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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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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태영 작성일13-02-25 01:3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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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이후에도 흑인들의 비극은 여전
백인들과 해방흑인들 간에 상호신뢰 증진에 실패

유태영 박사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유태영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 북의 승리로 끝났다. 남북전쟁이 북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흑인노예제도가 정치적으로는 끝났다. 그런데 백인들에게 있어서 해방된 흑인노예들이 이제는 귀찮은 존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인들은 해방된 흑인노예들의 수를 줄이기 위하여 그들을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백인들은 미국에서 해방된 흑인노예들을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아프리카에 《미국식민지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를 조성하여 아프라카의 메수라도(Mesurado) 지역을 확보하고 그곳의 명칭을 《라이베리아, Liberia》라고 불렀다. 《노예들이 자유의 땅을 얻었다》라는 뜻을 지닌 이 명칭은 백인들이 새로 만든 식민지의 명칭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해방노예흑인들을 라이베리아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처음 작성한 사람은 미국의 기독교 목사인 핀리 목사(Reverend Robert Finley)였다는 사실이다. 핀리 목사는 그때 당시 뉴잉글랜드의 신앙부흥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핀리 목사는 그의 신앙부흥운동에 있어서 해방흑인노예들이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약 20만명의 해방흑인노예들을 강제로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이주시켜 그곳에서 미국의 새로운 식민지 국가를 창건했던 것이다.  아프리카로 돌아온 흑인들은 각자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라이베리아》에 붙잡아 놓고 그곳에서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해방흑인노예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곳은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백인들은 또 다시 해방흑인노예들을 중남미의 《아이티》로 추방했다. 놀랍게도 카리브해 여러 국가들 중에서 유일한 흑인의 나라가 바로 《아이티》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미국의 백인들이 해방흑인노예들을 강제로 《아이티》로 이주를 대량으로 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아이티의 총인구 중에서 95%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이것을 밝히 말해주고 있다.

14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이르는 400년 동안에 아프리카에서 노루사냥을 하듯 1200-1500만명의 흑인노예를 붙잡아 미국으로 끌고 왔으며 그들의 피와 땀의 고역을 통하여 미국이라고하는 강대국을 건설했다. 그런데 400년 후에 시대적으로 불가피한 변혁으로 인하여 흑인노예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흑인노예들이 해방되어 자유흑인의 신분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해방된 흑인노예들이 이제는 미국의 백인들에게 오히려 귀찮은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백인들은 해방흑인들의 수를 축소시키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와 중남미 카리브해의 《아이티》를 고안해내고 이곳으로 해방흑인노예들을 강제로 추방시키는 책략을 썼다. 《라이베리아》와 《아이티》 이 두 곳으로 수십만명의 해방흑인들을 이주의 형식으로 강제로 추방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라이베리아》로 또는 《아이티》로 추방을 당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 있게 된 해방흑인들은 미국을 자신들의 조국으로 여기고 조국에 대한 정체성을 깊이 하고 있었다. 해방흑인들의 마음 속에는 미국에 대한 정체성과 신념이 강화되고 있었다.  불행한 과거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쫓겨나지 아니하고 남아 있게 된 데 대하여 한줄기의 다행스러운 회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 남아 있는 해방흑인들의 바로 앞길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인종차별의 암흑의 시대가 여전히 또 다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의 백인들의 우월주의적인 완고한 인종차별의 전통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1. 해방흑인노예들의 실망과 백인인종차별의 연속 (1865-1920)

남북전쟁이 끝나고 해방된 흑인들은 자유에 대한 감사와 자유사회에서 검약해 짐으로써 책임적인 미국시민이 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미국 남부의 멤피스주의 경우의 한 예를 들어 말하자면 1865년에 16,000명의 해방흑인들 중에서 2,000명 정도가 극빈자들이었는데 흑인자선협회를 통하여 2,000명의 가난한 흑인들에게 생활의 도움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해방된 흑인노예들이 시대적인 변혁으로 인하여 농장의 주인에게서부터 해방이 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토지가 없으며 돈이 없을 뿐만 아니 일자리를 찾는 데 있어서도 혼돈과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00여개의 원조협회들이 민간에서 임시로 활동했으며 1865년에는 미국 연방정부 안에 《해방흑인사무국》(Freedmen's Bureau)이 창설됐다.

