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의 최고지도자(수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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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9-07-27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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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의 최고지도자, 즉 수령에 대한 이해는 사적 소유와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최근에 이북의 후계자 문제를 계기로 이남과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이북의 최고지도자에 대한 오해가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북의 최고지도자가 그의 후계자를 마음대로 지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도되는 것과 같이 이북의 최고지도자에 대한 지위와 역할이 많이 오해되고 있다. 그것은 이북의 최고지도자(수령)를 마치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의 대통령이나 봉건제도 하의 왕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북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이북의 최고지도자(수령)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이론, 즉 수령론을 올바로 이해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 견지에서 이북의 수령론을 대할 때 나오는 비판들 중에 첫째는 수령의 특출한 지위와 결정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두 번째의 비판은 사회의 모든 성원들로 하여금 수령의 사상과 영도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은 <획일주의>라는 것이다. 세 번째의 비판은 수령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은 <권위주의>라는 것이다. 네 번째의 비판은 사회의 모든 성원들로 하여금 수령에게 충성을 다 바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개인독재>라는 것이다. 원래 자유민주주의의 기초가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그러한 견지에서 이북의 수령론을 대하면 위와 같은 오해들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은 최고지도자(수령)에 대한 문제를 <집단적 생명>에 관한 문제로 새롭게 전개하였다.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는 동시에 <개인의 생명>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이 있다고 주체사상은 보고 있다. 사회변혁투쟁을 전개하는 변혁집단은 하나의 <집단적 생명>으로 연결된 <사회정치적 생명체>이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민중이 정권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되면 계급적인 적대와 대립이 청산되기 때문에 온 사회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게 된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집단적 생명>에 의해서 연결된다. 사회주의사회 전체가 하나의 집단적 생명으로 연결된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적 생명>을 가지려면 집단의 공동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즉 사람들은 집단이 공동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와 이해관계를 담은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소유해야 한다. 그래야 이 집단이 하나의 똑같은 요구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집단적 생명을 가지고 하나의 집단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사회의 모든 성원들이 집단과 유기적으로, 조직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부터 사회적 집단의 공동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자주적인 사상의식>, 즉 <자주적인 사상>이 필요하게 되고, 또한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하나의 집단에 조직적으로 결속할 수 있는 <단결과 통일의 중심>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의 공동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자주적인 사상>을 창조하는 문제, 또한 집단을 하나의 모임, 하나의 생명체에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단결과 통일의 중심>을 가지는 문제는 하나의 생명체가 존립하고 발전하기 위한 근본조건으로 된다. 이것이 없이는 집단적 생명이 존재할 수 없고, 집단적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
이런대로 부터 집단의 공동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자주적인 사상>을 누가 창조할 수 있는가, 또한 집단의 모든 성원들을 하나의 조직적 모임에 결속시킬 수 있는 통일과 단결의 중심이 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나서게 된다. 여기로부터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분석 종합하여 그것을 집단의 공동의 요구와 생활적 이해관계로 승화시키고 집단의 모든 성원들이 집단의 이해관계로 부터 투쟁할 수 있는 지도사상을 내세울 수 있는 탁월한 인물, 또한 각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변혁집단에 결속시키고 그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탁월한 영도력을 가진 인물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탁월한 사상이론가, 탁월한 영도자, 비상한 조직적 수완을 가진 조직자가 바로 수령으로 된다.
그러니까 수령이라는 문제는 집단적 생명에 의해서 결합된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존립하고 발전하기 위한 필연적 요구로부터 제기되는 문제이다. 마치 인간의 유기체에서 뇌수가 생명의 중심이 되어 유기체의 모든 기관과 조직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관할하고 지휘하는 것처럼 사회집단에서도 역시 수령이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생명의 중심이 되어 그러한 역할을 한다.
물론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개별적 성원들도 다 개인적 생명을 갖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집단적 생명을 가진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수령은 단순히 이러한 개인적 생명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의 <집단적 생명의 중심>으로 된다. 여기로 부터 수령은 개인과 구별된다는 논리가 나온다. 물론 수령도 개성을 가진 존재, 하나의 인격이라는 의미에서 개인이다. 수령이 개인이 아니라는 것은 인간의 하나의 존재형태인 사회적 집단,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생명의 중심>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즉 수령은 단순히 집단을 이루는 개인적 생명체와는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개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령을 <신적 존재>로 신비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개인적 생명과 함께 집단적 생명을 가진다는 사실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사실상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지만 올바른 지도를 받아야만 역사의 주체로서의 응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주체로서의 역할을 창조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 사회변혁운동에서 지도문제는 수령과 당의 지도문제이다. 수령, 당, 대중은 하나의 사회변혁의 주체, 운명을 같이하는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수령, 당, 대중은 긴밀한 유기체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대중을 떠난 수령과 당이란 결코 정치적 영도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고 역할도 할 수 없다. 한편 수령과 당의 지도를 떠난 민중은 역사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령의 역할에 대한 문제는 결국 역사의 주체에 대한 내용으로 된다, 따라서 주체사상에서는 수령의 역할이 민중의 역할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며 수령의 역할은 민중이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하기 위한 근본요인으로 된다.
이처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생명의 중심인 수령과 결합되어야 자기의 생명도 유지되고 발전되어 나갈 수 있다는 실생활의 체험을 통하여 이북민중들은 자기의 생명자체의 요구로부터 수령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수령에게 자기의 운명을 의탁하고 또 자기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집대성한 수령의 교시를 집행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된다. 만약에 수령의 교시와 사상이 집단성원들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배치되는 것이라면 성원들이 그것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집행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개인들의 의사와 요구의 집대성이고 집단의 공동의 요구와 이해관계로 승화시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기에 수령의 교시를 집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령을 충성으로 높이 모시고 또 수령에게 자기운명을 의탁하며 수령의 교시를 집행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주성과 창조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수령을 높이 모시고 그의 교시를 집행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기의 영생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필연적 요구로 된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집단의 생명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개인들이 영생하려면 자기 개인의 유한한 생명을 사회정치적 집단의 무한한 생명과 결합시켜야 한다. 바로 집단의 생명의 중심인 수령을 높이 모시고 수령에게 자기의 운명을 의탁하고 사회정치적 집단과 운명을 같이 함으로써만 자기의 유한한 개인적 생명을 무한한 집단적 생명과 결합시킬 수 있다. 그래서 자기 개인의 육체적 생명은 죽더라도 사회정치적 집단은 영원하기 때문에 사회정치적 집단의 발전과 더불어 자기의 생명도 영원히 살아 있게 된다. 이것이 영생하는 참다운 길이다. 따라서 수령을 높이 모시고 수령에게 자기의 운명을 의탁하는 것은 역시 개인들이 영생하는 존재로 살며 발전하기 위한 가장 올바른 길로 된다.
[작성 :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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