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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일 헌신자 합동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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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1-07-12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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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일 헌신자 합동 추모제

"선배님들의 뜻을 기리며"

2011 5 26() 오후 6 30분부터 엘에이 원불교 LA교당에서 북미주 민주 통일 헌신자 합동 추모제 선배님들의 뜻을 기리며 행사가 진행되었다.

김인수 집행위원의 사회로 시작된 이 행사는 미주종교평화협의회,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민주개혁서부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중원포럼, 한인타운노동연대,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민족 교회, 우리문화나눔터, 내일을 여는 사람들, 민주노동당 미주후원회, 시민사회네트워크, 12개 단체들이 공동주최로 열렸다.

이 행사는 그동안 미주지역에서 이남의 민주화와 조국의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위해 북미주 지역(미국, 캐나다등)에서 헌신하시다가 돌아가신 고 손원태 박사님을 비롯해 50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이 행사에는 약 100여명이 참석하였으며 행사 내내 참석자마다 먼저 간 선배님들의 고귀하고도 희생적인 뜻을 받들기 위해 결연한 의지가 넘쳐나는 귀한 자리가 되었다.

먼저가신 선배님들의 뜻이 순결하게 담겨져 있는 국화를 헌화하면서 시작된 행사는 묵념과 국민의례 그리고 종교예식이 이어졌다.

종교예식에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만성스님(남가주 불교사원연합회장), 원불교계를 대표하여 정안 교무(원불교 미주서부교구장), 개신교를 대표하여 김동진 신부(성공회 미주목회자 협의회장)가 예식을 인도하였다.

계속하여 추모사와 추모시, 판소리, 노래, 합동 추모사가 이였으며 유가족 소개와 선구자 합창으로 행사가 이어졌다.

먼저 선우학원 박사(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가 고 김성락 목사와 고 손원태 박사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선우학원 박사는 추모사를 통해 두 분은 김일성 주석과 직접관계를 맺음으로 미주 동포 통일운동에 특별한 공헌을 하게 된 분이라 소개하면서 <김일성 주석은 한 생을 민족해방과 민주조선을 건설하는데 희생 봉사 하신 분>이라 소개하며 <김주석께서 창설하신 주체사상의 기본은 동지애와 민족애에 있다>고 언급하였다.

계속하여 김일성 주석과 김성락 목사와의 첫 만남을 소개하며 그에 얽힌 역사적 사건인 식사 기도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선우학원 박사의 책임 주선으로 김일성 주석과 손원태 박사와의 첫만남도 소개하였다.

선우학원 박사는 <이북 사회는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이며, 인간중심을 믿는 인간존엄성을 지키는 사회이고, 인민중심인 민중의 사회>라고 하며 이것은 <김일성 주석이 어린 시절부터 받은 인간애의 정신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민족통일 운동하는 여러분들은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를 친선적으로 만드는 책임이 있소.”하신 것도 김주석의 인간애 정신에서 하신 것>이라 하면서 <북의 사회는 인간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선우학원 박사는 추모사를 통해 강조하였다.

이어서 정찬임 시인의 ´님들의 고귀한 뜻 영원할 것입니다.(한길지음)´, 백승배 목사는 전충림 선생님 추모사를 낭독하였으며, 김원일 선생의 판소리 공연, 김도안 스님 추모사는 이승만 목사(박상준 선생 대독)가 했다.

그리고 시민사회 네트워크에서 준비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행사장을 가득 채워졌으며 먼저 가신 선배님의 넋을 이어나가겠다는 산 자들의 굳은 결의로 시나브로 번져나갔다. 이어서 합동 추모사가 있었다.

계속해서 유가족 소개를 하였다. 합동 추모제에 참가한 유가족으로는 고 전충림 선생의 부인 전순영 여사, 고 홍동근 목사의 사모 홍정자 여사, 서정균 선생의 부인 이화영 선생울 소개하며 인사말을 듣는 시간도 가졌다.

참석자 모두가 선구자를 합창하며 행사 모두를 마쳤다.

