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상봉이야기 4] 70년만에 드디어 형님의 소식을 듣게 되다!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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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가족상봉이야기 4] 70년만에 드디어 형님의 소식을 듣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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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1-06 03:1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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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북을 방문하여 헤어진 형님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이형식 재미동포의 가족상봉이야기를 소개한다. 필자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도움으로 70년 분단 조국의 저 편에서 월북한 형님의 유족을 눈물과 회한의 상봉을 하고 왔다고 한다. 필자는 북조선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미국의 <재미동포전국연합회>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무한한 감사를 올린다고 하면서 수십만 재미동포들중 나와 같은 처지에서 흩어진 가족, 친척을 북조선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용기와 신뢰를 가지고 <재미동포전국연합회>를 찾아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의 가족상봉이야기를 연재로 소개한다.

 


 

[가족상봉이야기 4]

 

 

70년만에 드디어 형님의 소식을 듣게 되다!

 

이 형 식(재미동포)

 

 

재미동포의 한 사람인 나는 해방된 우리 조국이 둘로 갈라지던 비극의 시기에 '월북'의 추측을 낳고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근 70년간 이산가족으로 남았던 형님의 유족들을 조국의 저 편에서 기적처럼 찾았다. 우리 가족은 형님의 생사와 행방에 관해 근 70년간 암흑 속에 묻혀 있었으나 <재미동포전국연합>의 인도주의적 '이산가족찾기 및 상봉' 사업의 혜택을 받아 형님을 북조선에서 찾아보았다. 비록 찾고 있던 형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기적처럼 그의 유족들을 찾는 광명을 맛보게 되어, 나는 2015년 여름에 평양에 가서 생면부지의 그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만나본 조카들이 내게 가져다 준 형님의 ‘리력서’란 이름의 자서전을 통해 그의 월북경위를 포함한 전생애의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열흘간으로 계획된 나의 평양방문에서는 조카들과의 상봉에 이어 많은 사적지들 및 기념물들과 문화적 유산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하나가 될 통일조국을 가슴으로 느끼는 꿈같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나와 같은 ‘이산가족’의 불행을 겪고 있을 많은 재미동포들에게 나의 이 체험을 소개함으로써 혹시 북조선에 있을지 모르는 이산가족, 특히 월북가족이나 친척들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가길 바라며, 통일조국을 희망하는 모든 동포들에게 하나 된 조국의 꿈을 더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쓴다.

 

 

4. 북조선에서 온 놀라운 소식 형님의 생존하는 유족들을 찾다

 

신청서를 제출하고 무려 10개월이 지난 어느 겨울날에 나는 <재미동포연합>의 한 인사로 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찾고 있던 나의 형님 “리규식은 2001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리민성과 그 외 2사람이 현재 청진시 O구 O리에 살고 있다”는 짤막한 통고였다. 물론 그것은 북조선의 <해동>으로 받은 결과보고인 것이다.

 

노심초사하며 10개월이나 간절히 기다렸던 이 소식을 전화로 처음 듣던 그 순간에 난 마치 시계바늘이 멈추고 심장도 멈춘 듯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보고자의 말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저 힘없이 놀라움과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어리벙벙하다는 표현이 이럴 때의 나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기쁨, 서글픔, 안타까움, 그리고 놀라움으로 뒤범벅이 된 나의 감정을 추스르는 데는 여러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나는 이 소식을 집사람과 멀리 있는 남매들에게 하나하나 전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상의하였다. 모두가 처음엔 그저 나와 같은 감정으로 충격에 휩싸였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평상심을 되찾고 새로이 전개될 가족사의 새 장을 차분히 맞이하게 되었다.

 

북조선으로부터의 이 소식은 나에게 어쩔 수 없는 슬픔과 기쁨을 함께 가져다주었다. 그토록 간절히 찾았던 나의 형님이 이젠 이 지상에서 더는 찾아 볼 수도 없이 고인이 됐음에 슬펐다. 그러나 한 편, 그가 그 동안 우리의 북부조국에서 76세까지 생존했었다는 사실과 그가 남기고 간 자손들이 그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실만으로도 나의 가족찾기는 성공이었고 기쁨이었다. – 물론 반쪽의 기쁨이었지만. 비록 형님은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겨 두고 간 북조선의 자손들이라도 찾아가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스러운 일인가? 그렇다, 이젠 미룰 것 없이 북조선으로 내 조카 민성과 그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자. 나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한 순간부터 이산가족 상봉의 벅찬 희망으로 오로지 행복한 기대의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재미동포연합>을 통하여 나의 조카 민성과 기타 미상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내가 북조선을 방문하기 위한 절차를 알아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북조선방문 수속을 서두르고 있을 때 나는 참으로 복잡하고도 그럴듯한 여러가지 의문과 우려의 사연들을 나의 남매들로 부터 들어야 했다.