《해방흑인사무국》은 총2,100만명분의 식량을 해방흑인들에게 제공했으며 40개의 병원을 설립하여 7년간에 50만명의 흑인환자들을 치료했으며 절차문제를 소홀히 하기는 했지만 간이헌법재판활동을 통하여 해방흑인들을 위하여 법률적자문활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몰수되거나 법적으로 관리하는 토지를 공정하게 처분하여 해방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주는 역할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방흑인사무국》은 많은 학교를 설립하여 학비를 면제해 주고 교과서를 무료로 제공해 주기도 했다.

해방흑인들은 《해방흑인사무국》의 흑백화해를 위한 관대한 정책에 대하여 감격하여 이전에 주인이었던 백인들을 향하여 《과거사는 기꺼이 과거와 함께 묻어야한다》라고 선언하면서 흑백화해 정책에 적극 호응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방흑인사무국》의 흑백화해의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백인 농장주들은 《해방흑인사무국》의 흑백화해를 위한 정책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시하면서 흑인노예들을 사적으로 계속하여 소유할것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쪽의 백인 농장주들은 《해방흑인사무국》의 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백인우월주의사상》을 고집하고 흑백상호신뢰정책을 근보적으로 배격하고 있었다.  

1865-1920년에 이르는 55년동안 《해방흑인사무국》이 흑백상호신뢰정책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과업을 완전히 실패하도록 백인우월주의자들은 반대작용을 감행하고 있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해방흑인사무국》의 정책을 거부하면서 펼친 부정적인 행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ㄱ. 백인농장주들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해방흑인사무국》을 불신하고 대항하여 《흑인단속법》(Black Codes)을 1866년에 제정했는데 남부의 11개 주정부가 승인했다. 그들은 또 이른바 <부랑자법>을 제정하여 흑인들에게만 적용하는 악법을 제정하여 백인들이 흑인들을 차별하는 노예전통을 계속하여 주장하고 있었다.

ㄴ. 해방노예들이 군에 입대할 수는 있지만 무기는 소유할 수 없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를 할 수는 있으나 면허증과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흑인이 일등 객차에 승차하는것을 금지했으며 만일 흑인이 백인 교회 집회에 참석하면 39대의 회초리로 매를 맞아야 했다. 노예출신 흑인은 선거할 수 없다. 백인들은 흑인을 향하여 《Mr.》나 《Mrs.》를 붙여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흑인을 위하여 학교를 세우는 것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흑인들이 글을 읽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ㄷ. 1866년에 흑인들의 폭동이 남부에서 처음 발생하여 흑인 40명이 죽고 100여명이 중상을 당했다.  이런 사건이 계속하여 발생함으로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싸우고 북부와 남부가 서로 분쟁을 했다. 1867년에 미국 의회는 《재건법》(Reconstruction Acts)을 제정하여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허락하는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미국의 공화당은 남부에서 흑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흑인을 지방행정기관에 고용하기도 했다.  남부의 흑인들이 《우리에게 투표권을 달라. 그러면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고 백인들에게도 유익을 주겠다.》라고 주장했다.   

ㄹ. 1880년대에 들어서서 남부의 공화당이 《애국동맹》(Union League of America 또는 Loyal League)을 창설함으로써 흑인들이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 약간의 변화와 진전이 있었다. 학교나 교회에서 흑인과 백인들이 합동하여 공화당을 지지하는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연방정부나 주의회에서 흑인들이 정치력을 발휘하는 데는 아직 극히 미약할 뿐이었다. 그때 당시 남부의 8개 주의회에서 흑인 주의원은 겨우 22명뿐이었다고 한다. 22명 중에서 12명이 노예 태생이며 10명이 대학교육을 받은 흑인이었다.

ㅁ. 남부의 백인들은 공화당의 정책이 흑인을 우대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정책에 대하여 분개하여 공화당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특히 남부의 극우적인 보수주의 백인들은 북부의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지향하는 데 대하여 가증스러운 《양키들》이라고 일격을 가하면서 흑인을 우대하는 어떤 정책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맹세하고 있었다.  남부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은 《미국 정부는 백인을 위한 백인의 것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루이지애나에서는 《백인동맹》(White League)이라는 백인우월주의 준군사조직이 창설되었는데 여기에 가입하는 백인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ㅂ. 1865-1867년에는 《KKK》(Ku Klux Klan)단이 테네시주 플라스카에서 창설됐다.  《KKK》단은 백인우월주의 폭력단체로서 흑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백인들도 흑인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KKK》단을 무서워 했다. 《KKK》단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미국 연방의회와 주의회들이 단속법을 통시켰지만 그 단속법의 효과는 미미했다.

