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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운동가에게 있어서 학습은 첫째가는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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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11-16 11:3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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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운동가에게 있어서 학습은 첫째가는 임무




김일성주석은 양세봉 독립군사령이 <반공>으로부터 <연공>에로 사상전환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을 직접 관찰한 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인간의 사상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며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시간과 체험이 소모되는 법이다.”

조선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높은 간부들을 포함하여 전 인민이 학습을 한다. 자본을 위주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낭비로 여기겠지만 인간중심의 사회인 조선은 학습을낭비가 아니라 큰 투자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조선을 방문할 때마다 내 요청으로 꼭 주체사상을 전공하는 학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학습을 통하여 계속 자신의 사상을 혁신하지 않으면 인간의 두뇌는 녹쓸게 마련이다. 그러면 시대에 뒤지게 된다. 학습은 사회변혁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김주석은 10대의 나이에 화전에 있던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있는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여 길림에서 1927년 1월부터 1930년 5월까지 3년간 지내면서 지속적인 진보사상에 대한 학습을 진행하였다. 그 과정을 통하여 그의 진보적인 <세계관>이 확립되었고 그것이 확고한 것으로 굳어졌으며 그것이 그의 한생의 사상정신적 양식으로 되었다. 길림에서의 사상의 축적과 체험은 그후 김주석으로 하여금 <자주적인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의 골격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학습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학습은 혁명가가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기초적 공정이며 사회의 진보와 변혁에 이바지할 밑천을 마련하는 데서 단 하루도 중단해서는 안되는 기초적 공정이며 사회의 진보와 변혁에 이바지할 밑천을 마련하는 데서 단 하루도 중단해서는 안되는 필수적 정신노동이다.”

선진사상의 탐구과정을 통하여 길림시절에 터득한 교훈으로부터 김주석은 생존시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학습은 첫째가는 임무”라고 자주 강조하였다.

길림은 1920년대 후반기 만주에서 조선민족주의운동의 기본세력이었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수뇌들의 집결지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신문을 발간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은 화전, 흥경, 룡정 같은데서 많이 하였지만 실지 그 수뇌들이 모여 활동한 곳은 길림이었다.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와 같은 종파분자들이 제각기 자기 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곳도 바로 길림이었다. 공산주의운동자들 가운데서도 유명한 인물들은 거의다 이 길림을 드나들었다.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종파분자, 망명자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여기로 모여들었다.

새것을 지향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청년학생들도 이 길림으로 찾아왔다. 한마디로 말하여 길림은 형형색색의 사상조류가 집결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 길림에서 10대의 김일성주석은 <공산주의>기치를 들고 혁명활동을 벌렸다. 김주석이 길림에 왔을 때 타도제국주의 동맹<ㅌ.ㄷ>(1926년10월17일 결성)의 몇몇 성원들이 화전에서 약속한대로 길림에 와서 문광중학교를 비롯한 시내 학교들과 기관구, 선창 등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김주석이 길림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김주석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뛰어왔다. “돈이 귀하고 마실 물이 귀하고 땔 것이 귀하지만 책이 많아서 좋다.”는 것이 그들의 길림인상이었다.


김주석은 책이 많으면 배고픈 고생과도 타협할 수 있다고 농담을 하였다. 그것은 그의 진정이기도 하였다. 김주석이 입학한 육문중학교의 교직원들 중에 국민당우파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교원들은 공산당계열이 아니면 삼민주의의 숭배자들이었다. 김주석이 존경했던 상월선생도 공산당원이었고 마준선생도 공산당원이었다.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새로운 고장에서 혁명의 진리를 마음껏 배우며 <ㅌ.ㄷ>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쳐 싸워나가자고 결의하였다. 길림에서의 김주석의 활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더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김주석은 회고했다. 김주석은 길림으로 올 때 화전에서 시작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더 깊이 해보자고 결심하였다. 길림의 사회정치적 분위기는 새 사조를 깊이 연구하려는 그의 결심을 북돋아 주었다. 김주석은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보다도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들을 탐독하는데 더 열중하였다고 추억하였다.

당시의 중국은 대혁명시기여서 소련이나 일본에서 발간되는 좋은 책들을 많이 번역출판하였다. 베이징에서는 [번역월간]이라는 잡지도 출판했는데 거기에 청년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진보적인 문학작품들이 자주 실리었다. 무송이나 화전에서 볼 수 없었던 책도 길림에서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육문중학교 도서관에도 좋은 책들이 많았다. 책이 많고보니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김주석은 독서시간을 1분1초라도 더 얻어내기 위하여 애를 쓰면서 차례진 시간 안에 하나라도 더 많은 책을 읽고 그 본질을 깊이 알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김주석이 중학시절에 밤을 새우며 책을 본 것은 단순한 학구적 취미나 탐구심 때문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자가 되고 그 무슨 출세의 길을 찾으려고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일제를 물리치고 나라를 찾겠는가, 어떻게 하면 사회의 불평등을 없애고 근로하는 인민들을 잘살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위해서 였다고 진술하였다.