이 행사는 미주지역의 애국인사들이 화합하고 단결하여 많은 분들이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먼저 가신 선배님들의 뜻을 기리는 자리를 마련 한 것이 매우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명박 정권의 악정으로 인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선배님의 뜻을 올바르게 헤아리며 진정으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길을 다시금 살펴보고 앞으로의 조국 통일과 번영의 역사를 올바르게 개척해나가고자 하는 산 자들에게 힘이되고 용기를 복돋아주는 자리가 되었다.

이 행사에서 낭독된 추모사와 추모시를 아래에 소개한다. - 편집국


선우학원 박사의 추모사

- 김성락 목사, 고 손원태 목사-

통일인사 공동 추모식에서 내 책임은 김성락 목사와 손원태 박사에 대해서이다. 그 두 분은 김일성 주석과 직접관계를 맺음으로 미주 동포 통일운동에 특별한 공헌을 하게 됐다.

김일성 주석은 한 생을 민족해방과 민주조선을 건설하는데 희생 봉사하시었다. 김일성 주석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자 푸라토(Plato)가 주장한 철학자 왕” (Philosopher-King)의 대표적인 정치가였다. 철학자 왕은 한 생을 민족국가를 위해서 봉사하고 자기의 사재나 가족을 위해서는 한 푼도 저축하지 않을 것을 주장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와 같은 한 생을 보내신 것이다.

김주석께서 창설하신 주체사상은 현재 북조선사회의 기본이념으로 돼있다. 주체사상의 기본은 인간중심이고 인간의 중심은 사상이다. 북에서 주장하는 3대혁명 중에서 정신 혁명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북조선 사회의 기본은 인간정신에 있다. 맑스주의의 기본인 물질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정신의 기초는 인간사랑이다. 김 주석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보듯이 김주석의 기본사상은 동지애와 민족애에 있다. 그 분의 사랑이념이 어디서 시작됐을까? 그것이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성락 목사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김목사의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김재준 목사가 평양방문을 계획했던 것을 취소하게 되여 김성락 목사를 대신으로 선택하여 북의 양해를 얻게 됐다. 그런 주선은 조선노동당, 정치국 국원의 한 분인 허담 선생과 내가 동백림에서 회담한 결실이었다. 왜 김성락 목사를 추천했었는가 하면 김목사의 아버지와 김주석의 아버지가 평양 숭실학교 재학 중 국민회 운동을 함께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안했었다.

내가 미국에 돌아와서 김성락 목사에게 평양방문을 제안했을 때 김목사는 내가 왜 평양에 가?” 하고 절대 반대했었다. 평양 방문하면 목회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김목사 평양 방문하고 김주석을 만나서 두 분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친근해질 것을 주장했다. 3, 4개월 동안 김목사에게 권고했다. 김목사가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곧 평양에 소식을 전했다. 김목사는 내가 안내하는 것을 거절하고 혼자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게 됐다. 두 분은 아버지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됐다. 자연히 두 분은 친근해 진 것이다.

점심식사가 준비됐다. 여러 고관들도 동참했었다. 식사가 시작하기 전에 김주석은 목사님, 식기도 하시지요.” 했다. 김성락 목사는 식기도를 길게 했다. 국가사업에 수고하시는 김주석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긴 기도였다. 그 후 우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만나는 사람마다 김주석이 김목사에게 목사님, 식기도 하시지요.” 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이야기는 평양 신문에도 나왔다고 한다.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후 김목사는 부인 동반하여 평양을 여러 번 방문했고 미주에서 우리와 함께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다음이야기는 손원태 박사의 방북이야기이다.

내가 김일성주석을 세 번 면담하고 긴 대화한 것을 그 후 신한 민보와 뉴 코리아타임스에 게재했고 작년 방북 후에는 민족21” 잡지에 게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손원태 박사의 이야기는 오늘 처음 하게 된다. 김주석과 면담했을 때 손정도 목사가 내 생명을 구해준 은사요. 그런데 손목사의 둘째 원태가 미국에서 살고 있는 줄 아는데 한 번 찾아 보시요.”했다.