1868-71년에 《KKK》단은 정부조직을 장악하는 세력으로 확대하였으며 흑인들의 투표권을 방해하기 위하여 투표장소 비밀, 개표조작, 협박과 공갈 등 방법으로 흑인들이 투표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공작을 했다. 1876년 이후부터 공화당은 흑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ㅅ. 남부의 백인들은 긑까지 흑백차별을 주장했다. 1875년에 연방정부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875, 일명 Enforcement Act 혹은 Force Ac)에 호텔, 극장, 공공 오락장 같은 장소에서 모든 시민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년 후 1896년에 남쪽의 루이지애나주를 비롯하여 여러 주정부들은 《인종차별》은 반대하지만 《인종구별》은 지지한다는 궤변을 주장하면서 철도시설의 이용에 있어서 백인과 흑인의 분리를 주장했으며 연방의회는 남쪽 주정부들의 주장을 묵인해주고 있었다.  결국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미국인들은 《인종차별》 문제와 《인종구별》 문제에 대하여 의견일치를 하여 《백인들의 지상천국》 건설에 튼튼히 정착하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의 흑인들의 전망은 밝지 않았다. 하지만 흑인들은 힘든 역사적 무거운 짐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한 미국인으로서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꾸준이 달려가고 있었다.

1917년 4월 1일에 미국이 제1차 세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흑인에 대한 차별정책이 슬그머니 점차적으로 약화되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었다. 미국은 독일을 향하여 선전포고를 하면서 약 2만명의 흑인 전투원을 이용했는데 이 중의 1만명은 정규군 사병들이었고 나머지는 주방위군의 흑인연대에 속해 있었다. 백인들은 흑인 군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흑인들이 지원병으로 밀물처럼 군에 지원했으며 또 《의무병역법》(Selective Service Act of 1917)으로 21-31세의 거의 모든 남자는 징병에 응해야했다. 그리하여 백인보다 흑인이 더 많이 군에 입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백인들은 많은 흑인 군인들이 연병장에서 무슨 일을 일으킬까 염려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기본훈련을 마치면 흑인 군인은 노무대대나 시설연대 등 비전투부대에 배치됐다. 흑인들은 전투보다 육체노동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백인 장교들은 흑인이 장교로 임관되는것을 적극 반대했다. 장교임관에 거절당한 한 흑인 병사는 1917년 10월 8일에 전쟁부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탄원서》를 제출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에 나의 형이 참전해 싸웠고 미국 남북전쟁 때는 아버지가 참전해 싸웠고 미국-멕시코전쟁에 조부가 참전해 싸웠고 1812년 전쟁에는 증조부가 그리고 영국과의 독립전쟁 때에는 고조부가 참전하여 싸운 자랑스러운 우리 가문이다. 나의 생각에는 우리 가문 모두가 병졸로 복무하여 미국에 공로를 세웠으니 이제 나 한 사람 정도는 장교로 임관을 받을 만하다.》

흑인 부대는 3분의 2 이상이 전투부대가 아니라 보급업무에만 종사했기 때문에 보도에 발표되는 명성을 누릴 수가 없는 그늘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인 노무부대는 미국의 여러 전쟁을 승리로 끝나게 하는 숨은 공로자들이었다. 흑인 군인으로 노무부대에서 평생 근무한 한 흑인 군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우리는 노무부대원, 그래서 해야 하고 ,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네,
영광과 십자 훈장은 결코 우리의 것이 되지 않고 , 닳아 없어지겠지,
그러니 우리가 없으면, 전선의 군인들이 거기에 있을 수도 없고,
전투에 승리할 수도 없을 것이네.》

