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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 98돌 생일 축하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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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0-04-23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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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고문이신 선우학원 박사님은 1938년 미국에 오신 이후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중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하셨습니다.

광복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시었으며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출활동에서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활략하신 어른이시며 <북미기독학자회>를 통하여 민주화와 통일의 문제를 위한 연구와 토론을 이끌어 오신 학자이십니다.

1981년부터는 "해외기독자와 북의 기독자간의 대화"를 시작하시어 해외동포들과 북녘의 기독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는 첫걸음도 내디디셨습니다.

이 대화는 10년을 계속하였으며 이 대화 때문에 군사독재 하에서의 남쪽 교회가 용기를 얻고 통일문제를 들고 나서게 하는 촉매 역할이 되었으며 심지어 <세계 교회연합>(World council of Churches)이 우리 반도의 화해와 평화적인 통일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게 하는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1995년 조국을 다녀오신 후 부인 신성려 교수님의 건강문제로 사모님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시고 돌보신 부인 사랑의 모범도 보이신 어른이십니다.

작년 8월 사모님의 별세로 6개월 이상의 추모기를 보내시고 이번 <4월 봄 민족문화축전>의 재미동포 대표단의 일원으로 15년 만의 조국방문을 하셨습니다.

선우 학원 박사님의 방문 감회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 편집부

 

김일성 주석 98돌 생일 축하참관기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김일성 주석 98돌 생일 축하단의 일원으로 15년 만에 평양을 방문했다. 내 건강문제와 아내의 건강문제 때문에 15년간 북을 방문하지 못했다. 1981년에 시작한 “해외교포와 북과의 대화” 후 평양을 해마다 방문하여 여러 인사들과 대화했었다. 그 중에는 고인이 되신 강량욱 부주석, 김용순 비서, 허정숙 여사, 려연구 여사, 전금철 박사 등을 기억하고 있다.

이번 방문에는 가족(아들, 정민과 정국 또 며느리 은숙)을 동반했다. 20년 전 베이징에서 재미교포학자와 북의 학자 대화 시에도 동반했고 평양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가족 동반하는 이유는 해외에서 살고 있으나 조국과의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방문에도 오랫동안 사귀고 있는 인사들 중에서 김영남 위원장(인민위원회)과 양형성 박사(인민위원회 부위원장)와 다른 여러분들과 대화하는 기회를 가졌다.

평양은 내 고향이다. 중학시절 체육시간에는 대동강에서 수영도 했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도 타면서 즐기었다. 특히 10여명으로 조직된 “조기 체조단”이 매일 새벽에 모란봉에 올라가서 을밀대에 모여서 애국가를 부르고 조선독립을 위해서 기도했다. 위험한 행사였다. 그러나 우리 청년들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뿐만 아니고 고조선의 수도로 인정되어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평양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90% 이상 파괴된 것을 현대식으로 재건하여 “공원 속의 도시”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수도로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대도시는 상업위주로 건설되었고 고층빌딩이 대중을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새롭게 재건된 평양은 인민의 문화생활을 고려하여 도시설계를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건설됐다. 평양 중심지에 조선의 전통적 건물인 인민학습당이 웅장하게 건설되었고, 매일 수천 명의 인민이 이용하고 있다. 인민 대학습당 옆에는 조선 중앙 역사박물관과 조선 미술박물관이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도시계획의 특징으로 건설된 것이 김일성 광장이라 하겠다. 문화시설로 배치된 심벌이다. 명절 때와 큰 행사 때 수만 명의 인민이 운집하여 이 광장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기는 것이다. 자본주의 도시중심부의 권력과 재벌의 장악을 차단하고 인민을 위한 문화시설 위주로 건설된 것이다. 혁명의 심벌로 꾸리기 위해서는 도시 중심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해야 한다. 김일성 광장이 그런 심벌일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평양은 우리나라의 민주 수도입니다. 아름다운 평양을 민주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무궁무진한 민주 력량의 발원지이다.”라고 지적 하시였다.

