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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은 ‘걸어다니는 민중학교’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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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1-05-24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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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은 ‘걸어다니는 민중학교’ 바로 그것"
<추모사> 정광훈 의장 삼우제를 마치고 돌아와 -오종렬
2011년 05월 23일 (월) 07:25:06 오종렬 tongil@tongilnews.com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 정광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 지난 13일 영면했다.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민중의 벗 고 정광훈 의장 민주사회장´ 영결식에서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이 헌화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의장님,

삼우제를 올리려고 묘 앞에 섰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아래 땅속에 의장님이 묻혀있다니, 도저히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향 사르고 잔 올리고 묘비를 만져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뜻밖에도 100명 가까이 많은 분들이 참례하셨는데 이 분들에게 의장님의 묘 자리 높이와 묘비를 다시 손 봐야겠지 않느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하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거, 쓰잘데기 없는 짓 하지 말고 얼른 가서 후배들이나 잘 돌보시오”하시겠지만 할 일은 해야지요.

이승에서는 우리 둘을 정치사상적 쌍둥이 같았다고들 말하는데 땅으로 돌아가서는 김남주 시인과 나란히 계십니다 그려. 이승을 떠난 의장님 자리는 지금 누워계신 그곳이 바로 맞습니다. 의장님과 나는 어느 것 하나 닮은 곳이 없는데도 쌍둥이라니, 말 같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맞는 핵심이 있으니 그건 ‘김남주 시인’ 아니겠습니까?

“남주의 시는 사상이요 철학이요 행동이다. 아니 혁명이다. 그렇다, 김남주는 민족서정이며 민중해방 전사이자 혁명 그 자체이다.” 이구동성이요 이체일심이랄까,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김남주를 보는 시각과 입장과 행동의 일치성’ 아니겠습니까?

앞서 가신 열사들의 무덤 앞에서 늘 “지하에 가셨으니 이웃 열사들과 지하조직 잘 하여 해방세상 이루시라”고 하셨지요. 저승은 이승의 연장이요 죽음 역시 삶의 한 표현일 따름이니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생사를 넘어 이뤄내야 한다는 뜻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비장한 가운데서도 미소를 생산하면서 사물의 정곡을 꿰뚫는 말하자면 촌철살인의 명구였습니다. 그 모습 그 목소리가 생시인 듯합니다.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가셨으니 원 없이 그렇게 하십시오.

제를 올린 후, 바쁜 분들은 먼저 가시고 망월동 어구에 있는 이름 난 밥집에서 오붓한 점심을 같이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의장님의 발자국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도록 어떤 일을 할까, 여러 의견들이 나왔는데 따로 자리를 만들어 구체적으로 의논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 2007년 9월 16일 한국진보연대 출범식에서 나란히 상임공동대표로 추대된 정광훈(왼쪽), 오종렬. [자료사진 - 통일뉴스]
삼우제를 마치자 곧 서울에 올라 왔습니다. 십년 가까이 함께 지내던 자취방, 안방은 의장님 방, 부엌 딸린 거실은 내방, 내 자리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서 의장님 자리를 건너다보았습니다. 앉기만 하면 뭣인가를 만들던 자리, 엎드리기만 하면 누군가에게 편지 쓰던 자리, 누워 눈감으면 쪽잠 자던 자리, 눈만 뜨면 책 읽던 자리, 이제는 임자 없는 그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개구리가방 둘러메고 휑하니 내달리기 일쑤, 어디 가냐고 물으면 ‘철원 모내기, 춘천 고추밭, 홍천 외양간, 화천 사랑방, 정선 감자밭, 진천 수박밭, 해남 벼 베기...’ 갈 길 바쁘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닫던 뒷모습...