 

내가 남매들로 부터 들은 걱정의 말들은 비록 북조선행 여행에 대한 결심이 확고한 나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긴 했지만, 아마도 나와 같은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부딪히게 될 질문들이라 믿기에 여기 옮겨본다.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두 개의 질문들은 이러했다. 첫째는 “북조선에서 알려온 ‘민성과 그 외 두 사람’이란 인물들이 어떻게 진짜 내 형님의 자손들인 줄 확신하는가?” 둘째는 “만약에 그들이 진짜 내 형님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혹시나 그들을 미국 (북조선에겐 ‘철천지 원수, 미제국’) 에 있는 내가 가서 만나 보는 경우, 그것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북조선 당국으로 부터 감시와 박해를 받게 할 위험을 야기하지 않겠는가?” 우선 첫째 질문에 대해서 나는 그리 괘념치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북에서 알려온 ‘문성’이란 내 조카의 이름이 우리 가문의 이름 항렬자 공식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들들 모두도 ‘성’자를 이름 끝의 돌림 글자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가문의 철저한 항렬규칙을 나의 형님도 분명히 고수하였으리라는 믿음에서 나는 ‘문성’이라는 이름 하나로 벌써 그가 틀림없는 나의 조카일 것으로 낙관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해동>으로 부터의 공식 통보에 신뢰를 가진 것 때문이다. 북조선의 <해동>이 내가 제공한 인적사항을 기초로 하여 면밀히 조사하여 아무 조건이나 단서를 붙이지 않고 확실히 통고해 준 결과에 대해 이를 의심해야 할 이유가 없는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알고 있다. 우리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조선에서의 이산가족찾기와 상봉에 대해서라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황당스러운 억측과 좋지 않은 말들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남달리 북조선의 통고를 의심없이 받아들인 데에는 아마도 내가 지나간 나의 인생을 통해 남달리 세계정세와 북조선의 실체에 대해 많은 정보에 눈떠왔고 진정한 이해를 넓혀 온 것이 제일 큰 이유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둘째 질문에 대한 나의 입장 또한 분명히 “아니오”였다. 왜냐하면 나는 과거에 많은 재미동포들의 북조선 방문기사들을 읽었고, 북조선 정부가 미국에 가족, 친척이 있다는 단순한 이유 또는 남한으로 월남한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주민을 박해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보다도 개연성이 더 큰 또 하나의 이유는, 지난 수십 년간 조국내에서 있어 온 ‘남북이산가족상봉’ 행사들을 통해서 확인한 바와 같이, 해방후 또는 6.25동란시에 북에다 가족을 두고 월남한 남한의 월남자들이 아직도 무사히 살고 있는 북조선의 가족, 친척들을 만나고 있다는 극히 평범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나의 예비지식과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재미동포연합>의 <재미동포 이산가족 찾기>사업을 의심에 찬 시각으로 보았을 것이고 나의 형님을 북조선에서 찾으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란봉면화자숙소 입구모습

 

 

이런 가운데 나는 최대의 믿음과 낙관을 가지고 <재미동포연합>을 통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신청서>를 북측의 <해동>에 제출하였다. 한 달쯤 지나서 나에게 북조선 입국허가가 통고되었고, 나는 마치 미국에서 다른 어떤 외국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행준비에 나섰다. 나의 방문지는 평양으로 정해졌는데 이는 모든 해외동포들의 이산가족방문이 <해동>의 방침에 따라 평양의 <모란봉면회자숙소> 에서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국시민으로서 미국여권을 가지고 중국의 북경에 가서, 북조선 영사관에서 발급한 입국사증을 받아 평양으로 들어가는 여행준비를 비행기표 예약과 함께 마무리 하였다. 물론 모든 여행절차는 <재미동포연합>의 안내에 따라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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