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65] 정수장학회 등 5개 재단이 말해주는 박근혜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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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태영 작성일15-04-11 17:3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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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65] 제3세계의 눈으로 식민지 한국을 파헤친다.
박근혜 누구를 위한 대통령인가
정수장학회 등 5개 재단이 말해주는 박근혜의 정체
세월호 인양도 5개 재단 출신들이 가로막는다
유태영(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정수장학회의 근원은 박정희 5.16 군사쿠테타 정권 하의 중앙정보부가 1962년에 김지태의 막대한 제산을 강제로 몰수하여 명색이 국가에 헌납이지 사실은 박정희 일가의 사유재산으로 만든 것이 바로 정수장학회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정수장학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박정희는 김지태의 재산을 부정축재 척결의 수단으로 탈취하였으며 겉으로는 공익으로 포장하였지만 내막으로는 은닉하고 사유화 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이용하여 강압적 수단으로 재산을 착복하고 그 재산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박정희의 자녀들은 마치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처럼 소유하고 있다”라고 전 김영삼 대통령은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 박정희에게 전 재산을 탈취당한 김지태는 누구인가? 김지태는 일제 하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또 그는 퇴직금과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울산에 토지2만 평을 사들인 것이 훗날 큰 기업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김지태는 절대로 친일파가 아니며 부정축재자도 아닌 자수성가한 실업인이었다.
김지태는 성공한 사업가로서 한때 이승만 정권 하에서 정치활동을 했으며 국회의원까지 했다. 하지만 김지태는 이승만 정권 때 정치에서 손을 떼고 대기업가로 성 공하였는데 그때 당시 경남 부산에서 최대 최고의 사업가로 명성을 높이 날렸다.
김지태는 부산일보 사장 시절에 이승만 정권의3.15 부정선거와 총격사건 등을 사실대로 보도하여 4.19혁명으로까지 연결되게 하는 정의로운 언론인이었다. 또 김지태는 이승만 정권이 강요하는 정치자금 3억 원을 완강히 거절한 청백한 사업가이었다.
진실조사위원회가 밝힌 자료에 의하면 박정희는 ‘5.16쿠테타 직전 거사자금준비’를 위하여 김지태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지태는 박정희의 요청을 모른 척하고 거절했다. 김지태는 박정희 정권에 비협조한 ‘반역죄’를 범한 죄인이 됐다.
1961년에 박정희는5.16 쿠테타에 성공한 군부의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면서 이병철과 김지태를 비롯하여 대기업가15명을 부정축재척결이라는 혐의로 구속했다. 박정희 쿠테타 군인들은 한국의 대기업가들을 체포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군인은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는데 대한민국 모든 국민 재산은 우리 것이다.”
1962년3월27일에 박정희 정권은 김지태에게 ‘부정축재처리법, 외환관리법, 재산도피법’ 등의 9개의 혐의를 뒤집어 씌우면서 강압적으로 체포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박정희 군부는 5월 24일에 김지태에게 7년 형을 선고 했다.
그런데 김지태는 한달 후 6월 20일에 계엄사령부 법무관 실에서 쇠고랑을 찬 손으로 법무부가 강요하는 서류에 본의 아니게 날인을 했다. 김지태가 도장을 찍은 서류는 김지태 소유의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기부승낙서였다.
김지태는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 하에서 전재산을 빼앗기고 마는 약자일 뿐이었다. 김지태는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은 덕택으로 6월 22일에 석방되었다.
박정희가 김지태의 사유재산을 강탈한 장물 재산은 어떤 것들인가? 부산일보, 한국 문화방송, 부산 문화방송, 부산시내 토지10만147평 등을 박정희에게 강제로 빼았겼다. 이 재산은 당시 시가로 5억4,570만 환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그 외에도 김지태의 소유인 거대한 부일장학재단을 빼았겼다. 부일장학회를 박정희가 탈취한 후에 5.16장학회라고 개칭했으며 또 그 후에 정수장학회가 되어 박근혜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박근혜 남매 형제들 간에 정수장학회의 소유권 때문에 발생한 집안싸움이 수십 년 간 계속돼 유명한 실화로 전해지고 있다.