남한 땅 골골 농민형제들을 찾아가서 일손 도우며 토론하고 일깨우며 다독이기 얼마였던가. 의장님은 ‘걸어다니는 민중학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장례 전날 밤, 의장님이 뜻한 바 있다며 지난해부터 따로 둥지를 틀기 시작한 산골마을 집을 찾았습니다. 오소리 굴 같은 연구소(?) 앞 나지막한 야산에는 왜적의 침노를 막기 위해서 수백 년 전부터 향민들이 쌓은 긴 성터가 있다는데 올라가 볼 겨를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의장님의 거처, 의장님의 잠자리에서 그 날 밤을 보내며 의장님 평생의 뜻을 세상에 밝히기로 작심했습니다. 그리고 해남 군청광장 노제에서 “민중의 벗, 시대의 등불 정광훈 의장님의 정체성을 애매모호케 하지 말자”고 전제한 다음 “인간의 피가 흐르는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의 본성에 따라 착취와 수탈과, 그게 여의치 않을 땐 학살도 서슴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의장님 사상의 핵심을 공언했습니다. 그리고 해남 사람들에게 “해남 땅은 왜 이리 찰지고 붉은가? 농민군이 흘린 피가 스며들어 붉게 물든 것이고 공동체의지와 동지애가 질기고 단단하여 흙조차 찰진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어떤 지역, 어떤 계급, 어떤 부문운동 단체든 ‘전선’으로 모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개폼잡고 ‘달밤에 유난체조’나 하고 자빠졌으면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는 의장님의 평생주장을 재확인하였습니다. 달밤의 유난체조란, 옛날 전라도 사람들이 잘 쓰던 ‘헛발질’과 ‘꼴불견’을 합친 말 아닙니까?

의장님 머리맡에 걸어드렸던 우리나라 큰 지도를 들여다봅니다.
오늘 따라 유난히 아리수가 뚜렷이 눈에 들어옵니다. 북한강 남한강이 두물머리(양수리)에서 만나 한강이 되어서 호호탕탕 전진하여 서울을 만들고 서해로 들어갑니다.

2십여년 전 우리가 만났을 때 내 눈에 비친 의장님은 유난히 ‘계급’에 천착해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장님 눈에 비친 나는 ‘민족’에 천착해 보였겠지요? 내가 혼신의 힘을 붓던 교원노조(전교조)를 ‘계급성과 변혁성을 덜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보는 시각을 명확히 여러 차례 나타내곤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둘이서 대화와 논쟁을 많이 해온 줄로 알던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요?
서로 삶의 방식과 견해를 존중하면서 마치 북한강과 남한강처럼 제 물길 따라 흘렀다고나 할까~. 밀고 당기고 하지 않고 제 물길 따라서 자연스럽게 만났다고나 할까~.

“자주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이며 “자주통일은 민중해방 복지사회로 가는 결정적 관문이자 절대적 필요조건”이고 “자주통일 그 자체가 곧 복지사회는 아니지만 자주통일 없는 자리에 민생복지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화통하게 일치했습니다.

   
▲ ´민중의 벗 고 정광훈 의장 시민사회장´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오종렬 상임고문. [자료사진 - 통일뉴스]
독서광인데다 일꾼들에게 책 사주기를 낙으로 여겼던 터라 무던히도 책을 많이 사셨지요? 어린 자식 입에 밥숟가락 넣어주듯 젊은 동지들에게 책 보내면서 행복해 하였습니다. 내 말 맞지요?

의장님이 생각날 때면, 바쁜 틈 쪼개서, 잘 가시던 영등포역 그 서점엘 찾으렵니다.
의장님이 생각날 때면, 신념과 활력의 재생공장인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을 찾을 것입니다. 마실가듯 찾아갈 것입니다.

“총 든 자본주의, 제국주의 몰아내고 통일세상, 대동세상 이루어서 향기롭고 맛나게 자손만대 살아보자!”며 “Down Down WTO! Down Down FTA! Down Down USA!"를 외치고 싶어서, 부인과 자녀들 그리고 손자 손녀에게 사랑한다는 한마디, 동지들을 믿고 사랑한다는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서 마지막까지 입을 닫지 않으셨습니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산처럼 쌓인 일을 놔두고 갈 수 없어서 눈도 감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눈도 감지 않으셨습니다. 부인 최해옥 여사께서 마지막 손길로 눈을 감겨드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며 잡은 손 놓고 눈물로 보내드렸습니다.

이제 평안히 누워계시는 망월동 그 자리에 막걸리 병 흔들면서 달려갈 터인데 얼마나 반가이 맞아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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