 당당했던 위세가 점점 쇠퇴해 지면서 특히 서로마는 급격히 쇠퇴해 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는 혼란 속에서 튀니지의 운명은 요동치고 있었다. 서로마가 점점 쇠퇴해지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게르만계통에 속하는 반달족이 439년에 튀니지를 침공하여 반달왕국을 건설했다. 반달왕국은 534년 까지 95년 동안 튀니지를 통치했다.

서로마가 점점 쇠퇴해 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로마제국인 비잔티움은 위대한 통치자 유스티아누수 황제가 등극하여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승리한 동로마제국은 동고트족을 서로마 제국의 이탈리아반도에서 몰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동로마제국은 튀니지를 침공하여 95년 동안 튀니지를 통치하고 있는 반달족을 또한 튀니지에서 534년에 몰아냈다. 반달족을 튀니지에서 몰아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튀니지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튀니지는 서로마제국의 통치권에서 부터 벗어나 이번에는 동로마제국에 예속됨으로서 통치자의 변화에 불과 했다.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은 튀니지를 647년 까지 113년 동안 통치했다.

2) 이슬람의 통치 시대 (647-1574)

동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튀니지를 이번에는 바그다드의 아랍 이슬람 세력이 647년에 또 다시 튀니지를 정복했다. 튀니지를 정복한 바그다드의 아랍 이슬람은 칼리프를 섬기는 전통적인 시아파 이슬람이었다.

튀니지를 정복한 시아파 이슬람은 670년에 북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이슬람 도시인 카이르완 도시를 튀니지에 건설했다. 그리고 이 카이르완 도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최초의 무슬림 성당, Great Mosque를 건축했다. 이 최초의 무슬림 성당은 건축규모의 웅대함과 설계의 예술성에 있어서 서방의 무슬림 세계에서 으뜸가는 Mosque로 유명 하다. 튀니지에서 서방 기독교의 잔재는 쇠약해지고 말았다.

아랍 이슬람의 통치하에서 튀니지에 농업을 위한 관개공사뿐만 아니라 도시의 물 공급을 위한 수도공사, 올리브 재배, 웅대한 궁전건축 등으로 가득 찬 화려한 이슬람 문화 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아랍 이슬람이 튀니지를 927년 동안 통치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수 없이 많은 왕조들의 내전으로 인하여 흥망성쇠가 항상 교체되고 있었는데 그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Aghlabid왕조의 통치 800-900, Fatima왕조의 통치 909-972, Zairids 왕조의 통치 972-1148, Hammaid왕조의 통치 1015-1152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rmflrh Banu Hilal왕조와 Baber Hafsids왕조가 1230-1574년 까지 튀니지를 통치함으로 바그다드 이슬람의 927년간의 통치시대는 모두 끝났다.

3) 오스만 제국의 통치시대 (1574-1881)

바그다드 이슬람의 튀니지 통치시대가 끝나자 스페인이 튀니지를 통치하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침공은 오스만 제국의 위세에 밀림으로서 즉시 떠나가고 말았다.

터키의 오스만 제국이 튀니지의 종주국이 되어 307년간 통치했다. 터키의 오스만 제국의 침략 초기에 파샤 군사령관이 파견되어 튀니지를 통치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럽 열강들의 잦은 침략과 방해로 인하여 오스만의 세력은 약화되고 있었다. 터키 이스탄불의 오스만 정권은 베이 총독을 튀니지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베이 총독에게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베이 독은 유럽 세력을 차단하는 통치수단으로 튀니지에 어용으로 왕조를 세웠다.

1705년에 오스만이 세운 베이 총독 하에서 튀니지에 후세인 왕조가 들어섰다. 후세인 왕조는 252년 동안 튀니지를 통치했는데 항상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의 세력 사이에서 줄 당기기의 불안한 통치를 했다. 그리고 1837년에 즉위한 아호메드 왕조는 서구화 정책이 튀니지의 부국강병의 정책임을 절감하고 서구화 정책을 점차적으로 시행했다.

1861년에 튀니지 아호메드 왕조는 새로운 헌법을 튀니지에 도입하여 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의 입헌국가로 기록됐다. 하지만 1864년에 보수파의 강력한 저항으로 튀니지의 서구화 정책은 일단 좌절됐으며 이로 인한 혼란 속에서 튀니지의 경제는 파탄에 빠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 튀니지에는 전염병인 흑사병이 전국에 퍼져서 암혹에 이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1784-1820년에 이르는 사이에 튀니지는 국가적인 혼란과 파국에 이르고 있었다.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완전히 패하여 오스만의 세력은 튀니지에서 쇠퇴되고 유럽 나라들에 의한 자본주의의 투입과 유럽문화가 빠르게 튀니지에 침투했다.

4) 프랑스의 통치시대 (1881-1956)

오스만 제국이 쇠약해지고 튀니지에 대한 통제력이 마비됨에 따라 1869년에 튀니지는 서방으로 부터 경제 파산국으로 판정을 받았다. 1878년에 베를린 비밀회의에서 프랑스, 영국 및 이태리 간에 튀니지에 대한 이권을 놓고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1881년에 세 나라들 간에 밀약이 성사됨으로 영국은 키프러스를 차지하고 프랑스는 튀니지를 통치하기로 합의를 함으로 실질적으로 튀니지는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튀니지에 대한 통치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프랑스는 튀니지에 현존하고 있는 오스만 베이 총독을 축출하기 위하여 프랑스군 36,000명이 튀니지에 주둔 했다.프랑스는 오스만 베이 총독을 축출하고 튀니지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당시 튀니지에는 프랑스인이 34,000명 있었는데 1945년경에 튀니지에 거주하고 있는 프랑스인의 수는 약 144,000명 이었다. 프랑스는 75년간 튀니지에 대한 식민통치를 했다.

2. 튀니지의 민족운동과 독립 쟁취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튀니지에서 민족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시작됐다. 튀니지 민중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하여 반기를 들면서 튀니지인들의 정치참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튀니지의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저항은 구체화 되여 1920년에 <데스투르당>이 창당 되였다.

<데스투르당>은 프랑스 식민통치정권을 상대하여 투쟁을 전개하면서 튀니지인들의 동등한 정치참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0년간 저항 운동을 지속한 후에 1930년에 이르러 하비브 부르기바 (Habib Bourguiba)가 주도하는 민중저항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면서 또 다시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다.

새로 창당된 정당은 <신 테스투르당>이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튀니지에서 모든 정치활동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신 테스투르당>은 해체를 당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신 테스투르당>은 복당되어 마테리를 대표로 하고, 하비브 부르기바는 사무총장이 되여 튀니지의 독립운동은 줄기차게 계속했다.

튀니지 민중의 독립운동이 성숙해짐에 따라 프랑스는 할 수 없이 1956320일에 무하마드 8세를 튀니지의 국왕으로 하는 조건하에서 독립에 합의를 했다. 독립을 쟁취한 튀니지는 무하마드 8세의 왕정 하에서 하비브 부르기바가 총리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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