평양은 오랜 역사를 보장하면서 대동강과 모란봉의 자연미를 살리고 있으며 21세기를 맞이하는 동시에 미래의 도시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일본기자가 보도했듯이 “공원 속의 도시”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3백만의 인민이 살고 있는 평양은 과연 공원 속의 도시이다.

내가 평양을 방문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고향 도시를 보기 위한 것보다도 평양을 재건하고 인민생활을 복귀하신 김일성 주석을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번 김 주석을 만나 대화한 적이 있다. 그것은 내 생애에서 가장 귀한 체험이었다. 그 분과의 대화를 지면관계로 몇 개만 소개하고자 한다.

때는 1990 4 15일 베이징을 떠나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두 안보원이 나를 데리고 만수대극장으로 달려갔다. 현관에서 윤기복 비서가 “왜 늦었습니까? 수령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했다. 내 좌석은 주석단 바로 뒷줄이었다. 개막직전이었다. 찬란한 조명이 내 왼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김일성 주석께서 조명을 받으시며 입장하시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관중은 열광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 때 김 주석은 장철 부총리에게 무엇인가 묻고 있었다. 장 부총리는 내 앞으로 주석님을 모시고 왔다. 주석님은 “잘 왔소. 수고 많이 하셨소.” 라고 하시면서 내 손목을 잡으신 것이다. 나는 당황했었다. 내가 수십 년간 대학 교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는데 주석님 앞에서는 아주 수줍은 작은 애였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조명은 나와 주석님과 악수하는 장면을 비추고 있었다. 내 생애 이처럼 흥분되고 감격적인 순간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90이 넘은 지금도 그 때의 감격스러운 체험은 설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전반 공연이 끝나고 30분간 휴식시간이었다. 안내원이 나를 데리고 주석님께서 휴식하시는 접견실로 안내했다. 주석님은 “나는 좀 걸어야겠소. 너무 앉기만 했더니…” 하시면서 넓은 응접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주석님을 따라 걸었다. 주석님은 “미국은 조선을 둘로 영구히 갈라놓으려고 해요. 우리 민족은 둘로 갈라질 수 없어요. 우리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어요. 그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적인 행동이야. 우리는 통일해야 해. 통일만이 애국이야…”라고 힘써 말씀하시었다. 계속해서, 주석님은 “문익환 목사 왔을 때 민족은 하나, 통일은 연방제도 하자니깐 문 목사도 찬성했어, 그래야 한다고 하더구만, 그뿐만 아니고 민족 자주해야 한다니까 자기도 찬성한다고 했어, 라고 하시였다. 나는 주석님께, “문 목사는 저와 도쿄에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애국자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우리와 함께 통일운동 했습니다. 온 가족이 애국자들입니다.” 했다.

주석님께서 또, “연방제는 자주적이어야 해, 세계가 다 연방제를 찬성하고 민족 자주성을 하자는 것이요, 우리나라는 지질학적 위치로 봐서 어느 한쪽에 붙을 수가 없어. 중국, 일본, 소련도 안돼. 우리는 대국들의 위성국이 될 수 없어. 우리는 중립국이어야 돼. 중립을 하드래도 자주독립국가로서 당당히 자기의 입장을 명백하게 해야 돼. 그 이상 더 좋은 것은 없어.”라고 말씀하시었다.

나는 주석사상은 세계 사람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고 말했다. “저는 이번 남미 에콰도르에서 있은 주체사상 국제세미나에 참가했고 논문을 발표하고 왔습니다. 남미의 여러 이름있는 학자들이 주석님에 대한 존경과 찬사,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는 대단합니다. 날이 갈수록 주체사상연구가 확장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주석님은 “주체사상은 자기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을 위한 것입니다.”하시였다.

나는 주석님께 여쭈었다.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라고. 주석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시었다. “나는 미국을 비방하지 않소. 미국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어요. 우리와 미국은 적대시하면서 살아 갈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을 경계해야 돼. 역사적으로 봐서도, 지형적으로 봐서도 남이나 북은 다 같이 일본을 경계해야 돼. 일본의 야욕을 잘 봐야 돼. ― 우리는 미국에서 배울게 없어. 세계최고 모범제율을 갖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지요.”하시면서 통일운동에 대해서, “나는 미국과 좋은 사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통일 운동하시는 동포들이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 친선을 위해서 노력해 주십시오. 우리는 친선관계가 되기를 원하며 평화를 원합니다.”라고 간곡하게 말씀 하시였다.