<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조로가 아니라 <실천의 무기>로 대하게 되고 진리의 기준을 추상적인 이론에서가 아니라 항상 <조선혁명>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에서 찾으려는 김주석의 입장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싹텄다고 김주석은 말했다. 그는 이 시기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임금노동과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들과 그것을 해설한 도서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고 했다.

김주석은 정치서적들과 함께 혁명적인 문학작품들도 많이 읽었다. 그가 그때 제일 흥미를 가지고 읽은 것은 고리끼와 로신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어머니], [철의 흐름], [축복], [아큐정전], [압록강가에서], [소년방랑자]와 같은 혁명적인 소설들과 당시의 현실생활을 담은 진보적인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후날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고난의 행군>과 같은 어려운 시련에 부닥쳤을 때에도 김주석은 길림시절에 본 [철의 흐름]과 같은 혁명적인 소설들의 내용을 회상하면서 힘과 용기를 얻군 하였다고 했다. 문학작품은 사람들의 <세계관 형성>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당시의 불합리한 사회현상과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직접 목격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었다고 했다.

< 혁명적 세계관>은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적 처지>와 <이해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될 때 형성된다고 김주석은 역설했다. 김주석도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을 비롯한 혁명적인 책들을 보고 <계급적 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사회현상을 보고 <불평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착취계급과 착취사회를 증오하는 사상이 자라서 결국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서들을 널리 탐독하고 거기에 깊이 심취될수록 김주석은 그 혁명학설을 청년학생들 속에 한시바삐 보급해야 겠다는 충동을 가지게 되었다. 김주석은 뜻이 통하는 몇몇 동무들로 육문중학교 안에 <비밀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진보적인 청년학생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과 이론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 것을 사명과 목적으로 하였다. 이 조직은 매우 빠르게 자라서 얼마 후에는 문광중학교와 제1중학교, 제5중학교, 여자중학교, 사범학교를 비롯한 길림시내의 여러 학교들에 확대되었다.

길림의 중심거리에는 <신문서사>라는 큰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책방에서 박소심선생을 만났다. 박소심선생은 서울에서 결혼생활을 하며 살다가 길림으로 온 지식인이었다. 박소심선생은 일본어로 번역된 [자본론]을 밤을 새워가며 읽군했다. 돈이 떨어지면 입을 옷을 저당잡히면서라도 책을 사다보는 지독한 독서가였다. 그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주요 저작들을 거의 통달한 사람이었다고 김주석은 기억했다.

박소심선생은 김주석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주고 그것을 해설해준 잊지 못할 선생이었다고 김주석은 추억했다. 맑스의 저작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자본론>에도 난해한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박소심선생이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에게 [자본론]에 대한 해설강의를 해주었다. 고전을 파악하는 데서는 역시 입문서나 안내자가 필요하였다. 박소심선생은 그 안내자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그는 참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의 문제점은 그가 맑스-레닌주의를 학술상으로만 연구해왔을 뿐이지 조선의 독립과 조선에서의 공산주의건설이라는 구체적인 <혁명실천>과 결부시켜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고 김주석은 지적했다. 박소심선생처럼 실천과 유리되어 학문상으로만 공산주의학설을 연구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것이 김주석의 견해였다.

박소심선생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탐구의 나날에 김주석과 인간적으로 친해졌고 김주석의 혁명적 지향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는 <반제청년동맹>과 <공청>에도 가입하였으며 김주석과 함께 청소년들을 교양하고 계몽하는 사업에도 헌신적으로 참가하였다. 책 속에만 파묻혀 있던 사람이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실천무대에 뛰여드니 그 정열이 대단하였다고 김주석은 추억했다.

박소심선생은 학문 앞에 성실하고 꾸준하였으며 탐구력이 대단하였다. 책 속에만 묻혀있지 않고 실천 속에 좀더 일찍 뛰어들었다면 노동계급의 혁명위업 수행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이론도 찾았을 것이고 실천적 업적도 쌓았을 것이라고 김주석은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실천 속에서 이론이 나오고 그 이론의 정당성도 실천을 통하여 검증된다고 김주석은 믿었다. 조선사람들이 순간도 잊어서는 안될 실천은 조선의 독립이며 조선인민의 행복이라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아쉽게도 박소심선생은 이 진리를 깨닫기 바쁘게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갔다.