미국의 남북전쟁이 1865년에 북쪽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해방흑인노예들은 자유와 해방에 대한 회망의 꿈으로 55년 동안 살았다.  하지만 해방흑인노예들의 희망과 꿈은 실망 뿐이었고 백인들의 인종차별의 전통은 끝칠줄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919년 8월 어느 일요일에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 있는 흑인백만장자 워커여사(Madam C.J. Walker)의 별장에서 백인과 흑인 저명인사들 100여명이 초청된 자리에 등장한 놀라운 화제가 있었다.  이 화제는 놀랍게도 《미국에 충성한 흑인들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라고 하는 화제였다. 뿐만아니라 조지 마이어즈(George Myers)는 《모든 흑인들이 미국에 충성스럽다는 사실을 하느님은 아신다》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1919년대에 이르러서 매우 늦은 감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흑인들에 대하여 이와 같은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을 상징하는 발언들이 미국의 저명인사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진다.

2. 1920년대 우파세력 강화 및 그후 흑인 인권운동의 심화 (1920-1970)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의 우파세력이 강화됐다.  잠시 쇠퇴했던 《KKK》단이 또 다시 출현하여 이번에는 《신KKK단》이라는 명칭으로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400만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1925년에는 연방정부의 허가를 얻어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여 남쪽은 물론 미국의 전지역에서 인종폭력의 바탕이 되고 있었다.

백인들의 《인종폭력》에 맞대항을 하여 흑인들의 《인종폭동》도 역시 미국 전역에서 유행처럼 발생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흑인들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하여 온 나라가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의 연방의회에 조치를 촉구했다.

《인종폭력》과 《인종폭동》의 원인은 다양했다. 그 중의 하나가 남쪽의 흑인들이 직장을 구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대량집단이동을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북쪽에서 미국의 군수산업의 호황으로 수백만의 노동력이 급히 요구되고 있었다. 남쪽의 대농장의 백인 농장주들은 철도역에서 흑인들에게 북방행 기차표를 파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도록 하여 흑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해하고 막고 있었다. 남쪽의 흑인 농장노동력이 북쪽으로 이동함으로 인하여 백인 농장주들에게는 막대한 손실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상경》식으로 북쪽으로 파도처럼 이동한 흑인 노동자들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군수산업의 후퇴와 450만 명예제대군인들이 직장을 차지했으며 그리고 남쪽에서 흑인노동자들의 이동이 넘치고 있었음으로 해서 흑인들은 실직자가 되어 빈곤에 처하게 됐다. 넘치는 흑인들의 수는 드디어 북쪽의 도시마다에 《흑인빈민지대》(Black Belt)가 형성되는 비극을 출현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남쪽을 떠나온 흑인들이 또다시 남쪽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흑인들을 위한 《전국도시연맹》(National Urban League)이 창건되어 1925년에는 51개의 지부들이 도시에서 활동하여 흑인들이 스스로 단련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직업알선 등 활동을 전개했다. 월간지 《기회》(Opportunity)를 발행하여 흑인들의 교양을 향상시키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종상호협력위원회》(Commission on Interracial Cooperation)를 창설하여 백인과 흑인이 상호간에 선의를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신KKK단》에 맞대응하여 선의적으로 흑인들의 지위향상을 위한 《전국도시연맹》을 창건하여 맹열한 활약을 전개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의 흑인들은 《유색인》이라고 하는 불안감을 해소하고 또 흑인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이른바 《흑인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문화와 예술, 문학과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창조적인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폴 로런스 던바(Paul Laurence Dunbar)의 소설과 단편, 클로드 매케이(Claude Mckay)의 유명한 서정시, 윌리스 리처드슨(Willis Richardson)의 드라마, 폴 와이트맨(Paul Whiteman)의 재즈음악, 쇼(Show)의 춤과 무용 등 수없이 많은 우수한 문학과 예술 작품들이 흑인의 삶과 역사를 개혁하고 향상시키는 원천이 되고 있었다.  방대한 흑인들의 천재적인 문학과 예술의 자료들을 지면상 제한으로 다 기술할 수 없다.

