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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명은 악의 근원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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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3-03-14 14:5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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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4] 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서구문명은 악의 근원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체제

인간에 대한 반인륜적 망령의 <인종주의> 해악

 

유태영(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인종주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1930년대에 있었던 독일의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사건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전에는 인종주의가 없었는가? 아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적 사건 이전에도 역시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서구문명의 역사에 존속되고 있었다.

<인종주의>의 고대적인 역사의 기원을 히브리인의 신화에서 노아 할아버지의 세 아들 <야벳의 자손> < 셈의 자손> 그리고 <함의 자손>들이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번창하여 서로 상이한 인종의 기원이 됐다고 말해 주고 있다. (BC 3,800 구약성경 창세기 10) 하지만 히브리인의 신화적인 고대의 설화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의미로 오늘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인종주의 역사와 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고대인들은 주로 피부, 머리카락, 눈의 색 갈, 얼굴의 모양 그리고 종교적 우월성을 가지고 인종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기독교시대에 들어와서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하여 인종적 적대감을 고취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1800년대에 반유대연맹이라는 단체가 등장하여 독일을 비롯하여 서유럽에서 인종주의를 선동한 역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많은 분쟁과 전쟁의 역사는 <인종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으로 우리는 일단 반인륜적인 망령의 <인종주의>에 대한 올바른 관찰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지난 500년 동안 유럽의 국가들이 인종주의를 전 세계로 확대시켜 다른 지역 사람들을 살육하고 착취하면서 노예화했다. 인종주의적 망령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재전에서 뿐만 아니라 냉전이라고 하는 비도덕적인 이데올로기로 되살아나 인종간의 갈등과 증오를 고취하고 있었다. 오늘 미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이른바 신보수주의와 함께 망령의 인종주의 현상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인종주의를 생물학적인 면에서 신체의 특정에 따라 구분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오늘의 인종주의는 사회과학 분야와 함께 정치적 분야에서 계급과 자본,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이득쟁취의 직능적 과제등이 가장 중요시 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종주의는 경제와 정치적인 관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종주의가 사회적 집단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개인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열등한 문명과 인종들을 예속시키고 때로는 멸절시키기도 한다.

1. 중세 서유럽의 인종주의

AD 7세기 이후에 있어서 중세 유럽의 정치적 세계를 지배한 제국은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이슬람제국>으로 3개의 제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은 AD 476년에 동서로 분열되어 두개의 제국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제국은 로마 캐톨릭 교황청의 통치하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1054년 까지 578년 동안 명목상으로 로마 캐톨릭 교황청의 통치 하에서 하나의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중세 유럽에서 오직 <이슬람제국>만이 비기독교제국으로서 단독으로 정치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인 면에서 두 개의 기독교 제국과 대립하여 막강한 이슬람제국의 두각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슬람제국을 일명 <사라센 제국>이라고 부른다. 이슬람제국은 고대로 부터 사라센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사라센족의 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설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BC 2,000경의 신화적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후손을 출산하지 못함으로 아브리함이 이집트 출신의 하녀 하갈이라는 여인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브라함이 100세에 본부인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러므로 이집트 출신 하녀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사막으로 추방을 당해 쫓겨났으며 거기서 방랑자의 조상이 됬다고 한다. 사막의 방랑자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사라센 민족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구약 창세기 16)

이와 같은 좋지 못한 전설적 구전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제국은 한때 세력이 팽창하여 유럽에서 대제국의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세속적 성취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 보다 더 앞서 있었다. 이슬람제국은 그리스 철학과 자연과학을 받아들임으로써 국력을 확대시켜 로마제국을 제치고 고대 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특히 1187년에 이슬람 제국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통치하게 됐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하여 이슬람제국의 세력이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을 제치고 상당 기간 동안 문화와 군사적으로 우세한 통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서유럽의 기독교제국을 곤경에 빠지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서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은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다급해진 서유럽의 <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막강한 이슬람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명분으로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연합하고 단합하여 1095 년에 십자군을 창설하였다. 십자군을 창설한 목적은 이슬람의 통치하에 있는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함이었다. 1096년에 제1차 십자군전쟁을 시작하여 1279년까지 제9차 십자군 전쟁을 시도하여 183년 동안 계속하여 싸웠다.