김주석은 길림에서 3년 남짓 머무르는 동안 과학적 학설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 학설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실천적 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김주석이 새 사조의 진수를 빨리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나라잃은 민족의 아들로 태어난 슬픔과 분노때문이었다. 조선민족이 당하는 참을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은 그를 일찌기 철들게 하였다. 그는 수난당하는 조국과 겨레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감수하였다. 그것이 그에게 커다란 민족적 의무감을 주었다.

김주석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준 분이 박소심선생이라면 고리끼의 [어머니]와 [홍루몽]을 소개해준 사람은 베이징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후 육문중학교에서 어문학을 강의한 상월선생이었다. 상월선생은 작가의 <출신>이 작품의 계급적 성격에 영향을 주는것은 사실이지만 그 성격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요인은 <출신>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김주석에게 지적해주었다.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일부 사람들도 사회변혁운동에 참가하는 것은 <세계관>이 진보적이기 때문이라고 상월선생은 생각하였다.

상월선생의 서가에는 수백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상월선생은 김주석에게 이 서가를 통채로 개방하였다. [홍루몽], 장광자의 소설 [압록강가에서]와 [소년방랑자], 고리끼의 [어머니]등, 여러 책들을 빌려본 것은 바로 상월선생의 서가에서 였다. 상월선생은 김주석이 요구하는 책이면 무엇이든지 다 빌려주었다. 자기의 서가에 없는 책은 품을 내어 다른데 가서 구해다주었다. 상월선생은 책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김주석에게서 독후감을 꼭꼭 들어보군하였다.

< ㅌ,ㄷ>성원들과 비밀독서회 성원들의 활동에 의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자 청년학생들의 사상의식에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선진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점차 역사와 민족 앞에 지닌 자기들의 임무를 깊이 자각하게 하였다. 길림시절 김주석은 청년학생들의 혁명활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운동발전에 심열을 기울였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군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데서 <청년학생운동>이 노는 역할과 위치가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의하면 청년학생운동이 선진사상을 보급하고 대중을 계몽각성시켜 혁명운동에로 추동하고 안내하는 교량자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김주석과 그 동지들은 그 이론에 동의하였다. 혁명이 심화발전되는데 따라 청년학생들의 역할에 대한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의 견해와 입장에서는 큰 변화가 생기었다. 그들은 혁명의 동력을 노동자, 농민의 본위로만 규정하던 종전의 낡은 시각에서 벗어나 청년학생들도 혁명투쟁에서 당당한 <주력>을 이룬다고 새롭게 생각하였다.


3.1인민봉기와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사건 등 해방전 우리 나라 반일애국투쟁의 봉우리를 이루는 주요한 역사적 사변들에서 청년학생들은 항상 앞장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김주석은 공산주의운동의 새 역사도 청년들의 힘으로 개척하였고 15성상의 항일무장투쟁도 청년학생들을 골간으로 하여 전개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이남혁명에서도 주력은 청년학생들이었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4.19봉기와 광주인민항쟁(1980년)의 주역도 청년학생들이었다고 김주석은 지적하였다. 중국사람들이 신민주주의운동의 시발점으로 보고있는 <5.4운동>의 주역도 청년학생들이었다고 김주석은 역설하였다.

김주석을 비롯한 진보적인 조선청년들은 길림에서 1927년 4월 <조선인길림소년회>라는 청년조직을 내왔다. <조선인길림소년회>의 목적은 소년들을 반일사상으로 교양하여 그들을 혁명의 믿음직한 후비대로 키우는데 있었다. 이 회는 강령에서 회원들이 새로운 <선진사상>을 학습하고 그것을 광범한 군중 속에 널리 해설선전하는 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웠다.

소년회에 망라된 학생들 가운데는 세상에 정말 <하느님>이 있다고까지 믿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들에게는 아무리 <하느님>이 없고 종교를 믿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날 김주석은 조선인소학교의 한 여선생에게 부탁하여 종교를 믿는 학생들을 데리고 예배를 보러 가게 하였다. 그 여선생은 김주석의 지시대로 학생들을 데리고 예배당에 가서 온종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시여, 배가 고픈데 우리에게 떡을 주시고 빵을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떡이나 빵이 차례질리는 만무하고 배만 여전히 쪼록쪼록 고팠다. 이번에는 여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가을 추수를 끝낸 밀밭에 가서 이삭을 줏도록 하였다. 선생은 밭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굉장히 많은 이삭을 주어왔다. 그 이삭을 털어서 빵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학생들은 그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실지 노동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단순한 사실 같지만 청소년들의 사상의식을 개조하고 낡은 인습을 청산하는 데서는 이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었다.

