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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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8-03 13:19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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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자.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서 모든 주의와 주장을 초월하는 민족대단결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한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일제 식민지통치시기이던 당시 우리 나라 항일투쟁무대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두 진영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제의 폭정과 수탈이 강화될수록 항일투쟁을 지도하던 선각자들은 애국역량의 단합과 민족대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초기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의 단합을 모색하였고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진영과의 연대를 시도하였다.
민족해방과 민족자주권의 부활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두 진영 지도자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1927년 2월에 서울에서는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되는 통일전선 조직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신간회는 새로운 기초위에서 민족역량의 총집결을 지향하였다.
이상재, 홍명희, 허헌과 같이 명망이 높은 진보적 애국지사들에 의하여 발기되고 추진되고 운영된 신간회운동은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민족적 단결을 공고히 하며 일체 기회주의를 부인한 강령의 내용도 혁신적이고 혁명적이었으며 회원들의 직업별구성도 다양하고 광폭적이었다. 신간회에는 노동자, 농민, 여관업자, 사진업자, 기자, 상업인, 의사, 회사원, 교원, 대서업자, 목축업자, 인쇄업자, 어업자, 운수업자, 직공, 재봉공, 학생, 변호사, 작가, 은행원, 교역자, 등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 3만 7, 000여명이 참가하였다.
좌우합작으로 민족의 총력을 하나로 집결시키려고 한 그 훌륭한 취지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해산되었다.
신간회가 해산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선민족의 반일항쟁역량이 하나로 단합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가 그 내부에 분열을 꾀하고 개량주의적 상층을 매수한데 있었다. 적들의 암해책동과 파괴공작을 물리치고 신간회를 능숙하게 운영하고 이끌어나갈만한 중심적인 지도역량이 없은 것도 하나의 주요한 해산원인이었다.
신간회의 와해에서 뼈저린 교훈을 찾은 김일성주석은 애국적 민족역량의 통일단결을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해야겠다는 비상한 각오와 결의밑에 <반일민족통일전선> 문제를 중요한 방침으로 제기하고 민족의 총력을 항일구국위업의 기발아래 결집시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 과정에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만한 핵심도 키워내고 유익한 경험도 축적하였다.
김일성주석을 영도의 핵심으로하는 새세대청년공산주의자들은 길림시절부터 시종일관하게 고수해온 통일전선 정책과 각계각층의 반일애국역량을 결속시키는데서 그들이 축적해놓은 경험과 신간회의 와해에서 얻은 뼈저린 교훈을 토대로 하여1936년 2월에 개최된 역사적인 남호두회의에서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창립에 대한 결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 나라 통일전선운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김일성주석은 통일전선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군중이 있고 영도핵심만 있으면 능히 통일전선체를 내올수 있습니다. 목적과 지향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하여 열사람이건 백사람이건 묶어세워야 한다는것이 통일전선에 대한 나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통일전선운동을 추진시켜왔습니다.”
남호두회의 이후 각계각층의 애국역량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한 통일전선운동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광활한 전망이 열리게 되었다.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운동은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조직을 위한 활동에로 집중되었다. 하나의 상설적인 통일전선조직을 내오고 그 산하에 광범한 <반일애국역량>을 튼튼히 묶어세우는 것은 혁명발전의 견지에서 보나 내외정세의 요구로 보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나섰다.
민족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전민항쟁>에 있고 민족대단결이 자주독립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라는 것은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이 일찍부터 주장해온 사상이었다. 통일전선은 주체확립과 더불어 항일혁명투쟁의 초시기부터 견지해온 가장 중요한 이념의 하나였다.
민족대단결과 통일전선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은 여러 갈래의 민족주의세력과 반일애국역량과의 연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바쳐왔고 중국땅에서 투쟁하는 조건에 맞게 중국의 광범한 반일역량, 중국인 공산주의자들과의 공동투쟁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왔다. 한때 박달동지는 김주석에게 다음과 같은 아주 외람된 질문을 하였다.
“지금 국내혁명가들 속에서는 김일성장군은 조선사람이지만 중국혁명을 하는 사람이고 김일성부대는 조선사람들로 꾸려진 부대이지만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있는 부대라는 말이 돌아가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장군님의 직접적인 해명을 받고싶습니다.”
