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문 가는길, 김성주의 웅심 깊은 마음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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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상일 작성일15-02-25 1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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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문 가는길, 김성주의 웅심 깊은 마음을 읽는다!
김상일(전 한신대학교 교수)
왕청문에서 허탈한 발걸음을 돌려 고유수로 돌아 온 김성주와 차광수 일행은 국민부 현묵관과 고인호에 대한 김혁의 무장 복수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만약에 그 때에 김성주가 김혁에 동조하여 국민부 일당들에게 일격을 가했더라면 현대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숙청’이란 말이 북조선의 전유물인 것처럼 반공 교육을 시켜 놓고 있지만,
김구 일행이 남북 연석 회담차 평양에 갔을 때에 당시 김일성 주석이 현묵관의 안해와 가족들,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들 심지어는 우익 독립운동의 선봉장으로 공산당 청년들의 씨를 말리려 했던 양세봉의 가족들마저 우대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서울로 돌아 올 때에는 생각이 많이 변했었다. 바로 왕청문 사건에서 김성주가 보인 태도에서 보면 내다 볼 수 있는 일이다.
김성주가 현묵관등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에 일제가 나라를 강탈하고 있는 코앞에서 같은 민족 끼리 총을 겨눈다는 것은 결국 일제를 이롭게 하는 것이고 이는 일제로부터 해방을 영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1993년 3대 헌장탑을 세울 때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즉,전민족 대단결, 평화 통일, 자주통일이 그것이다. 이것은80 여 년이 지난 지금 왕청문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그러나 우익 국민부의 테러와 민족 대분열 그리고 외세 의존적 사대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신은미 황선 익산 황산 테러에 이르기 까지 서북청년단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이미 1930년 대 왕청문 사건에서 예견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보수란 자들은 보편 개념이 없다. 보편 개념이란 그 당시에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일 것이다, 그들에겐 이런 보편적 가치관이 없고 자기 당파적 이익뿐이었기 때문에 일제가 설치는 만주벌에서 피끓는 최봉등 겨레 장병들 6명이나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들 보수우익들의 사전 속에는 지금도 민족, 자주, 통일,평등 같은 보편 개념은 아예 없고 자기들 배때기나 부르게 하는 눈앞에 이익 챙기는 것이 전부이다. ‘일거양득 一擧兩得’이란 말이 있다. 명조 때 최막쇠라는 청년이 두 호랑이를 한꺼번에 잡는데서 유래 한다. 두 놈이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한 놈이 다른 놈을 죽이면, 죽인 놈도 지쳐 빠지게 되고 그 때에 공격을 하면 두 놈 다 잡는 데서 유래 한다. 지금 일본은 남북이 서로 싸우게 부추기고 있다가 어느 하나가 먼저 죽으면 나머지 한 하나도 결국 제 힘에 겨워 죽게 되고 그 때 덮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남한 정부는 한일 군사 동맹 운운하고 있다. 결국 일거양득을 노리는 일본의 수작에 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인간 족속들에게 우리가 대처해 나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갊지말라’ 이다. 이것이 김성주가 가진 국민부에 대한 태도였다. 그들은 이미 여론의 심판을 받았다. 이들은 저절로 꺼져야 하지 인위적으로 청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성주의 예측대로 왕청문 사건이후 국민부 안에서 대분열이 생겨 생각 있는 청년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국민부의 핵심층에 있으면서 현묵관을 옹위하던 두 청년 가운데 한윤이와 장성만이 국민부에 탈출하여 고유수로 김성주와 차광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이에 대하여 차광수는 이들의 저의가 의심스러우니 경계하고 만나지 말아야 한다고 김성주에 권고한다. 그러나 김성주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한윤이 일행이 그렇게 먼 길을 걸어서 찾아 온 것에는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김성주는 한윤이가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 간다.여관엘 가니 한윤이는 없고 한윤이의 가방 만 여관방에 놓여있지 않는가? 그러나 김성주는 자기를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한윤이가 미행한 것이 아니고 국민당 반동군벌에게 체포당한다. 1920년 대 중엽부터 고유수에는 정의부 계통의 세력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던 곳이다. 이들은 김성주를 체포하기 전에 한윤이도 체포해 간 것이다.
한윤이을 만나러 김성주가 올 것을 알고는 덫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윤이가 국민부를 이탈 한 것은 사실이고 그가 김성주를 유도한 것은 아니다. 김성주가 길림 감옥에 이송 되었을 때에 아이러니 하게도 한윤이를 거기서 만난 것이다.
당시 한윤이의 마음이 어떠했을 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감방 안에 있는 동지들도 한윤이의 진심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김성주의 생각은 달랐다. 결코 한윤이가 이중적이지 않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김성주의 체포와 함께 청년 혁명 동지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차광수는 김성주의 체포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한없는 자책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체포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상윤에게 있었다고 그를 질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차광수는 이 차제에 누구의 탓을 찾는 것은 현명치 못한 태도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부터 반성을 하고 자세를 가다듬고 나아가 성주의 출옥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결의한다.
다른 한 편 감옥에 있는 김성주로서부터 연락이 왔다. 박옥희가 넣은 바구니에 쪽지 편지가 전달 된 것이다. 감옥 안이나 밖이나 모두 우리에게는 투쟁의 장이다. 여기서도 잘 싸우고 있다. 밖에서도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싸우자는 소식이었다.
감옥안에서도 김성주는 특유의 사람 설득의 실력으로 이씨 간수를 자기 편으로 회유하는 데 성공한다. 이 간수는 평양 공설 운동장에서 김성주가 연설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자기도 마지못해 이 짓을 하고 있다고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왕청문 가는 길에서 만난 ‘한윤이’ 그의 본심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김성주는 그를 믿어 주었다.그와 김성주는 길림 감옥에서 만나게 되었다. 김성주의 생각이 옳았다. 이렇게 투쟁의 과정에서 진정한 친구를 잃지 않기란 쉽지 않다.
북에서는 자주 ‘웅심깊은 마음’이란 표현을 쓴다. 주로 김일성 주석을 두고 말 할 때이다. 좌우를 함께 아우를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진정한 동지를 발견하는 마음을 두고 하는 마음이다.
혁명과 항일 투쟁 과정에서 이념과 사상이 달라도 애국애족 한 기치 아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싸고 함께 나가자는 것이 김일성 주석의 웅심깊은 마음이라 본다. 그러나 남은 사사건건 진의가 의심스럽다 ‘신뢰프로세스’ 운운 하면서 북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거양득을 노리는 것은 미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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