김 주석께서는 평화를 강조하시었고 언제나 인민을 사랑하는 것을 주장하시었다. 조국통일을 위해서는 민족대단결, 인덕정치, 통 큰 진보정치, 인류사회의 자주성 실현을 주장하시었다. 그분의 사람 접견은 겸손하고 인자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한 생을 민족을 위해 사시고 자기 개인이나 가족을 위한 재산은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그분이 서거하신 후 몇몇 간부들이 그분의 금고를 열었을 때 발견한 것은 금전이 아니고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참가했던 동지의 한 장 사진이 그의 재산 전부였던 것을 보았다.

또 김 주석은 부모님들에 대한 애정이 극심했었다. 그분께서 강희원 부총리에게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님(강반석 권사)을 따라 다니던 교회당이 칠골에 있었는데 찾아보시라.”고 했다. 칠골교회는 김성락 목사 아버지가 시무하던 교회였다. 후일 김성락 목사가 김 주석을 방문했을 때 “목사님 기도하시지요.”하고 오찬 시 말씀한 것이 그 후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칠골에 살던 노인들에게 위치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여 그 위치를 발견했다. 그 자리에 지금 칠골교회를 재건하여 강반석 권사를 기념하고 있다.

김 주석께서 평양을 떠나 만주로 가서는 손정도 목사 교회에 참석하면서 교회 청년회 회장을 맡았다. 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중국 경찰에 의해 공산주의자 혐의로 체포되어 감금되었으며 손 목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다른 곳으로 피신했었다. 그때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당시 17세였다.

김 주석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손정도 목사의 자녀가 미국에 있음직한데 찾아봐 주시오. 손 목사는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외다. 그 목사님의 아들이 나와 함께 자랐는데―”하시었다.

미국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 시에서 거주하고 있는 손원태 박사(손 목사의 차남)를 찾아 직접 방문하여 평양에서 김 주석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가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손 박사는 거절했다. 그 이유는 자기 형님이 이승만 정권 시에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인데 어떻게 평양에 갈 수 있는가 였다. 나는 김 주석은 그런 생각 하지 않고 손정도 목사의 자녀를 찾고 있다고 간곡히 권고했다. 새벽 세 시가 됐을 때 손 부인께서 “가 봅시다.”하고 응했다. 손 박사도 부인의 권고로 승낙했다. 두 분께서 평양을 방문하고 김 주석을 만나게 됐다. 어린 시절에 함께 자라난 이야기를 하면서 즐겼다. 그 후 손 박사 내외는 매 년 두 번씩 평양을 방문하여 많은 환영을 받았다.

김 주석께서 과거의 은인을 기억하는 에피소드의 하나이다.

그와 반대로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다. 친일파 인사 최남선, 이광수에 대해서이다.