183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싸운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 탈환을 성취하지 못하고 실패한 전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중세기의 십자군 전쟁은 서구의 기독교제국이 예루살렘을 탈환한다고 하는 허황된 주장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사실은 이방종교의 나라를 대항하여 싸운 <인종주의>적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세기의 십자군 전쟁은 상이한 인종 사이에서 우열을 판단하기 위하여 우등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려는 전쟁이었다. 동시에 유럽의 기독교 제국은 이러한 전쟁을 신의 섭리에 따른 성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스마엘-사라센- 이슬람- 마호메트로 연결되는 이슬람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은 부정적인 인종주주의 편견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십자군 전쟁을 183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하지만 서구의 기독교제국은 정반대로 주장하기를 우리는 신의 뜻에 충성하고 종교적 봉헌심을 통하여 악마와 싸우는 고상한 정신적 인종주의자라고 자신의 우월감을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서 십자군 전쟁이 점점 난관에 이르게 됐으며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또 다시 사라센-이슬람에게 빼앗김으로서 서유럽의 인종주의적 우월감과 낙관론은 완전한 실패로 사라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또 다시 완전히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후 1254년에 이르러 유럽의 인종주의적 낙관론자들은 무력으로는 이슬람인들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결국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럽인과 아랍인이 서로 다양한 형태의 인종들이 상대방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접촉하는 길 밖에 별 도리가 없음을 중세기 십자군의 치열한 전쟁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터득한 교훈이라고 여겨진다.

중세기 서유럽 기독교제국이 이슬람제국과 당면했던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오늘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2-13세기에 있어서 평화적인 공존을 위하여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 사이에 서로 관용적인 화해의 관계를 모색하여 평화를 유지한 역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개의 종교가 상호존중의 정신으로 <예수><마호메트>의 이름을 빼버린다면 <하느님>은 모든 인종들에게 평등한 하느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의 세계가 원하는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지혜는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길에 있을 뿐이다.

2. 식민지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서구유럽의 역사에서 중세기는 종교와 관련된 인종주의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다. 그런데 15세기에 이르러서 유럽인들의 선박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넘어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진출하면서 유럽인들의 인종주의는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유럽인들이 이번에는 종교와 관련된 인종주의가 아니라 정복자로서 점령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인종주의자로 변장된 모습으로 등장했다.

유럽인의 식민지 자본주의는 점령과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인종주의가 필요하고 중요했다. 유럽인들은 점령지의 원주민을 저열한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유색인들의 생명, 토지, 문화, 사회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신의 뜻을 수행한다고 정당화 하고 있었다.

영국인 법률학자 H. Brackenridge는 주장하기를 인디언들이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고 있음으로 인디언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라고 법률적 괴변을 주장했다. 유럽의 식민지 인종주의자들은 인디언들이 19세기 말에는 거의 멸절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사실에 있어서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거의 절멸되고 말았다.

15세기 말에 아메리카를 점령한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원주민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으려면 싸워야 했으며 싸우다 서로 죽는 위험이 많았다. 인디언들은 노예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아프리카 흑인 노예 노동력을 확보하는 노예제도이었다. 흑인 노예제도는 1700년대 초까지 북미 식민지 사회구조 안에 확고히 자리 잡게 됐던 것이다.

흑인 노예제도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방법이었다. 흑인은 생리학이나 심리적인 면에서 인종적으로 열등한 인종이며 이데올로기로 인종주의적 노예제도가 만들어 지는 것을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유럽인들은 인간을 유럽인” “아메리카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으로 나누어 태생적으로 우열을 논하는 인종주의적 도식을 주장했다.

미국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의 헌법을 기초한 제퍼슨은 노예제도의 폐지에 대하여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퍼슨은 오히려 흑인의 내적이며 자연적인 열등성을 지적하면서 흑인들은 더위에 강하기 때문에 육체노동에 생물학적으로 적합하다고 주장했고 한다.

이와같은 이중적인 모순은 하느님이 인간의 조상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고 하는 성경을 믿는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자기모순적인 과오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종을 다른 인종과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과학적인 생물학으로 인종주의를 부인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회적 현실에 있어서는 인종차별이라고 하는 인종주의가 그대로 역사속에 존재하고 있다.

오늘 서구문명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인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종주의는 유럽의 식민지 자본주의를 확립시키는데 있어서 잔인한 정복전쟁과 인종학살을 정당화시켰으며 또한 산업에 필요한 자본축척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노동의 착취를 합리화 시키고 있었다.