김일성주석은 박달동지와 그와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지들을 위해 <조중연군활동>에 대해 비교적 긴 설명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출판보도에 의하면 김주석이 인솔하는 부대를 가리켜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라고도 칭하고 있으니 국내혁명가들이 그런 의문을 가지는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김주석은 지적했다. 그렇지만 그가 인솔하는 부대를 완전한 <중국군대>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으로서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동북항일연군>이라는 것은 명칭 그대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는 각종 항일유격부대의 연합군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공산당계열의 중국인유격부대, 구국군계열의 중국인 반일부대들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직지휘하는 조선인항일유격대 등이 망라되어 있다. 그것은 반일항전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하여 결속된 일종의 국제적인 연합군이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 자기 조국의 해방이라는 같은 목적, 동북이라는 동일한 투쟁무대 또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조중 두 나라 인민들간의 친선의 감정과 공통한 처지, 이러한 것들이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의 무장대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무력연합을 실현하게 하였다는 것이 김주석의 견해였다. 연군체계는 어디까지나 자원성의 산물인만큼 항일연군은 각 민족군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존중하고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연군의 간판을 띠고 중국혁명을 도와주면서도 조국해방을 근본사명으로 하는 민족군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고 조선혁명에 주력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대가 창건초기부터 자기 조국의 해방과 자기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조선의 민족군대라는것은 만주에 살고있는 모든 동포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김주석은 중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가서는 <항일연군>이라고 부르고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말했다고 지적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그 당시 유지하고 있던 연군체계는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싸우는 조중 두 나라 전우들간의 혈연적 유대의 산물로서 국제적인 반제공동행동의 모범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고 김주석은 언급하였다. 조선인민군의 자주적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고 또 중국사람들이 싫다고 하지 않는 한 조선인민군은 앞으로도 이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고 그는 말했다. 가능하다면 몽골민족군대나 쏘련군대와도 항일연군을 형성해가지고 싸우고 싶다고 김주석은 자세히 조중 연군활동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다음으로,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이 자주 부딪치는 문제가 바로 종교인들과의 연대연합문제였다. 조선유격대원중에 종교인들을 멀리하고 심지어 경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르크스도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듯이 “천도쟁”이나 “예수쟁이”가 유격대 내에서 우환거리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의견들이 많았다. 유격대내에 존재하는 종교인에 대한 편견을 김주석은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설명해주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명제를 극단적으로, 일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그 명제는 종교적 환상에 유혹당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종교인 일반을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애국적 종교인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다 포섭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우리 유격대는 항일구국을 자기의 첫째가는 사명으로 삼고있는 애국적 무장력이며 로동자, 농민만이 아니라 전체 조선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인민의 군대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유격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무장력이라고 하여 다른 계층이나 세력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설사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원한다면 주저없이 우리의 무장대오에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이남과 해외의 종교인들 속에서 연공애국인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공산당선언]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와 그들을 결합시켜주고 있는 유대는 애국애족의 사상감정이다.”
<애국애족>만 있으면 그 어떤 계층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의 원칙이었다. 김주석은 이 원칙에 따라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과도 손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이러한 조중연군활동과 우리 나라의 민족진영의 여러 각계각층의 인민들과의 연대활동 과정에 그들이 쌓아올린 적지 않은 성과와 경험은 통일전선운동의 폭넓은 발전을 위해서 값있는 밑거름으로 되었다. 이들은 이런 성과와 경험에 토대하여 통일전선운동을 전민족적인 범위에서 벌려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과 함께 그것을 맡아 수행할 수 있는 핵심과 주체적 역량을 빨리 키워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
김일성주석을 영도의 중심으로 하는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장구한 희생적인 투쟁의 결과로 보람찬 결실을 보게 된 것이 바로 <조국광복회> 창립이었다.
김일성주석은 자신이 조국광복회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의 초고를 작성하였고 리동백이 보충하는 식으로 창립문건을 하나씩 완성해나갔다.
그런데 강령의 첫 조항에 어떤 내용을 넣는가 하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 첫조항이 <조국광복회>가 어떠한 이념과 투쟁목적을 가진 어떠한 성격의 정치단체인가를 한마디로 규정짓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토론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주석은 2천만 조선민족의 총동원된 힘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세우자는 내용을 넣자고 말하자 리동백은 “무산계급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문구가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그 주장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강령 첫 조항에 <공산주의 냄새>가 전혀 없으니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진정한 인민의 정권”이라는 말은 계급적 성격도 모호하고 어쩐지 <민족주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 이동백의 주장이었다. 후날 백두산밀영에서 박달동지와 처음으로 자리를 같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도 역시 조국광복회 강령 첫 조항에 대하여 리동백과 꼭같은 논조의 말을 하였다고 김주석은 회고하였다.