박정희가 탈취한 것은 김지태의 재산 외에 또 있다. 그것은 영남대학이다. 영남대학의 전신은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으로 사립대학이었다. 그런데 삼성의 이병철은 1966넌에 이른바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크게 걸려들어 회사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병철은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밀수사건 무마용으로 청구대학을 국가에 헌납했다. 박정희는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탈취하고 통합하여 영남대학으로 개명하였다.
박졍희는 탈취한 영남대학의 운영권을 임시로 사학재단 운영 규칙을 적용하여 영남대학의 운영권을 중앙정보부 부장인 이후락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여 영남대학을 운영하도록 했다. 그러는 동안에 박정희는 영남대학의 교주로 등록이 됐다.
하지만 1980년 이후부터 박정희는 자기 딸인 박근혜를 영남대학 재단 이시장으로 임명했다. 이때에 박근혜-최태민의 비밀관계로 인하여 문제가 복잡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보고하여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끊도록 건의를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의 말보다 박근헤-최태민의 주장을 더 신임하였으며 결국 박근혜를 영남대학 이시장으로 임명하여 1989년 까지 9년 동안 계속했다. 박근혜-최태민의 관게는 더욱 친밀해졌으며 최태민은 박근혜의 멘토 역할을 했다.
그 후에 영남대학의 이권문제로 인하여 박근혜-박재만-박근령 3인의 재산 싸움이 계속됐는데 집안 싸음이 한때 법정문제로 까지 비약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박근혜는 집안 싸움 무마용으로 1983년에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을 이사 자리에 앉게 함으로써 집안 싸움은 임시로 무마됐다.
영남대학 교주 박정희로 확인된 사립대학은 그동안 운영 비리가 여러번 폭로되어 국정감사를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등 사회적 물의를 계속하여 일으키고 있었다.
민족분단 70년이라고 말들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민족분단 70년 역사는 오직 미국이 무조건적으로 지원해주는 배경 하에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근혜로 연결되는 불법적인 탈취 행태의 정치가 연결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70년 역사는 반민중적 정치와 반민족적 정치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1.누구를 위한 대통령인가? 국민인가, 박근혜 5개 재단인가
민족분단 70년 동안에 주요한 역사적 맥락으로 등장한 박근혜 일가의 불법적인 탈취의 배경에는 박근혜의 생명줄인 5개의 재단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박근혜 일가의 도둑질 정치를 70년 동안이나 계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일가의 도둑질 정치를 살펴보면 분단 70년 역사에 있서서 5개의 불법적 재단들의 인맥들로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부정부패의 진상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ㄱ) 육영재단.
육영재단은 1969년에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어린이 복지 사업으로 설립한 재단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투철한 애국심과 문화 예술 그리고 과학지식을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설된 어린이 복지 재단이다.
하지만 1974년에 육영수가 사망한 뒤에 박근혜가 대표 이사장을 맡으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박근혜 이사장과 최태민 고문의 밀착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치 문제와 사회적 기강 문제가 확대되고 노출된 것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근혜-최태민의 관계로 인하여 육영재단의 비리가 국가적 문제와 사회적 여론의 위기에 이르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보고를 묵살하고 무조건 박근혜-최태민을 면접하고 그들의 변명의 말만 신임하고 둘의 관계를 문제삼지 않았으며 김재규의 비리에 대한 보고를 모르는 척 했다.
박정희 사망 후 육영재단은 박근혜-박근영-박지만 3남매의 재산 싸움이 시작됐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박근혜를 전적으로 도와줌으로써 박근혜는 이시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박근혜는 16년 동안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고수해 오다가 1990년에 동생 박근령에게 육영재단의 이사장 자리를 이양해 주었다.
박근령이 육영재단의 이사장에 취임한 후에 박지만이 등장하여 박근령-박지만 싸움이 시작되어 경찰이 동원하는 법정싸움으로 확대되어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집안 싸움의 원인은 육영재단의 막강한 기금 때문에 3남매의 3각 관계가 서로 물고 물리는 집안 싸움으로 끝을 모르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10월에 박근령과 신동욱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박근혜와 박지만은 동생과 누나의 결혼식에 모두 첨석하지 않을 정도로 박정희-육영수가 없는 자녀들 3남매의 관계는 최고로 험악한 지경이 계속되고 있었다.
