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북을 방문했을 때에 주민들이 그를 맞이하는 장면이 매우 궁금하다. 필자가 1999년 첫 금강산 관광을 했을 때에 장전항에 걸린 환영 현수막에 “남조선 관광객들의 금강산 방문을 열열이 환영한다” 였다. 남에서는 아마도 “환영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방문객들 입장에서 보다는 초청하는 측에서 본 표현이라고 이해가 된다. 이런 사소한 표현에서부터 여기가 자주성이 있는 나라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번 교황 방문 때에도 남측 사람들이 좀 이런 태도로 교황을 맞이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세월호 가족들이 단식 중인 광화문에서 열린 주요 행사에서 교황은 유가족 특히 김영오 유민이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 나라의 국민들은 자기 나라 국가 지도자로부터 받지 못한 위로를 받고 또 해 주는 교황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나 길게 앞을 내다보았을 때에 교황의 위로는 약인 동시에 독일 수도 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약을 의미하는 ‘파르마티콘’ 이란 말이 역설적이게도 ‘독’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말을 받아 현대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자기 철학을 전개하는 데 핵심적인 주제어로 삼고 있다.
우리 속담에 “약주고 병주고”라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세월호 가족들이 마음속에 입은 상처는 겹겹에 쌓여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마음을 위로하기는커녕 종교인,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경쟁이나 하듯이 막말 씨리즈를 이어 가고 있다. 막말을 한 마디 하는 것은 청와대에 눈도장 찍는 이상의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이들이야 말로 시체 장사꾼들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교황이 유족들을 위로한 것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은 ‘감사하다’고 했다. 진정으로 감사하다면 이런 막말꾼들부터 징계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진실만은 밝히도록 했어야 할 것이다. 실로 박근혜의 말은 희대의 위선자의 언어 포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세월호 유족들과 국민들의 아픔을 정치권, 특히 야당은 받아 내지 못하고 7.30 선거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선거 이후 이제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선 심경으로 지금 유족들과 국민들은 교황을 맞이하고 있다.
교황은 자기의 행동과 말에 반대할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의식도 하지 않고 무조건 소수의 약자 편에 서는 듯하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말이다.
교황은 유족들의 아픔을 성모 마리아에게 위탁한다고 했다. 만약에 세월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초대 가톨릭교회에 한국 역사에 범한 과오를 사과하라는 글을 썼을 것이다. 한국 전통의 아름다운 관습인 제사를 부정하고 나라의 비밀을 외방 선교국에 밀고를 한 황사영 백서 같은 것은 이미 역사의 심판을 받았고,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에 대하여 고해성사를 한 터이다.
과연 윤지충이 누구인가? 1839년 윤지충은 당시 유교식 모친상을 치르지 않고 위폐를 태우고 가톨릭식 장례를 치뤄 불효, 불충, 악덕 죄로 고종사촌인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전주 풍남문 밖에서 순교한 인물이다. 주체적인 사관으로 볼 때에 윤지충의 행동이 그렇게 숭앙받을 만 하지는 의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갈릴레오와 브루노를 종교 재판에 회부한 것을 사과했듯이 교황은 윤지충의 과오를 시인하고 갔어야 하지나 않을까 한다. 그런데 윤지충을 성자의 반열에 올려 시복식을 했다. 세월호의 아픔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아니 느낄 수 없다.
이번 교황 방문에서 이런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는 거의 거론되지 조차 안 하고 넘어 가는 듯하다. 세월호의 아픔과 슬픔이 너무 크고 이를 덮으려고 하는 한국 정부의 악랄함이 천정부지로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세월호의 아픔은 어디까지나 세월호 가족들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안고 해결해 나갈 문제이란 점이다. 약은 항상 독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을 때에 그 부작용과 거기에 따르는 폐단이 너무나도 크고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그 치러야 할 값이 얼마일지는 막상 교황이 지나 간 다음에야 계산대 위에 나타날 것이다. 기독교가 처음 조선 땅에 들어 왔을 때에 민초들과 민중들은 정부와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외래 종교인 기독교에로의 쏠림 현상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 온지 20 여년도 안 되어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이 타고 온 배 속에는 장사꾼 merchant, 군사무기military, 선교mission 란 소위 3M이 함께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의 얼굴에서 이 땅의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읽는다. 교황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교황은 치료자, 그리고 유민 아버지는 치료 받는 관계인 듯 한 관계가 과연 바람직한가? 아니라고 본다.
앞으로 이 땅의 그리스도의 상을 그리는 미술 작가들이 있다면 유민이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기독교의 신은 세월호 가족들 같이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자식을 잃고 35이나 단식을 한 유민이 아버지의 얼굴 이상으로 신의 모습을 그려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국민들의 가슴은 피눈물로 멍들어 가고 있다. 희멀건 기름진 여야 정치인들의 영혼 없는 얼굴이 유민이 아버지와 대조가 되면서 절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유민이 아버지의 35일 간의 단식은 오늘날 이 땅에 살아가는 신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 내고 있다. 그래서 교황이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면 유민이 아버지 앞에 두 손 모아 절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 무슨 불경스런 소리이겠느냐고 하겠지만 만약에 갈릴리 예수가 서울을 방문을 했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교황의 모처럼의 방문이 잠재 돼 있던 한국인들의 사대주의의 불씨가 지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외세에로의 쏠림이 망국으로 가는 첩경이나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율곡이 이미 “이것은 나라가아니다其國非其國”이란 말이 고등학교 학생들 입에서 나올 정도이다. 지금이 구한말 나라꼴하고 같아도 너무도 같고 교황에로의 쏠림이 예나 너무나 같기 때문이다.
고려 지눌 스님은 “땅으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고 했다. 구원자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민이 아빠 김종오씨 등 세월호 가족들 그리고 온 국민들이 주체적으로 교황을 맞이하는 방법은 ‘열열이 환영한다’이어야 한다.
교황의 위로가 ‘위로주의pacification’로 이어저서는 안 된다. 약은 동시에 독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로주의를 두고 대중의 아편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주인공은 인간 스스로 주체일 뿐이다. 지금 나라가 교황의 위로주의에 현혹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라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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