김주석은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만연되어 있던 사이비 맑스주의적인 견해를 올바로 설명해줄 필요성을 느끼었다.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도 공산주의는 <민족적 이념>과 상치되는 사상인 것처럼 여기면서 공산주의자들은 협소한 민족적 이념에서 벗어나 철저히 <계급적 원칙>과 <국제주의적 입장>을 고수해야만 노동계급과 전인류를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주되는 원인의 하나는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프로레타리아트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한 명제를 매우 단순하게 그대로 받아들인데 기인된다고 김주석은 지적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같은 식민지예속국가들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식민지예속국가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과 <애국주의>의 기치를 드는 것은 곧 종주국의 부르죠아지를 반대하는 것으로 되며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민족혁명>과 <계급혁명> 그리고 <국제혁명>위업에 다같이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 김주석의 견해였다.
이 명백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프로레타리아트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명제를 무조건 절대화하면서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공산주의의 원수처럼 여기고 배척하였다는데 바로 사이비 공산주의자들, 행세식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실천적 착오가 있었다고 김주석은 분석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이 <민족국가> 단위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하에서 식민지나라들에서의 <진정한 민족주의>와 <진정한 공산주의>사이에는 사실상 깊은 심연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민족성>에 대하여 좀더 역점을 두고 다른편에서는 <계급성>에 대하여 좀더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지 외세를 반대하고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애국애족적인 입장>은 같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김주석의 주장이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이며 또 진정한 민족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라고 보는 것은 그의 변함없는 신조였다. 이런 신조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은 시종일관 애국적인 진정한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중시해왔으며 그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쳐왔다.
김일성주석은 조국광복회 명칭에 문제를 제기한 박달동지에게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혁명이란 공산주의자들 몇사람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이 총동원되어야 우리 혁명은 승산있는 혁명으로 될 수 있다.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는 노동자, 농민이나 공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온 민족이 압제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조선독립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역량을 다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워야 한다. 동무는 조국광복회 명칭문제에 의견을 가지지만 사실상 그것은 어떤 계층이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적합한 명칭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단체명을 하나 지어도 혁명이라는 말이나 적색이라는 말이 꼭 들어가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좌경의 한개 표현이다. 우리는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조직체의 명칭에 조국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그 단체가 어떤 한정된 계급이나 계층을 위한 조직인 것이 아니라 온 민족을 위한 조직으로 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려 하였다.”
김주석은 박달동지를 통하여 국내투사들의 사고방식에서의 허점과 제한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고와 실천에서 그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큰 과오는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교조주의적 이해였다. 그들이 민족주의운동 일반을 배척하고 경원시하는 것은 그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잘 소화하지 않고 통채로 받아들이던 행세식 공산주의자들과 문자주의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들 일반이 범하고 있던 좌경적 편향이었다.
김주석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족해방>보다 더 큰 대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민족을 떠난 공산주의운동이란 있을 수 없으며 또 그런 공산주의운동은 필요도 없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가 말하는 민족의 개념 속에는 로동자, 농민뿐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창조적 로동을 사랑하고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사랑하는 각계각층 군중이 다 포함되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총동원의 기준이며 조국광복회 입회기준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준에 기초하여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동원할수 있는 사람은 다 동원해야 합니다.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하며 또 이룩할 수 있다는 자주독립사상에 기초한 민족의 총동원만이 조선의 운명을 칠성판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김일성주석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민족적 권리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그것이 결코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바치었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투철한 조국애와 민족해방을 위한 실천투쟁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이라는 것을 온 민족 앞에 과시하였으며 마침내 민족해방투쟁의 진두에 떳떳이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의 과정을 거쳐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은 <조국광복회>라는 명칭자체도 당당하게 내달고 강령의 첫 조항에 우리 민족성원전체의 자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동만유격근거지에 세웠던 것과 같은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세우려 한다는데 대하여서도 뚜렷이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이처럼 주권문제의 해결을 조선민족 앞에 나선 일차적 과제로 제시하고 인민들에게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과업과 해외교포들의 민족적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과업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정치적 과제들을 제시하였다.
이 강령에서는 또한 혁명적인 군인건설과업도 제기하였으며 경제관계분야에서 일제와 매국적 친일지주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일본국가, 일본인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과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을 몰수하며 빈곤한 인민을 구제하며 민족적 공농상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고 민족경제를 건설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경제적 과업들도 명시하였다. 또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사회문화적 과업과 대외적 과업도 제시하였다.
마침내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문이 준비위원회의 최종토의에 붙여져 통과되었다. 리동백은 지난날 이른바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던 파쟁군들이 변변한 강령조차 제대로 내놓지도 못하는 주제에 단지 헤게모니쟁탈전만 일삼아왔다고 통탄하면서 이제는 캄캄했던 조선혁명의 진로를 더 밝게 비쳐줄 새로운 등대불이 나타났다고 아주 기뻐하였다.