미국을 위주로 하는 유럽의 자본주의 지배세력은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축으로 삼는다.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야만적 억압과 탄압으로 미국의 유색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와 탄압하고 있으며 비백인들을 이방인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미국의 백인 인종주의는 제3세계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민중의 자의식을 퇴보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방법을 다하고 있다.

인종주의가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커짐에 따라서 제국주의 식민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방어책을 찾아내야 했다. 19세기가 되면서 식민 자본주의 자들은 인종주의를 다윈의 진화론의 언어를 빌어 <자연법칙에 의한 선택>이라고 변명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인종주의적 인간의 억압에 대하여 변명하여 유색인들에게 성경을 인용하여 <정복자들과 억압자들에게 다른 뺨도 내주어라>라고 요청했다.

식민 자본주의 인종주의자들은 소수가 미개한 대중을 지배하는 개척자적인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한 예를 들어 말하면 1890년에 3억이나 되는 인도인들을 영국의 겨우 7만명 군인과 6천명의 영국인 정치인들이 인도를 통치했다.

 19세기 미국의 최고 동물학자인 아가시즈 박사는 미국의 흑인들에 대하여 인종주의적인 멸시의 말을 했는데 <흑인들의 뇌는 백인이 어머니 자궁에서 7개월 된 태아의 불완전한 뇌와 같다>라고 악담을 했다.

식민 자본주의 백인의 인종주의적 우월성은 유색인을 열등인종으로 규정해 놓고 멸종, 괴멸, 노예와 흡수등을 수세기 동안 계속해 왔다. 식민 자본주의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로 제3세계를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그 원인과 결과를 오히려 뒤집어 거꾸로 주장을 하면서 모든 책임을 피압박자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식민 자본주의가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경제적 착취를 강요하는 핵심적인 수단과 방법이 바로 인종주의이다. 식민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위에 올라 앉아있는 백인 자본가들은 아래를 굽어보면서 인종주의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있다.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사이에는 언제나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인종주의가 끈질기게 살아남는 그 주요한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 질서가 인종주의를 보존해 주면서 합리화시킴으로서 상호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종주의는 미국의 식민 자본주의 착취체제도와 연결된 유기체이다. 따라서 미국의 인종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의 투쟁은 자본주의 뿌리를 뽑아내는 혁명적인투쟁이 되어야 한다. 이 길만이 인류의 고질적인 인종주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

3. 프랑스의 인종주의

프랑스의 인종주의 문제는 프랑스의 문화와 종교가 완전히 다른 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으로 인하여 발생했다. 프랑스와 인접해 있는 유럽의 외국인들 예술가, 기술자, 상인과 노동자들이 수 없이 많이 프랑스에 살고 있었으나 프랑스인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프랑스인과 같은 종교와 같은 문화권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에는 아프리카에서 이른바 제3세계의 이민의 물결이 파도처럼 프랑스에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빈민에 속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의 오랜 식민통치의 부산물로서 난민들이 되여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였던 것이다.

어찌하여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프랑스의 인종주의 문제가 되고 있는가? 왜 아프리카인이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식민통치를 수 세기 동안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편의상 ㄱㄴㄷ순으로 살펴 본다.

. 프랑스는 1830년에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오스만 세력을 밀어 내고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1830년 이전에는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는 식민지 쟁탈전을 북아프리카에서 오래 동안 계속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때 프랑스는 알제리를 독점하였으며 알제리의 청년 173,000명을 징집하여 전쟁터로 내보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알제리 청년 15만명을 프랑스군으로 둔갑시켜 전쟁터에 내보냈다. 알제리 청년들의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재산과 경제적 착취를 백 년 동안 계속하여 당했다. 프랑스로 인한 알제리의 비극의 역사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알제리 민중들의 독립투쟁운동은 계속됐는데 약 100만 명이 죽음을 당했고 70만 명이 투옥됐다. 프랑스 식민통치의 잔악성에는 프랑스의 고급문명인의 모습과 기독교 전통의 성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 볼수 없었다. 196275일에 수 십 년 동안의 치열한 투쟁끝에 알제리는 드디어 독립을 쟁취했다. 북아프리카 나라들에게 독립러쉬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알제리가 독립은 쟁취하기는 했지만 알제리의 고질적인 문제는 20만 명의 친프랑인들 <하루키>의 문제가 있었다. <하루키>란 무엇인가? <하루키>는 알제리 민중을 반역한 악질적인 <친프랑스 매국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의 친일파와 같은 족속들을 알제리에서는 <하루키>라 부른다.