박근혜 3남매가 물고 물리는 재산 싸움의 핵심은 어린이 회관이었다. 이 회관의 토지 4만 평의 시가는 부동산 업자의 판단으로(2008년 현재) 3조 원이 넘는 다고 했다.
1980년대 부터 지속된 박씨 3남매의 끝을 모르는 법정 집안 싸음은 청부살인의 진위공방설까지 등장했다. 박지만과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 사이의 치열한 분쟁이 청부살인 진위공방 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육영재단의 내막 비밀을 제일 많이 알고 있으며 특히 박근혜- 최태민의 비밀 관계를 폭로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박근혜의5촌 조카인 박용철은 갑자기 의문사로 피살됐다.
하지만 역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여당의 집권 하에서 육영재단은 정권 감싸기 속에서 무사안일하게 존속 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박씨 가문 3남매의 재산 싸움이 자체 내분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 뿐이었다.
ㄴ) 정수장학회
정수장학회의 핵심적 문제는 정수장학회 출신들이 막강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장학회 출신은 38,000-40,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오늘 박근혜 정권의 각계 각층에서 그물망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박근혜는 정수장학회 이야기만 나오면 도둑놈이 제발 저리다는 격언처럼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철면피적으로 선을 긋는다. 하지만 박근혜는 10년 넘게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연봉으로 해마다 1억 원-2억 원을 지급 받은 것이 기록 보존되어 있다.
정수장학회 출신이 청와대, 행정부, 법조계와 학계, 언론계와 문예계에 가득 차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장 1대 허태열, 2대 김기춘, 3대 이병기 등 3인이 모두 정수장학회 출신이며, 서울시 교육감 조희연도 정수장학회 출신이다.
심지어 개독교 목사라고 욕을 먹고 있는 뉴라이트 장로교 두례교회 김ㅇ홍 목사는 정수장학회 출신이며 감리교 목원대학 김ㅇ배 총장은 바른말하는 교수들과 직원 그리고 이사들까지도 목을 자르기로 유명한데 그도 역시 정수장학회 출신이다.
정수장학회 출신들의 모임인 상청회가 있다. 이 상청회의 회원 중 400명이 현직 대학 교수들이다. 정수장학회 출신400명 교수들이 한국의 명문 대학에서 조직적으로 박근혜 정권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현재 받고 있는 재학생들의 모임을 청오회라고 한다. 그런데 이 청오회의 회원들은 박정희에게 죽도록 충성을 맹세해야만 정수장학회의 돈을 받을 수 있다. 정수장학회 장학금을 받은 38,000-40,000명들은 매년 박정희와 육영수의 추도식에 참가한다.
2004년에 정수장학회의 장학금 수혜자 수는 3만1천 명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그후 10년이 지난 2015년에는 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 수를 38,000-40,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박근혜를 절대로 지지하는 정치적 기반이며 ‘코드인사’들이라고 한다. 지면상 제한으로 코드인사들을 일일히 기록할 수 없으므로 오직 대표적 인사 몇 사람을 살펴본다.
법조계 신승남 전 경찰총장, 주선희 전 헌법 재판관, 허만 전 서울고등법원 판사, 성영훈 전 대검찰청 판사, 행정 관료계 대표로 서준석 전 경제부 총리, 안병영 전 교육부 총리, 임상규 전 농림부 장관, 송광용 전 서울대 총장 그리고 문화 방송국과 체육회, 신문사, 건설회사, 병원 원장, 대학 총장, 주식회사와 무역계 사장들, 회계사 등 코드인사들이 정부와 사회의 구조 속에 골고루 깊숙히 그물망 인맥으로 침투되어 있는 것이다.
박근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수장학회와 아무 관계 없다.”라는 황당한 거짓말을 하면서 민족에 반역하고 미국에 충성하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4-11 17:39:41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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