나는 미국에 돌아와서 홍동근 목사에게 부탁했다. 홍목사는 얼마 후에 손원태 박사가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 시에서 은퇴생활하고 있는 사실을 전달해 주었다. 나는 손박사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하루 종일 운전해서 손박사 집에 도착했다. 손박사는 의사직에서 은퇴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손박사의 형인 손원일 장군의 부인 은혜와 내 아내 쏘니아의 관계로부터 시작했다. 쏘니아가 8세 때 어머니를 따라 마산 고향에 가서 일년 있으면서 학교에서 사귄 친구이다. 그 후 손원일 장군이 서독대사로 있을 때 구라파를 여행 중이던 쏘니아가 손 부인을 찾아가서 반가이 만난 이야기로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는 심각한 문제로 바꾸어졌다.

손박사님, 평양에 가서 김주석을 만나세요. 김주석이 지금 박사님을 몹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요, 평양에는 못 가요.”

왜요? 주석님은 기다리고 계시고, 대환영 할겁니다.”

아니요 안돼요. 내 형님이 국방장관까지 했는데 안돼요.”

나는 몇 시간 동안 권했다. 새벽 세시까지 그 이야기가 계속됐다. 이 때 손 부인께서,

선우박사께서 책임지고 보장한다는데 가 봅시다.” 했다.

손박사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 동안 잠잠했다.

평양에 가면 대환영 받을 것이 틀림없어요. 교회에서 청소년 운동한 이야기로부터 함께 놀던 이야기들, 그 얼마나

선우박사가 책임진다면 모험을 해 보지요.”하고 손박사가 승낙했다.

손박사 내외는 평양에서 대환영을 받았고 김주석과 장시간 동안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즐기었다. 손박사 내외가 집에 돌아와서 내게 전화했었다. 우리는 또 하루 종일 운전하여 손박사 댁을 찾았다. 많은 선물과 김주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이면서 기뻐했다. 그 후 손박사 내외는 평양에 한 해에 두 번씩 가서 한 달씩 지냈다. 오마하에서는 평양 방문 이야기를 교회와 클럽에서 자주하게 되어 손박사가 친북인사의 별명을 얻게 됐다.

우리가 북과 해외동포와의 대화를 10년간 계속했고 그 결과로 평양에 교회당이 세 개가 건설됐고 또 신 구약성서가 출판됐고 사회과학사전에 종교에 대한 정의가 종교는 아편이다 라는 맑스의 정의를 종교도 사회문화에 공헌한다.”라고 교정됐고 무엇보다도 김일성 종합대학에 종교과가 설치된 후에 홍동근 목사가 10년간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했었다. 이런 사변은 국가의 정책으로 실천된 것이지만, “목사님, 식기도 하시지요.”한 것이나 손정도 목사가 내 생명을 구한 은인이다.”란 김주석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나온 진심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즉 김주석께서 어머니 강반석 권사를 따라 칠골 교회에 댕기면서 얻은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과 손정도 목사 밑에서 청년회 회장을 하면서 경험한 기독교의 진리가 김주석의 한 생을 지배한 것으로 믿게 된다.

북 사회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위해서 전체는 하나를 위해서슬로건을 보편화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시조인 정치사상과 룻소는 자기의 유명한 저술인 사회공약”(Social Contract)의 기본요소로 개개인의 이권을 전체의 이권을 위해서 희생하여야 하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전 시민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북에서는 주체사상의 기초인 인간중심 즉 인간정신을 기초로 사회건설이 진실한 민주주의 사회건설을 위한 것임을 실천하고 있다.

북한사회는 17세기 영국 정치사상가 라크의 민주주의의 기초요소인 시민의 평등, 인간의 존엄성, 시민다수의견으로 정책결정 등 세 요소를 실천하고 있다. 즉 북에서는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이며, 인간중심을 믿는 인간존엄성을 지키는 사회이고, 인민중심인 민중의 사회이다. 이런 민주사회의 창설자인 김일성 주석은 어린 시절부터 받은 인간애의 정신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미국에서 민족통일 운동하는 여러분들은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를 친선적으로 만드는 책임이 있소.”하신 것도 김주석의 인간애 정신에서 하신 것이었다. 북의 사회는 맑스주의의 유물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인간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김일성 주석과 김성락 목사와의 관계, 또 손원태 박사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 분의 진정한 인간사랑의 정신을 보게 된다.