<하루키>들은 혈통으로는 알제리인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프랑스인처럼 행세한 민족반역자이며 매국노들이다. <하루키>들은 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한 후 알제리에서 발부칠 자리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루키> 20만 명이 살길을 찾아 무작정 상경식으로 프랑스로 밀려갔다. 프랑스는 20만 명의 알제리인 <하루키>들은 냉정하게 불청객으로 취급을 했으며 그들은 골치덩어리 난민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루키>들은 버림받은 채 프랑스 도시의 어두운 빈민굴에서 비참하게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

. 튀니지는 1,300년의 찬란한 문화재를 자랑하는 이슬람나라이었다. 하지만 1881-1956년 까지 75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1945년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인 144,000명이 튀니지에 상주하면서 식민통치를 집행하고 있었다. 동시에 수많은 튀니지인들이 프랑스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붙잡혀 왔으며 훗날에 프랑스에서 제3세계 난민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56년에 튀니지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튀니지 정권은 여전히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하에 놓여져 있었다. 튀니지의 대통령 벤 알리는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친프랑스 경향의 대통령이였다. 하지만 벤 알리 대통령은 36년 동안 친프랑스 독재정권으로 통치를 하다가 튀니지 민중들의 저 유명한 <제스민 혁명>에 의하여 권좌에서 축출되고 35년의 징역형 선고를 받았다.

프랑스는 친프랑스 독재정권을 이용하면서 튀니지 착취를 정당화했다. <내것은 내것이요 네것도 내것이다>라고 하는 착취 방법을 계속했다. 튀니지 노동자들이 프랑스에 많이 끌려와 상주하면서 노동의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 꼬뜨디봐르는 1904년에 서아프리카 프랑스령에 편입되여 있다가 1958년에는 프랑스공동체 안에서 한 개의 자치주가 됐다. 1960년에 독립투쟁의 결과로 독립국이 되기는 했으나 프랑스공동체 안에서 라는 말은 여전히 붙어져 있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고 집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브와니 대통령은 33년 동안 친프랑스 독재로 집권하면서 프랑스의 기업체들이 건설, , 통신, 교통등 모든 산업체들을 독점하도록 허용하는 통치를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꼬뜨디봐르는 두 나라가 아니라 한개의 나라인 모양으로 항상 잡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2002년에 북쪽의 반군세력이 수도인 아비쟝과 전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해 2003년에 꼬뜨디봐르는 독립이 아니라 북과 남으로 분열됐다. 북과 남 사이에 유혈전이 벌어지자 유에군 8.000명과 프랑스군 8,000명이 꼬뜨디봐르에 주둔했으며 무기는 약 300만정이 꼬뜨디봐르에 유입됬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임기와는 관계없이 계속하여 집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바그보 대통령은 2010년에 프랑스의 배신을 당하여 드디어 권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와같이 프랑스와 꼬뜨디봐르와의 종속관계가 100여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꼬뜨디봐르의 다수의 난민들이 프랑스에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결과이었다. 문제는 오늘의 프랑스가 꼬뜨디봐르의 난민들에 대하여 어떻게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인종주의 문제를 처리하는가를 국제사회는 주목하고 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최고의 문명국이며 신사숙녀의 나라로서 캐톨릭 전통을 과시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북아프리카의 이주민들로 이하여 프랑스 사회에서 인종주의가 표출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주목을 일으키는 매우 경악스러운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이와 같은 인종주의 문제에 대하여 정책적인 면에서 대표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민족전선, Le Front National>이라고 하는 정당이다. 민족전선은 1972년에 창당하여 1990년 이후부터 프랑스에서 제3당의 위치로 격상하여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면 <민족전선>은 프랑스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알제리의 <하루키>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도시마다 가득차 있는 북아프리카 피식민지인들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민족전선>은 인종차별적인 인종주의에 대하여 어떠한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있는 프랑스의 주류사회가 북아프리카의 피식민지 흑인노동력이 프랑스로 유입됨으로 인하여 한때 프랑스의 경제가 발전되는 것을 보고 프랑스인들이 흑인들을 반가운 손님으로 환영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1962년에 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하고 또 다른 북아프리카 식민지 나라들이 줄을 이여 독립을 쟁취함으로서 프랑스와 종속국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에 있어서 프랑스의 경제는 내리막길로 떨어졌으며 실업자의 수가 증가함으로 인하여 북아프리카 나라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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