1936년 4월말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준비위원회는 창립대회장소를 동강수림으로 내정하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청장을 받은 대표들이 그럭저럭 거의 다 모여왔다. 국내대표로는 강제하의 조직선을 타고 벽동에서 천도교대표와 농민대표가 왔고 온성지구의 당조직선을 타고 교원대표와 노동자대표들이 각각 한사람씩 왔다.
역사적인 조국광복회창립대회는 5월 초하루날부터 시작되었다. 회합을 앞두고 대표들은 모두가 격정과 흥분으로 설레이었다. 회의는 15일간이나 진행되었다. 먼저 리동백이 대회앞으로 보내온 축사들을 낭독하고 그 다음 김주석이 보고를 하였다.
김주석은 보고에서 조국광복의 기치밑에 전민족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결속할데 대한 과업과 국경지대와 국내에 진출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전개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가일층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국경연안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할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할데 대한 과업들을 제기하였다. 이 보고는 후에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켜 전반적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올리자]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김주석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을 대회심의에 붙여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2. 재만조선인들은 조중민족의 친밀한 연합으로써 일본 및 그 주구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영토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자치를 실행할 것.
3. 일본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싸울 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4. 일본국가 및 일본인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농, 상업을 장애없이 발전시킬 것.
6.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실현과 봉건사상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방할 것.
7. 양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별없는 인륜적 평등과 부녀의 사회상 대우를 제고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히 할 것.
8. 노예노동과 노예교육의 철폐, 강제적 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무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 것.
9. 8시간 노동제실시, 노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노동법안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각종 노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하고 있는 근로대중을 구제할 것.
10.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히 연합하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 친선을 유지할 것.
회의참가자들은 강령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면서 뚜렷한 투쟁목표를 가지고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확신성있게 나아갈 수 있게 된데 대한 기쁨을 토로하였고 강령에 제시된 과업들을 적극적으로 실현해나가겠다는 굳은 결의들을 다지었다.
또한, 대표들은 조국광복회창립선언에 대한 토론에서 온 민족이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이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능과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한데 뭉쳐 행동으로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참가한다면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고 모두 다 조국광복회에 망라되어 싸울 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김주석은 참가자들의 총의에 따라 조국광복회창립대회에서 이 조직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 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혁명의 군중적 지반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어 전국적 범위에서 보다 조직성있고 체계성 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반일역량을 나라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조국광복회창립은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꾸준히 키워온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의 위대한 산물이었다. 그것은 조선인민이 민족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나갈 의지를 다시금 엄숙하게 선포한 역사적인 계기로 되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떠밀어가는 전환점으로 되었다.
리창선, 리제순, 박달 기타 많은 사람들이 조국광복회의 조직확대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1936년 5월 백두산 북쪽 기슭에서의 조국광복회의 탄생은 조선혁명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조국광복의 밝은 서광을 안아온 역사적 사변으로 되었다. 조선혁명의 보다 창창한 새날은 이렇게 백두산 기슭에서부터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백두산 기슭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조국광복회건설운동은 만주전역과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빨리 번져갔다. 나라와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일관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중국 만주에 살고 있던 90만 동포들과 국내의 2,000만 동포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심어주고 민족해방의 열망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민족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노동자, 농민들과 더불어 지식인, 청년학생, 수공업자, 종교인, 민족자본가를 포함한 애국적인 인민들 모두가 하나의 광복전선에 합세하였다.
이제 우리 8천만 겨레는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는데 대동단결해야 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마땅히 하나의 통일국가에서 살아가야 하며 또 살아갈 수 있다. 우리 겨레는 민족대단결이라는 위력한 무기가 있다. 그리고 <조국광복회> 조직건설을 통해 이룩한 민족통일전선의 풍부한 경험이 있다. 80여년 전에 이미 통일전선의 경륜을 훌륭하게 이루어온 우리 민족은 민족대단결을 실현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겨레는 북에 살건 남에 살건 해외에 살건 무조건 통일단결해야 한다. 통일단결만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 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통일단결>은 민족이 민족으로 살아남는데 필요한 영원한 생존방식이다. 민족이 살아나갈 길도 통일단결에 있고 민족이 부흥하고 번성하는 길도 통일단결에 있다.
우리 민족은 75년동안 미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이남강점으로 인하여 분단을 강요당해왔다. 우리 8천만 겨레는 북에 살건, 남에 살건, 해외에 살건 사상, 정견, 종교,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공동의 적인 미제국주를 조국땅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제2의 조국광복회>를 탄생시켜야 한다. 우리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각계각층 군중이 다 포함되는 거족적인 <제2의 조국광복회>를 결성하고 제2의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야한다. 남과 북, 해외의 8천만 겨레의 단합된 힘으로 미제국주의를 이남땅에서 몰아내고 조국의 해방을 이룩해야 하며 전인민의 총동원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해야한다.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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