청소년들이 미신에 빠지고 예수의 교리를 절대화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될 수 있기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이러한 일을 벌렸다고 김주석은 지적하였다. 신자라고 하여 혁명을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부족한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무저항주의적인 요소들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어떤 소년회원들은 길림 거리를 걸어다니면서도 찬송가를 부르고 있엇다. 그만큼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였다. 그런데 찬송가나 불러가지고서는 적의 화구앞으로 돌진할 수 없었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도 결사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였다고 김주석은 회억하였다. 그래서 새 세대 청년들은 청소년들에게 혁명적인 노래들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거리를 오가던 소년회원들이 얼마후부터는 <소년애국가>와 <조선인길림소년회가>를 부르며 버젓이 시가행진을 하였다.

조선인길림소년회, 마르크스-레닌주의 독서회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길림일대에서는 <ㅌ,ㄷ>성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새 세대의 혁명역량이 급속히 자라났다. 새 세대 청년들은1927년 8월27일 <ㅌ,ㄷ>를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하고 연이어 그 다음 날인 8월28일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공청)>을 창립한 것은 반년 남짓한 사이 길림과 무송 일대에서 청년학생들을 망라하는 합법, 비합법의 여러가지 대중조직들이 자라난 조건에서 그 모든 조직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통솔할 수 있는 조직이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 ㅌ,ㄷ>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우수한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자라났다. <파쟁>도 모르고 <사대주의>도 모르고 <집권욕>도 모르며 낡은 때가 묻지 않은 새형의 청년공산주의자들로써 우리 나라의 청년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새롭게 개척해나갈 수 있는 참다운 핵심이 육성되었다.

< 공청>은 회원들의 사상교양사업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들 속에서 정치이론 수준과 지도수준을 높이기 위한 학습에 많은 힘을 넣었다. 그때 학습의 주제로 많이 다루어진 내용은 <제국주의론>, <식민지와 민족문제>, <조선혁명의 당명투쟁과업>과 같은 문제였다. <공청>은 <새형의 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청년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힘있게 추동하였으며 그 위업을 앞당기는데서 중추적이고 근본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0년 7월3일에 결성된 첫당조직인 <건설동지사>의 성원들중 대다수는 <공청>을 통해 육성된 선봉적인 청년투사들이었다. 조선에서는 지금 <공청>창립일인 8월 28일을 <청년절>로 기념하고 있다.


< 공청>은 일제의 탄압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1927년 겨울방학부터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공청은 농촌계몽활동을 대중을 조직화, 혁명화하기 위한 활동과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그것을 적극적인 정치투쟁의 한 형태로 승화시키는데 큰 주의를 돌리었다. 공청의 군중교양은 애국주의교양, 혁명교양, 반제교양, 계급교양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들을 의식화하고 그들을 각종 대중조직에 묶어세우는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공청이 대중의 혁명화를 위해 그처럼 전력을 다한 것은 군중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인민이야말로 우리의 선생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중요시한데 있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은 인민들 속으로 들어갔다. 김주석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라!> 그때부터 이 구호는 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으로되였다. 나는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 있다. 단한번이라도 인민들과의 접촉을 게을리하고 단 한번만이라도 인민의 존재를 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면 나는 10대의 시절에 이미 형성된 인민에 대한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을 오늘까지 간직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인민에 대한 참다운 복무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김주석은 길림에서 활동하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감옥에서 간수들가운데서 비교적 온순하고 민족성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의식화운동을 계속하였다. 어느날 한 간수가 김주석을 찾아와 감옥당국이 김주석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인가고 물었다. 김주석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대답하자 그 간수는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비적”이라고 하는데 아무려면 당신같이 선량한 사람들이 남의 것을 빼앗겠는가, 당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틀림없다면 공산주의자들에게 “비적”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주석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착취와 압박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잘 사는 사회를 세우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이다, 돈많고 권세있는 놈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비적》이라고 하면서 욕하는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지주, 자본가나 토호, 매국노들이 판을 치는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엎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그 간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자신들이 무식하다보니 지금까지 당국의 거짓선전에 넘어갔는데 이제부터는 그런 말을 곧이 듣지 않겠다고 하였다.

김주석은 감옥에 머무는 동안 앞으로 조선혁명을 어떻게 이끌고나갈 것인가 하는데 대하여 깊은 사색을 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고 하였다.

김주석은 이 내용을 1930년 6월 카륜회의에서 발표한 [조선혁명의 진로]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혁명의 주인은 조선인민이며 조선혁명은 어디까지나 조선인민의 자체의 힘으로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수행하여야 한다.”

조선민족, 조선인민대중이 조선혁명의 <주인>, 즉 <주체>이며 <조선인민의 힘>을 추동력으로 하여 조선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과 태도는 종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적 입장과 태도였다. 이것이 바로 <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이처럼 주체사상은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김주석의 오랜 학습과 실천 과정을 통하여 창시된 것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체사상의 <독창성>과 동시에 진보적 사상의 <계승성>도 동시에 중요시 해야한다.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20-11-16 11:36:49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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