1932년에 루즈벨트가 민주당 대통령으로 당선됐는데 흑인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루주벨트가 제창한 이른바 《뉴딜 정책》이 흑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창한 《뉴딜 정책》이 흑인들에게 있어서 《인종평등》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흑인들에게 동등한 임금이 보장된다고 《뉴딜 정책》이 선언했다. 실제로 1935년에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이 통과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여 1932-1940년에 3선 대통령으로서 흑인표의 70-80%를 차지했다. 흑인들의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대단했다. 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이 자기 자신은 《흑인 인종문제》에 대하여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흑인 윌리엄 해스티(William Henry Hastie, Jr.)를 연방법원판사에 지명하고 라버트 위버(Robert Clifton Weaver)를 행정부 고위직에 임명한 것은 흑인들에게 큰 고무적인 처사였다. 하지만 위버는 그때 당시 내무장관 해롤드 이크스(Harold L. Ickes)의 완전한 감시하에서만 복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직면하게 되면서 영국과 가까와지는 시대적인 변화와 긴박한 국내문제에 봉착하게 됨으로써 흑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정한 《뉴딜 정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흑인들은 독일 나치의 《인종 우월주의》에 반대했다. 히틀러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흑인 운동선수를 배격했던 사실을 상기하며 흑인들은 미국을 위하여 싸울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흑인들이 참전하여 싸웠지만 흑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좋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흑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미국을 위하여 싸울 것을 작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백인들은 1941년에 군수산업 직업교육에 있어서 백인 우수교육생을 17만 5천명 선출했는데 흑인교육생은 4천6백명 정도만 배출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위급한 정세 하에서 백인과 흑인은 같은 장소와 같은 조건 하에서 복무할 수 밖에 없었다.

인종, 신념, 피부, 출신에 관계없이 흑백혼성부대를 편성할 수 밖에 없었다. 크게 증가하는 흑인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백인들은 흑인 장교의 필요성도 인정하게 됐다.  흑백차별의 무거운 장벽을 깨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은 크게 역할했다.

1961년 6월에 케네디 대통령이 서명한 대통령령 10925호에 따라 《동등고용기회위원회》(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 EEOC)의 전신에 해당하는 《동등고용기회에 관한 대통령직속 위원회》가 설치됐다. 연방정부의 부처와 법원에서 미국의 실질적인 삶과 평등의 중요성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62년 12월에 케네디 대통령 정권하에서 연방정부의 전직원 중 13.2%에 해당하는 292,836명이 흑인들이었다.

1963년 11월에 발생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은 미국의 충격이었고 흑인들에게는 상실감을 던져 주었다.  하지만 1964년에 흑인들의 지지를 받는 험프리 부통령을 포함하여 95%의 흑인표를 획득하여 존슨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존슨 대통령의 행정부는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부의 고위직에 흑인 남성뿐만 아니라 흑인 여성들도 등용했다.  존슨 대통령은 《흑인들이 미국의 양심을 깨운 용기를 가졌다.》라고 유명한 말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백인들의 흑인을 증오하는 고질적인 《백인우월주의》는 그리 쉽게 조금도 후퇴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 전역에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남쪽의 앨라배마주 댈라스 카운티의 《보안관 짐 클라크》(James Gardner Clark, Jr.)의 지휘 하에서 조직적으로 흑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있었다.

흑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흑인들이 글(영어)을 읽고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선거권을 등록할 수 없다는 구실이었다. 남쪽의 어떤  주들에서는 18만명 이상이 선거인 등록을 거절당하고 있었다.

1964년 12월 10일에 마틴 루터 킹목사는 스웨덴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흑인들의 유권자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앨라바마주 셀마시로 갔다. 알라바마주에서 시작된 흑인 선거권 투쟁은 선거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관심을 받으면서 흑인의 인권을 위하여 역사적인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함께 걸어라, 형제자매가 되어》... 킹 목사가 선두에 선 행진 대열이 5일 후에 2만 5천명이 앨라바마주 의사당 앞에 모였다.  이 일로 인하여 존슨 대통령은 투표권을 비롯하여 세 개의 민권법안에 1965년 12월에 서명했다.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이 통과됨으로써 흑인들의 투표율이 남부지역에서 5%에서 55%로 증가됐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부문에서 흑인들의 위치에 대한 어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미국의 산업, 행정부는 여전히 주로 앵글로 색슨계 기독교 백인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흑인들의 지위향상을 위한 노력은 교회나 정치활동을 통하여 보다 적극적이며 전통적인 혁명으로 평화적으로 과감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1968년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됨으로써 흑인들의 인권투쟁은 퇴보됐다.