“내가 왜 최남선, 이광수를 반대하는가 하면, 그들이 일본의 동족화 운동에 앞장선 반역자들이야요. 우리 인텔리들이 반역자가 된 겁니다. 우리가 해방 후 제일 큰 문제가 인텔리였지요. 평양에는 대학교, 전문학교가 없었어요. 자연과학계통의 인텔리가 12명뿐이었어요. 해방 후 기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었어요. 김회일 등 네 사람뿐이었어요. 그 분을 교통위원장으로 세웠지요. 기관사는 없고 화부 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로동당을 창설하고 당기를 만들 때 로동자와 농민을 대표하고 인텔리를 상징하는 붓대를 가운데 넣었지요. 인텔리를 중요시했기 때문이에요. 그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나는 우리식대로 해야 된다고 고집했지요. 소련이나 남의 본을 따르지 않고 우리 식대로 한 것이 매우 다행이었지요. 남의 것을 배우되 우리가 입에 넣고 먼저 씹어보고 우리 구미에 맞는 것이면 먹고 아니면 뱉어 버려야 해요. 해방 후 인텔리는 대부분 서울에서 넘어왔어요.” 했다. 계속해서 김 주석은, “이승만은 미국을 위했지만 김일성은 자주적이지요. 지금 우리나라에 인텔리가 145만 명이고 매해 늘어나고 있어요. 인텔리는 우리의 큰 자원입니다. 로동당 깃발에 붓대를 포함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중국의 변화, 중국의 내란소동, 러시아의 문제 등등 그러나 우리나라는 문제없습니다. 조국은 튼튼합니다. 수령, , 인민이 하나로 뭉쳐있어요. 우리사회에는 미국 모양으로 빈부차이가 없고요. 미국에는 길바닥에서 자는 사람들, 강도, 아편쟁이들, 에이지 등등 못된 것이 다 모인 곳입니다. 왜 미국이 남의 나라에 가서 간섭을 해요? 중동나라 가서 왜 간섭을 해야 해요? 소련이 약해지기 때문에 전세계를 통치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위험한 행세입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미국은 독점자본주의자들이 지배하지요. 우리는 주체사회주의입니다. 여러분 주체사상을 배우세요. 남조선은 미국의 속국 노릇해요. 나라의 군대는 그 나라를 통솔하는데 남조선의 군대는 미국이 통치해요. 그것은 독립국이 아니요. 남조선 인민들은 모두 민족통일을 원하지만 미국의 지배 밑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요. 대중은 반 파쇼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원해요.

김 주석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지적해 줬다.

“우리는 조선의 넋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려운형 선생과의 관계를 알리웠다. “려운형 선생이 세 번이나 방문했었는데 특히 자기의 가족들을 위해서 딸과 아들을 평양에 보내겠다고. 딸이 먼저 와서 그 애를 소련에 보내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우게 했고 돌아와서 좋은 일을 담당하고 있지요.”했다.

려연구는 후에 해외교포와 북의 대화에 참석하여 많이 활약했다.

김 주석은 또 1972년 이후락, 장기영, 최규하가 방북 했던 이야기도 해주시었다.

“그들이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내가 새마을 운동은 본격적으로 농민을 잘 살게 해야지요 했고, 농장을 수리화해야 하는데 우리가 경험이 있으니까 도와줄 수 있다고 했고 또 우리 해안에 물고기가 많은데 남조선에서 잡아가도록 할 수 있고, 우리에게 광산이 많은데 공동개발 할 수도 있다고 여러 가지를 제안했지요.”했다. 김 주석께서는 벌써부터 타협하고 협력하는 것을 실천코자 하셨다.

김 주석과의 면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주성에 대한 강조였다. 김 주석은 “자주성은 사람을 살게 만든다. 사람이 자주성을 잃게 되면 사람의 행세를 할 수 없소. 동물과 다름이 없게 돼요. 그러므로 사회정치생활은 물질생활보다 더 중요하오. 사람은 사회적 존재요 사람이 사회를 떠나고 정치적 자주성을 잃게 되면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소.

김 주석께서는 현 세계정세에 대해서, “현재 자기의 의사를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실현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요. 내가 국제회의에서 주장한 것은 지금은 크고 작은 나라는 있지만, 강하고 약한 나라의 분별은 없다고,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할 수 없다. 발전되고 후진된 나라는 있어도 다른 나라를 강제로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고

평화적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본문제는 옛날제도에서, 옛날사고방식에서 해방된 인민이 자주성의 제도를 획득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럼으로 자주성이 세계평화를 건설하는데 기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부터 시작된 한국과 미국의 주종관계는 군사정권을 거쳐 현재 이명박 정권에서 더 명백해지고 있다. 그와 반대로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정권은 세계 최대강국인 미 제국과 대항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북의 군력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북의 대항력은 민족 자주성의 정신으로 무장한 전인민의 정신적 자세에 있다고 믿어진다. 즉 김일성 주의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2년 후 즉 2012년이 되면 김 주석의 탄생 백 년을 맞이하게 된다. 북에서는 벌써부터 경축준비에 빈번하고 있다. 내 건강이 허락하고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다면 백 년 축하 제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작성 :  선우학원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