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누가 백범 김구를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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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리민족끼리사 기자 작성일11-06-24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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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끼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가 자주, 민주, 통일을 주장한 사람들을 야수적으로 테로, 학살하였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김구에 대한 테로암살행위도 그 대표적실례의 하나로 된다.

1949년 6월26일 낮 12시
서대문 경교장 2층 서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 당한 직후의 백범 김구.
해방전에 독립과 《반공》을 떠들면서 《상해림시정부》에서 활약한 완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는 해방후 남조선에 돌아가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제창하면서 《반공》을 떠들었다.
그러나 1948년 4월남북련석회의를 계기로 《한국독립당》당수의 자격으로 평양에 왔던 김구는 그후 조국의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정신상태에서의 변화를 알게 되자 미제는 김구를 사살하기 위한 모략을 꾸몄다.
김구암살계획은 미중앙정보국의 비밀지령에 따라 1949년초에 세워지고 미정보계통의 조종을 받는 남조선반동단체의 하나인 《88구락부》에서 구체화되였다.
김구암살의 집행자로 안두희라는 자가 선정되였다.
안두희는 해방전 평안북도 룡천벌의 대지주의 아들로서 일제기관에 복무하였고 해방후 월남도주하여 테로단체에 들어간 자였다.
안두희는 한 고향사람인 《한국독립당》조직부장을 자주 찾아가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뢰물을 섬긴 덕에 《한국독립당》의 상층인물들과 상종할수 있었다. 이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구에게 접근하여 낯을 익히면서 그의 신임을 얻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편 미제와 그 주구들은 김구의 거처지를 습격할 구실을 만들려고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한 《사건》의 지명수배자가 김구의 경교장에 숨어있다는 허위소문을 퍼뜨렸다.
1949년 6월 23일 밤 안두희를 포함하여 8명이 김구의 거처지를 습격하였으나 곧 실패하고말았다. 이렇게 되자 미제와 그 주구들은 이틀후인 6월 25일에 김구가 공주에서 진행되는 한 모임에 참가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그를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모임이 취소되는것으로 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6월 26일이였다. 낮 12시경 남조선군 소위복장을 한 안두희는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안두희가 노리고 또 노리던 절호의 기회가 차례졌다. 다시는 마련할수 없는 가장 적중한 기회라고 생각한 안두희는 방에 들어가자 마자 권총을 꺼내였다. 돌연 4방의 총성이 울렸다. 김구는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렇게 되여 김구는 미제와 그 주구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였다.
김구살해사건은 당시 서울주재 미국대사관의 정보원이였던 고정훈의 고백으로 그 진상의 전모가 드러났다.
내외 여론과 항의에 의하여 1949년 8월 6일 안두희는 형식상 벌린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몇달후에는 15년형으로 감형되였다. 그후 1950년 6월 27일에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였다. 안두희는 미제와 남조선당국의 주선으로 후에 승급하여 호화생활을 하다가 1996년 10월 23일 어느 뻐스운전사의 몽둥이찜질에 맞아 즉사하였다.
이렇듯 미제는 테로의 방법으로 조국통일을 바라는 수많은 애국적인사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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