킹 목사는 다음과 갈이 주장했다.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 나는 베트남에서든 미국에서든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건물도 불태우지 않을것이다.》

킹 목사가 암살로 죽고서 바로 두 달 후에 케네디 대통령이 또 암살을 당했다.

킹 목사의 비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일어난 흑인들의 폭동은 미국을 치안에 있어서 한때 특히 대도시들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흑인들의 폭동을 무서워한 백인들은 흑인을 달래기 위하여 선의의 공략을 펼 수 밖에 없었다. 한 예를 들면 1968년에 소기업관리국이 흑인에게 년간 3만달러를 주었는데 이제는 32만달러를 대부해 주었다. 이런 경우는 1년에 77건이나 있었다고 한다.

1964년에 베트남전쟁이 시작됐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존슨 대통령의 인기는 떨어졌다. 베트남전에 흑인이 5만명이 참전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흑인들의 비판 중 한가지는 장교 11,000명 가운데 흑인 장교는 5%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흑인들의 강한 비판은 흑인 전사자의 비율이 높은 것에 쏠렸으며 또한 빈곤을 구제하는 연방사업을 축소시키고 전쟁을 위한 비용 지출에 집중하는 것에도 가해졌다.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흑인들은 험프리를 지지했지만 닉슨 대통령이 당선됐다. 닉슨 대통령은 당선소감을 말하면서 《흑인들의 인종문제》가 제일 골치거리라고 실토했다.  흑인들은 닉슨 대통령 당선에는 실망했다. 하지만 국회위원선거에서 처음으로 하원에 9명의 흑인들이 당선된 것에는 큰 고무를 받았다.

3. 미국 흑인들의 삶에 대한 투쟁 어디로 가는가?

1970-19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에 미국의 흑인들의 삶에 있어서 정치와 경제적인 투쟁은 깊은 의미와 변화를 획득했다. 흑인들의 인종적 자부심을 일깨우고 문화적인 삶의질이 광범위하게 향상됐다. 흑인들의 향상된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언급해 본다.

ㄱ. 정치권에서 핵심적 요소는 흑인들의 투표권을 통한 인종적 성숙을 나타내 보인 점이다.  흑인들이 《저항》에서 《참정》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흑인들의 《참정》에 가장 앞장선 사람은 제시 젝슨(Jesse Jackson)목사였다. 잭슨 목사는 《무지개 연대》를 제창하면서 흑인, 인디언, 아시아계 등 다양한 인종과 연대를 주장했다.

흑인남녀의 선거를 통한 공직자 수는 1971년의 1,800명에서 1985년에는 6,100명으로 증가했다. 1984년에 흑인 시장이 225명이었다. 하지만 미국 전국의 선거를 통한 공직자 수에 비하면 흑인은 1%에 지나지 않았다.

ㄴ. 1968년 부터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16년 동안에 카터 대통령의 통치기간 4년을 제외하고 흑인들을 돕는 연방정부사업은 모두다 철회되거나 축소됐다. 《민권법》은 공화당 대통령의 통치 하에서 완전히 무시됐다.

ㄷ. 1984년에 미국의 흑인 총인구는 2,800만 명이었다.  흑인 농지소유자는 14만명에 불과했는데 흑인 농부들이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는 길은 불가능했다. 흑인 변호사, 흑인 의료계 등 전문분야에서 흑인들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흑인 실업률은 1981-86년에 17%로 백인의 2배 이상이 되고 있었다. 흑인가정의 평균수입은 백인 가정의 55%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흑인들은 기부나 자선의 도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동등한 기회를 요구하여 투쟁했다.

ㄹ. 흑인들은 태어나면서 열등하다는 벡인들의 주장을 완강히 부인했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미국의 스포츠계에서 흑인들이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흑인 코스비쇼는 세게적으로 놀라운 성공을 기록했다. 말콤 X는 《교육이 흑인의 미래를 보장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흑인들의 교육적 향상을 위하여 인종간에 통합된 학교버스 통학을 주장했다.

1970년에 닉슨 대통령은 흑백 학생들의 버스통학을 반대했다. 포드 대통령도 선임자 닉슨을 본받아 1974년에 흑백 학생들의 버스 통학을 반대했다. 카터 대통령만 유일하게 흑백 버스통학 정책을 지원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연방판사들이 흑백학생 버스통학을 저지하는 재판을 하는 데 적극 승인했다.