백승배 목사의 추모사

- 고 전충림 목사-

뉴 코리아 타임스 발행인 이산가족의 은인 전충림 장로님

부족한 제가 고 전충림 장로님을 소개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고 한편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고 전충림 장로님을 소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면 단 한가지, 전장로님의 생전의 귀한 사명, “이산가족찾기운동으로 인한 많은 수혜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81 1월 누님의 편지를 통해 어머니의 타계소식을 들은 저는 상실감의 충격과 아픔으로 9년이나 조국방문을 미루다가 90 10 <범민족통일음악회> 참관단 일원으로 처음 북녘 조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39, 누님과 두 누이동생 가족을 만났고 어머니 묘소를 방문할 수 있었던 고향방문은 제게 극적인 회심의 기회였습니다. 무종교인이던 제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 첫 번째 회심이라면 조국방문으로 인한 눈뜸은 제2의 회심이었습니다.

분단의 비극 극복을 위한 민족화해와 통일운동, 조국통일을 위한 한 모퉁이의 작은 일꾼이 되기 위한 결심의 회심이었습니다. 역사로 살기 위한 회심이었습니다. 고 전충림 장로님의 삶은 바로 그것, 분단 역사에 역사로 살기 위한,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 조국 사랑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1923 9 22일 북간도 용정 태생인 전장로님은 용정, 연길, 함흥 등지에서 수학, 45년 이후 잠시 목단강, 함흥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1947년 김순영 여사와 결혼 서울로 이주하셨습니다. 금융기관, 조선일보를 거쳐 5.16 1962년 캐나다로 이민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시고 1973 <뉴코리아 타임스>를 발행하여 해외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셨습니다. 당시엔 초진보적인 신문이었습니다. 그 신문을 통해 저는 선우학원 박사님을 알게 되었고, 비운의 우리 역사를 바로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9년 평양탁구선수권대회에 북미주 동포 언론인으로 단신으로 방문하시어 30년만에 누님을 만나고 오신 전장로님은 해외이산가족찾기회를 조직하여, 수많은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어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장로님이 겪은 비방, 멸시, 따돌림으로 인한 아픔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마는 장로님은 그 투철한 신앙심으로 극복, 신심을 잃지 않고, 신념을 꺾지 않고,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 민족과 나라 사랑의 길을 가셨습니다.

여기 몇 분의 전장로님에 대한 증언의 말을 옮깁니다.

“그는 민족의 분단으로 애타하는 많은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삼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광야에서 외로이 외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승만 목사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민족의 화해를 이룩하고 이북의 겨레들과 이미 정신적인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 사실을 우리의 민족사는 길이길이 기억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경모 선생

“그가 발상해서 성사시킨 이산가족찾기운동은 그가 우리 곁을 떠난 후에도 계속돼야 한다. 선우학원 박사

과연 장로님은 민주화를 위한 투사요, 통일화를 위한 선구자요, 참 민족 사랑, 나라 사랑을 위한 선각자요, 이 모두를 실천하기 위한 믿음과 정의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전충림 장로님,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 나라 사랑 민족사랑의 길 얼마나 고달프셨는가를 어찌 저의 부족한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전장로님의 몸은 우리를 떠나있으셔도 장로님의 고귀한 유업은 우리와 함께 민족과 함께 영원하리라 믿습니다.

전장로님, 하느님의 품에 편히 쉬소서.

남아 있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주소서


이승만 목사의 추모사

- 고 김도안 스님 -

김도안 스님을 추모하며

김도안 스님은 참된 인간으로 사시고저 평생동안 도를 닦으시며 살아가신 저희들의 스승 이셨읍니다. 세상의 평화와 옳은 일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적으로 바치신 귀한 이셨읍니다. 종교적 신앙을 실제 생활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신 도안스님의발자취는 오늘까지 우리들의 마음속 깊이 살아 있으며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우리들의 무한한 힘이 되고 있읍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비저진 역사적 현실을 심히 안타까히 여기시며, 분단과 갈등으로 인하여 계속 되고있는 민족의 아픔을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삼으시고, 우리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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