ㅁ. 백인들은 흑인들이 태생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백인들의 주장대로 흑인이 태생적으로 열등하다면 흑인들에게 예술과 문학도 없을 것이며 역사에 대하여 관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흑인 《족보연구회》가 1977년에 창건됐으며 론 프라이(Ron Fry)와  챨즈 르로이 블락슨(Charles LeRoy Blockson)의 공저로 《흑인족보학》(Black Genealogy, 1977)이라는 책이 출판됐다.  뿐만 아니라 미국독립 200주년이 되는 1976년에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의 《뿌리, (Roots)》라는 소설이 발표됬다. 이 작품은 30여개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영화로도 제작되어 8천만명의 시청자가 있었다고 한다. 《뿌리》가 던진 강력한 메시지는 미국 흑인들의 선조가 아프리카인이며 아프리카 흑인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미국에 끌려오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분명히 밝히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미국의 총인구의 약 11-14%에 해당하는 미국 흑인들의 조상이 아프리카라고 하는 사실은 오늘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인 응집력과 사명감을 갖고 임하도록 밀어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ㅂ. 미국 흑인들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은 일반적으로 심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에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흑인들의 삶 속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실존적 몸부림이다. 이러한 메시지의 전달의 표현은 상류층 뿐만 아니라 하류층까지 그리고 지식인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까지 다가갈 수 있도록 힘쓰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미국의 역사를 배울 때 컬럼버스의 《신세계 상륙》이 인종말살의 시작이었음을 알지 못했으며 또 미국에 대한 《신의 축복》이 1,500만 명에 대한 노예무역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렴풋한 암시조차도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 미국의 《국익》이라는 명분 때문에 한국에서 국지전으로 수백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닉슨이 인도차이나 전쟁을 시작해 300만명을 죽음으로 몰아 갔다. 레이건 대통령이 조용한 그레나다를 공격했다. 아버지 부시가 파나마를, 아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러한 모든 거듭된 침략행위에 대하여 미국은 뭐라고 변명하는가?  《미국의 국익 을 위하여》... 미국의 《국익》이라고 하는 우상숭배로 모든 악행을 정당화 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전쟁의 막대한 비용의 지출로 인하여 희생을 당하는 사람들은 백인이 아니라 유색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늘날 미국은 부유한 대기업과 군사력으로 모순덩어리인 《양당제 정치제도》를 억지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직 미국의 국익만을 위하여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역사를 누구의 편에서 바라볼 것인가하는 점에서 아프리카의 뿌리를 찾아 헤맨 알렉스 헤일리가가 역사를 보는 시각으로 미국의 역사를 살펴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글을 끝 맺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성경 책에 손을 올리고 대통령 취임을 선서한 오바마에게 킹 목사의 《평화의 꿈》이 있는가?  아니다.  오바바 대통령에게는 백인을 위하여 싸우는 《전쟁의 꿈》이 있는 것으로만 보인다.  

오바마는 재선에 성공하여 《미국이라는 하나의 가족이 고락을 함께 하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바마 정권의 제1기 집권 기간에 흑인들의 실업률은 올라갔으며 빈부의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넓게 벌어졌다. 오바마는 알렉스 헹ㄹ리의 《뿌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바마는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막강한 군부세력의 위력에 의한 통치력을 발휘하고 있을 따름이며 오바마에게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은 중동 뿐 아니라 이프리카를 배신하는 처사이다. 아프리카 민중들의 분노를 어찌 감당할지 앞이 캄캄하다.

북조선의 핵문제에 대하여 중국은 북조선의 자주권을 100%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대조선 정책은 표면과 실질적인 면에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오바마는 이러한 정치과학적 판단을 가지고 북조선의 핵문제에 대하여 옳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

오바마는 조상의 뿌리를 제3세계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오바바는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을 하늘이 내린  큰 뜻으로 감수하여 하늘의 뜻을 따라 제3세계와 아프리카를 위해서 그 무엇인가를 공헌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 역사적인 《평화의 꿈》을 실현하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기 바란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을 다시 생각한다. 생사를 초월한 킹 목사의 《꿈》은 정의와 진리를 위한 영생의 꿈이다. (2013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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